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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진실과 사실에 대한 단상
우리들은 “나는 안다”의 쓰임이 얼마나 심하게 특수화 되어 있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 안다”는 알려진 것을 사실로서 보증해주는 사태를 기술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항상 “나는 내가 안다고 믿었다”라는 표현을 망각한다. We just do not see how very specialized the use of "I know“is. For "I know" seems to describe a state of affairs which guarantees what is known, guarantees it as a fact. One always forgets the expression "I thought I knew".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
한때 기독교에 심취했을 당시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인에 대한 설렘에 빗대어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식을 보살피고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빗대어보기도 했다. 물론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내게 전달되는 그 따스함의 감정적 해석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적 해석과 유사한 느낌을 여호와의 사랑을 통해서는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혹자는 유사한 감정을 느꼈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의 존재, 그 있음을 확신하기도 한다. 나도 부흥예배나 수련회를 통해서 격렬한 감정에 휩싸기도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가지는 느낌이라기엔 의심스러웠다.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은 더욱 강렬한 느낌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 경험을 토대로 한 그들의 신념은 일반 기독교인들보다 더욱 견고하다.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너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셨을 정도로 너를 사랑하신다.” 목사들의 설교는 한결같지만, 나는 나의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 원죄라는 대전제를 온전히 받아들일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렵게 얻은 그의 아들 이삭의 죽음을 요구했다. 물론 다급히 아브라함의 실행을 막았지만, 훗날 여호와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행했다. 그 폭력적 방식이 믿음과 사랑의 징표라면, 그 믿음과 사랑은 인간이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의 사랑을 인간은 감히 따라할 수도 없고,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허둥대던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마치 깨달음과 같은 섬광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오래된 일이라 그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시편139:1과 비슷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나를 안다. 신은 나보다 더 나를 안다. 어쩌면 그것은 비교의 문구로 표현할 수 없다. 이후로 나는 성경의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더 이상 인간의 사랑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 즉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진리가 되었다. 인간은 무한에 닿을 수는 없지만, 무한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완전한 앎’에 닿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관념을 취할 수는 있었다. 나는 과연 ‘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을까? 어쩌면 ‘안다’는 신의 언어에서나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불완전한 앎이 앎이 될 수 없다면, 인간세계에서는 ‘앎’은 가능하지 않다. 당시에 나는 인간의 사랑을 신의 사랑의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게 되었고, 결국 ‘이해하다’로 매조지었다. 이후로 나는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실한 교인이 되었음을 밝히는 말이 아니다. 이는 내가 수백 명의 대학생들로 이뤄진 대형교회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한 경험이고, 자기합리화의 전형에 따름이었다. 아마 그때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완전히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과연 그 존재를 만나고 싶을까? 그저 나의 부끄러움을 깊숙한 비밀금고에 집어넣고는, 나는 열쇠를 나의 무의식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러한 방식은 이 문명사회에서 기득권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나를 끊임없이 용서하게 하였다. 하지만 착각은 나의 결핍마저 채울 수는 없었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의 지향을 거슬러 생기는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체재가 당시 내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앎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유고인 ‘확실성에 관하여’에는 “내가 아는 것을, 나는 믿는다.(What I knew, I believe)”라는 문장이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아는 것은 나의 믿음에 근거해서 안다.”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내가 성경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은 곧 ‘내가 성경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나는 알았다.’이고, 그것은 오로지 나의 믿음에 근거할 뿐이었다. 믿음은 거짓에 대한 것일 더욱 빛을 발한다. 발광한다. 진실에 대한 믿음은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거부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지는 거짓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기 회피적 부정, 혹은 진실에 대한 자기 방어적 거부반응과 혼동된다. 우리가 이를 구별할 수 있는가?
진실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그 진실이 사실이 되어, 그 사실을 내가 안다면 더 이상 믿음이라는 자기 의지를 발현할 필요가 없다. 나는 존재한다. 그 존재의 의심을 거부하기 위해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의지를 발현해야 하는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기대어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 아니라 지구라고 믿었던 때에는 지동설이 그에겐 진실이었겠지만, 그가 관측을 통해서 지동설을 검증한 이후에는 그 진실이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진실, 그 자체는 무엇인가? 이러한 철학적 물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 답이 정말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논리적 구조를 갖춘 철학적 답변이라고 한들, 그것은 그 철학자의 관점, 즉 진실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과연 관념론자와 경험론자의 답변이 같을까? 혹은 종교학자와 논리실증주의자의 답변은 같을 수 있을까? 혹자는 진실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존재에 강요된 허무일 뿐, 그 자체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토록 복잡하고 어렵게 접근해야만 할까? 어쩌면 진실이라는 그 단어에 집착하다보면, 진실이 지시하는 그 무엇이 왜곡되거나 모호해질 수도 있다. 진실이 중요한 이유는 진실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것은 진실이다.’의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은 ‘어떤 무엇이 진실일까 아닐까?’이다.
앎과 믿음, 그리고 깨달음은 그 원인과 그 목적이 의미 있는 단 하나로 귀결된다면, 그 단 하나는 곧 ‘진실’이다. ‘신을 믿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카를 융은 ‘신을 안다’라고 답했다. ‘안다’가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는 답변 속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긍정하고 있다. 그 문답이 사실이라면, 그 단편적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다. 우리는 그 문답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더구나 기자의 ‘신’과 융의 ‘신’이 동일한지도 알 수가 없다. 진실은 사실과 사실의 연결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진실은 사실이 사실임이 가능케 하는 줄기 혹은 뿌리이다. 단편적 사실에서 우리는 ‘왜’라는 열쇠로 또 다른 문을 열어야 한다. 왜 융은 ‘신을 안다’라고 답을 했을까? 기자는 왜 융에게 ‘신을 믿느냐’라는 질문을 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결국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논리적 추론에 따르는 것일까? 철학자는 “그렇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논리가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별함이 아니다. 또한 논리적 추론만으로 모든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독 인간이라는 개체가 복잡한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감각적 능력이 떨어지게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뇌도 감각기관이고, 인간의 지각활동은 총체적 감각에 따른다면, 즉 개별감각들의 연결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감지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상대적으로 약한 오감을 보완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뇌를 지녔을 뿐이다. 이는 개체의 존재성이고, 개체 간의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근거가 될 수가 없다.
“나는 안다”는 “나는 본다”와 비슷하고 근친적인 원초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지만, 그만의 주장도 아님은 영어에서 ‘see’의 의미를 살펴보면 된다. 한편 ‘알다’를 의미하는 한자는 지식(知識)인데, 여기에는 ‘보다’가 아니라 ‘말하다’와 가깝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안다’라는 인지상태를 달리 해석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안다’라고 할 때, 그 표현으로 “내가 봤어!” 혹은 “내가 그 냄새를 맡았어!” 등의 말을 한다. 물론 적절한 억양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믿는다’의 신(信)이 곧 ‘사람이 말한다’라는 의미라는 점에서 말과 믿음, 그리고 앎의 관계야말로 원초적이다. 이때 무엇을 말하는가? 본 것을 들은 것을 느낀 것을, 즉 지각을 통해서 경험한 어떤 사실을 말한다. ‘본다’는 지각을 환유하고 있다. ‘말하다’는 지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실에 대해서 나는 ‘내가 안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단순하게 보면,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왜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알고 있기에 나는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지각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내가 지각했고, 이를 믿기에 나는 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믿음의 주체인 나에 대한 믿음이지, 대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 사실은 지각되거나 논리적으로 검증된다.
한편 우리는 태생적 관점 즉 “믿음은 의지를 낳고, 의지는 행동을 낳는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알고 있기에 나는 안다.”라는 당연한 언표 앞에 다소 머뭇거릴 수가 있다. 그 앎이 그에 따른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앎이 믿음에 근거한다고 볼 수 없거나, 어떠한 행동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앎과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앎은 반드시 근거가 되는 앎이 있고, 그 근거로서의 앎은 또 다른 앎이 전제된다. 여기서 (거의 대부분) 스스로 실증하지 못하는 앎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실증하지 못했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믿음이다.
