「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退溪小傳 9회
故鄕에 돌아오다
마음에도 없는 벼슬을 지내며 학문 연구를 중단하고 번거로운 세월을 보내기를 십유여 년. 몸이 피로할대로 피로해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그제야 겨우 안식을 얻게 되었다.
산수 좋은 곳에서 읽고 싶으면 읽고 자고 싶으면 자면서 날마다 매화분이나 매만지고 있
으니 그제야 사는 것만 같았다.
사표를 세 번씩이나 내는 바람에 이제는 나라에서도 마지못해 수리를 해 주었는데, 그때 퇴계의 나이가 이미 50이었다.
그 당시 퇴계의 집은 도산면 하명동(陶山 霞明洞)에 있었다. 지금은 안동 댐이 생기면서
이전 되어버린 도산국민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퇴계가 살고 있던 옛 집터었다.
그 집 앞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있었는데, 예로부터 낙동강에는 은어(銀魚)가 많았다. 은어는 맛이 좋은 물고기여서 그 당시 낙동강의 은어는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물고기로 지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낙동강의 은어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버렸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이 국법을 알 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강에 멱을 감으려 나가면 저마다 은어를 잡아오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 중에 화제의 자제들도 섞여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퇴계는 은어를 잡아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은어만은 잡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법으로 정해 놓았으니 다른 고기는 잡아도 은어만은 잡지 말아라.」
하고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본성으로 보아 그 국법이 잘못된 법임을 퇴계는 혼자 개탄하고 있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여름철이면 강물에서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국법을 지켜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럴때 어느날 촌로(村老) 한 분이 퇴계를 찾아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름철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물 속에서 멱을 감노라면 고기도 잡게 되는 법인데 아이들이 은어를 못 잡도록 국법으로 정해 버렸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아이들이 물고기 잡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이오. 나라가 아이들 소중한 줄 모르고 그와 같이 잘못된 법을 만들면 장차 이 나라가 뭐가 되겠소.」
퇴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노인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장의 말씀은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천진난만하게 뛰놀아야 할 어린아이들의 자
연스러운 행동에 제약을 가한 국법은 확실히 잘못된 법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나라에서 일단 법으로 제정한 이상에는 백성된 자 마땅히 그
법을 지켜야 옳을 것입니다. 법이 적당치 않다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는 준법정신(遵法精神)이 해이(解弛)해져서 좋은 법도 지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야 나라의 안녕질서를 무엇으로 유지해 나가겠읍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악법이라도 일단 제정된 법은 누구나 반드시 지켜 나가야 될 것입니다.」
참으로 천금같이 귀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낙동강에서 은어를 잡고 있었다.
퇴계는 자기 집 아이들이 날마다 국법을 어기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죽동(竹洞)으로 집을 옮겨 버렸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너무도 유명한 고사(故事)이거니와, 어린 아이들에게 국법을 어기지 않게 하려고 집을 옮겨간 것도 퇴계만이 실천할 수 있었던 거룩한 행위였었다.
그런데 죽동으로 집을 옮기고 보니 땅이 좁고 흘러가는 냇물이 없어서 퇴계는 바로 그 해
에 상계(上溪)로 집을 다시 옮기고 그 곳에 한서암(寒棲庵)이라는 집을 새로 짓고 뜰에는 광영당(光影塘)이라는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기르며, 평생에 처음으로 유유자적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벼슬을 물러나 한가한 생을 누리니 마음이 어떻게 즐거웠던지 그 때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벼슬 자리 물러나 분수를 지키니 마음은 편하나
身退安愚分
학문은 퇴보했는데 앞 길이 머지않아 걱정이로다.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처음으로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고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 바라보며 날마다 스스로 살핀다오. 臨流日有省
※편집자 주: 퇴계의 아호 풀이가 된 詩로 비석에 새겨 종택 마당 끝에 세워져 있다.
퇴계는 자연 속에 파묻혀서 학문연구에 정진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조정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50평생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풍기 군수를 사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와 독서삼매(讀書三昧)에 잠길 기회를 가졌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1,2년 동안이야말로 퇴계로서는 가장 즐거운 세월이기도 하였다.
오래간만에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그 때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퇴계는 이듬 해
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묵은 책 속에서 옛 성현들을 대하며
黄卷中間對聖賢
희밝은 방 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虛明一室坐超然
매화피는 창가에 봄소식을 맞으니
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줄 끊겼기로 무엇을 탄식하랴.
莫向瑤琴嘆絶絃
오래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가진 퇴계가 매화꽃 피는 창가에 조용히 앉아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그윽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이 깨끗하고도 거룩한 시다.
그 무렵 학자로서의 퇴계의 명성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진 바 있는지라, 그가 고향에 돌아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방에서 젊은 학도들이 학문을 배우려고 몰려 왔다.
그리하여 퇴계는 이 때부터 자기자신의 학문을 연구해 가면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
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었다.<9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