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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1년 04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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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04년 11월 26일 |
국적 | 스페인 |
1486년 5월 1일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공동 통치자인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와 이사벨라(Isabella I) 여왕을 접견했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대서양을 횡단해서 인도에 도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필요한 선박 세 척과 항해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제출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기획안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Juão II)에게 먼저 보냈으나 1년 전에 거절 통보를 받았다.각주1)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7세(Henry VII)에게도 같은 내용의 기획안을 제출했지만, 잉글랜드로부터는 아예 연락도 없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라도 당장 그의 제의를 수락하지는 않았다. 콜럼버스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조건들 중에는 자신을 에스파냐의 대서양 함대 제독으로 임명할 것, 그가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게 되면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할 것, 그리고 새로운 영토에서 올리게 될 수입의 10퍼센트를 보장할 것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그에게 호의를 보여서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제공했다. 그의 계획을 계속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3년 후에 두 번째 알현을 마치고는 콜럼버스가 에스파냐 내의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그의 숙박료는 왕실에서 부담한다는 호의도 추가했다.각주2) 사실 당시 이사벨라 여왕은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을 장악하고 있는 무슬림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콜럼버스의 제안을 면밀하게 검토할만한 여유가 없었으며, 이 점은 콜럼버스도 수긍했다.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이 무슬림들의 마지막 거점인 코르도바를 함락하자 콜럼버스는 그곳으로 부리나케 쫓아가 여왕을 다시 알현했다. 그것이 네 번째 알현이었다. 그리고 그해 8월 3일 대형선인 캐럭 급의 산타 마리아 호와 중형선인 캐러벨 급 핀타 호, 산타 클라라 호 등 세 척이 미지의 항로로 항해를 시작했다.각주3)
이 초라한 항해가 전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게 될 초강대국 에스파냐가 탄생하는 첫걸음이었으며, 동시에 소수의 유럽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스무 배가 넘는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제국주의 500년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각주4)
에스파냐는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을 처음 만나기 7년 전에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합병해서 탄생한 신생국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무슬림에게 전체가 정복을 당한 지역으로, 남부는 완전한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중부와 북부의 기독교도들은 타이파(Taifa)라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영주들이 통치하는 작은 왕국으로 쪼개져 코르도바에 자리 잡은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치열하게 다투면서 긴 세월을 보냈다.
코르도바의 칼리프가 약화되자 '엘 시드(El Cid)'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로드리고 디아스(Rodrigo Díaz de Vivar)와 같은 영웅들이 등장해서 기독교권이 조금씩 영토를 회복해 갔으나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사벨라가 태어날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 대서양에 면한 포르투갈은 완벽한 하나의 왕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반면 에스파냐는 크게 카스티야(Castilla), 아라곤(Aragón), 그라나다(Granada),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세 개의 왕국 중에서 남부의 그라나다 왕국은 유럽인들이 무어인(Moors)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베르베르인(Berbers)이 세운 이슬람 왕국이었다.각주5)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갈라져 병립한 지는 거의 500년 정도 지난 상태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사용하는 언어까지 차이가 있는 완벽히 다른 나라였다. 그러나 두 왕국의 왕실 사이에 통혼이 잦았고, 양국의 일반 백성들도 내심 재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었으니 왕국 사이에, 그리고 지방 영주들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 틈새를 유대인들이 파고들어 와 영주들에게 전쟁 비용을 빌려주기도 하면서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세 개의 왕국 중에서 카스티야는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는 세 왕국 중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다.
그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이사벨라의 아버지인 후안 2세(Juan II)였다. 그는 나이가 한 살하고 십 개월일 때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반세기 전 치열한 골육상잔을 벌였던 두 형제 페드로 1세(Pedro I, the Cruel)와 엔리케 2세(Enrique II)의 혈통이 그에게서 만났기 때문에 이루어진 정치적인 타협의 결과였다. 어린 왕에 대한 섭정도 페드로와 엔리케의 혈통을 가진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공동으로 맡았다.
이 상태에서 국왕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무려 20년간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국왕의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이 섭정기간이 끝나고 스스로 통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후안 2세는 국가의 통치를 전적으로 귀족들에게 의존했다. 이에 왕권은 급격히 약해졌고, 국민들은 왕실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귀족들은 세금도 거의 내지 않으면서 국민들을 착취하고 국왕을 좌지우지했다.
