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사람
한 인 자
사람들은 향기를 좋아한다.
향기 짙은 꽃을 좋아하고 향기로운 향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다닌다 해도 후각으로 맡을 수 있는 향기 때문에 좋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내면에서 풍기는 심성의 향기가 있어야 비로소 향기로
운 사람으로 사랑받게 되는 것이다.
이른 아침 운전을 하다가. 잠깐 한눈을 판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앞 차
를 들이받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얼른 뛰어 내려가 앞 차를 살펴보았다. 먼지
한 점 없이 잘 닦여진 까만색 포텐샤였다. 갓 출고한 듯한 그 차의 뒷 범퍼가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가슴에서 쿵덕 방아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매서운 고양이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을까? 고양이 앞에 쥐가 된 나
는 앞 차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운전석엔 놀랍게도 고양이가 아닌 말끔
한 신사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팔을 꼬집어보았다. 이른 아침 여자가 출근길의 자기 차를 쾅 소리가 나도록
들이받았는데 웃고 있다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가 벗겨졌는데 어떻게 보상을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
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고 있는 내가 안돼 보였던지
“벗겨지기만 했다니 괜찮습니다. 이곳은 병목현상이 있는 곳이라 곧잘 접촉
사고가 납니다. 그 쪽 차는 괜찮습니까? 출근하는 길입니까?”
그렇게 내 차까지 걱정해 주는 여유를 보였다. 내가 내 차는 괜찮다고 하자 그
러면 자기도 괜찮다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걱정 말고 그냥 가라는 말을 남기고
가벼운 목례까지 하고는 차를 몰고 사라져갔다.
나는 그 신사가 남기고 간 향기에 취해 한동안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
보다가 천천히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안은 그가 내게 주고 간 난향
같은 상큼한 향기로 가득 찼다.
이른 아침 한림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유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연세 지긋한
의사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안내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들을 향해 인
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간호사들이 일에 팔려 미처 교수님의 인사를 듣지
못했는지 하던 일만 계속하자 예의 그 인사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하였다.
그제서야 교수님이 먼저 인사한 것을 알고
“어머 교수님, 안녕하세요?”
간호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의사라
는 권위의식도, 나이가 많다는 허세도 없는 노 교수의 얼굴엔 마음씨 좋은 이
웃집 아저씨 같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딸같이 어린 간호사들을 향해 먼저
인사말을 던져 상쾌한 아침을 열고 있는 노교수에게선 엷은 국화꽃 향기가 퍼
져나고 있었다.
청량리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가 배낭을 메고 급히 뛰
어내려오다가 힐끗 뒤를 돌아다보더니 다시 뛰어 올라간다. 할머니 한 분이 무거
운 짐을 이고 들고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 머리 위의 짐을 얼른
받아내려 들고 다른 한 손으론 할머니가 든 짐을 같이 들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정한 할머니와 손자가 되어 있었다. 손자의 얼굴엔 사랑의 미소가, 할
머니의 얼굴엔 고마움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바람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 같은 향기가 역 계단에 퍼진다. 잠깐 동
안 내 눈에 들어온 그림 같은 풍경이 가슴에 잔잔한 향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구세군 냄비에 오백만원이라는 큰 돈을 8년 째 아무도 모르게 넣고 총총 사라
진다는 이름 없는 사람도 참으로 향기로운 사람이다.
자신의 아이가 3명이나 되는 어느 부부가 장애아 2명을 양자로 데려다 정성껏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에도 잔잔한 향기가 실려 있다.
장애아 친구를 위하여 6년간 책가방을 들어다 준 어느 소년의 이야기도 듣는
이의 가슴에 연둣빛 향기를 전해준다.
위대한 사람만이 향기로운 사람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미담들이 오히려 더 친근한 향기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향기로운 사람은 향기를 내려고 일부러 마음 밭에 향기를 뿌리지는 않는다. 자
신이 하는 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
지 않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그들과 눈높이를 같이 한다. 자신이 억울함
을 당했어도 그 것 때문에 옳은 일을 그르치지는 않는다. 자신에겐 칼날같이 엄
격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선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안다. 늘 넉넉한 마음
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본다.
이런 사람들의 향기가 있기에 온갖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도 향기로 덮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도 세상은 살아볼만한 향기로운 세상이리라.
첫댓글 향기로운 사람 이야기를 읽다보니 그 향기를 전해주시는 한결선생님의 향기가 솔솔~~~ 풍겨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수필방에 들어와 보니 한결님의 향기가 가득 하군요. 향기를 가지신 분이야 말로 향기를 제대로 느낄수 있는게 아닐까요?
이병옥님, 원성호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향긋한 향기 싸가지고 갑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로 모두가 기분 좋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