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더 위대합니다
함석헌
부처님 오신 날에 부쳐서 무슨 말을 하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내게, 부처님 오신 날은 없습니다. 내가 아는 부처님은 오신 날도, 가신 날도 없는, 영원하신 부처님입니다.
나는 물론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불교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압니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압니다. 그것은, 부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는 예수를 통해서 압니다. 영원하신 이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입니다. 그 지극히 작은 한 알을 먹으면 무한한 전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입니다. 지극히 가는 한 가닥을 받아들이면 무한한 전체를 밝힐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마치 바람 같은 것입니다. 그 지극히 연약한 한 숨결을 쏘여 봤으면 영원한 전체의 운동을 알 수 있습니다. 소금이 어떤 것이냐를 알기 위해 7대양의 물을 다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7대양의 물을 다 마신 후에야 소금이 짠 것임을 알 수 있다면 소금이 귀할 것이 조금도 없고 그것을 해보는 것 같이 쓸데 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빛의 경우도, 바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극히 작은 것을 체험함으로 인하여 그 영원 무한한 전체를 능히 알 수 있게 되는데 그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이지 앎이 아닙니다. 그럼 그 믿게하는 그 자체는 무엇입니까? 믿게하는 이가 있지 않고는 내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믿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믿게하는 것은 참입니다. 이했다 저랬다 하는 것으로는 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소금 한 알을 입에 집어넣고 「아, 짜다!」했을 때 나는 그 잘 뵈지도 않는 한 알에 내 전신을 들어 항복한 것입니다. 흉악한 독재 군주의 권력과 무기는 다 거부할 수 있어도 소금 한 알의 짠 맛을 짜지 않다 할 놈은 없습니다. 그것이 참입니다. 그러나 그 짬은 또 내 속에 본래부터 짬이 들어 있지 않고는 받아 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게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나를 두렵고 겁나게 하며 슬프고 낙심나게 하는 것으로는 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빛 한 가닥이 어둠 속에 들어오는 순간 「아 밝다. 아 따뜻해!」했을 때 나는 내 전신을 들어 감사, 찬송한 것입니다. 부부애, 동포애는 잊을 수 있어도 이 빛의 사랑은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도 생명 속에 본래 밝고 따뜻함이 들어 있지 않고는 알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게하는 것은 또 스스로 함입니다. 물질계에서 같이 무자비한 법칙만이 다스린다면 나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벼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감을 당하고 저도 모르게 「아 시원해!」했을 때 나는 내가 바람인지 바람이 나인지 모르리 만큼 자유한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함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이 우주의 숨결은 또 내속에도 본래부터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 보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내가 불교를 모르면서도 부처님은 감히 아노라 한것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내 속에 본래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본래부터 부처님이 계신 것을 알려 준것은 예수요, 공자요, 노자요, 장자입니다" 그들은 다 그 온 때와 곳과 그 말씀하시는 식양(式樣)은 달라도 그 참인데서 그 사랑인데서 그 스스로 함인데서 하나인 것은 마치 소금이 구어낸 곳이 지중해냐 황해냐 인도양이냐 하는 데서는 달라도 그 짠맛에 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음과 같고, 빛이 그 들어 온 것이 창문을 통해서냐, 산에서냐, 바닷가에서냐 하는 데서는 달라도 그 따뜻하고 밝음에는 다름이 없는 것과 같으며, 바람이 그 통해서 온 곳이 숲 사이냐, 물결 위냐, 감옥 살창 틈에서냐 하는 데서는 달라도 그 시원한 데서는 추호도 다를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제도적인 데, 교리적인 데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어느 종교도 사람을 상대하는 이상 제도나 교리를 전혀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 집착해서는 아니 됩니다. 입착해 버리면 그 안에 진리가 있어도 못봅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플라톤은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플라톤보다도 더 위대하다」한 말을 빌어서,「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기독교 보다도 더 위대하다」 했더니, 열심 있는 친구가 거기 반대하여서「아닙니다. 진리는 위대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보다도 더위대하다 해야 합니다.」했습니다. 그 어느 개념이 더 큰 것이냐 하는 것은 어린 학생도 알 만한 것인데, 열심이나면 그런 잘못을 하게 됩니다.
나는, 아는 것은 적습니다. 그러나 내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가지지 않으려 애씁니다. 또 진리는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낡은 허울을 아낌없이 버리려고 힘씁니다. 이제 어떤 종교도 자기를 절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 어느부분, 어떤 나타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볼완전한 나타냄 속에서 완전을 믿게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믿음에는 주격도 목적격도 붙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혹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믿고, 네가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믿으면 우주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하나님도 있습니다. 믿음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믿음에 이르지 않는 철학 참 철학일 수 없고, 철학 없는 종교 참 종교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종교의 결점은 체험적이 못 되는 데 있습니다. 즉, 내 종교가 아니고 남의 종교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기초적인 것만 강조하고 있고 날마다 변하는 역사에 적응해 나갈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건질 능력이 없고 세속적인 세력에 뒤따라 가며 그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심부름인 이상, 부끄러운 것입니다.
불교에서 석가탄일을 국정 공휴일로 하자고 불교도 들이 시위 운동하는 것을 보고 섭섭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가 크리스마스에 팔려 다니는 것만 해도 슬픈데 또 불교까지 그 쓸데 없는 것을 세속 세력에 청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무엇이 부처님께 영광이 됩니까? 있던 영광도 내버리고 진리에만 나서서 마침내 구경 자리에 오르심을 나타 내 보여주신 이인데, 거기다 무엇을 다시 더 부칩니까?
이 더럽고 소란한 문명을 향해 정말 적멸을 한번 실지로 보여 줄 용기는 없으십니까?
나는 본래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는데 일제 때 감옥에 들어가서 감방에서 책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어서 무량수경을 읽다가 기독교 신앙과 불교 신앙은 본질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본래 선도대사가 깨달음을 못 얻고 번민하다가 눈을 싸매고 책 곳간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책에 운명을 걸고 찾아서 뽑은 것이 무량수경이어서 거기서 도를 깨쳤고, 일본의 호낸쇼닝이 또 젊어서 번민하다가 선도대사의 무량수경 해석을 읽어서 도를 깨쳤다는데, 나는 그러할 정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또 그 호낸의 제자인 신관의 글을 통해 무량수경을 알게 됐으니 참 이상한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량수경이 가르치는 염불이란 무엇입니까?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 아닙니까? 그것은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무한겁에 이르는 고통 시련도 사양 아니 는 놀라운 신앙의 열매입니다.
오신 날 찾아서는 뭣합니까? 언제나 믿는 순간이 오시는 순간입니다. 기독교 성경에는「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시는 것도 오늘에 있고 가는 것도 오늘에 있습니다.
부처님 오늘 우리 마음속에 나십시샤!
불광 1978 6월 44호 원제목; 부처님 오신날에 부친다
저작집30; 7-215
전집20; 5-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