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채는 두목지(杜牧之)라...
춘향가 중 방자가 춘향에게 이몽룡을 소개(?)하는 장면에 "우리 사또 자제 도령님은 얼골이 관옥이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요, 문장은 이태백, 필법은 왕희지라..." 라는 대목이 나온다(구운몽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음). 여기에서 좀 낯선 두목지라는 인물의 본명은 杜牧(803~853 )으로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당나라 후반(晩唐)을 화려하게 장식한 시인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이 두목지란 이가 풍류에만 능한 것이 아니고 대단한 풍채를 지닌 멋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양주(楊州)에서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로 있을 때, 술집이 있는 저자거리를 지날라치면 그를 유혹하려는 여인들이 모두 나와 귤을 던졌다는 일화(醉過楊州橘滿車)가 생겨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양주(楊州)시절을 회상한 시(遺懷),
落魄江湖載酒行(락백강호재주행) 강호에 실의하여 술독에 삐져 지낼 때
楚腰纖細掌中輕(초요섬세장중경) 가는 허리 손위에 올려 놓을 가녀린 초나라 미인들과
十年一覺楊州夢(십년일각양주몽) 양주의 십년 세월이 한가닥 꿈만 같은데
贏得靑樓薄倖名(영득청루박행명) 남은 건 靑樓(기방) 바람둥이란 이름 뿐
(*楊州는 江蘇省에 위치한 고도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一楊二益 즉 제일이 양주요 두번째가 익주라 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고, 따라서 妓女도 많아 우리나라로 보면 옛날의 평양 쯤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그래서 옛 중국인들은 양주에 관리로 가는 것을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알아준 멋장이
황진이가 김경원(金慶元)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別金慶元)에도 楊州와 杜牧之가 등장한다.
三世金緣成燕尾 三世의 철석같은 인연 좋은 짝이 되었는데
此中生死兩心知 이중에도 生死는 당신과 나 두 마음만 알 것입니다
楊州芳約吾無負 楊州의 꽃다운 인연 내 아니 저버릴 것이나
恐子還如杜牧之 두려운 건 그대가 두목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편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이야기에도 두목지가 나온다. 풍류나 풍체 모두 지질한 남편 김성립에 실망한 그녀가 漢詩의 정신적 사부이며 풍모도 출중하다고 전해지는 부목지를 사모하였다는 항간의 일화와 관련이 있는듯 싶다(이런 소문 때문에 남편의 냉대가 심했던 것은 사실임).
人間願別金誠立 인간세상에서는 김성립과 혜어졌다가
地下長隨杜牧之 저승에서 오랫도록 杜牧之를 따르리라
두목지가 죽으면서 그의 작품을 모두 불사라 버리라 한 것과 난설헌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우연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의 시가 난설헌이 직접 지은 것이라 보기도 역시 어렵다.
술과 풍류의 사나이
두목지가 술과 풍류를 즐겼다는 사실은 그의 시만 흝어봐도 쉬게 알 수 있는데, 그중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청명(淸明)이란 시를 보자.
淸明時節雨紛紛(청명시절우분분) 청명 절기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路上行人欲斷魂(노상행인욕단혼) 길 가는 행인 기분이 울적해져
借問酒家何處在(차문주가하처재) 술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牧童遙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참 맛갈나는 시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중국 산지사방에 '杏花村' 또는 '杏花村酒家' 란 술집이 있고 서로 자기가 원전에 나오는 본가라 주장한다니 지하의 두목지가 웃을 일이다. 두목지에 대한 술이나 여인 그리고 풍류에 대한 일화는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의 다른 면모를 보기로 하자.
역사 의식이 강했던 시인
두목지가 활동하던 시절이 당나라가 망해가고 있던 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다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방의 한나라 군에 패하여 오강(烏江)에서 자결한 항우를 질타한 시(題烏江亭)는 그 비장함과 함께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勝敗兵家不可期(승패병가불가기) 이기고 지는 것은 兵家도 기약할 수 없는 일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수치를 삭히고 참는 것도 男兒이어늘
江東子弟多豪傑(강동자제다호걸) 강동의 자제들 가운데 호걸이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올수 있었을지 어찌 알리오
너무 순진한 항우가 해하에서 패해 오강까지 도망했을 때 주위에서 후일을 도모하자 했지만, 강동의 자제 수천명을 잃고 낯두껍게 어찌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자살을 택했다는 일화를 두고 읊은 시이다.
난징(南京)의 옛이름은 금릉(金陵)으로 남북조 시대 진(陳)나라가 수(脩)에 멸망하기 전 호사가 극에 달했던 곳인데, 그 가운데를 흐르는 강이 진회(秦淮)로 당나라 시절에도 호화로운 花柳家가 많았던 모양이다. 두목은 이 진회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진나라 마지막 임금의 '후정화(後庭花)'라는 황음한 노래가 그때까지도 불리워 지고 있음을 이렇게 개탄한다.
烟籠寒水月籠沙(연롱한수월롱사) 안개는 차가운 물결을 감싸고 달빛 모래에 어리는데
夜泊秦淮近酒家(야박진회근주가) 밤중에 진회에 배를 대니 술집에 가깝네
商女不知亡國恨(상녀부지망국한) 기녀들은 망국의 한을 알지도 못하는지
隔江猶唱後庭花(격강유창후정화) 강건너에선 아직도 그 옛노래(後庭花)를 부르고 있네
진회의 야경
인생을 관조하며
그의 인생역정 구비마다 쓴 주옥같은 시들이 많지만 아마도 말년쯤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산행(山行)이란 시가 그 중 백미로 마지막 구절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서리내린 단풍은 봄 꽃보다 더 붉다'고,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멀리 한기 도는 산을 오르니 돌길은 가파른데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구름 피어 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를 세우고 앉아 늦은 단풍숲을 즐기니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내린 단풍 봄꽃(二月花)보다 붉어라
*두목지가 주로 양자강 부근에서 활동해서인지 계절이 빨라 춘삼월이 아니라 二月花라 한듯
첫댓글 드디어 烏江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陝西省(섬서성)의 省都인 西安에서 동쪽으로 280km지점에渭南市 華縣이 옛날 烏江입니다.黃河江의 支流인 渭江의 한 區域이네요.
대단합니다. 나도 찾으려다 아직 못찾았는데..
정따거는 본시 일본통 아님껴? 이제는 판로를 넓혀 중화까지..... 항우! 야는 범증을 장자방의 이간계에 속아 내치면서
망쪼의 고속도로 진입! 유방곁엔 현사들이 와글와글...항우와 유방의 승부차기 유방승!
유방왕께선 게임후 일등공신 사냥끝난 개들 탕끓여 먹슴다
대표선수 한신... 맞춤형 가마솥탕에 푹 익슴니다 장자방 솥걸기전에 미리 안보이는곳으로 튐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조선족 관광객이 와글거리는 장가계에 가게방 주인됨니다
두목지! 이름은 상당히 조폭틱함니다만 장동건같은 미남에다 풍류남아엿군요 허난설헌이 좋아하던 분인가요?
좌우지간 풍체가 좋게 태어나서 여성에게 인기좋은것도 살다보니 큰복입디다. 못생겨서 공연히 미움을 받고 자라니
그것 또한 스트레스이어요
옛날엔 자연을 갖고 노래한 시가 대부분이네,한시의 맛이 쉽게 와닿지않네,아직 알 길이 멀구먼,변공,박공 부럽소이다.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술잔 쬐메 찌끄린것 외에 뭐 한 일이.......
에이! 왕 짜쯩 가서 쐬주나 한 꼬푸~~~쫘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