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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 외 2편
김 병 우
국방부 행정서기관 정년퇴직
여성가족부 ‘남편수기공모전’ 지아비상 수상(2011)
수필집 『염불봉사』
저서 『공무원 계급구조와 개혁에 대한 변(辨)』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글무리수필 동인
서문시장
서문시장에 또 불이 났다. 다닥다닥 붙은 재래시장의 구조상 불이 나면 피해가 크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뉴스는 국정농단에 대해서만 도배하고 있다. 사돈 남 말 하듯 스쳐 지나가면서 화재현장을 잠깐 비춰주는 게 다다. 텔레비전으로 불타는 상가건물을 보는데 어릴 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집에서 동생과 놀고 있었다. 장사를 나가신 어머니가 버선발을 한 채 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셨다. 헝클어진 머리와 풀어진 옷고름, 평소와 다른 모습에 어린 마음에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 옆구리에는 탄약통으로 만든 ‘돈통’이 들려있었다. 서문시장에 큰 불이 났었고 포목점을 운영하던 어머니는 현금만 챙겨 화재현장을 급하게 빠져나온 것이었다. 대낮에 일어난 불은 마치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면서 시장 통 사이사이를 새파란 불빛이 할퀴고 다녔다. 그 화재는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사업마저 부도가 나서 졸지에 알거지로 나앉는 신세로 전락했다. 부모님은 생활의 터전인 대구에서 더는 살 수 없다며 낯선 땅 부산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만 데리고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먼저 왔다. 영도다리 근처 자갈치시장에서 갯내가 물씬 풍기는 부산 바다와 갈매기 떼를 처음 보았다. 바아앙~ 뚜우~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좌판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지는 소주를, 나는 고래 고기를 왕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서문시장과 대구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 뒤 여섯 식구가 모두 부산에서 다시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대구 토박이였던 부모님이 무일푼으로 바닷바람과 거친 사투리의 부산 땅에서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따랐다.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오들오들 떨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부산은 바닷바람 탓인지 유난히 꽃샘추위가 심했다. 춥고 배고팠던 그 시절의 봄이 생각나서인지 지금도 봄이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문풍지 사이로 들어온 연탄가스에 온 식구가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며 좁은 골목길에 널브러진 적도 있었다.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던가. 새벽녘 찬 공기 속에서 들이마신 동치미국물이 생명줄을 잇게 하는 끈이 될 줄이야. 그때 올려다 본 새벽하늘의 별들이 어쩜 그리도 초롱초롱했는지. 그런 와중에도 별을 볼 정신이 있었던 모양이니 내가 철이 없긴 없었는가 싶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지만, 다행히도 여섯 식구가 역경을 딛고 버티면서 꿋꿋이 살아온 것은 아마도 조상님께 잊지 않고 지냈던 제사 은덕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연어가 모천회귀(母川回歸)하듯 고향 땅 대구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고 나서야 말이다. 서문시장은 나의 유년시절 추억이 오롯이 저장되어 있는 기억창고 같은 곳이다. 옛날 어머니 가게에서 먹었던 왕만두와 꿀떡이 생각이 나서 주말이면 아내랑 서문시장을 찾곤 한다. 입에 맞는 단골 식당도 생겼다. 씨앗호떡을 들고 시장바닥을 거닐면서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서문시장에 갈 수가 없겠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그곳을 찾는다면 어릴 적 악몽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다. 하루빨리 수습이 되어서 종전과 같이 활기찬 시장 모습을 되찾기를 빌어본다.
