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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마을 여강이씨문중의 문화유산 고찰
-여헌학보(2018.12)에 발표한 글-
교육학박사 김영호(金泳豪)
1. 들어가는 말
산수가 아름답고 평원이 좋은 곳에 세거지(世居地)를 정하여 일성(一姓)이 대대로 조상을 숭모하며 보본지심(報本之心)을 견지하고 봉선지의(奉先之義)를 다하면서 친족화친을 도모하고 정답게 생활하며 만세번창을 기원했던 집성촌은 예사로 보여 지지 않는다. 오늘날 아파트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세태에서 볼 때 대단히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업(生業) 때문에 원처(遠處)에 나가 생활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형편이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지만, 아파트 출신 세대들은 이집 저집으로 이사 다니다 보니 고향무적(故鄕無籍)의 출생적(出生的) 무향민(無鄕民)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애향심은 처음부터 파종(播種)이 되지 못하고 그로인해 애국심 또한 불모(不毛)의 상태로 나대지(裸垈地)가 되어 삭막한 심역(心域)에 제대로 성장발달을 할 수 없게 되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그렇지만 남은 세대들이 고향을 지켜 가꾸면서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고 기구지업(箕裘之業)을 이어가는 마을에는 청솔이 빛나고, 와송(瓦松)이 자라고 있는 고택와옥에 서광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주의 마을에는 양동의 월성손씨 및 여강이씨마을, 옥산여강이씨마을, 두류・국당・입실안동권씨마을, 사리골경주김씨마을, 노실연일정씨마을, 산대청안・월성이씨마을, 중명서산류씨마을, 모서영산신씨마을, 청령곡부공씨마을, 현실이천・달성서씨마을, 배반경주최씨마을, 기구밀양박씨마을, 박실청도백씨마을, 금척곡산한씨・영천이씨마을, 가암・교촌경주최씨마을, 용장・새말경주이씨마을, 부지밀양박씨・경주최씨마을, 어련경주김씨마을, 보문영양남씨・여강이씨마을, 식혜골경주김씨마을, 탑동월성박씨마을, 가척・모길파평윤씨마을, 남산풍천임씨마을 계곡고창오씨마을, 도지제주고씨마을, 석계김해김씨마을, 입실청안이씨마을, 도장골연안차씨마을, 어일연일정씨마을, 나산김녕김씨마을, 두산김해김씨마을, 전동김해허씨마을 등 많이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지만, 이들 마을에는 각기 현조(顯祖)를 중심으로 친족들이 조상을 받들면서 화친을 도모하고 있다. 자손들이 객지로 나가 우거(寓居)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러는 빈집이 되어 있는 곳도 없지 않으나, 모두가 명절차사 및 벌초, 묘사 때가 되면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차량이 마을길을 가득 매우고 있어서 훌륭한 자손들이라 여겨진다.
특히 행정구역이 경주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주향(慶州鄕)에 속했던 포항시 기계면에 소재하는 덕동마을은 비록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에 있지만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왜 이 마을이 잘 알려지게 되었을까? 하여, 그 교훈적 의미를 알고 싶어서 덕동마을 출신으로 우체국장을 역임한 원로 유림(儒林) 이희찬(李熙粲) 인형(仁兄)의 안내로 덕동마을을 심방(尋訪)하게 되었다.
덕동민속전시관에 들여 이동진 관장으로부터 들은 덕동마을의 자세한 유래와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덕동마을의 유래, 덕동마을 여강이씨의 현조, 덕동마을의 사적, 덕동마을 여강이씨의 현황 등을 고찰하여 조상을 숭모하고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참고가 될까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보려고 한다.
2. 덕동마을의 유래
덕동(德洞) 혹은 덕동마을이라 칭하는 곳은 여러 곳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245번지 자금산 아래 지역을 말한다.