후안의 재위기간이 무려 49년이나 되었던 사실은 카스티야 왕국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로부터 알찬 수확을 거둬들이고 있던 바로 이 반세기 동안 유독 카스티야만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 후안의 수상은 알바로 데 루나(Álvaro de Luna)라는 귀족이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왕국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원흉이었다. 그러나 후안은 전적으로 알바로만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어머니 이름도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왕녀였으므로, 이사벨라 여왕과 구분하기 위해서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 of Portugal)'라고 부른다.각주6) 그녀는 후안이 첫 번째 부인을 잃고 한참 후 맞아들인 두 번째 부인이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후안의 외아들인 엔리케(Enrique IV)보다도 세 살이 어렸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품위와 용기를 갖춘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왕국을 정상화시키기로 작정했다.
엔리케 왕자는 아버지만큼이나 무능했지만 최소한 권력에 대한 탐욕은 아버지보다 훨씬 강했던 사람이었다. 그도 수상이 못마땅했으나 감히 그에게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엔리케와 힘을 합쳐 알바로와 대립했다. 그동안 주어진 권한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했던 알바로 수상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사벨라가 태어난 것이다.
이사벨라가 두 살 때 어머니 이사벨라와 엔리케는 알바로 수상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격분한 그는 자신의 후임자를 살해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국왕 후안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대단히 컸다. 그 다음해에 이사벨라의 동생인 알폰소(Alfonso) 왕자가 태어났다. 그렇지만 후안은 쿠데타 때 받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알폰소가 여덟 달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엔리케 왕자가 엔리케 4세라는 이름으로 국왕에 등극하면서, 그는 이사벨라 태후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언제라도 자신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대신 알폰소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사벨라 태후와 어린 두 남매를 세고비아로 추방하고 다시 이사벨라 태후를 그 부근의 아레발로라는 황량한 성에 유폐시켰다. 당시의 아레발로는 카스티야에서 가장 척박하고 가난한 마을이었다.
이 작은 가족은 아레발로에서 평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이사벨라 태후는 영리한 여인이었지만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급작스러운 환경변화를 견디지 못했고, 아레발로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발병하고 말았다. 이사벨라 태후는 자신에게 죽은 알바로 수상의 귀신이 씌었다며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며칠씩이나 성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싸움을 걸었고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자 모든 생활은 어린 이사벨라에게 떠넘겨졌다. 성 주변에 사는 선량한 농부들이 가족을 돌봐주기는 했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가족을 위해 매일 음식을 만들고 남동생을 씻기고 완전히 정신을 놓은 어머니를 간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사벨라는 밝고 명랑한 소녀로 자라났다. 그녀의 피난처는 가톨릭 신앙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고난이 신께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태후가 실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엔리케는 안심했다. 또한 왕가의 공주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사벨라는 아직 어리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조건으로 다른 왕국과 거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안나(Anna)라는 여인을 이사벨라의 가정교사 자격으로 아레발로에 파견했다. 살라망카 대학각주7) 에 근무하던 안나는 여러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동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까지 섭렵하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한 사람이었다.
안나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만약 이사벨라의 유별난 신앙심이 후일 광기에 가득 찬 종교 재판과 수천 개의 화형대라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안나는 신앙 문제에 관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안나와 함께 지내는 8년 동안 그녀의 방대한 지식과 깊은 신앙심을 마치 스펀지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빨아들였다.
그런데 아레발로에서의 고달픈 생활이 이사벨라 자신과 카스티야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큰 축복이 되었다. 그녀는 최하층인 가난한 농민들 속에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살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잘 터득하게 되었다. 귀족들이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들도 잘 파악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권력의 기반은 오만한 귀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기만당하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동안 카스티야 국왕인 엔리케 4세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욱 심하게 귀족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각 지방의 조세 징수권뿐만 아니라 화폐를 주조하는 권리까지 영주들에게 양도한 상태였다. 왕실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재정적인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으나, 귀족들은 국왕보다 훨씬 더 부유해져 있었다.
