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에서도 현실세계처럼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을 들라고 하면 해킹이라고 하겠다. 주인(운영자)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남의 가정(홈페이지)에 들어가서는 물건(자료)을 훔치거나 가재도구(내용)를 파괴시키는 해킹은 그 행위가 대부분 악의적이라는 점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개인이나 기업의 컴퓨터시스템이 해킹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기업의 경우 온라인상의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회사의 신뢰도가 떨어질 우려도 생긴다. 특히 인터넷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서는 서비스의 연속성이 돈과 직결되는 터에 해킹을 당해 서비스가 중단된다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해킹을 당했을 경우, 피해를 입고 안 입고를 떠나서 해커가 침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하고 무서운 일이 된다. 이는 비록 잃어버린 금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섬뜩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해킹은 우리 사회가 급격히 정보화해가면서 빚어지고 있는 역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해킹에 관한 뉴스가 거의 매일 보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이버공간에서 활개치는 해커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 김효석의원(민주당)이 디지털해커협회 회원 등 언더그라운드 전문해커 111명과 일반해커 1030명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에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해커」는 최소한 6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문해커의 68.5%가 악의적 해킹인 크래킹을 해본 경험이 있고, 7.8%는 청탁에 의한 청부해킹을 해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해킹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대형화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굵직굵직한 해킹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5월 미국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 충돌 사건으로 미국과 중국사이에 사상 최대의 사이버전쟁을 벌인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 「전쟁」에서 중국 해커들이 1천여개의 미국 웹사이트를 해킹했는데 우리나라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1월 26일부터 4일간 주요 웹사이트가 마비됐고 6개의 해외 지사 사이트가 7번이나 해킹을 당했다. 또 TM위스 다보스포럼(WEF)에 참가한 주요 인사들의 신용카드 번호와 사용 내역, 휴대폰 번호, e메일 주소 등이 「가상의 훼방꾼」이라는 그룹에 의해 해킹당하기도 했다.
해커(hacker)라는 말은 원래 좋은 의미에서 출발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애초에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소프트웨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란 뜻으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사용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MIT의 해커들이 해커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많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현재의 컴퓨터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매킨토시를 개발한 애플(Apple)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한 빌 게이츠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컴퓨터에 불법으로 접속하여 컴퓨터에 고장을 일으키게 하거나 컴퓨터에 수록된 정보를 변조 또는 파괴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해커들은 해킹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자 남의 보안시스템에 몰래 침입하는 불법행위(크래킹)를 하는 사람들에게 크래커(crack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용어는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으나 아직도 범법여부와 관계없이 해킹이라는 말이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크래커들은 보통 범죄를 목적으로 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대한 고도의 기술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크래킹을 한다. 전문가들은 크래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방화벽 등을 이용하여 컴퓨터 통신망의 보안체제를 강화하고 불법접근을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철통같은 보호장치를 해놓아도 결국에는 해킹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현실세계에서 범죄수법이 앞서가고 수사기법이 뒤따라가듯이, 가상공간에서도 해킹수법이 발달하면 보안기법이 그 다음에 개발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커라고 하면 해킹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전에 우선 나쁜 일을 하는 범죄자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크래커」와 달리 홍길동이나 일지매를 연상시키는 「좋은 해커」도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컨설팅과 보안연구원으로 일하는 애드리안 라모가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하겠다.
C넷(cnet.com)에 따르면 해커인 라모는 AOL, 뱅크오프아메리카, 프로디언, BP 등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는 인터넷 백본(기업 전산망의 근간이 되는 네트워크를 연결시켜 주는 고속 통신망) 제공업체인 MCI월드컴의 관리네트워크를 지난 두달 동안 4차례나 침입했다는 것이다. 라모는 MS, 야후, 익사이트앳홈 등 이름있는 IT기업들을 자기집 드나들듯이 해킹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라모는 대부분의 해커들이 아무도 모르게 시스템에 침투했다가 「일」을 저지르고 빠져나가는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발견한 보안상의 허점을 해당 기업에 알려 이를 고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라모는 지난달 30일 MCI월드컴에 침입한 이후에도 MCI월드컴이 서버의 잘못된 구성을 바로잡아 서버의 보안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나쁜 생각을 가진 크래커가 MCI의 관리네트워크를 침입하여 시스템을 파괴시켰다면 아메리칸온라인이나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은 네트워크가 다운되면서 엄청난 피해와 혼란이 발생했을 것이다. 라모의 이 같은 행동은 법적으로는 잘못이지만 그가 사이트의 보안상 허점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사법당국에서도 그를 기소하지는 않고 있다.
MCI월드컴의 대변인은 라모 때문에 망신을 톡톡히 당했으면서도 "시스템의 보안을 강화했으며, 라모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고 하니 라모야 말로 나쁜 짓 하는 크래커가 아니라 좋은 일 하는 해커라고 할 수 있다. 라모 같은 해커가 더 많이 출현한다면 사이버세상은 좀 더 명랑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