덕(德)은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도덕적・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 혹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옛사람은 덕을 이덕(二德), 삼덕(三德), 사덕(四德), 십덕(十德)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덕은 『좌씨전(左氏傳)』에 의하면, 신(信)과 인(仁)이라 하였고, 삼덕은 『서전(書傳)』에 의하면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이라 하였으며 『주례(周禮)』에서는 지덕(至德)・민덕(敏德)・효덕(孝德)이라 하였다. 또한 『장자(莊子)』에서는 삼덕을 상덕(上德)・중덕(中德)・하덕(下德)으로 나누었으며, 『중용(中庸)에서는 지(智)・인(仁)・통(通)으로 나누었다.
사덕(四德)은 『주역(周易)』에서는 원(元)・형(亨)・이(利)・정(貞)으로, 『서경(書經)』에서는 흠(欽)・명(明)・문(文)・사(思)로, 『예기(禮記)』에서는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이라 하였다. 그리고 십덕(十德)은 『시경(詩經)』에 의하면 인(仁)・지(知)・예(禮)・의(義)・신(信)・낙(樂)・충(忠)・천(天)・지(地)・덕(德)으로 구분하였다.
덕은 사람과 지켜나가야 할 길이라는 뜻에서 도(道)와 결부시켜서 도덕(道德)이라고 하며, 그 중심은 오상(五常)과 오륜(五倫)으로 인(仁)・의(義)・예(禮)・ 지(智)・신(信)과 의(義)・자(慈)・우(友)・공(恭)・효(孝) 등이 그 덕목으로 되어있다.
이상과 같은 좋은 의미를 지닌 덕(德)자를 마을 이름에 담아 덕동마을로 부르게 된 것은 인정 많은 사람들이 사는 정겨운 마을, 덕 있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 그런 마을이 되기 위한 염원이 담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마을을 조성할 때는 아무 곳에나 세거지(世居地)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길지(吉地)에다 정초(定礎)를 하게 되었고, 혹은 풍수적인 결함(缺陷)을 메꾸기 위하여 솔밭, 수구막이 숲, 비보림(裨補林), 송계숲, 섬솔밭 등을 조성하여 그 숲이 아름답고 무성하게 빛나듯이 마음사람들이 모두가 숲처럼 찬연히 빛나기를 바랐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덕동마을 여강이씨들은 선조의 애손지심(愛孫之心)에 따라 세세영영(世世永永) 번창(繁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덕동마을의 유래(由來)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3. 덕동마을 여강이씨의 현조
덕동마을 여강이씨문중은 문과 급제자를 비롯하여 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문한세가를 이룩하며 국가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하였다. 그 많은 현조들의 사적을 모두 수록할 수 없어서 입향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몇 분의 행적을 살펴본다.
■ 이언괄(李彦适)
이언괄은 1494는 성종 25년에 출생하여 1553년 명종8년에 졸하였다.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저용(子容)이며, 호는 농재(聾齋)이다. 선대는 여주인으로 향공진사 세정(世貞)이 후손이다. 증조 휘 숭례(崇禮)는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는 휘 수회(壽會)는 훈련원참군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성균생원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 이번(李蕃)이며, 어머니 정경부인은 경주손씨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계천군(溪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공은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 먹은 듯 살아가라는 현인의 가르침에 따라 농재라 자호(自號)하였다.
조덕린(趙德鄰)이 쓴 농재(聾齋)공의 행장에서 살펴보면, 공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로부터 규칙과 법도를 배웠고 형 회재선생의 권면(勸勉)으로 학문이 성취되었다. 형이 먼 지방에서 오래도록 떠나 있을 때는 홀로 어머니를 모시면서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1545년(인종1)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고, 1547년 송라도의 찰방이 제수 되었으나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가지지 않았다. 때로는 서울까지 가기도 하였고, 혹은 사은숙배하기도 하며, 때로는 근무지까지 부임하였다가 곧바로 사직하여 관직에 조금도 머물지 않았다. 날마다 어머니의 심금을 편안하게 해드렸고, 또한 먼 타지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형 회재선생의 애틋한 그리움을 편지로 위로하였다. 편지를 받아 본 회재선생은 공의 남다른 효성을 칭찬하고 공과 함께 시봉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아우를 칭찬하였다.