국왕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조롱거리였다. 엔리케는 이미 성 불능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나바르 왕국의 왕녀 블랑카(Blanca)와 결혼했지만, 13년 만에 이혼당했다. 블랑카가 그때까지도 처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사실을 부인했고, 포르투갈 아폰수 5세(Afonso V)의 누이동생 후아나(Infanta Juana)와 재혼했다. 후아나는 결혼 6년 만에 딸을 낳았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후아나(Juana)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벨트란의 아이'라는 의미의 벨트라네자(Beltraneja)라고 불렀다. 그녀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 왕비의 연인이었던 벨트란 쿠에바(Beltrán de la Cueva) 공작의 딸이라는 의미였다. 엔리케가 왕비의 맹세를 근거로 이 작은 후아나를 자신의 소생이라고 주장하며 후계자로 결정하려고 하자 일부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왕비가 새로운 연인인 폰세카(Fonseca) 추기경의 조카와의 사이에서 두 사생아를 연이어 낳자 엔리케의 입장은 더욱 궁색해졌다.
결국 후계자 논쟁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엔리케의 퇴위를 요구하면서 이사벨라의 동생인 알폰소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 내전은 겉으로는 왕위 계승권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실제로는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주도권 다툼이었으며, 이사벨라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엔리케의 왕궁으로 찾아가 인질이 되었으며, 알폰소에게도 엔리케와 대립하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도 내전은 3년이나 줄기차게 계속되었고, 그동안 이사벨라는 왕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열다섯 살이 된 이사벨라는 왕궁을 탈출해서 알폰소에게 갔다. 내전을 종식시킬 목적이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다음해에 알폰소 왕자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내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각주8) 반란자들이 이번에는 이사벨라를 옹립한 것이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엔리케를 국왕으로 보호할 것임을 천명하면서 묘한 발언을 했다.
"엔리케가 국왕의 자리를 지키는 한 저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신성한 왕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엔리케는 국왕으로 인정하지만 그의 후계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엔리케는 그녀의 이 선언에 대단히 만족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 남매는 귀산도(Guisando) 산 정상에서 만나 이사벨라를 엔리케의 후계자로 확정하는 귀산도 협약(Tratato de los Toros de Guisando)에 서명했다.각주9) 이로써 장장 4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다.
엔리케는 나약하고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기는 했지만 사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왕궁으로 돌아온 이사벨라를 아주 극진하게 보살폈다. 그런데 이사벨라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녀의 결혼 문제가 대두되자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그녀의 뛰어난 미모로 인해 여러 나라의 왕실로부터 혼인 제의가 쇄도한 것이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카스티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프랑스였다.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보면 마치 현대적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사실 이사벨라는 그 당시 미인의 기준이었던 커다란 가슴과 풍만한 육체를 가진 금발 미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지나치게 말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독특한 분위기였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거의 투명하게 보이는 하얀 피부,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마치 고대 켈트인의 신화로부터 페이(Fei)각주10) 가 막 걸어 나온 듯한 신비한 매력을 풍겼다고 한다.
구혼자들 중에서 이사벨라를 가장 탐내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5세는 무슬림들과의 전투를 위해서 북아프리카 원정까지 단행한 대담한 사람으로 당시 전 유럽에서 전사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문제는 이사벨라보다 스무 살쯤 위인 홀아비라는 사실이었다. 당사자인 이사벨라는 이 결혼에 응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사벨라는 아폰수의 정략결혼 제의가 후일 카스티야에 대한 병합까지 염두에 둔 노림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멍청한 엔리케는 아폰수의 달콤한 제의에 넘어갔다. 당시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에 비해 훨씬 강력한 강대국이었고, 엔리케는 나름대로 이사벨라를 이용한 거래에서 많은 이득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남매를 충돌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당돌한 이사벨라는 엔리케와 같은 인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500년 전에 분열된 에스파냐를 다시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었는데,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곳에서 사악한 이교도들을 완전히 축출하는 일이 신이 그녀에게 맡긴 임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 또래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Fernando II de Aragón) 왕자를 예전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라에게 예상보다 훨씬 다급하게 위기가 다가왔다. 그녀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모로코 원정을 대승으로 장식한 아폰수는 결혼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사벨라는 아폰수 국왕과 자신이 인척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교회법상 근친혼에 해당된다고 주장했으나, 엔리케는 이 문제에 관련해서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 로마로 특사를 파견했다. 아폰수 국왕과 이사벨라가 그녀의 어머니 쪽으로 일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에 장애가 될 만큼 가까운 인척 관계는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다급해진 이사벨라는 아라곤의 페르난도에게 밀사를 보냈다. 페르난도 역시 이사벨라의 미모와 성품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으며,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명한 혼인서약서를 값비싼 목걸이와 함께 이사벨라에게 보냈다. 그런데 아라곤 왕국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페르난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아라곤의 국왕은 후일의 역사가들에 의해 '대왕(el grande)'의 칭호를 듣게 되는 후안 2세(Juan II)각주11) 인데, 그는 이때 백내장이 악화되어 두 눈이 모두 실명한 상태였던 것이다.
