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의 인물로 읽는 禪이야기
24. 근현대 선지식 태허 선사
불교로 ‘인간혁명’ 꿈꾼 선각자
中 근현대 4대 고승 중의 한명
스승 경운의 불교 운동에 감화
‘불교중흥’을 평생 사업에 매진
승단·사찰재산 3대 개혁추진
각지 불학원을 설립, 후학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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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경쟁적으로 아시아를 식민지화했다.
중국도 이런 고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중국 안팎으로
아편전쟁(1839~1842)을 비롯해
태평천국의 난(1851~1864)
·청일전쟁(1894~1895)
·신해혁명(1911~1912) 등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어서 1922년 군벌타도를 목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1차 국공합작,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에 이어
국민당과 공산당이 4년 여 간에 걸친
국공내전에서
결국 공산당의 승리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런 격동의 시대에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중국 근대에 반란이 발생하거나
혁명세력이 생겨나면,
이들은 한결같이
중국이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을
유·불·도라고 생각했다.
불교 또한 미신으로 치부되어
훼불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계를 패닉에 빠뜨린 사건이
‘묘산흥학(廟産興學)’이다.
묘산흥학을 최초로 제기했던 사람은
1898년 장지동이다.
그는 ‘중국의 학(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學)을 용(用)으로 한다.’
는 기본방침아래,
사찰 재산의 70%를 몰수해
학교교육에 충당하자는 것이다.
묘산흥학 운동은
신해혁명(1911년) 이후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이후로도
불교사찰 재산 몰수에 관해
다양한 양상으로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런 풍랑 속에서도
선종에서는
조동종과 임제종 법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토종의 인광(印光, 1862~1940),
천태종의 제한(諦閑, 1858~1932) 등
걸출한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승려들 중에는
개인의 수행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곳과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사업을 전개했다.
이 시대에 재가자 활약이 컸는데, 양문회(1837~1911)
·강유위(1858~1927)·담사동(1865~1898)
·양계초(1873~1929)·구양경무(1871~1943)
·여징(1896~1989) 등에 의해
불교서적 및 경전이 출판되었고,
화엄·유식·정토·천태학 등이 발전되었다.
[근현대 선자들 화두 ‘염불시수’]
근현대 중국 선사들의 화두는
‘염불시수(念佛是誰)’이다.
물론 당나라 말기 영명 연수로부터
선정일치(禪淨一致)가 정립되어
염불선이 내려오고 있었고,
명·청대에도 선의 주류는 염불과 선이었다.
당시 염불시수를
참구해 정각을 이룬 선사에는
법인(法忍, 1844~1905)
·경안(敬安, 1851~1912)
·대정(大定, 1823~1906)
·응자(應慈, 1873~1965)
·허운(1840∼1959)·야개 등이다.
야개와 원영의 경우만 보자.
야개(冶開, 1852~1922)가
선방에서 수행하던 중에
유나가 향판으로 그를 내리쳤는데,
그 순간 선사는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 선사에게 수학한 제자가 있는데,
근현대 중국불교를 구축한 원영이다.
원영(圓瑛, 1878~1953)은
야개 문하에서 6년간 참선하였다.
원영은 사회운동을 했으며,
‘천태+화엄+선’의 일치를 근본으로 하였다.
원영은
선과 염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출가하여 처음에는 참선을 배우고
함께 염불 정토를 닦았는데,
선정일치를 깊이 알았다”고 서술하였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염불법문을 말한 뜻은
6근을 거두어
청정한 염(念)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아미타불 명호를 칭념함으로서
경계가 고요하며
마음이 공한 경지에 이르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나고
부처님의 지견을 깨달아 들어가서
마침내 자성미타를 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영은 특히
“염불은 아가타약(阿伽陀浪)과 같아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으며,
생사를 뛰어넘어
속히 깨달음에 이르는 원돈법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염불을 생활화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
일념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된다”
고 하여
염불을 돈오법문에 비견하였다.
[인간혁명 꿈꾸었던 태허 선사]
태허(太虛, 1889~1947)는
경안(敬安, 1851~ 1912)의 제자로서
평생 동안
불교개혁과 계몽에 앞장섰던 선각자이다.
태허는
홍일·인광·허운 스님과 함께
중국 근현대 4대 고승 중 한 명으로 꼽는다.
태허는
절강성 숭덕현 출신으로
16세에 신통력을 얻기 위해
강소성 소주의 소구화사에 출가하였다.
천동사 경안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3년간 여러 경전을 간경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일체법은 얻을 수 없고,
열반 이외 어떤 법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는 구절에서
텅 빈 느낌이 들며 한 소식 깨달았다.
태허는
불학을 혜학(慧學)이라고 생각하고,
경교(經敎)를 중시하며,
선(禪)을 근본으로 삼았다.
선사 또한 염불시수 화두를 참구하였다.