“공명(功名)을 초개(草芥)같이 여기니 경중(輕重)을 능히 알았다. 벼슬을 마다하고 어버이의 뜻을 받들었다.”라는 말에서 공의 효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547년(정미) 가을에 형이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 간 다음부터는 공은 혼자 어머니를 모시면서 위로하고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특히 밤마다 통곡하며 향을 피우고 형의 사면(赦免)을 천지신명께 빌었다. 이 소식을 들은 회재선생은 “나를 사랑하는 아우의 정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응할 것이며 나의 생명이 오늘에 이르도록 보전하게 된 것은 오로지 아우의 정성 때문이다. 그 명감(冥感)으로 머지않아 돌아가 어머니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시를 보냈던 것이다. 이 서찰에서 공의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은 또 형 이언적이 북청에 유배되자 상소문을 지어 윤원형을 규탄하였다.
“너의 소장과 상언의 초본에 있는 말들이 매우 격절하여 내가 펴볼 때마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시 펼쳐 볼 수 없구나.”라는 회재선생의 말씀에서 형의 사면을 위하여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각오하고 형의 사면활등에 전심진력한 것은 우애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1548년(戊申)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공은 50을 넘긴 나이에 신병을 앓고 있었으나 치상(治喪)을 온전히 하고 삼년 시묘(侍墓)하면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다. 건강한 몸으로도 3년간 시묘한다는 것은 생명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항차 신병이 중한 형편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으나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뉘우치며 시묘효행을 하였던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위인자자(爲人子者)의 도리를 끝까지 다하였던 것은 마땅한 포상의 행적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공의 남다른 학문과 행적을 기려 포상으로 관직을 제수할 때 교지에 특별하게 효성을 표현하였으니 이는 그만큼 효행이 모범되었기 때문이다.
복결(服闋) 후에는 슬픔에 지친 나머지 비록 몸을 가눌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형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경주에서 강계(江界)까지 험로 천리 길을 달려가 형과 눈물로 상봉하였다 하니 그 우애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형제 상별(相別)의 아픔을 서로 달래며 시를 지어 화답한 상별시(相別詩)는 사연이 너무나 애절하여 차마 읽을 수가 없다고 한다.
공은 1553년(癸丑) 정월 초하루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60세였다. 회재 선생의 명에 따라 흥해군 남쪽 달전리 도음산 찬성공 묘소 아래 유좌원에 안장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의(仁義)를 다해 살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아무나 행하는 인도(人道)가 아닌 것이다.
맹자(孟子)는 인(仁)의 실체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고, 의(義)의 실체는 형을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孟子曰 仁之實事親是也 義之實從兄是也).
공은 이상과 같이 인의를 몸소 실천한 표본적(標本的)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향민들은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리학과 경전에 밝았고, 후진의 교육에 힘썼으며, 사헌부 지평과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祭酒)에 증직되었다.
경주의 운천서원와 덕연세덕사에 제향(祭享) 되었다. 저서에는 『농재집(聾齋集)』이 있다(www.naver.com).
■ 이재한(李在瀚)
이재한은 1807년 순조 정묘년 12월 21일에 안강현 서정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붕(季鵬), 호는 어수(魚叟)이다. 아버지는 휘 만상(民祥)이고 어머니는 밀양손씨 환복(煥復)의 따님이다. 할아버지는 휘 정함(鼎函), 증조는 위솔(衛率) 휘 헌락(憲洛)이다.