윤리를 가르치는 자는 윤리적인가? 자본론을 강의하는 자는 사회주의자인가? 종교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바를 실천하는가? 가령 자본론을 강의하는 자본주의자 교수와 그 강의를 듣고 행동하는 사회주의자가 된 학생의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교수의 변명 ; “나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안다.”
학생의 의심 ; “내가 소속된 집단의 앎을 믿기에 나는 행동하는가?”
-스피노자의 앎에 대하여
앎이란 정보를 기억체계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 기계적으로 꺼내놓는 구조를 일컬을 뿐, 앎과 행동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고 봐야 하는가? 앎에 대해서 4가지로 분류한 스피노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지성개선론에서 상상(imagination), 감각(sensatio), 연역적 이성(ratio deductiva), 직관적 이성(ratio intuitiva)에서 상상과 감각에 의한 앎은 불확실하며, 연역적 이성 즉 논리체계도 앎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적합한 인식은 곧 직관적 이성에 의한 앎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유니콘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유니콘은 상상에 상상이 더해져 시대마다 다르게 묘사되기도 한다.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있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니콘이라는 동물은 없지만, 그 동물을 묘사할 수는 있다. 즉 부분은 실재에서 따왔지만, 그 합인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상상이 더해져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안다’라고 착각한다.
상상이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니,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인가? 과연 의지적으로 스스로 상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상상은 인간존재성의 하나다. 즉 스스로 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버릴 수가 있다. 인간의 존재성에 속한 어떤 것들은 그것에 선과 악, 혹은 참과 거짓을 논할 수가 없다. 즉 초월한다. 여기서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능력이 아니라, 인위적 영역의 밖이란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상상 그 자체의 문제란 있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한다면, 우리는 왜 그런 상상을 하는지 자문할 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반성할 수 있다. 즉 거짓 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상상은 우리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 상상은 우리의 행동을 사전에 점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이 상상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상상 외로 어렵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 이유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치는 경우는 흔하다. 씨암탉 한 마리로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알을 낳으면, 번식시켜서 팔고 돼지를 사고, 번식시켜서 소를 사고, 번식시켜서 논밭을 사는 대충의 과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상상 혹은 이야기를 통해서, 비록 그 시작은 작을 수는 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큰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혹은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서 그 시작이 비록 하찮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라는 교훈을 얻는다. 이러한 상상이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단순한 이유는 인풋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풋대비 아웃풋, 아웃풋의 조건으로써 인풋을 상상해보자. 그때 우리는 논리적 사고를 하게 된다. 이것이 연역적 이성이다.
연역적 이성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앎의 방식이다. 인간에게 논리체계는 자동차를 구매할 때, 옵션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장착된 핸들 또는 브레이크와 같다. 사회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논리적 사고를 훈련한다. 어떤 이가 요식업으로 창업을 한다고 할 때, 그는 무작정 아무 곳에서 아무 음식을 팔지 않는다. 물론 아무 곳이라 한들 사막 한 가운데일 리가 없고, 아무 음식이라고 한들 먹지 못할 음식을 팔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두고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식투자의 경우라면 어떨까? 가상의 원숭이가 투자수익률 대회에서 펀드매니저보다 앞섰다는 일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돈을 무작위로 추첨한 종목에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소개하는 추천종목을 매수하기도 하고, 주가가 많이 하락한 종목을 매수하기도 하고, 많은 공부와 가상매매를 통해 경험을 쌓고 투자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연역적 이성을 통한 앎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창업이나 투자에 있어서 오직 연역적 이성을 통해서 행동하지는 않는다. 대개는 감정과 복합해서, 혹은 감정에 치우진 행동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연역적 이성을 통한 앎일지언정 투자수익률이 원숭이보다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연역적 이성에 대해서 우리는 그 앎을 확신하지도 않는다.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연역법의 대표적 삼단논법을 보자.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는가? 혹은 이걸 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는가? 혹은 이걸 이제 알아서, 어차피 죽을 인생 멋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하는가? 우리는 모르는 게 참 많다고 여기지만, 사람들과 어울림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복잡한 논리체계나 간절한 믿음도 필요 없이, 우리는 “~이다.” 또한 “~있다.”로 끝낼 수 있는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 나는 사람이다. 나에게 손이 있다. 새가 날고 있다. 내 몸에 시원하게 닿는 것은 바람이다. 하나하나 사실들을 적다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고 펜을 놓는 순간, 멈춤은 순간일 뿐 우리는 재빨리 다시 펜을 들 것이다.
스피노자는 연역적 이성을 통한 앎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하며, 상상과 감각은 오히려 완전한 앎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감각은 우리가 어떤 앎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감각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감각이 마치 퇴화된 것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감각을 배제할 수 있는가?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모든 감각을 제어할 수 있는가? 상상을 막을 수 없듯이, 감각도 그렇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인간은 몸과 정신, 감각과 이성을 분리시켜 왔다. 철학자들이 쏘아올린 공에 문명인들은 열광했다. 몸은 열등한 껍데기가 되고, 감각은 열등한 채로 남아있어야 했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쏘아올린 공의 절망을 알까?
나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이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이성’은 감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인식통로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스피노자는 감정적 요소를 배제한 판단을 ‘이성’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성이 그저 논리체계가 아니라면, 나는 이성이 감각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스피노자가 분류한 4가지 앎은 복합적이거나 단계적일 수가 있다. 그가 이상적으로 제시한 직관적 이성은 곧 감각과 분리되지 않은 이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관적 이성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 입장에서는 반성적 인식(cognitio reflexiva) 혹은 관념의 관념(idea ideae)이라는 올바른 인식방법에 따른 앎(지각,percipio)이다. 관념의 관념은 이중메타포라기 보다는 플라톤의 그릇된 관념(idea falsa)와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즉 관념의 관념은 올바른 관념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반성적 인식은 이성과 상응하고, 직관은 올바른 관념과 상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직관의 사전적 의미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판단하는 작용이다. 과연 인간이 어떤 사유작용도 배제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직관은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반사와 유사한 지각작용, 즉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인지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노동자들의 파업뉴스를 보고는 즉각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부정적 인상을 보이는 이들이 있고, 반면에 걱정하는 마음부터 우러나는 이들도 있다. 즉 직관은 주체의 패러다임에 따른 즉각적 인지이다. 그렇다면 모든 직관이 올바른 관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주체가 있다. 이는 권력을 지향하는 주체와 조화를 지향하는 주체인데, 이 둘은 한 개인에게 공존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직관적 이성은 즉각적인 관념이 반성적 인식을 거쳐서 올바르게 생성된 앎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참다운 관념, 즉 직관적 이성에 의한 앎에 의해 자연의 본성(natura)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의 본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최고의 선이고 지속가능하고 영원한 선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의 본성을 불완전한 인간이 알 수 있는 근거는 곧 인간의 정신이 전체 자연과 함께(cum tota natura) 소유한 통일의 인식認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전체 자연과 함께(cum tota natura)’ 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될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스피노자는 정신, 관념 등의 형이상학적 접근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피노자가 깨달음을 경험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전체 자연과 함께’라는 관념은 그것을 지각한 경험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앎의 본질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비트겐슈타인과 스피노자가 언급한 앎에 대해서 나름대로 살펴봤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가운데 ‘도대체 앎이 무엇이지?’라는 물음이 맴돈다. ‘그것이 사실임을 나는 안다’라고 할 때, 우리의 앎은 ‘그것이 사실이다’라는 언표에 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앎’에 대한 의심을 한다면, 즉 ‘내가 안다’ 그 자체를 내가 어떻게 실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거나 혹은 나의 앎은 어떤 앎인지에 대해서 따져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다행히 일반적으로 혹은 보통의 경우,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순간 그러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의심이 들 수도 있다. 심지어 그때도 우리는 ‘도대체 앎이 무엇이지?’라고 자문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심은 어떤 계기로 혹은 반성적 측면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이기 때문이다.