태허의 스승 경안 스님은
시문학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아육왕사 부처님 사리탑에 참배하고
손가락 8개를 소지공양하여
‘팔지두타(八指頭陀)’라고 불렸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으며,
불교의 권익과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태허는
불교운동을 하다가 입적한 모습을 보고,
무력한 불교계를 탄식하며,
스승이 미처 다하지 못한
불교를 부흥시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이런 점은
제자 인순(印順, 1906~2005)이
스승 태허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태허 스님께서는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을 읽고
너무 아껴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글(이론)만 읽는 선비여서는 안된다.
글 이전에
현실적으로 몸으로 진실을 느껴야 한다.”
즉, 인(仁)은 신체로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과 부딪히는 속에서
배움(學)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담사동의 사상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중생과 함께 하는
동사(同事)라고 볼 수 있다.
태허는 담사동으로부터
승려의 사회 현실 참여에 눈을 뜨게 되었다.
태허는
“‘나’라는 망상에서 깨어나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만유제법(萬有諸法)은 인연으로 통하고
공성(空性)은 둘이 아니며,
서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이뤄져 있으니
이 땅에서 극락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
는 불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이런 불교관을 품고 있던 터라
태허는 불교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허는
①현실의 인생을 중시한다
② 과학적 증거에 기댄다
③ 조직을 통해
대중의 역량을 결집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곧 불학으로
현실을 개혁하고 현실을 구하겠다는 서원인데,
인생불학(人生佛學)
·실증불학(實證佛學)
·과학불학
·인간정토 이념에 바탕을 두고,
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13년 태허는
상해 정안사(精安寺)에서
불교의 3대 혁명을 외치며
불교혁명을 주장하였다.
3대 혁명이란
불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는
‘교의개혁(教義改革)’·
승단을 개혁하고 시정하는
‘교제개혁(教制改革)’
·불교 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교산개혁(教產改革)’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태허는
“정사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며
승려 본연의 자세를 고수했다.
그런데 당시 보수적인 승려들은
태허의 혁명 운동을 반대했다.
결국 태허의 혁명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마음고생만 하게 되어
보타산으로 들어가 무문관 수행을 하였다.
3년 후, 태허는
상해에서 각사(覺社)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불교 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
선사는 각사에서 불교 수행을 연구하고,
‘각군(覺群)’이라는 주간지를 창간하였다.
제자에게 맡겼는데,
대만 불광사의 성운(星雲, 1927~ )도
두어 차례 편집에 참가하였다.
〈각사총서(覺社叢書)〉를 창간하여
〈정리승가제도론(整理僧家制度論)〉
을 발표하였다.
태허는 〈각사총서〉를
〈해조음(海潮音)〉으로 바꿔 창간하고
매월 발행했는데,
이 잡지는 지금도 대만에서 계속 발행되고 있다.
태허는 승려 교육을 위해
호북성 무창불학원(1922년)
·복건성 민남불학원(1925년)
·사천성 한장교리원(1932년)
·서안 빨리삼장원
·북경 불교연구원을 설립하였다.
불학원에서는
종파를 초월해 승려들을 교육했는데,
근대불교를 이끈 승려들이
대부분 태허가 설립한 불학원 출신들이다.
한편 1929년에 원영 스님과 함께
중국불교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세계불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스님은 상해 옥불사에서 68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정리승가제도론(整理僧伽制度論)〉
〈석신승(釋新僧)〉
〈신유식론(新唯識論)〉
〈법리유식학(法理唯識學)〉
〈진현실론(眞現實論)〉 등이 있다.
[후대 불교사에 남긴 태허]
태허는
중국불교를 개혁하여 중국을 정토화하고,
세계를 불교화하고자 노력했다.
태허는 근대 불교를 현대화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선지식으로 평가받는다. 1949년 중국이 인민공화국이 되고나서 불교계가 준비한 농선병행(農禪竝行)·장엄국토(莊嚴國土)·이락유정(利樂有情) 이념은 태허의 사상인 인간불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인간불교 운동은
제자인 인순(仁順, 1906~2005)을 거쳐
현재 불광사의 성운으로 이어져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성운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내용을 남겼다.
“글을 쓰게 된 인연이나
불교 포교를
어떻게 펼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태허스님의
인간 불교의 이념을 실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인간불교는
시종일관 내가 지향하고
실천해 나가는 길이 되었다.”
또한 성운은
태허가 주장했던 ‘3대 혁명’을 지지하며,
사회와 중생에 관심은 갖되
정계 진출은 하지 않았다.
즉 성운은 태허를 본받아
불교도들이 국제적인 공생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되
불제자로서
권력을 갖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대만의
‘관음보살의 화현’이라 일컫는
자제공덕회 증엄(證嚴, 1937~)도
태허의 영향을 받았다.
증엄은 〈태허대사 전집〉을 읽고
흠모해 존경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증엄은
태허의 제자인 인순을 찾아가
스승 제자 인연을 맺었다.
〈끝〉
ㅡ 현대불교
정운 스님
/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