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왕에 다녀 왔다. 피곤하다.
등반 난이도는 토왕보다는 판대 100미터가 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 등반이라고 하는 것이 기술적인 난이도만이 다 이던가… 랜턴을 켜고, 새벽 칼바람을 맞으며 어둠을 깨면서 가는 힘겨운 어프로치, 목적지에 도착해서 장비를 착용하고 한발 한발 오르면서 보이는 장쾌한 바위와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등반이 아닌, 워킹에서는 느낄 수 없는, 추상적이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무엇… 등반은 이 모든것을 아우른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연 등반이 이토록 경이로운 경험 일진데, 한겨울 설악산, 그것도 토왕폭에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얼음이 인공 얼음의 난이도와 비교할 대상이련가..
사실 나에게 토왕은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달나라에 다녀 왔다는 뉴스 만큼이나 다른 나라의 남 얘기였다. 그렇듯 남의 얘기였던 토왕이 어느날 갑자기 내 얘기가 되었다. 내일 새벽 토왕 등반을 앞두고 모두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등반 전날 잠을 자고 싶어서 운전하면서 커피도 마시지 않았는데,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샤워을 하고는 잠이 안온들 조금이라도 누워있는 것이 체력에 도움이 될 듯해서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이미 모두들 잠이 깨버렸다. 차분하지만 서둘러 등반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어두운 새벽, 렌턴을 켜고 걸어가는 길에 느끼는 작은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어느덧 와이계곡에 도착했다. 법정 탐방로에서는 볼 수 없는 설악의 속살이 보인다. 비현실적이다. 텔레비젼으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거 같다.
장비를 착용하고 정승호 대장님은 이미 저 멀리 올라가 있다. 서두르다 실수를 하고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릴거 같아 차분하게 장비를 착용하고 토왕 하단으로 오른다. 하단과 상단이 보이는 곳에 다 다랐다. 토왕이다. 사진에서만 보던 그 토왕이다. 저 멀리서 누군가 나에게 말하는 거 같다. “어! 왔어?” 하지만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현주 선배의 선등으로 하단을 오른다. 날씨는 등반하기에 최적의 날씨 같다. 두려운 상상속의 칼바람도 거센 눈보라도 없이, 우리 팀 말고는 아무도 없는 토왕은 얼음을 시작한 이후 최고의 선물이다. 선등자가 등반을 완료하고 내 차례가 되었다. 이러면 안돼는데, 자꾸 팔로 당겨 올리고 자세는 경직되어 오른다. 이러다 금방 지친다. 확보를 하고 잠시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오른다. 왼손에 오른발, 오른손에 왼발, 훨씬 낫다. 그렇게 하단을 모두 올랐다. 저 멀리 상단이 보인다.
상단까지 가는 길이 오히려 더 힘들다. 걸어가기도 애매하고 바일을 찍으면서 가기도 엉거주춤.. 게처럼 옆으로 가야겠다. 옆으로 첫발을 내 딛는 순간, 미끄러졌다!!! 줄이 잡아 주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더 미끄러진다. 어? 지금쯤은 줄에 걸려야 하는데 이러다 저 아래 하단으로 떨어지는거 아닌가? 어? 어?? 하는 순간 줄에 걸렸다. 체감상 30미터는 미끄러 진거 같다. 사실 그 순간에 그리 공포스럽지 않았는데, 상단 아래에 도착하고 나서야 추락의 공포가 느껴진다. 죽을뻔 했는데??? 어이쿠야. 죽을뻔 했던거네..
상단 아래에서 보니 하단쪽에 다른 팀들이 올라오고 있다. 다섯명이란다. 평일이지만 우리만 있는건 아니군.. 상단은 하단보다 좀더 어려웠다. 낙수도 흐르고 낙빙도 많아지고, 오르고 오르고…그렇게 오르고 있는데, 이승호 선배님이 빙벽화가 물에 젖어 더 이상 갈 수 없을거 같다고 그만 하자고 하신다. 그 말을 들은 정승호 대장님이 잠시 고민하는거 같길래 아! 이제 내려갈려나 보다 하면서 줄을 정리하고 다시 위를 보니 어느새 정승호 대장님이 오르고 있다. 끝까지 가려나 보군! 내 차례가 되어 현주 선배와 같이 오른다. 낙수는 점점 많아지고 각도도 세지지만 오히려 바일이나 크램폰을 찍기는 더 좋다. 그렇게 오르다가 갑자기 왼쪽 볼에 얼음을 맞았다. 정신이 번쩍 났다. 꿈속에서 등반을 하는거 같다가 갑자기 꿈이 깨는 순간이다. (사실 확보를 하고 기다리다 낙빙에 맞았는지, 등반을 하다가 맞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덧 얼음의 각이 무뎌지면서 정상이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햇살도 따뜻하다. 정상이다. 사진에서만 보던 그 토왕 정상이다. 한겨울의 꿈같았던 등반이 따뜻한 햇살에 잠이 깨고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저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고, 설악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정상에 섰다.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와이계곡까지 내려왔다. 이제 더 어둡고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한겨울의 꿈같았던 등반이 끝났다.
24-25 얼음시즌….누군가에겐 생애 마지막 토왕, 누군가에겐 (그동안 데려와 줄 사람이 없어서) 30년 만의 토왕, 나에겐 첫번째 토왕…. 살면서 토왕에 몇번이나 갈 수 있을런지. 소중한 경험 함께 해주신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굽이져 흰띠 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잊으리오 꿈 같은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첫댓글 멋이 넘쳐흘러요~
등반 후기 잘 보았습니다. 힘든데 차분하게 따라 와줘서 고마워요 내년에 또 가자구 축 하 해
토왕의 웅장함을 30여 만에 처음 으로 경험 하셨군요.
처음은 누구나 두렵고 힘든데 잘 이겨 내시어 훌륭 하십니다.
멋진 후기도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좋은경험 부럽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