‘앎’ 그 자체는 존재의 본질적 무엇이 아니다. ‘앎’은 ‘삶’의 부분이지, ‘삶’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세계와 연결된다. 그 이어짐이라는 현상에서의 우발적이든 의도했던 인지(지각과 인식)의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앎이다. 나와 세계의 연결에서 감각을 통해서 혹은 인식을 통해서 결맞음이 생기는데, 그것이 앎이다. ‘앎’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로서 인간의 속성이다. 그래서 ‘도대체 앎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응답할 책임이 없다. 앎을 우리가 의지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고, 앎이 부채로 환원될 수 있는 자산도 아니다. 평생 그 질문에 어떠한 고민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간다. ‘앎’을 알아야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상상’이란 단어를 배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는 ‘감각기관’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우리는 감각한다. 심지어 우리는 상상과 감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앎’이라는 작용을 의도할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 없다. 알고 싶다는 욕구는 보다 더 알고 싶다는 의미이지, 앎이 어떤 욕망의 대상일 수가 없다. 식욕이 있다고, 그 욕망의 대상이 감각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즉 우리는 ‘앎’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 ‘앎’은 우리에게 그저 있다.
‘앎’이 나와 세계의 연결에서의 결맞음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아의 몸, 정신, 주체의 이어짐에서의 결맞음이기도 하다. 몸과 정신, 그리고 주체는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그 이어짐은 자신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내적 결맞음으로 ‘앎’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 혹은 되돌아봄 즉 ‘반성’이기도 하다. 문득 떠오른 상상에 상상을 더해갈 때가 있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져보기도 한다. 그럴 때도 우리는 ‘도대체 앎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도 비트겐슈타인도 그리고 나도 내 친구도 왜 ‘앎’에 대한 질문을 할까? 그 앎이라는 작용에 뭔가 비밀이 있는가? 혹은 문명세계 내 존재로서의 스스로에 대한 반성 때문인가? 어쩌면 문명인들의 궁극적인 결핍과 관련이 있는 왜곡을 은폐하고 있지는 않을까? 스피노자에게 실체가 분명했듯이, 내게도 실체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속성의 하나인 앎을 통해서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다. 그 순간 내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 한 인물이 있다. 파르메니데스, 그가 쏘아 올린 공을 떠올린다. 감각과 분리된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리, 변화가 부정되는 진리, 완전한 전체로서의 진리, 그래서 그는 절대불변의 관념구체가 되어버린 그 진리를 세상에 던졌다.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육체와 분리된 정신은 이 문명세계의 돛이 되었다.
-앎에서 진실과 사실
‘앎’의 기저에는 ‘믿음’과 ‘어림짐작’이 있다. 구분해서 두 가지로 표현한 이유는 의미전달의 용이성 때문이지, 그것들이 반드시 독립적이고 상호배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선택에 따라 독립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진실에 대한 앎의 기저에는 믿음이, 사실에 대한 앎의 기저에는 어림짐작이 있다.
진실과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의미의 차이를 느낌으로 혹은 어림잡아 알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혼용해서 사용한다. 물론 이러한 혼용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다. 심지어 어떤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의도한 바 그 의미가 뉘앙스로 무리 없이 전달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앎과 관련한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였으니, 우선 그 의미의 차이를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 단풍이 물든다. 우리는 그 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에 대해서 한번쯤 “왜”라는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과학적 설명을 통해 그 궁금증을 해소하지만, 어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가령 단풍은 새들에게 이제 곧 추워지기 시작하니, 겨울나기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다. 궁금증은 앎을 통해서 해소된다. 과학에 따른 앎은 그 대상을 ‘사실’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 현상을 ‘진실’의 관점에서 주장한다. 물론 단풍과 새의 관계에 대해서 근거 없는 소리라고 일축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 약간의 개연성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그 주장은 ‘믿든지 말든지’의 즉 ‘진실’의 관점이지만, 단순논리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 색깔의 변화와 계절, 계절의 변화에 따른 새들의 대응은 “논리적”이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즉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지동설 그 시작은 ‘진실’이었다. 그는 관측을 통해서 지동설을 실증하였고, 그에게 지동설은 ‘사실’이 되었다. 믿음에서 출발한 지동설은 논리적 실증을 통해서 사실이 되었을 때, 갈릴레오에겐 코페르니쿠스와 지동설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비주류인 지동설이 논리실증으로 견고해지자, 당시 주류인 천동설이 진실이라고 믿는 자들에겐 갈릴레오가 눈엣가시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고,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을 저주한다면서 공개적으로 철회하였다. 만약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실증하지 못하고 그저 강력하게 믿고 있었다고 할 때, 종교재판에서 순교한다는 심정으로 지동설을 옹호하지 않았을까? 당시 로마교회는 진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믿음이야말로 어떤 사악한 사실에도 굴할 수 없는 보편가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갈릴레오는 진실과의 다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압도적 권력에 굴복하였을 뿐이다. ‘진실’은 ‘사실’과 다투지 않는다. 다툼이 있다면 진실이 진실이 아니던지 혹은 사실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반성과 검증이 요구된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지동설을 철회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변절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사실로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진실과 사실을 나무에 비유해보면, 진실이 줄기라면 사실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무에 핀 꽃이나 나뭇잎은 모두 사실이다. 잔가지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진실인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진실은 뿌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진실은 뿌리가 없는 줄기이기도 있다.
진실과 사실이 이어져 있듯이, 하나의 진실이 드러내는 사실들은 공통의 속성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진실에 닿을 수 있고, 모든 사실로도 진실을 외면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는 줄기 없는 가지들의 총합이며, 이어짐 없는 분리된 가지들과 꽃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듯이 명제의 총체라도 그것이 세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지 않았다. 사실들의 총체에 진실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그가 세계와 사실을 구조적으로 언어와 복합명제로 바라본 점은 연역적 이성에 치우친 앎이다. 이는 과학을 통해서 세계의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세계는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곧 이 세계는 인간이 아는 사실과 모르는 사실의 총체이다. 여기서 인간이 모르는 사실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과 언젠가 알 수 있는 사실들의 합이다. 지금은 모르지만 실증을 통해서 언젠가 사실로 인식가능하다는 것은 곧 언젠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과학경험을 토대로 한다. 한편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없는 것은 없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없다. 즉 논리적으로 그것을 공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실증된 것이거나 실증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닌 사실’이라는 모순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는 사실의 총체’라는 정의는 믿음과 모순의 전제에서 성립될 뿐이다. 또한 “세계의 모든 비밀은 실증을 통해서 사실이 된다.”는 언표 그 자체를 실증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말하는 바가 거짓이 아니라는 믿음에 의해서 참이 될 뿐이다.
우리는 세계가 있음을 ‘나’ 있음을 알듯이 알고 있다. 지각을 통해서 우리는 안다. 감각이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치부하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정도의 온전한 감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긍정하기 위한 어떤 실증이 필요한가? 심지어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대전제가 ‘세계와 나’이다. 즉 우리가 인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와 나’를 이미 긍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각하는 세계와 인식하는 세계가 하나의 세계이지만, 나와의 관계 즉 세계에 대한 받아들임과 인식, 나의 드러냄과 표현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진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실은 사실의 이면에 감춰진 것으로 본다.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라는 말을 우리는 듣기도 혹은 하기도 한다. 장두노미(藏頭露尾)도 같은 의미를 지는 사자성어이다. 즉 진실은 사실과 분리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별개의 사실들이 하나의 진실과 이어져, 사실들은 더 이상 별개가 아니라 연결된다. 또한 별개의 사실들이 하나의 사실과 이어져,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가령 경찰이 어떤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할 때, 단서와 증거, 증언 등으로 사실을 확인하지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다. 편린으로 흩어진 여러 사실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사실을 찾으면, 그 사실을 통해서 흩어진 사실들이 연결된다.