공은 아버지가 과거공부를 명하자 과업을 돈독히 하여 10년 만에 명경과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며, 1840년(庚子) 4월에 족형 재립(在立)과 나란히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9월에 권지승무원부정자에 출사하였고, 1844년(甲辰) 사간원정언에 올랐으며, 1845년(乙巳) 부사과(副司果)로 전직하였다. 1856년(丙辰) 선전관을 겸하였고, 1858년(咸豐8년) 6월 4일에 통훈대부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부사직으로 옮기었다. 1864년(고종원년) 5월 28일에 통훈대부 사헌부장령에 제수 되었으며, 1866년(고종3년) 3월 8일에는 통훈대부장락원장으로 승차되었다. 관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여름이면 보리죽을 땀 흘리며 마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근심스러워 벼슬을 권하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람들이 조정의 득실과 장단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의 시비와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구하는 등의 말은 하면 막연히 마치 듣지 못한 듯이 외면하였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면서 즐거운 낯빛을 잃지 않았고, 상중에는 슬퍼함이 예를 넘었으며 우애가 돈독하여 종일토록 형제가 책상을 같이하니 화목한 기운이 넘쳐났다. 막내아우 재호(在澔)와는 10년 동안 한 솥밥을 먹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독서를 좋아하여 제자백가의 열람을 늘그막에도 그치지 않았고, 『주자대전』을 좋아하여 언제나 반복하여 낭송하니 목소리가 맑고 아름다워 마치 늙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로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것 같아서 듣는 자로 하여굼 오래도록 경청하게 하였다고 한다. 양좌리에 학교를 개설하여 제자들을 모아 강의하였으며 부지런히 살피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공은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으로 출사하여 위민 보국하였고, 효경으로 부모를 섬겼으며, 인자하고 후덕한 성품과 풍채와 태도가 준엄하고 단정하였으며 기량이 장중하고 심원하여 모두가 우러러 존경하였다고 전한다. 1875년(乙亥) 7월 17일 향년 69세로 졸하였다. 묘소는 성법리 시목(柿木)의 갑자원(甲子原)에 소재하고 있으며, 아들은 능협, 능연이며 딸은 다섯 분을 두었다. 묘갈명은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가 찬하였다.
■ 이능립(李能立)
이능립(1809〜1904)의 자는 사중(士中), 호는 기헌(耆軒)이며 기북면 독리(德里)에서 태어났다. 1891년(신묘, 고종28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902년(光武6년) 고종39년에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차되었다. 유고문집으로 『고기헌공습유』, 『기헌습유』 등이 전해오고 있다. 1904년 향년 96세로 졸하였다.
아흔 살 대질(大耋)의 수를 누리고 있음을 큰 복으로 여기며 자연 속에서 자적하였다. 동도(東都)라는 시 한편에서 보면 ‘냇가 아지랑이에 저녁연기 푸르고, 나무 숲 우거진 데 아침 해살이 붉구나.’라는 시귀(詩句)에서 자연의 경물을 예리하게 관조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東都儀物擅吾東(동도의물천오동) 동도 문물은 우리나라에 으뜸인데
王氣千年一抹空(왕기천년일말공) 천년 왕기가 모두 사라졌구나.
神物人稱波息笛(신물인칭파식적) 사람들은 만파식적을 신물이라 말하며
雄星我聞鳳鳴鍾(웅성아문봉명종) 나는 봉덕사 신종의 웅장한 소리를 듣는다.
杳靄迤迤夕烟碧(묘애이이석연벽) 냇가 아지랑이에 저녁연기 푸르고
優麗葱葱朝日紅(우려총총조일홍) 나무 숲 우거진 데 아침 해살이 붉구나
盡日遊觀觀不足(진일유관관부족) 진종일 유람하며 보아도 부족하여
沽酒更上最高峯(고주경상최고봉) 술 받아와 다시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오.
■ 이망구(李望久)
이망구(1830〜1918)는 자는 주로(周老)이고 본관은 여강이며, 아버지는 기헌 이능립(李能立)이다.
1902년에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유고문집으로 왕고병곡공유고, 병곡하일기, 병곡만록, 만세초 등이 있다.
이망구는 1902년(光武6년) 고종39년 12월 8일에 정삼품 통정대부에 임명되었다.
■ 이시중(李時中)
공의 휘는 시중(時中), 자는 성능(聖能), 호는 성헌(省軒)이다. 증조는 등(등)이고, 할아버지는 휘 강(강)이다. 아버지는 휘덕일이며 일찍이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사우(사우)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어머니 축산전씨는 사인 신성의 따님이다. 9세 때 친상을 당하여 애절하게 절규하였다. 종조 참봉공에게 배우기 시작하여 남다르게 성취하였다. 1688녀(무진)에 할아버지 사의공이 졸하자 장례의 모든 절차를 예법에 따라 허물없게 하였다. 상복을 벗자 어머니의 명으로 응시한 향해(鄕解)에 연달아 1등을 하였고, 이어 기묘년(1699)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대과에는 초장 합격은 여러번 하였으나 예위(禮圍)에서는 끝내 낙방하게 도되어 공은 “이것은 운명이다.”면서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조용한 생활로 후진양성의 임무를 스스로 맡아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권장하니 성취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다. 1738(무오)년 11월 17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행장은 문소(聞韶) 김도행(金道行)이 찬하였다.