아폰수와의 결혼이 가시화되자 이사벨라는 자신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했다. 다시 한 번 왕궁에서의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 이사벨라 태후를 방문하기 위해 아레발로로 간다는 핑계를 대고 세고비아로 올라갔다. 이 지역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이었고, 이때 카스티야 국민들은 수십 년 동안 견지해 왔던 왕실에 대한 무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사벨라의 평판 때문이었다. 그녀는 카스티야 국민들의 희망이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에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이사벨라 공주가 아라곤의 왕자와 결혼하고자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국민들은 열광했다. 카스티야 국민들에게 아라곤과의 재통일은 아주 오래된 숙원이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세고비아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부대를 창설했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기백여 명의 병사들이 모인 초라한 부대였지만 머지않아 유럽 최강의 부대로 불리게 될 카스티야 상비군이 창설된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페르난도에게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라곤의 후안 국왕은 마침 시력을 기적적으로 회복한 직후였고, 페르난도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후안 국왕은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크게 기뻐했지만, 그간의 국내사정으로 인해 페르난도의 결혼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게는 별다른 작위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페르난도 왕자(Infante Fernando)'라고 불리고 있었다.
후안 국왕은 부랴부랴 페르난도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임명해서각주12) 이사벨라의 공식 작위인 '아스투리아스의 공주(Princess of Asturias)'각주13) 와 걸맞게 균형을 잡아 주었다. 페르난도는 시종을 단 두 명만 거느리고 마부로 변장해서 아라곤 왕국을 오가는 카스티야 상인들을 태우고 국경을 넘어 이사벨라가 기다리고 있는 세고비아로 들어왔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1469년 10월에 세고비아에서 멀지 않은 바야돌리드에서 결혼했다. 이사벨라의 나이가 열여덟 살, 페르난도는 그녀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들의 결혼식은 그 시절에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카스티야 국민들이 성의를 모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결혼식 자체가 대단히 성대했고, 많은 서민들이 참가해서 북새통을 이룬 피로연도 이틀간이나 흥겹게 계속되었다. 이 젊은 커플은 결혼식을 끝내고 아라곤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격분한 엔리케는 귀산도 협약을 파기하고 아버지가 불분명한 후아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했다. 당연히 귀족들과 국민들이 동시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렇지만 후아나는 강대국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아폰수 국왕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누구이건 분명히 후아나는 자신의 조카였으며, 이사벨라와의 결혼이 완전히 무산된 이 시점에서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은 카스티야까지 통치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후계 문제와 관련해서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이사벨라가 정면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자 엔리케는 슬그머니 한걸음 물러나 중립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상황은 형식적으로는 이사벨라 대 후아나, 실질적으로는 이사벨라 대 아폰수 국왕의 대결이 되었다.
한편 이사벨라는 허니문 베이비로 딸을 낳았다. 그녀는 이 아이에게 다시 이사벨라(Isabella)라는 이름을 붙여 후세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일단 내전의 위기를 넘기자 이사벨라는 페르난도와 함께 세고비아를 근거지로 삼아서 카스티야 전역을 바쁘게 순회했다. 엔리케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항상 국민들 특히 일반 평민들과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사벨라는 고달픈 여정을 감수했다. 이 젊은 커플은 카스티야 어디에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카스티야의 왕궁은 톨레도각주14) 에 있었으며, 세고비아는 하나의 고도(古都)로 성에는 왕실 창고만이 남아 있었다.