진실이 사실로 되는 경우는 있지만, 사실은 진실이 될 수 없다. 가령 과거 천동설은 믿음에 의한 진실이었지만, 실증을 통해서 드러난 지동설이 사실이 되었다.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인간들이 있지만, 누구도 지동설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지동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기에, 더 이상 그 사실 앞에 누구도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음의 영역에서 과학을 통해 사실이 되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실이 된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고, 이미 진실이 아니었다. 즉 그것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었고, 실증을 통해서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모든 진실은 과학을 통해서 모든 사실로 전환될 수가 있는가? 이 물음에 앞서, 우리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만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 한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우리에게 진실로 다가온다. 홀연히 마주하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진실과 사실에 대해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용한 주요한 개념과 대응해서 보자. 물론 스피노자의 개념들이 진실과 사실에 대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실체substance로, 사실은 양태mode로, 밝혀지지 않는 사실은 속성attribute로 대응하여 본다면, 왜 밝혀지지 않는 사실이 우리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쉽다. 어림짐작으로 보자면, 사실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결된 사실들이 쉽게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진실을 알면, 사실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림짐작heuristic’은 행동경제학에서 주요 개념이다. 일반경제학에서 이론적 전제가 되는 인간을 호모에코노미쿠스라고 한다. 경제적 인간은 완전 합리적이고 완벽한 자제력을 지녔으며 이기적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제적 인간을 이상적인 모델일 뿐, 실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봤다. 오히려 사람들은 경제활동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는데, 휴리스틱 즉 어림짐작이 이러한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봤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휴리스틱을 ‘불완전하지만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그의 논문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앎’의 전제가 되는 ‘어림짐작’은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휴리스틱에 가깝다. 물론 비합리가 무논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행동경제학의 비합리적 관점이 아니라, 단순논리체계로서의 ‘어림짐작’이다. 즉 ‘앎’의 전제로서의 ‘어림짐작’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있는 단순논리체계이다.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답안지 채점을 하면서, 한번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질문: “이 문제의 답을 어떻게 맞혔어?”
A: “사각연필을 돌렸지.”
B: “겐또로 맞췄어!”
C: “모르면 무조건 3번이지!”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라고 할 때, 각각의 경우에서 확률적으로 유리한 것을 특정할 수 있을까? 특정 조건에서는 확률계산이 가능할 수 있지만, 전체문항에 대한 행위가 아니고 정답분포에 대한 작위성이 없다면 확률은 의미가 없다. 이를 알고도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경우가 확률적으로 정답에 가깝다고 믿는다. 이때 ‘믿음’은 ‘앎’의 전제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찍기의 방법을 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근거 없는 믿음에 따르는 경우가 A이다. 시험 전날 밤, 그는 사각연필의 각 면에 정성스럽게 숫자를 새겨놓는다. 심지어 부처님, 예수님, 심지어 알라신에게 기도하기도 한다. 신비로운 힘이 깃는 연필은 돌릴 때마다 정답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학교에 이런 친구가 몇몇 꼭 있었다. 물론 그 친구는 문제의 답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정답을 맞히는 방법을 안다고 말할 뿐이다. (“친구, 이건 틀렸잖아! 너의 찍기는 엉터리야!” “무슨 소리! 내 기도의 정성이 부족했거나 내 믿음이 부족했을 뿐이야!”)
B의 경우는 ‘어림짐작’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경상도에는 일본어가 토착화해서 사투리가 된 경우가 많다. 겐또가 그렇다. 겐또라는 단어가 어쩌면 ‘짐작’이란 단어보다 의미적으로 폭넓게 사용된다. 이 경우는 ‘어림짐작’으로 사용된다. ‘어림’은 ‘대강 헤아리다’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측량 혹은 측정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논리체계에 따른 행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시험 중에 이런 방식으로 답을 정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나 객관식 문항들을 논리적 관점에서 대충 살펴보고 답을 찍는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이 정답률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이 문제를 내가 풀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답을 안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도 ‘어림짐작’이 적용될 수 있다. 가령 수학문제를 풀 때, 우리는 어떤 공식을 적용할지 순간적으로 결정한다. 여러 유형의 문제들을 풀어 본 경험으로 적절한 공식을 대입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머신러닝 같은 기계적 방식만 고려한 주장이다. 오히려 공식의 대입은 ‘어림짐작’으로 이뤄진다.
C의 경우는 복합적이다. 시험출제자가 객관식 정답을 균등하게 배치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고, 그럴 경우 한 개의 번호만 찍는 것이 확률적으로 높다는 단순논리도 깔려 있다. 어떤 이들은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라면서, 정답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의 정답배치를 확인하고 제일 적게 나온 숫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어림짐작’은 사실에 대한 정신활동이다. 어떤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논리로 그치지 않고, 즉 실증을 통한 명증의 단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는 논리적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정신활동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성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과학이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이성은 우리 몸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작용할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켰지만, 그것은 그릇된 관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최대한 그를 이해하자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구분했을 뿐이고, 또한 정신의 우월성조차 명증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명제가 있다.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 생각할수록 세계를 아우르는 엄청난 말이다. 그것도 단순한 단 두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알았을까? 남겨진 그의 단편을 보자면, 곳곳에 믿음이 강요되고 있음을. 믿음은 모호한 앎이며, 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고 그는 믿지 않았을까?
뉴턴 이후로 과학기술은 큰 도약을 한다. 당시의 과학자들의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라플라스가 남긴 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비록 우주에는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더라도, 과학자들은 천체운동에 대해서는 지금도 상당히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모든’에 있다. 과학적 실증을 통해서 자연의 모든 비밀을 ‘사실’로 드러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라플라스의 주장을 명제로 본다면, 그 명제는 참이다. 하지만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실증적으로 알 수 있을까? 실증하지 못하는 이 전제는 어림짐작에 의해서 도출되었기 보다는 믿음에 근거한 앎에 가깝다. 이러한 믿음이 대중에게는 과학에 대한 맹신이 된다.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의 결과로 뻔히 예측되는 디스토피아는 결국 과학에 의해서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상대방의 반론을 방어하는 최후의 선언이기도 하다. “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니까!” 우리가 ‘앎’ 그 자체가 모호하다고 여길 때, 어쩌면 앎의 기저에 있는 ‘믿음’ 때문이다. ‘사실’과 구분한 진실 그 자체가 모호하듯, 믿음은 모호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대화에서 거리낌 없이 진실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전달자가 바라는 바 그 의미도 무리 없이 전달된다. ‘믿음’이란 단어도 그렇다.
믿음에 대한 어원을 보자면, ‘Belief’는 ‘trust, care, desire’ 등과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Trust’는 ‘reliance on the veracity, integrity’를, ‘Faith’는 ‘royalty to a person, honesty, truthfulness’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통해서 주목할 ‘믿음’은 곧 ‘진실에 대한 의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는 주장에는 ‘하나님의 존재는 진실이고, 전지전능한 그 존재에 나는 의존한다.’는 개인적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다. 한편 한글 ‘믿음’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다. 동어반복이기도 하지만, ‘사실에 대해서 믿는 마음’은 적절한 표현이 될 수가 없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저 산에 산삼이 있다.”라고 어떤 이가 주장할 때, 나의 믿음은 그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상관없다. ‘믿는다’와 유사한 우리말은 ‘미쁘다’이다. ‘미쁘다’는 ‘믿음성이 있다’라는 의미이지만 ‘진실성이 있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우리말에서도 믿음은 진실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믿음’이 믿음일 수 있는 속성은 곧 ‘진실에 기댐’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안정감을 가지게 되며 편안하다. 누군가 그 상태를 흩트리려고 할 때 우리는 저항한다. 우리에게 의지가 생기고, 우리는 행동한다. 그래서 “믿음은 의지를 낳고, 의지는 행동을 낳는다.”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지각활동이다. 어림짐작이 논리체계에 따른 정신활동이듯, 믿음은 감각에 따른 지각활동이다. 우리는 자신의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떤 이가 “아, 오늘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아름답다.”라고 감탄할 때, 그는 ‘푸르다’라는 색깔이 여는 색깔과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 오늘,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등의 단어와 동시에 뉘앙스를 담는다. 단조로운 기계음으로 동일한 문장을 듣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즉 진실에 대한 믿음이 지각활동이기에, 우리는 진실을 아는 그 순간을 형언할 수 없다.