오백 원 아줌마
지하철 출입구 부근에서 여인이 행인들에게 돈을 구걸한다. 점심나절 나타났다가 해 질 무렵이면 사라지는데 구걸 행위가 독특하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면서 여인은 외친다. “아저씨요! 오백 원만. 아줌마요! 오백 원만. 아가씨! 오백 원만. 학생! 오백 원만….” 신분에 걸맞은 호칭을 구사하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오백 원만 달란다. 재미있는 것은 아저씨나 아줌마를 부를 때는 목소리가 올라가는데 오백 원만에서는 슬며시 내려간다. 남의 돈을 거저 달라는 게 양심에 찔리기는 하나 보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한지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땟국이 흐르는 맨발에다 치맛자락으로 삐져나온 엉덩이가 펑퍼짐하다. 제 몸도 하나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육중한 몸집을 끌면서 영락없는 비렁뱅이 행색으로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다. 한겨울의 추운 날을 빼고는 늘 같은 장소에서 구걸했다. 시간대에 따라서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경우도 있으나, 이동 거리라야 고작 지하철 출구를 거점으로 백여 미터 전후가 전부다. 버스주차장, 횡단보도 앞, 사람들이 붐비는 주변을 벗어나는 법이 거의 없다 보니 사람들 눈에 항시 잘 띈다. 그게 그 여인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각인효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그 장소에서 본지도 벌써 3년째 접어들었다. 언제부터 그 장소에서 구걸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여나 그 옆을 지나치다가 아저씨요! 아줌마요!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은 되레 안부가 궁금해지기까지 하니 참 별일이다. 그녀가 그 주변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이유가 뭘까? 무슨 곡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그녀의 나이는 일흔을 조금 넘긴듯하나 그것도 추측일 뿐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다만 목소리는 사십대라 해도 믿을 만큼 젊고 힘이 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도 “아저씨요! 오백 원만”이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허구한 날 똑같은 톤으로 외치다 보니 연습이 된 것인지 소리가 맑고 또랑또랑하다. 오백 원 동전 앞면에 그려진 학이 그처럼 울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녀는 소싯적에 잘 나가던 가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자 웃음이 나온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녀의 패션이 가끔 바뀐다는 점이다. 손으로 직접 짠 듯한 수를 놓은 벙거지를 생뚱맞게 쓰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다. 때가 꾀죄죄하게 묻어있는 옷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러운 옷은 동냥의 수단이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모자만큼은 한껏 멋을 부려보아야겠다는 여자의 본능적인 심사가 작용한 것일까. 오백 원 동전의 학처럼 훌훌 날고 싶은 충동을 모자로나마 보상받으려는 것일까.
그녀와 맞닥뜨릴 때는 나 역시 주머니를 열 수밖에 없다. 동전이 없는 날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여 주는데 뺏다시피 낚아채서는 치마 속으로 쑤셔 넣는다. 손아귀 힘이 무척 세다. 그런 행동으로 봐서는 정신이 온전하지가 못한 것 같기도 하나, 자신의 어쭙잖은 행동이 들켜 민망해할 때는 눈웃음을 짓는다.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다.
한번은 구걸 장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번잡한 주도로가 아닌 이면도로 골목길이었다. 그녀는 막 뜯은 비닐봉지에서 꺼낸 빵을 한입 물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보물단지처럼 항시 떨어지지 않던 보따리가 펼쳐져 있었다. 신문, 빨간색 지갑, 보온병 등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열린 지갑에는 햇빛에 반사된 동전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순간, 오백 원 동전의 학이 날갯죽지를 푸드덕거리며 공중을 차고 오르는 환영이 보였다. 동냥 사이사이 막간을 이용해서 커피 타임을 즐기며, 구걸한 돈을 지갑에 챙겨 넣으면서 마냥 행복해하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돈이 없으면 자유를 잃는다고 했던가. 평생 빚에 허덕이며 살았던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돈은 주조된 자유”라는 명언을 남겼다. 돈의 위력을 여실히 증명하는 말이다. 저 여인 역시 말 못 할 아픔이나 사연을 가슴에 안고 살다 보니 돈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것은 아닌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인들이 구걸하는 그녀를 보면서 한마디 한다. 집도 있고 서방도 있는 여자가 저러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저씨요! 아줌마요! 누구를 부를 때는 생기가 돌았으나 오백 원만을 외칠 때는 사뭇 달랐다. 구걸에 대한 절박감이나 절절함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묻어나지 않았다. 구걸 행위는 단지 사람 냄새가 그리워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그녀만의 놀이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임도 보고 뽕도 따듯이 사람 구경도 하고 한두 푼 던져주는 푼돈을 모으는 재미도 누리면서, 마치 동냥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스스로 터득한 길거리 철학을 통달한 자기 분수를 아는 걸인이다.