1474년 12월초 이사벨라는 아라곤 왕국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여 일시적으로 귀국하는 페르난도를 전송하고 세고비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달 12일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엔리케 4세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사벨라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후아나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아라곤에 있는 페르난도가 돌아온 이후에 대관식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리 크지 않은 세고비아 성에 세고비아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사벨라의 즉각적인 즉위를 요구했으며 일부는 대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사벨라는 한 달 남짓 버티다가 결국 다음해 1월 20일 세고비아 대주교가 주관한 조촐한 대관식에서 카스티야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페르난도는 아직 아라곤에 있었으며, 왕실에서도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객은 대부분 평민들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과 귀족들은 이사벨라를 지지했으며, 의회는 그녀를 카스티야의 국왕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졸지에 반역자가 된 후아나는 다급히 포르투갈의 아폰수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폰수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조카 후아나에게 청혼한 것이다. 후아나가 이 청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른바 '카스티야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모로코에서 무슬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포르투갈의 정예병들이 카스티야를 침공해 유린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사벨라는 궁지에 몰려 있던 페르난도를 지원하기 위해 아라곤에 있었다.
이사벨라는 페르난도와 결혼하면서 그 유명한 '평등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 따라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공동 통치자이지만 그것은 명목상이었고, 실질적인 통치권은 모두 이사벨라에게 있었다.
아라곤의 국왕 후안은 이 부부의 계약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사벨라의 의사를 존중했지만, 의회와 중신들은 이사벨라가 그저 페르난도의 왕후 역할만 할 것을 요구했다. 페르난도는 어차피 자신은 아라곤의 국왕이 될 사람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아라곤을 통치해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이사벨라는 급히 귀국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아폰수 5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사벨라는 초기에 북서쪽에서 남하하는 포르투갈군에 정면으로 대응해 이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연패를 당했다. 포르투갈군은 무슬림들과의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백전노장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지구전으로 양상을 바꾸어 나갔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고, 페르난도가 아라곤 군대를 지휘해서 합류하자 전반적인 양상은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카스티야군은 같은 시대의 그 어떤 군대도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사벨라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바로 보급의 문제였다.
당시 유럽의 군사 전략은 대략 10세기 초반부터 활약한 노르만 출신의 워로드(Warload)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약탈자들이었고, 보급 문제를 그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급은 당연히 전장 부근에서의 약탈을 통해서 해결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이 시대까지도 병사들을 언제라도 보충할 수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했고, 그들을 위해서 물자를 낭비하지는 않는다는 개념이 답습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당대의 일반적인 지휘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군대는 시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녀에게 한 명의 병사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한 사람의 국민을 의미했다.각주15) 이사벨라는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병사들을 모아 놓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녀에게 병사들에 대한 보급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으며, 카스티야군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보다 훨씬 풍요로운 상태에서 전쟁을 했다. 이사벨라의 선량한 천성이 만들어낸 카스티야군의 이러한 장점은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면서 포르투갈군을 국경 방면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폰수는 당대 유럽에서 최고의 전사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사벨라의 남편 페르난도 역시 카스티야 계승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만만치 않은 전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치면서 전쟁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점차 이사벨라와 후아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페르난도와 아폰수 두 남자의 자존심 대결로 변질되었다.
1476년 봄, 아폰수와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국경 지대에 위치한 토로(Toro) 시 부근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1박 2일 동안 격렬하게 벌어진 전투의 승자는 페르난도였다. 아폰수 5세는 조카이자 부인인 후아나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철수했다.각주16) 그의 명성은 이 전투를 계기로 기울어졌으며, 당대 최고의 전사라는 명예는 페르난도가 차지했다.
카스티야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직전 아라곤의 후안 왕이 세상을 떠나자 페르난도는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아라곤의 국왕을 계승했다. 이사벨라 자신이 카스티야 계승 전쟁에서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만천하에 입증했기 때문에 그녀의 직접 통치에 대한 논란은 카스티야에서건 아라곤에서건 더는 제기되지 않았다. 페르난도는 이사벨라를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두 사람의 이름만 서로 바뀌었을 뿐 카스티야와 동일한 조건이었다.
이 시기부터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에스파냐(Espagña)로, 자신들을 에스파뇰(Espagnol)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각주17) 고대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하던 이스파니아(Hispania)에서 유래된 말이었다.
계승 전쟁을 통해서 이사벨라에 대한 국민들과 병사들의 지지는 확고해졌다. 그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대상은 수십 년 동안 왕국을 도탄에 빠뜨렸던 봉건 영주들이었다.