‘사실’은 나-자아를 둘러싼 환경이 되지만, ‘진실’은 나-자아의 주체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에 대한 ‘어림짐작’이 실증을 통해 명증에 이를 수 있듯이, 진실에 대한 ‘믿음’은 총체적 감각을 통해서 ‘깨달음’이 된다. 우리말 ‘깨닫다’는 ‘깨다’와 ‘달리다’의 합성어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계와 마주하는 그 순간을, 자연의 한 생명으로 탄생한 강렬함을 ‘달리다’로 표현하였다. 다시 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사건이 ‘깨달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깨달음은 잠에서 깨어나 그 자리를 박차고 달리나감이며, 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마치 빛이 어둠을 걷어내듯,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깨달음’ 그 본연의 의미이다.
믿음이 진실에 기댐이라면, ‘깨달음’은 ‘진실에 이어짐’이다. 믿음이라고 진실과의 분리는 아니다. 다만 깨달음은 믿음의 의존성이 사라진 사건이며, 진실에 직접적으로 닿는 순간이다. 믿음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했다면, 깨달음으로 사람은 홀연히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생’에 의한 그 ‘삶’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몸짓이며, 문명세계에서 홀로 떨어져 나가버린 박탈감과 그 세계를 걸어온 지난날에 대한 회한의 몸짓이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공격받을 때 우리의 저항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지만, 깨달음에 대해서는 우리의 저항은 진실이 거부되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행동이다.
사실에 대한 대표적인 학문영역이 과학이라면, 진실을 찾기 위한 대표적인 영역은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사실을 밝히는데 있어서 성공적이었다면, 종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는 실패했다. 샤먼의 주술과 무당의 굿이 그 순수함을 잃어버렸을 때, 이미 실패했다.
노자의 깨달음, 석가모니의 깨달음, 예수의 깨달음이 같을까? 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어느 선배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창업을 했다. 그 선배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어느 사이비 교주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이 진실에 이어짐일진대, 진실이 하나라면 그들의 깨달음은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깨달음이 다르다면 진실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의 진실이 감춰져 있다고 보지만,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이는 여러 가지 사건에 각각의 진실이 있다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날 때는 결국 그 현상에는 다양한 진실이 혼재해 있다고 어림짐작한다. 심지어 일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진실여부를 다투기도 하며, 양비론 혹은 양시론으로 친구들의 다툼을 말리기도 한다. 이처럼 논리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진실은 다양하다고 여긴다. 물론 우리는 진실의 다양성 유무를 굳이 따져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보는 행동을 끊임없이 한다.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할 수 있는 ‘나는 봤다’의 행동에서 그 ‘봤다’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다. 물론 언제, 어디서, 왜 봤는지도 그 행동에 포함될 수 있지만, 느닷없이 우연한 곳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봤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문장이 된다. ‘나는 무엇을 봤다’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무엇’은 대수롭지 않거나 자신의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그 ‘무엇’이 무심코 스쳐지나간 하나의 사건이거나 어떤 현상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간혹 되새기는 ‘무엇’도 있다.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무엇’과 더불어 그 행동에는 반드시 ‘나’도 있다. 즉 ‘나는 무엇을 봤다’라는 행동은 기본적으로 포집되는 대상과 포착하는 주체의 연결로 볼 수 있다. 그 행동이 반응, 대응, 행위, 혹은 멈춤의 유형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는 있다. 여기서 형태는 포착하는 주체의 드러남이다. 게슴츠레 보다, 흘깃 보다 등 ‘어떻게’도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어떻게’는 이러한 표정을 짓게 하는 혹은 표정과 상관없는 주체의 관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무엇을 봤다’는 ‘나는 무엇을 어떻게 봤다’와 같다. 그래서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진실의 다양성은 곧 주체의 관점, ‘어떻게’, 주체의 드러남에 따른 형태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자아의 주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진실이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나의 주체도 다양하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한다. 다중인격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주체는 하나여만 한다고 믿고 있다. 만약 주체가 하나라면, 우리에겐 내적 갈등이란 생길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관념적 주장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있음을 없다’라는 관념적 주장과 ‘있음을 있다’라는 엄연한 사실의 간극은 너무 크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에겐 두 가지 주체가 있다. 하나는 조화를 지향하고, 또 하나는 권력을 지향한다. 이들은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가 없지만 함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진실이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은 하나다. 진실과 주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용한 주요한 개념과 대응해서 보자. 이때 스피노자의 개념들은 진실과 주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부합한다. 진실은 실체substance이고, 주체는 양태mode이며, 주체의 드러남은 속성attribute이다. “그것은 진실이다.”에서 ‘그것’은 어떤 이에게 진리이고, 또 어떤 이에겐 도(道)이고, 열반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생(生,NATURE)’이다. 진실은 생과 그 생의 드러남(조화)이다. 생은 외재한다. 그렇지만 그 생의 드러남 곧 조화는 실체의 속성이며, 실체의 양태인 주체의 속성이다. ‘사실’이 참과 거짓으로 드러나듯이, ‘진실’은 왜곡되지 않은 진실과 왜곡된 진실로 드러난다. 물론 ‘사실’이 ‘진실’과 이어져 있기에, 자신에게 드러난 진실에 대한 평가는 ‘사실’에 따라 간접적으로나마 가능하다. 그래서 진실을 ‘참 진실’과 ‘거짓 진실’로 나눌 수도 있다.
-진실과 왜곡에 대하여
스스로의 감각을 열고 인식으로 보완하여 타자를 바라봐야 왜곡되지 않으니, 가족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마을을 그 자체로 바라보며 나라를 그 자체로 바라보고 천하만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라. 내가 가히 천하가 그러함을 아니, 이는 도道로써 그렇다네.(도덕경 곽점본 8장 풀이 중에서)
토론에서 혹은 언론에서 메신저를 공격하면서 메시지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방식은 원래 메시지가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것일 때,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신뢰유무를 따져서 간접적으로 메시지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유효하다. 하지만 흔히 메시지가 사실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지의 진위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메신저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메시지의 진위를 강요한다. 특이하게도 이렇게 노골적인 왜곡의 방식조차 대중에게 통한다. 우리는 스스로 실증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저 믿음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마는가? 그리고 우리는 믿는 것만 보는가? 이렇게 다른 이의 앎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이유가, 스스로 지닌 논리체계를 부정하는 즉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패배의식 때문인가 혹은 현대사회의 정보홍수에 주눅이 들어서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라도 의존하려는 비겁함 때문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앎의 모호함에서, 그 짙은 안개 속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멈춰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원리에 대해서, 우리는 그 원리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가 없다. 가령 만유인력이 있음을 알지만, 우리는 만유인력이 아니라 그 원리의 작용을 지각한다.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일화도 있지 않은가. 굳이 말하자면 ‘생(生,NATURE)’은 근원이 되는 단 하나의 원리이며, 우리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가 없다. ‘생’은 외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의 양태로서 존재하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그 ‘생’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곧 생의 드러남 즉 ‘조화’다. 생이 근원이 단 하나의 원리라면, 그 생의 드러남과 분리될 수가 없다. 즉 생과 생의 드러남을 분리할 수가 없다. 생과 생의 드러남을 우리가 진실이라고 일컫는다면, 진실은 하나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그 진실은 곧 생의 드러남이니, 조화로움이다. ‘생의 드러남’을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생의 드러남’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공간이 대자연이다. 자연과 분리된 우리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 두려움은 자연은 당연하고 돈은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당연함이 끊어지면, 우리는 ‘정말’ 살 수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간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과가 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만약 만유인력의 원리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을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면, 그 ‘생’에 대한 왜곡이 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왜곡이 ‘신’이다. 비문명의 시대에도 ‘신’은 구전되었다. 대지에, 산에도, 바다에도, 큰 바위에도, 심지어 동물에게도 정령이 있다. 다만 이러한 신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과 조화를 지향하는 목적에 충실했다. 사람들은 생을 환기했다. 하지만 그 신은 어느 순간 압도적인 크기, 압도적인 무게, 압도적인 소리 즉 사람을 압도하는 힘의 이미지가 되었다. 신은 자연과 분리된 관념이 되었고, 권력의 전형이 되었다. 권력이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구현되니, 도시가 그렇다. 그래서 도시는 관념적 실재이다. 도시를 문명의 꽃이라 한다. 문명은 관념이자 관념적 실재가 된다. 신이 생을 대체하고, 문명은 생을 모방한다.