4. 덕동마을의 서적
덕동마을 주요 사적은 세덕사지, 용계정, 애은당, 사우정, 덕연구곡 등이다. 이들 사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세덕사지(世德祠祉)
세덕사(世德祠)는 양동 입향조인 이번(李蕃)과 그의 둘째 아들 이언괄(李彦适)을 배향(配享)한 사우(祠宇)이다. 이 사우는 문중 사우의 성격을 갖고, 1779년 10월 26일에 창건되었으나 창건 88년만인 1867년 4월에 훼철되어 지금은 세덕사지 비석만 세워져있다. 창건 당시의 이 사우는 선정신(先正臣) 문원공 이언적(李彦迪)의 아버지 이번(李蕃)이 배향되었기 때문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첨당파와 향단파가 주축이 되어 사우를 건립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입향조 이번(李蕃)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전 계파에서 사우운영의 임원직을 골고루 역임하였다.
2) 애은당
애은당은 농포 정문부 선생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고택은 용계정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정문부는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하였고 길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조부 정언각이 부지를 마련해 두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여기서 피난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고향인 전주로 이사를 가게 될 때 사위인 사의당 이강에게 재산 일체와 집을 양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애은당은 여강이씨 가문의 재산이 되었고, 그로인하여 이곳 덕동마을은 여강이씨가문의 집성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사우정
사우정 고택은 정어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때 풍수에 해박한 청지기가 이곳을 길지라하여 세운 건물이다. 전면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7칸, 측면이 1칸으로 지어졌다. 후면의 높은 산과 주변의 계곡에 흐르는 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며,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가꾼 숲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4) 용계정(龍溪亭)
용계정은 농재 이언괄 선생의 4대손인 사의당 이강(1621-1687)이 1687년에 착공한 것을 손자인 진사 이시중(1667-1738)이 완공하였으며, 손자 이정웅(1743-1796)이 1778년에 중수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이 5칸이고 측몀이 2칸이며 익공계의 팔작집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이곳에 있는 향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수령이 200년을 넘었다고 한다,
5) 덕연구곡(德淵九曲)
덕연구곡은 덕동마을 동족 깊은 골짜기에서 구비쳐 흐르는 계곡으로 수통련(水通淵), 막애대(邈埃臺), 서천폭포(西川瀑布), 도송(島松), 연어대(鳶魚臺), 합류대(合流臺), 운등연(雲騰淵), 와룡암(臥龍岩), 삽연(鍤淵) 등 아홉 개를 말한다. 이 구곡에 대한 10개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2006년에 이동인이 엮은 『德淵九曲(덕연구곡)』에 의하면 지은이는 이석대, 이선상, 이능진, 정기택, 이덕화, 윤기홍이고, 옮긴이는 사)동양고전연구회 이장우, 조인숙, 박은숙, 이경혜이다.
우리나라 도처에 있는 구곡은 괴산의 화영구곡, 영주의 죽계구곡, 성주의 무흘구곡, 단양의 운선구곡 등이 있다.
덕연구곡의 10개의 시는 다음과 같다.
德淵九曲(덕연구곡)
덕동의 아홉개의 빼어난 경치
九曲淸嵐繞一家(구곡청남요일가) 구곡 맑은 아지랑이 온 집을 감아 돌고
怪奇巖石自成瑳(괴기암석자성차) 기이한 바위 저절로 잘 다듬어졌네.
山容遠遠雲生岫(산용원원운생수) 산 모습 멀고먼데 구름은 산봉우리서 나고
洞壑深深月上峨(동학심심월상아) 골짜기 깊고도 깊어 달은 높이 떠오르네.