이사벨라는 그들로부터 조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 행정 책임자 임명권과 같이 왕의 고유한 권한을 되찾아왔다.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병사들과 아라곤군까지 동원해서 무력 시위도 불사했다. 봉건 영주들의 요새들을 점령하면서 그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각 지역마다 자신의 병사들을 치안책임자로 파견했다. 의회 역시 개혁의 대상이었다. 이사벨라의 병사들이 의원들의 활동을 감시했고, 문제가 드러나면 과감히 처단했다.
이사벨라 자신은 계속 전국을 순회하면서 일반 평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분명히 의회까지 완전히 무력화시킨 독재자였지만, 국민들은 그녀에게 열광했다. 그녀의 소박한 생활방식도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지방을 순회할 때 이사벨라는 봉건 영주들의 화려한 성이 아니라 수녀원에 묶으면서 수녀들과 똑같이 거친 음식을 먹고 그들과 똑같이 엄격한 생활을 했다. 이러한 국왕에게 열광하지 않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상황에서 귀족들이 이사벨라에게 반항할 수단은 거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대략 10년이 지나자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었던 봉건 국가 카스티야는 부유하면서도 가장 중앙집권적인 절대왕정 국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사벨라 식의 개혁은 카스티야뿐 아니라 아라곤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두 왕국의 경제적인 기반이 확고해졌다고 판단한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양국 의회에 상비군의 확대 개편을 요구했다. 그것도 최신형의 대포로 무장한 포병대를 포함한 엄청난 규모였다.
이것은 국가에 엄청난 재정 부담을 의미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인 전쟁의 형태는 왕이나 영주들이 거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용병을 고용하고, 전쟁에서 그들이 약탈한 재물을 처분하여 채무를 갚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왕이나 영주들은 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사만 있으면 국가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언제라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비군이라면 병사들의 모집에서부터 전투 시의 보급은 물론 병사가 전사할 경우 보상과 은퇴 후의 연금까지 모두 국가의 부담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에게 완전히 장악당했던 양국의 의회였지만 이 요구에는 크게 반발했다.
그러자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각주18) 를 선언했다. 이베리아 반도 남단을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 그라나다 왕국을 침공해서 이교도들을 완전히 축출하겠다는 것이다. 레콘키스타는 무려 700년 동안이나 이베리아의 모든 통치자들이 꿈꾸어 오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의회가 이 성스러운 전쟁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레콘키스타가 선언되자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뿐 아니라 유럽의 모든 나라로부터 지원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라나다 왕국이 비록 과거 코르도바의 칼리프 시대와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한창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고 있어 전반적인 전쟁 수행능력은 오히려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종교적인 열정에서도 에스파냐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그라나다를 통치하고 있던 나시리드(Nasirid) 왕조의 마지막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7세(Abu Abdullea Muhammad VII)가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을 상대로 벌이고 있던 권력 투쟁이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1485년 카스티야 상비군이 산꼭대기에 위치한 요새 론다를 포위하고 포병대가 포격을 개시함으로써 레콘키스타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무려 7년간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는 줄곧 전쟁터였다. 론다에 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로하, 북아프리카와의 무역항으로 무한한 경제적 가치를 지닌 말라가를 함락함으로써 그라나다의 서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에스파냐군은 전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쪽 방면에서는 레콘키스타가 그리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러 해 동안 피 말리는 전투를 치른 끝에 1491년 이사벨라는 드디어 무슬림들에게는 찬란한 영광의 도시인 그라나다를 마주보며 십자가 모양의 아름다운 흰색 요새 산타페(Santa Fe)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여러 달의 지루한 공방전 끝에 다음해 1월 2일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술탄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무려 7년이 소요되었던 레콘키스타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그녀와 페르난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로부터 '가톨릭의 수호자(Reina Católica)'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이 영예로운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이사벨라의 독실한 신앙이 비극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라나다를 점령해서 지리적인 정복을 끝낸 이사벨라는 정신적인 통일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가톨릭 신앙으로의 통합을 의미했다.