자아의 주체는 거울과 같다. ‘생’을 있는 그대로 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이기도 하다. 왜곡된 주체는 왜곡된 진실을 담고 있다. 포집과 포착은 대상과 주체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주체는 대상을 구성하고, 대상은 주체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보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보는가? ‘사실’은 왜곡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사실’에 볼 때 ‘진실’을 덧씌워 보기에, 그 진실이 왜곡된 진실이라면, 즉 왜곡된 주체로 본다면, 우리는 사실에 왜곡을 덧입혀 사실을 안다고 한다.
이제는 ‘있음을 있음 그대로 보라’라는 도덕경의 가르침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가르침은 우리의 ‘앎’에서 진실과 사실이 분리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나무를 볼 때, 줄기만 보지 않고 가지만 보지 않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줄기만 볼 수 있고, 가지만 볼 수도 있다. 사이비 광신도도 그렇고, 과학자도 그럴 수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줄기만 보더라도 가지가 있음을 알고, 가지만 보더라도 줄기가 있음을 안다. 만약 인위적으로 만든 나무줄기를 본다면 어떨까? 나뭇가지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관상용인지 건축자재인지, 필요에 의해서 줄기의 유무는 결정된다. 만약 인위적으로 만든 나뭇가지를 본다면 어떨까? 가령 예술작품을 볼 때, 그 작가의 작품들이 서로 연결된 듯이 보일 때가 있다. 또한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작품에서 휴머니즘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휴머니즘은 진실일까, 혹은 왜곡된 진실일까?
휴머니즘이 왜곡된 진실인 신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진실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신의 대체자로서 만물의 중심이 된다는 측면에서는 또 다른 왜곡된 진실이 된다. 신과 인간, 지배와 피지배, 권력과 휴머니즘 등 왜곡된 두 가지 진실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은 진실을 모호하게 만들고 문명에 대한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지동설은 사실이다.’이라는 명제는 사실이 사실이므로 참인 사실이 된다. ‘천동설은 사실이다.’라는 명제는 거짓이다. 즉 실증에 근거한 앎은 논리체계에서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에 근거한 앎은 어떤가? 우리는 그 믿음-진실에 기댐-에 대해서,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외침-“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에서 그의 앎을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세례 요한의 또 다른 행동들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이때 사실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요한의 믿음에서 ‘진실’이 아니라 ‘기댐’이다. 심지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것을 믿는 자들도 있다. 가령 수많은 위성을 우주로 보내는 지금도 지구평면설(flat Earth)을 믿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은 ‘거짓에 기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가짜 믿음이라고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도 한때 동화를 믿었고 산타클로스를 믿었음을 잊고 산다. 또한 사이비 교주를 믿는 자들을 정신이 이상하다고 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달에 토끼가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비단 진실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앎의 기저에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앎에 있어서 그 앎의 기저에 믿음이 있다면, 스스로 그 믿음을 의심할 수 있다. 즉 믿음이 ‘진실에 기댐’이니,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할 수 있다. 그저 어림짐작에 따른 사실의 영역이라면, 실증여부를 따져보거나 기본적인 논리체계에 따라서 반성할 수가 있다. 혹은 메신저에 대한 기댐이라면, 그 메신저와 분리된 메시지를 주목할 수도 있다. 다만 진실의 영역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왜곡된 진실인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상에서 진실과 사실에 대한 혼용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삶이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일상에서 자신의 ‘앎’에 대해서 번번이 의심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오히려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바라는 바가 있으니, 우리가 ‘앎’에 대한 모호성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가끔씩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비록 우리의 ‘앎’이 거짓이나 왜곡된 진실에 영향을 받았고, 그 앎에 따른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평생 타인을 배려하고 선행을 베푼 노인의 행동을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앎’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진실에 주목한다면, 일상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거나 타인의 행동을 평가할 때, 진실에 따른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다. 판단이나 행동이 살아있는 생명들과 조화로운지 조화롭지 않은지, 살아있는 생명들에 파괴적인지 파괴적이지 않은지를 따져 볼 수 있다. 스스로 파괴적인 행동을 지양할 수 있다. 물론 더 나아가 우리가 더 이상 권력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만큼 지구에 대한 자연에 대한 또한 우리 스스로에 대한 파괴가 늦춰지지 않을까?
비문명인이라도 조화롭지 않은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행동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만약 그 행동이 공동체에 해가 된다고 마을의 장로들이 판단하면, 그들은 그 행동을 제재를 하거나 최악의 경우 그 행동을 한 자를 추방한다. 그럼에도 조화롭지 않은 행동들은 어쩌다 파괴로 이어져 권력을 형성했다. 권력은 착취를 기반으로 그 세력을 공고히 한다. 도시가 생기고, 도시의 규모가 커진다. 문명은 이미 권력과 함께 태동했고, 도시와 함께 성장했다. 고도화된 문명사회에서도 비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가령 마을공동체가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조화로움을 기반으로 하거나 지향한다면, 이는 비문명의 흔적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유전적으로 학습된 문명의 흔적이 있지만, 기본적인 조화주체도 지닌다. 몸이 성장하면서 이 문명사회에 학습되면서 즉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조화주체는 원초적인 동물의 본능이나 욕망으로 치부되면서 억눌려진다. 문명주체는 강화되고 오히려 조화주체는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우리는 문명주체를 통해서 세계와 만난다. 그 만남은 익숙하다. 그러나 그 익숙함 가운데 우리는 문득 심한 결핍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 몸은 여전히 문명인이라는 외투가 어색하기만 하다. 사람이 자연과 분리될 수 없듯이, 문명인은 ‘생’을 외면할 수는 있어도 ‘생’의 그 진실과 불편한 동거를 거부할 수가 없다. 조화주체가 그러하듯, 문명주체에도 ‘권력적이지 않음’이 있다. 즉 조화주체와 문명주체의 교집합에 ‘조화롭지 않음’과 ‘권력적이지 않음’이 있다. ‘조화롭지 않음’은 권력화의 가능성이고, ‘권력적이지 않음’은 조화에 대한 향수이다. 그래서 아무리 권력에 압도된 인간이라도 진실로의 회귀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은 문명이 고도화되면서 점차 낮아져서 지금은 절망적일 정도로 거의 없지만, 살아있기에 우리에게 몸이 사라지지 않듯이 희미한 희망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앎과 주체
자아는 몸과 정신으로서 세계와 마주한다. 자아는 감각과 인식으로써 세계와 만난다. 자아는 주체와 결맞음을 통해서 세계를 그리고 나를 안다. 앎은 결맞음이다. 결맞음은 이미 이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결맞음은 홀로가 아님을 전제한다. 우리는 ‘앎’을 통해서 우리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안다.