도심 속에는 각기 다른 다양한 개체들이 옹기종기 모여 조화를 이루면서 어울러 살아간다. 자기들만의 색깔을 분출하면서 구색을 맞추듯이…. 그녀 역시 이제는 친숙한 이웃으로 다가와서 우리들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으나 그 장소에 없으면 아쉽고 서운하다.
그녀는 스스로 터득한 길거리 철학을 통달한 자기 분수를 아는 걸인이다. 오백 원 동전에 새겨진 날아오르는 학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양산 쓰는 남자
남자가 양산을 쓰고 시내를 활보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아직은 구경거리가 되지 싶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런 내가 요즘 외출 시 양산을 찾는다. 이 나이에 누굴 의식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배짱도 생겼다.
백내장 수술을 하고부터 햇살이 강한 날은 외출하기가 부담스럽다. 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려도 보지만 강한 빛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나도 모르게 찡그리게 되고만다. 정기적으로 찾는 안과에서도 딱히 묘안이 없으니 외출할 때는 선글라스나 모자를 써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둘 다 평소에 습관이 되지 않아서인지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어색하여 몇 번 시도하다가 그만뒀다.
한 번은 아내와 외출할 때 양산을 내가 든 적이 있었다. 결혼 초부터 내 양손에는 늘 무거운 짐들로 채워져 있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아내를 배려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남자가 창피하게”라며 빼앗던 양산 역시 다른 물건들처럼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아내를 핑계로 든 양산이 제법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자 체통 때문에 섣불리 양산을 들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도 그렇고, 양산을 쓴 여자들과 눈길이 마주칠 때는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내는 시집간 딸과 통화하면서 양산을 쓰고 다니는 아빠가 창피스럽다고 흉을 봤다. 딸의 반응은 의외였다. 서울은 양산 쓰고 다니는 남자들이 부쩍 많아졌다며 오히려 눈 건강을 위해서 당당하게 쓰고 다니길 권했다. 문화 차이인지 몰라도 지역 간의 격차가 느껴졌다.
그무렵 우리 지역에서도 대프리카를 잘 견녀내라며 시민들에게 양산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시내 백화점 앞에서 이뤄진 행사였다. "남자분들도 양산 쓰세요! 양산 써보면 정말 좋아요." 양산을 건네는 봉사자가 행인들에게 친절멘트를 날렸다.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하니 양산 썼을 때와 안 썼을 때 약 7도 정도 차이가 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 행사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지만, 신선감이 컸다.
일본에서는 몇 년 전부터 남성용 양산이 인기리에 시판 중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여성용과는 달리 색상이 짙고 면적이 넓다고 했다. 우산 겸용 양산을 선호한다고 한다니 편리성 때문일 거다. 모 방송국 종합 뉴스 진행자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자기도 출근길에 용기를 내어 양산을 써봤다고 했다. 의외의 시원함에 놀랐다며 이제는 여성들의 전유물에서 탈피해도 되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자외선에 취약하고 면역성이 약해서 탈모가 빨리 온다고 한다. 그러니 남자들이 오히려 양산을 더 쓰고 다녀야 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난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우리나라 젊은 남자들도 일본처럼 양산의 편리함과 매력을 알게 된다면 앞다투어 하나씩 장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옛날에는 여름 선물로 부채를 줬다면, 이제는 남성용 양산을 선물해도 좋을 것 같다.
도로는 지열로 뜨거운데 양산 속은 거짓말처럼 선선함을 느끼기까지 하니 신통하지 않을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양산의 효능을 나처럼 경험하게 된다면 양산 예찬론 남자가 될 것이다.이 좋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이래도 체면만 차릴 것인가. 남자들도 과감하게 양산을 쓰고 다닐 것을 권해본다.
몇 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 남자 가이드가 관광버스에 오르내릴 때 항시 손에 우산을 꼭 쥐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때만 해도 직업상 그러는가 보다 예사로 생각했었는데 여름날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비와 햇볕을 동시에 막아줄 수 있는 양산 겸 우산이야말로 안성맞춤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산이나 양산처럼 비도 막아주고 햇볕도 가려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어느 시인은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듯 고마운 양산 같은 삶을 살아가야겠다. 양산만큼의 그늘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