이사벨라는 1478년에 이미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책임자는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의 토르케마다(Thomás de Torquemada) 신부였다. 그는 유대인들을 모두 천주교로 강제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동안 악랄한 방식으로 카스티야의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그라나다가 함락되자 종교 재판소의 요구에 따라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에 따라 유대인들 중에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4개월 이내에 카스티야나 아라곤을 떠나야 했다. 이사벨라는 종교 재판소의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떠남으로써 입을 손실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토르케마다 신부의 의견을 따랐다. 모두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개종보다는 추방을 선택했으며,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회복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릴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라나다의 무슬림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그라나다가 항복할 때 이사벨라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라는 조건을 수락했었다. 그렇지만 1498년, 죽은 토르케마다 신부의 뒤를 이어 종교 재판소를 장악한 키스네로스(Ximenes de Cisneros) 추기경은 이 조항을 준수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작은 봉기가 발생하자, 1502년부터 무슬림에 대해서도 개종과 추방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의 종교 재판은 이사벨라가 죽은 후에도 약 한 세기 정도 더 지속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었다. 거짓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고문을 받고 죄를 자백하거나 고문 중에 사망했다. 죄를 자백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형대였다. 어찌 되었거나 에스파냐는 이 과정을 통해서 가톨릭 국가로 통일되었다.
이사벨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 재판에 열광할 정도로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선량한 천성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 시절에 이미 에스파냐는 '근대적'이라고 부를 만큼 잘 발달된 의료체계를 구축했는데, 그 시초는 그녀가 레콘키스타 기간 중 부상병 치료를 위해 설립한 야전병원과 종합병원 시스템이었다.
콜럼버스의 실각 과정에서도 그녀의 천성이 드러난다. 콜럼버스는 계약대로 에스파냐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다. 그가 실각한 이유는 이사벨라 여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회의론자였던 그는 이 시기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신앙심이란 항상 좋은 것이지만, 지나친 열정과 방법론이 문제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그는 원주민들을 협박하고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경우 고문하고 처형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콜럼버스는 1500년 수갑과 족쇄를 찬 채 죄인 신분으로 에스파냐로 소환되었다. 원주민들에게 잔학행위를 행한 혐의였다. 그는 페르난도에 의해 석방되어 우여곡절 끝에 2년 뒤 네 번째 항해를 떠났지만, 이사벨라가 죽을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이사벨라가 종교 재판소를 묵인했던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또 다른 면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무서운 사실은 이사벨라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포함해서 가톨릭 교회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신앙과 교회를 동일시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교회는 봉건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을 평민들 틈에서 보낸 그녀는 귀족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의 부패와 부도덕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매우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주교 임명권은 교황에게 있지만 종교 재판소는 그녀의 관할이었다. 부패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여왕보다 교황에게 충성하는 성직자들, 그녀의 잠재적인 적들은 모두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하거나 화형을 당했다. 그녀는 에스파냐가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지 가톨릭 신앙을 전면에 내세운 교황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그녀와 페르난도에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영예를 선사해서 에스파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라는 반대로 종교 재판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에스파냐의 교회까지 장악했다. 그녀가 굳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에게는 속마음까지 헤아려 그녀 대신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던 키스네로스 추기경이라는 충성스러운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1504년 이사벨라는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다가 11월 26일에 쉰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대륙으로부터 한창 약탈품이 들어오면서 에스파냐가 흥청거리던 때였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은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이사벨라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이사벨라와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후안(Juan, Prince of Asturias)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임종은 남편 페르난도와 둘째 딸 후안나(Juanna, the Mad), 그리고 키스네로스 추기경이 지켰다. 카스티야는 둘째 딸인 후안나와 그녀의 남편인 펠리페 1세에게 상속되었다가 외손자인 카를 5세에게 아라곤 왕국과 함께 상속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다.
그녀는 분명히 경건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교묘한 독재자였으며 자신의 적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비정함을 그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기고 있던 냉혹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독실한 신앙이 그녀의 후손들을 통해서 에스파냐와 유럽 전반에 미친 악영향은 대단히 컸다. 유럽에서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었을 때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그녀의 후손들은 언제나 가톨릭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새로운 형태의 믿음과 종교의 자유를 전쟁과 종교 재판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제어하려고 했다.
1974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이사벨라에 대한 시성 절차에 들어갔으나, 종교 재판소의 설립과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박해를 이유로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신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녀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여부는 현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바로 초강대국 스페인 그리고 현재의 스페인을 최초로 설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