우리는 어떤 ‘앎’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주체를 평가할 수가 있으며, 나를 돌아볼 수 있다. 동계올림픽 스키경기장을 가리왕산에 만들 때, 올림픽 이후 생태복원이 조건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복원은 비용문제로 차일피일 미뤄졌고, 심지어 해당 지자체는 이왕에 만들어진 시설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환경단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더라도, 국가와 지자체가 협의해서 약속대로 즉각적으로 복원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전해 듣고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 ‘앎’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있다. 스스로 다양한 평가를 할 수는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가 있다. 우리는 가리왕산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가 있고, 복원에 필요한 비용에 주목할 수 있다. 훼손은 회복을 전제하지만, 회복될 수 없는 훼손은 곧 파괴를 의미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파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뉴스를 누군가에게 ‘안다’라며 전할 때, 하나의 관점에서 얘기하게 된다.
자아의 두 주체는 대개 하나가 강화되면 하나가 약화된다. 또한 두 주체가 함께 약화될 수도 있다. 두 주체가 모두 약화된 사람은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또한 사람에게 무심한 듯 보인다. 그는 세상이나 사람에게 큰 실망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운 좋게 무난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는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할 때, 혼란스럽고 스스로의 결정에 만족하지 못한다. 물론 그가 두 주체가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강화된 문명주체에 대한 불편함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두 주체가 함께 강화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문명주체가 강화되면서 조화주체의 사라짐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자극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문명주체는 권력을 지향을 한다. 권력은 우월감에 따른 자아도치이며, 강한 소유욕으로 이어진다. 그 소유욕은 비단 재물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그 소유는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로 확장된다. 자아에 대한 통제이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조차 소유한다. 관념적으로 확장한다. 사라지는 조화주체에 대해서 무엇인가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강화된 문명주체는 그것조차 용납할 수가 없다. 조화주체는 자신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가끔 필요할 때,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과 깨달음
Jesus said, "Among those born of women, from Adam until John the Baptist, there is no one so superior to John the Baptist that his eyes should not be lowered (before him). Yet I have said, whichever one of you comes to be a child will be acquainted with the kingdom and will become superior to John."(도마복음 46)
우리는 문명인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의 꿈은 그 꿈의 동기와 형태는 어른이 되면서 현실적으로 변한다. 그 현실은 이 문명사회에 부합한다. 형태가 바뀌지 않더라도, 동기는 변한다. 가령 의사가 꿈이라던 이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동기는 점차 사회적 지위나 부를 달성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흔하지 않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의사가 된 사람이 직업사명으로 충실한 삶을 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순수함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사회화과정을 겪으면서 문명주체가 강화되고 상응하여 조화주체는 약화된다.
우리가 의도했든 아니든 약화된 조화주체를 회복시키고 강화하는 방법이 있을까? 시간을 되돌려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물론 도마복음에 언급된 말씀도 그런 의미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문명에서 벗어난 삶을 살지 않더라도, 우리의 조화주체가 자극받는 경험을 자주한다. 시를 통해서도, 반려동물을 통해서도, 숲길을 걷다가도, 혹은 연인의 함박웃음에서도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이때의 ‘살아있음’은 조화로움에 기인한다. 내가 살아있는 타자와 이어져 있음을 지각하고, 이러한 지각이 조화주체를 자극하여 뭔가 비워진 혹은 결핍된 마음이 약간이나마 채워진다는 느낌이다.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을 때도 혼잣말로 “살아있네!”라고 외칠 수도 있지만, 이때는 문명주체를 자극한다. 그 자극이 오래지 않아 살아지면서, 오히려 공허함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조화주체에 대한 자극도 오래지 않아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 자리에 더 큰 공허함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거나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한편 문명주체에 대한 자극을 통해 남겨진 기억은 자칫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주식투자로 회복할 수 없는 실패를 겪은 이들에게도 리즈시절은 있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자극이 아닌 조화주체가 강화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쩌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는, 아니 유일한 방법은 깨달음을 통해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실에 대한 ‘어림짐작’이 실증을 통해 명증에 이를 수 있듯이, 진실에 대한 ‘믿음’은 총체적 감각을 통해서 ‘깨달음’이 된다. ‘깨달음’은 ‘진실에 이어짐’이다. 우리는 ‘깨달음’이란 단어 앞에서 숙연해진다. 그 단어는 성인이라 추앙받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먼 나라 이야기에서나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 단언컨대 살아있다면 누구나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지만, 원효대사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도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믿음이 그렇듯, ‘깨달음’의 쓰임새도 다양하다. 인식의 측면에서 사실과의 이어짐이기도 하며, 지각의 측면에서 왜곡된 진실과의 이어짐일 수도 있다. 심지어 관념적으로 거짓 혹은 ‘있지않음’과의 이어짐일 수도 있다. 또한 강한 믿음을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러한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령 돈, 신, 사이비, 권력 등에 대한 깨달음이 그렇다. 깨달음으로 자신의 세계관이 전환 또는 강화된다. 즉 자신의 패러다임이 선명해진다. 세계를 관통하는 관점이 생긴다. 사실은 그 관점이 덧씌워져 자신과 결맞음이 된다. 그리고 행동한다. 그래서 어떤 깨달음은 믿음보다 훨씬 위험하다. 뉴턴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도 유럽전역에서는 마녀사냥이 진행되었다. 무고한 여성들이 잔인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또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믿음도 그렇듯, 우리는 ‘앎’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혹은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반성하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평가할 수 있다. 믿음보다 깨달음이 더욱 단호하고 노골적이어서, 그 평가는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판단이나 행동에서 ‘조화롭지 않음’과 ‘권력적이지 않음’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단순히 그것이 ‘조화로움’인지 ‘권력적’인지만 따지면 된다. 우리는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미 권력주체가 강화된 상태이다. 여기서 깨달음에 의해서 또 다시 권력주체가 강화된다는 것은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자아가 권력주체에 압도된다. 소시오패스가 된다. 그리고 다시 조화를 지향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깨달음을 통한 조화주체의 강화도 한편으론 치명적이긴 매한가지다. 문명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낯설어지고 불편해진다. 지인들과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혁명가 예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장 51-53) 문명세계에서 홀로 떨어져 나가버린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문명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지인들로부터 진실이 거부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리고 다시는 몰랐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진실은 하나다. 그렇듯 ‘진실에 이어짐’인 깨달음도 하나인 진실로 귀결된다. 다만 그 이어짐의 경로는 다양할 수 있다. 즉 깨달음이 어떤 단 하나의 경로를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道)’가 자연스럽게 ‘덕(德)’으로 이어지듯이, 깨달음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지향하게 된다. 가령 휴머니즘을 통해서도 깨달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실체인 ‘생(生,NATURE)’의 양태인 ‘살아있는’ 사람과 자신이 이어져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살아있음’을 알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행동을 한다. 이렇게 깨달음을 통해서 조화주체가 강화되더라도, 문명주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회와 단절된 삶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여전히 문명인으로 살아간다. 특히 사람을 통해서 얻게 된 깨달음은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무색해지기도 한다. 어느덧 초심을 잃고, 인간중심이라는 신념만이 남는 경우도 있다. 과거의 깨달음은 ‘강한 믿음’으로 퇴색하고, 심지어 문명사회와 적절한 타협을 통해서 왜곡되기까지 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좀 더 윤택한 삶을 살수 있다면, 자연에 대한 파괴를 불가피하다며 용인한다. 그들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그들에겐 관념적 인간이 된다. 자연의 일부로서 즉 조화로움의 존재로서의 실재하는 사람이 그들에겐 자연의 중심으로, 세상의 주인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존재로서의 관념적 인간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노동운동에서 볼 수 있다. 처음 시작은 어땠을까? 노동자들이 착취의 대상이 아닌 이 사회에서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에서 시작한 운동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도 그 초심을 유지하는 노조가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많은 노동운동가들에 노동자는 모든 생산의 중심이자 목적이 되는 관념적 지위를 획득한 관념적 주체가 된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그 혁명의 날을 꿈꾸며 노동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화로움에 대한 당위성은 이제는 혁명에 거추장스러운 미련일 뿐이다.