十里煙霞今未已(심리연하금미이) 십리 안개구름 지금도 변함없는데
四時物色古如何(사시물색고여하) 사계절의 풍경이 옛날에는 어땠을까?
淵淵樓下無邊景(연연누하무변경) 깊디깊은 누각 아래 끝없는 경치를
管測便同井底蛙(관측변동정저와) 좁은 소견으로 헤아려보니 우물 안 개구리로다.
一曲 水通淵(일곡 수통연)
물이 통하는 연못
千流百派此淵回(천류백파차연회) 수천 수백 물길은 이 수통연을 돌아서
南北相通任去來(남북상통임거래) 남북이 서로 통하여 자유로이 가고 오누나!
石角砮尖疑列戟(석각노첨의열극) 돌부리와 돌살촉을 나열한 것 같고
溪心淸潔渾無灰(계심청결혼무회) 계곡물 맑아 티끌 하나 없네.
波頭鳧影沈疎荻(파두부영침소적) 물결 위 오리 그림자는 듬성한 갈대밭에 잠기고
沙上鳩踪作畵梅(사상구종작화매) 모래 위 비둘기 발자국은 매화를 그려 놓았네.
天借名區遺萬世(천차명구유만세) 하늘에 명승지를 빌려 만세토록 남겨두니
至今可愛不帙懷(지금가애부질회) 지김까지 사랑스러워 가슴속에 접어 둘 수 없구나.
二曲 邈埃臺(이곡 막애대)
속세와 먼 너른 바위
無名卉木立如麻(무명훼목립여마) 이름 없는 꽃나무 삼대처럼 서 있고
洞壑中通一路斜(동학중통일로사) 골짜기 가운데 외길 비스듬히 통해있네.
百尺層巖今與古(백척층암금여고) 백 척 층층 바위 지금도 옛날과 같은데
四時佳景葉兩花(사시가경엽양화) 사철 아름다운 경치는 잎과 꽃이네.
漏泉能解行人渴(누천능해행인갈) 쓰며 나오는 샘물 나그네 갈증 풀어 주고
耕土可宜食力家(경토가의식력가) 밭 갈아 식구들 먹일 수 있다네.
爲杜一生塵世累(위두일생진세루) 일생 동안 속세의 더러움 막으며
溪邊特立閱風波(계변특립열풍파) 냇가 특별히 서서 세상풍파 지켜보네.
三曲 西川瀑布(서천폭포)
서쪽 냇가의 폭포
不雨雷聲動地雄(불우뇌성동지웅) 비 내리지 않는 청ㅌ둥소리 땅을 크게 움직여
嚴危形像脫疎慵(엄위형상탈소용) 가파르고 위태한 모습 게으름 벗어나게 하네.
飛波若碎千斤玉(비파약쇄천근옥) 흩날리는 물결 천근의 옥을 가는 듯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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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足紬流將退暑(탁족주류장퇴서) 비단 물결에 발 씻으니 더위 곧 달아나네.
披襟淺灘自生風(피금천탄자생풍) 얕은 여울에 옷깃 풀어 헤치니 절로 바람 이는데
天翁造化誰能識(천옹조화수능식) 하느님의 조화 누가 능히 알겠는가?
分裂東西割淸鴻(분열동서할청홍) 동서로 갈라지니 맑은 물이 기러기 나뉘듯 하네.
四曲 島松(도송)
섬 소나무
赤甲蒼髥自作樓(적갑창염자작루) 비 내리지 않는 청ㅌ둥소리 땅을 크게 움직여
危巖特立閱千秋(위암특립열천추) 위험한 바위에 우뚝 서서 오랜 세월 지켜보네.
遲遲佳景詩人咏(지지가경시인영) 한가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시인이 읊조리고
鬱鬱淸陰野老謳(울울청음야노구) 울창하고 시원한 그늘에서 촌노인 노래하네.
古壁身長龍鱗伏(고벽신장용린복) 옛 벽의 신장은 용 비늘 엎드린 것 같은데
疎枝風靜鶴夢留(소지품정학몽유) 성근 가지 바람 자니 학이 꿈꾸며 머무네.