양태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결국 깨달음은 실체에 대한 지각이 동반되어야 한다. 깨달음에 있어서 약하고 강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양태를 통한 깨달음이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지각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기반성을 ‘강한 믿음’으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만다. 가령 힐링이 그렇다. 선진 문명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혜로 생각한다. 몸과 마음의 치유는 결국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본주의자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모토로, 인간이 우선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믿음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생에 의한 사람들의 삶, 그 조화로움의 당위성’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한다면, 그 깨달음에서의 휴머니즘은 사람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조화를 담을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깨달음은 믿음의 의존성이 사라진 사건이며 진실에 직접적으로 닿는 순간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면, 그중에서도 효과적인 경로 혹은 최적의 경로가 있을 수 있다. 진실에 직접적으로 닿는 순간이라면, 우리는 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그 순간을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자연도 생의 양태라고 할 수 있지만, 생의 적나라함이 고스란히 구현된 유일한 양태이다. 즉 자연을 생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단 하나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이 ‘대자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인디언의 마더어스가 ‘대자연’이며, 비문명인들의 정령이 곧 ‘대자연’이다. 현대인들의 힐링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자연을 수단으로 인식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깨달음’은 자연이 나와 이어져 있음을 지각하며, 나를 담고 있는 자연이 목적이 된다. 즉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최적의 경로는 자연에 있다. 예수가 40일간 머물던 광야도 자연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고, 또한 깨달음이 순간의 사건이지만,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현대문명사회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겐 문명주체가 활성화되어, ‘진실에 이어짐’을 지각하는 즉 깨달음의 결맞음에 어려움이 있다. 이 문명사회에서 우리의 조화주체는 약화되고 억눌려있다. 깨달음의 순간에 이르기 전에 우리에겐 조화주체의 충분한 자극이 필요하다. 조화주체는 일상에서 여러 경로로 자극받을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감각이 무차별적으로 끊임없이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비단 도시의 인위적 구조물과 인위적 조형물만이 아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꽃도, 하늘거리는 나비도, 모이를 찾아 분주한 새들도, 매연을 견디는 가로수도 있다. 우리는 지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나를 느끼며, 우리는 연인의 따스한 체온에서 조화를 느끼며, 우리는 누군가의 진솔한 소리에서 삶을 느낀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감각들을 우리가 소중히 느낀다면, 우리의 조화주체는 자극받는다. 어느덧 우리는 문명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문명에 대한 의심’, 이로써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끝낸다.
자극받은 조화주체는 우리를 자연으로 이끈다. 숲길을 걷고 싶어지고, 산 속에 머물고 싶어진다. 흐드러진 생명들과 어울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 끌림이 있는 그곳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주위를 지긋이 둘러보라. 그리고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 내음을 맡고, 숨을 크게 들이켜 혀에 맴도는 맛을 느껴보라. 그리고 피부에 닿는 공기에 집중해보라.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느끼게 된다, 총체적 감각을. 우리는 드디어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나를 느끼는 건지 자연을 느끼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그 순간, 생이 이 모든 있음에 관통함을 알게 된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이로움이 벅차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도 우리는 큰 변화를 겪는다. 다시 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문명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문명주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분명 깨달음의 전후는 다르지만, 조화주체가 강화된 채로 지속되기란 어렵다. 오히려 문명세계에서 진실이 거부되는 현실을 똑똑히 지켜보는, 그 상황을 견디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우리의 저항은 나약하고 외롭다. 우리는 지쳐간다.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강화된 조화주체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그 어려운 상황에 홀로 놓이게 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깨달음은 일회성이 아니다. 더구나 더 이상 결핍으로 인한 공허함에 빠지지는 않는다. 언제든 우리의 조화주체는 보다 선명하게 자극받으며, 보다 수월하게 강화된다. 특히 우리에게 조화로움을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살아간다. 조화를 지향하며!
-인간존재의 당위성
이 글이 깨달음으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무한의 긍정을 얻게 되고, 이에 따라 최고의 쾌를 얻어서 지속되는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면 좋았을 현실의 모호함이 분명해지고, 우리는 권력에 의한 노골적인 파괴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우리는 문명의 수혜자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조화주체를 굳이 회복하려 하지? 심지어 의문에 그치지 않고, 거부감에 들거나 실없다고 책망할 수도 있다. 문명에 기대어 편안하게 지내는데, 문명에 대한 그 믿음이 훼손당한다는 건 곧 자신이 부정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의문을 품을 수 있고, 단지 이러한 의문을 이유로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만물이 타자를 향한 자신의 존재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미가 오직 우리 자신에게만 향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지 않는가?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하면서, 타자에 대한 파괴에 무덤덤할 수 있는가? 아니, 정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기는 할까? 왜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것들을 약자에게 전가시키고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문명사회에서 받는 혜택이 착취로부터 얻은 것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모른 척 하는가? 우리는 왜 문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가? 정말 우리는 편안한 삶을 사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미래의 행복이 목표라며 죽음의 전장에 있는 듯 현재의 고달픔과 두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가?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조차 진실하지 못하는가?
도시는 문명의 꽃이라고들 한다. 과연 그렇다. 문명은 도시와 그 태동에서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문명이 생의 왜곡이라면, 권력은 조화의 왜곡이며, 도시는 자연의 왜곡이다. 권력은 문명의 속성이며, 도시는 문명의 양태가 된다. 도시는 타자에 대한 착취를 전제로 세워지고 유지된다. 권력은 타자에 대한 파괴를 전제로 행사된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 국민을 위한답시고 자연에 대한 파괴를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정말 국민을 위한 국가권력이 있기는 했던가? 그저 부정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 애초에 국민에게 나눠준 권력이 없었다면, 국민은 위임할 권력도 없었던 것은 아닌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권을 국가에 양도한 것인가? 인류의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얻음으로 살아왔다. 그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인가? 만물을 지배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직도 유효한가? 우리는 자연과 함께 조화로움으로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가 국가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없다. 다만 우리가 위임하여 세워진 권위가 있을 뿐, 그리고 조화를 지향하는 지도자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호가호위하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드라마에서, 역사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본다. 그런데 우리는 알까? 그런 인간들의 전형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음을. 우리가 문명의 수혜를 기뻐해야하는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혹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산업혁명이후 문명은 가파르게 진화했고, 자연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 결과, 누구나 예측 가능했던, 아니 논리적 귀결로서의 현상이 기후변화이다. 더더욱 생물의 다양성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로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녹고 있다. 과연 지속가능발전이라는 세계적 어젠다가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의 폭식을 멈추지 않고도, 파괴를 멈출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일각에서는 인간이 이주 가능한 외계행성을 찾는가? 고리타분할 수는 있지만, 이제 다시 우리는 인간존재의 당위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생의 양태로서의 만물은 조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만물은 타자를 향한 존재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예외일까? 사람도 생의 양태이며, 타자를 향한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연 그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이 곧 인간존재의 당위성일 것이다. 인간은 거의 유일하게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파괴를 일삼는 종이다. 이것은 생의 양태로서의 존재당위성일 수가 없다. 이런 모순이 허락된다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원에도 바다에도 포식동물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1995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회색늑대를 풀어뒀더니, 생태계가 복원에 도움이 되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북미 인디언들은 늑대가 순록의 개체수를 안정시키고, 또한 병든 순록을 사냥해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는다고 믿었다. 이는 양을 키우는 몽골의 유목민들의 증언도 일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당위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인간이 스스로 파괴한 생태계를 복원하는데, 그 역량을 다해도 부족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인간에게도 늑대와 같은 고귀한 자연의 사명이 있지 않았을까?
논리체계는 자연의 섭리와 상이한 어떤 질서가 아니다.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논리는 없다. 과거 기후변화를 예견한 과학자들은 지극히 논리적 인과론에 따른 주장이었다. 이제는 기후재앙의 임계점을 이미 넘겼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쩌면 예견된 디스토피아를 향해 인류는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것이란 생각은 그야말로 기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 이들이 있다. ‘과학기술이 해결하겠지’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진실을 외면하듯, 우리는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과학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일들은 대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최악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안다. 지금 인류의 시급하고 유의미한 도전은 문명에 대한 의심이다.
202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