誰識歲寒然後凋(수식세한연후조) 누가 알리오? 추워진 이후에 마르니
嚴霜不敢大夫頭(엄상불감대부두) 된서리에 대부들도 감히 고개 들지 못하네.
五曲 鳶魚臺(연어대)
솔개와 물고기 노님을 즐기는 누대
二者潛翔是素盟(이자잠상시소맹) 둘은 잠기고 나는 것이 본래의 맹세이나
偶然來接畵樓楹(우연내접화루영) 우연히 누각기둥에 그려져 만나게 되었네.
名傳萬古那無理(명전만고나무리) 이름 만고에 전해짐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臺立千秋永有聲(대립천추영유성) 누대 오랜 세월 서 있어 영원한 명성 있네.
飛躍精神皆得意(비약정신개득의) 날고뛰려는 정신은 모두 뜻을 얻었고
羽鱗形像各伸情(우린형상각신정) 날개와 비늘 형상은 제각기 성정을 펼쳤네.
此中微妙誰能察(차중미묘수능찰) 이 가운데 미묘함을 누기 능히 살필 수 있으리?
活潑心期付一生(활발심기부일생) 활발한 마음을 일생에 부쳐보네.
六曲 合流臺(합류대)
물줄기가 합쳐지는 누대
靈臺一物近近樓(영대일물근고루) 신령스런 대 누각 가까이 있어
屹立中洲歲月流(흘립중주세월류) 모래톱에 우뚝 서서 세월이 흘렀구나!
雨雨風風磨俗態(우우풍풍마속태) 비바람 맞으며 더러움 갈고 닦아서
朝朝夕夕洗塵頭(조조석석세진두) 아침저녁 속된 생각 씻어 내네.
長川派列終爲合(장천파열종위합) 긴 냇물 갈라졌다 끝내는 합쳐지니
巨石護危永不愁(거석호위영불수) 큰 바위에 호위되어 오래도록 걱정 없네.
開闢初年帳水口(개벽초년장수구) 개벽하는 처음부터 물 입구 감추어 놓아
德溪高致此中留(덕계고치차중유) 덕동 계곡 고상한 풍취는 이 가운데 있네.
七曲 雲騰淵(운등연)
구름이 오르는 연못
好是明塘未種蓮(호시명당미종연) 좋구나, 이 맑은 못에 연은 심지 않았지만
石盤平布可爲氈(석반평포가위전) 바위 평평하게 깔려 방석 삼을 만하네.
波翻溪腹能成鑑(파번계복능성감) 넘실대는 물결 가운데는 능히 거울이 되고
水打巖頂激作漣(수타암정격작연) 물살 바위 끝을 치고 흘러들어 큰 물결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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鷺沈月浦堪可憐(노침월포감가련) 해오라기 달뜨는 포구에 잠기니 사랑스럽네.
苔採垂釣斜陽立(태채수조사양립) 수초 캐고 낚시 드리우며 석양에 서니
無數銀鱗活潑姸(무수은린활발연) 무수한 은비늘 고기들 퍼덕임이 예쁘구나?.
八曲 臥龍岩(와룡암)
누운 용바위
問爾化功幾百春(문이화공기백춘) 조화의 공덕 얼마나 되었는지 너에게 묻노니
宛然遺跡只今陳(완연유적지금진) 완연한 유적 지금까지 펼쳐져 있구나.
身居天澤能成雨(신거천택능성우) 몸은 하늘 못에 있어 비를 내릴 수 있고
形在地田利見人(형재지전이견인) 모습은 땅에 있어 대인 만날 징조라 이롭도다.
斜日爭吹樵子笛(사일쟁취초자적) 석양에 나뭇꾼 다투어 피리를 불고
午陰洗掛野夫巾(오음세괘야부건) 한낮 그늘에서 촌부 수건 씻어 걸어 놓았네.
靈名不朽千秋臥(양명불후천추와) 신령스런 이름 썩지 않고 천년을 누웠으니
誰識此中物久神(수식차중물구신) 누가 알리오? 이것이 오래도록 신령스러웠음을.
九曲 鍤淵(구곡 삽연)
가래 같이 생긴 연못
欲探鍤曲水涯尋(욕탐삽곡수애심) 삽곡을 찾으려고 물가를 찾아드니
半在山陽半在陰(반재산양반재음) 반은 산 양지에 있고 반은 음지에 있구나.
石逕險危人跡小(석경험위인적소) 돌길 좁고 험하여 인적 드무나
地靈雄邃物情深(지령웅수물정심) 대지의 영묘함 웅장하고 깊어 심오함 느끼네.
林濃鳥下靑山夕(임농조하청산석) 숲 울창한데 새 청산에 밤 되어 내려앉으니
淵淡魚遊碧海心(연담어유벽해심) 못 맑아 고기 푸른 바다에서 노니는 마음이네.
如此名區通大道(여차명구통대도) 이 같은 명승지가 큰 길로 통하니
東南玩客古猶今(동남완객고유금) 동남쪽 노니는 손님 예나 지금이나 같네 .
6) 덕동민속전시관
덕동민속전시관은 덕동 여강이씨 문중과 각 가정에서 보존하고 있던 유품 등을 수집하여 진열해 놓은 곳이다. 5카 외옥 한 채에 가득 채우고 있는 민속자료에는 교지와 칙명을 받은 임명장이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간직해 온 것들이 보관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자세히 보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상소장과 문집출판위원들의 명단 같은 것이다. 한지에 붓으로 정갈하게 쓴 문장과 명단은 뜻을 같이 했거나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한 것이 기에 예사로 보여 질 수 없었다.
5. 맺는 말
제1차 산업시대에는 친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따뜻한 정분을 나누며, 조상을 숭모하고 기구지업(箕裘之業)을 이어받아 도덕적 삶을 영위하면서 정답게 살았다. 제2차 산업사회가 되면서부터 자손들은 생업을 따라 출향(出鄕)하여 경향각지에서 우거(寓居)하거나 혹은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또한 각기 바쁘게 살다보니 고향의 조부모와 친족과의 대면의 기회는 적어져서 그로인해 본의 아니게 숭조애종(崇祖愛宗)의 이념은 자연 희박하게 되고 말았다.
고대광실을 자랑하던 고옥(古屋)들이 폐가(廢家)되거나 관리가 소홀하여 풍우설상에 퇴락(頹落)하여 더러는 빈집이 되어 박쥐가 서식(棲息)하고 군초(群草)에 묻혀 있는 것을 볼 때는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아니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고향을 지키면서 조상이 물려 준 문화유산을 수호(守護)・보전(保全) 하면서 잘 관리하는 마을에 가보면 대체로 그 후손들이 현대 사회에서도 사회적으로 부러워하는 직위를 획득하여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아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상이 대대로 살아왔던 세거지(世居地)를 잊지 않고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정성껏 참여하여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조상의 음덕이 크게 미치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오덕리 덕동마을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자연이 내뿜는 향취가 온몸에 뿌려지고, 여강이씨의 선대가 안장되어 있는 마을 후원(後園) 자금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정신을 맑게 해 준다. 특히 구곡(九曲)을 구비 치며 흐르는 청계수(淸溪水)는 청아한 음악이 되어 도시생활에 찌든 정서를 회복시켜 주는 듯하다. 즐비한 고택들이 지난 시대 문한세가(文翰勢家)의 명성을 짐작해 보도록 하지만, 민속전시관에 진열된 조상의 유품 하나하나에 후손들의 봉선지심(奉先之心)에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을 지키며 조상이 물려준 문화유산을 400여 년 동안 소중히 수호・보전해오고 있는 덕동 여강이씨문중의 보본(報本)・인의(仁義)・절의(節義)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시대를 초월해서 숭상(崇尙)되어야 하는 고귀한 가치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한다.
■ 상담자: 이동진(덕동민속전시관장). 李熙粲(전 우체국장)
참고문헌
이상필 역주(2017). 경주향현록. 부산:연문씨앤피.
이언괄 행장
이재한 묘갈명
이태환(2014). 태고와문집
덕동문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