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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64. [역경의 열매] 전종준 (1-11) 수없이 실패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따뜻한 겨울햇살이 눈부신 늦은 오후다. “오늘 약속은 끝났습니다”라는 리셉셔니스트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벌써 6시가 넘었다. 예약 스케줄에 가득 적힌 의뢰인들의 이름들, 파일 캐비닛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질주해 왔던가를 생각했다. 내겐 한국 최초 미 이민법 저자, 최초 미 혼혈인 법안 제출, 최초 탈북자 미 영주권 획득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난 ‘최초’가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고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최선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등’해서 서러운 사람들이라도 ‘최선을 다할 때 남이 하지 않은 최초도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내가 인생을 평탄하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등만 한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시험마다 다 통과해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까지 온 길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실패의 열매이기도 하다. 실패는 도전을 알게 했고, 그 도전은 내게 희망을 배우게 했으며, 그 희망은 좌절로 혹은 기적으로 응답됐다. 정확한 공식이 없는 인생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키워 나가는 일 뿐이었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간섭하심이 부족한 나를 숨기시고 이끌어 주신 것이다. 내가 잘한 게 딱 하나 있다면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 열정의 원동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이 지면을 통해 나처럼 평범하게 2등만 하던 사람도 열심히 도전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이 자랑이 되고, 나의 약함이 강함이 되며, 나의 나눔이 곧 받음이 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계획 안에 있었다.
내가 변호사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어른 중에 변호사이신 전정구 아저씨가 계시다. 서울상대를 나오시고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두 개를 패스하셨다. 국회의원을 지내신 원로 세법변호사였다. 그분이 식구라는 이유만으로 든든해하셨던 어른들의 태도를 보면서 나도 아저씨처럼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아버지를 졸라 종로서점에 갔다. 법률서적을 읽고 미리 공부하고 싶다며 책을 사달라고 하니까 아버지는 공부하겠다는 말만 듣고도 기특하게 생각하시며 책을 사주셨다. 육법전서 중에서 헌법 민법 형법에 관한 책을 샀다. 책을 사던 날 난 이미 변호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대를 가서 공부한 후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 너무 멀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반드시 법대를 간 후에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빨리 변호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을 다 무시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를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나? 가르쳐주는 선생도 없이 육법전서를 읽으며 혼자 이해하는 아주 위험한 공부를 했다. 나의 오만한 생각과 행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순서와 절차를 무시한 행동이 얼마나 큰 수업료를 치르게 했는지 모른다. 계획 없는 행동들은 실패의 서곡에 불과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 [역경의 열매] 전종준 (1) 수없이 실패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역경의 열매] 전종준 (2) 대입예비고사 낙방 후 정신이 번쩍
* [역경의 열매] 전종준 (3) 영어 못해 사법시험 낙방… 오기로 미 유학
* [역경의 열매] 전종준 (4) 대학원 등록위해 토플 550점 네번 도전
* [역경의 열매] 전종준 (5) 미국헌법 과목 낙제 충격에 우울증 증세
* [역경의 열매] 전종준 (6) 미 유학 버팀목 돼 준 크리스에게 프러포즈
* [역경의 열매] 전종준 (7) 미국 변호사 시험 두번 도전 끝 합격
* [역경의 열매] 전종준 (8) 교포사회 돕기 위해 이민법 개선 앞장
* [역경의 열매] 전종준 (9) ‘부당한 비자 거부’ 10년 투쟁 끝 철폐
* [역경의 열매] 전종준 (10) 탈북 여성이 ‘하나님 간증’ 온 몸에 전율
* [역경의 열매] 전종준 (11·끝)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포기를 몰랐다
◇약력=1958년 서울 생, 단국대 법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정치학 석사(M.A.), 산타클라라대학 법학박사(J.D.), 아메리칸대학 국제법석사(LL.M.), 현 워싱턴 로펌 대표변호사
***[역경의 열매] 전종준 (2) 대입예비고사 낙방 후 정신이 번쩍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후에도 수험생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법전을 공부했다. 과외다 학원이다 바쁘게 다니는 친구들이 우스워 보였다. 그러나 예비고사에서 털컥 떨어진 후에야 내가 그동안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비고사에 떨어진 후 명문대는 고사하고 전국 어느 곳에도 입학 원서를 낼 자격이 없었다.
너무 창피해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씨름하고 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성화로 억지로 다녔던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교회 다닌 사람은 반드시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법이다”라고 했던 말씀이 또렷이 기억났다.
“하나님, 저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동안 하나님은 없다며 유아독존에 빠져 기댈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고 잘난 척하고 큰소리쳤던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예수님 사진을 골방에 걸어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부하기 전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매일 밤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면 다시 해낼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1년 후 다시 본 예비고사는 작년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제2차 지망인 지방대 커트라인에 간신히 통과됐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난 전정구 아저씨처럼 멋진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서울 상대에 입학했고 나는 ‘서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대학’(서울상대)에 가게 되었다.
1978년 2월, 고모가 사는 대구에 위치한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복지행정학과에 가기로 결정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 대구로 향했다. 대학 입학식 날, 의례적인 행사에 자리를 채우러 간다는 생각으로 행사장에 갔다. 기대도 흥분도 없이 참석한 입학식장에 무료하게 서 있었는데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단상을 바라보니 키가 자그마한 백발의 총장님 목소리였다. 반은 연설이고 반은 야단을 치듯 말씀을 하고 계셨다.
“남이 안 하는 거 해 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을 맞는 듯, “남이 안 하는 거 해 봐”가 계속 울려 퍼지더니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난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 말씀은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분이 바로 대구대학교 설립자 이영식 목사님이셨다. “그래, 남이 안 하는 걸 해 보자.”
행정학과에 입학해 1학년 첫 학기에 법 과목을 접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혼자 공부하여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었다. 미리 공부했던 법 공부가 효자 노릇을 할 줄이야. 관심 있는 과목들이라 논리적 이해도 빨랐고 집중력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비로소 대학에 와서 난 날개를 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움츠리기만 했던 나의 날개가 활짝 펴지고 있었다.
첫 학기엔 과 수석을 해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열심히만 공부하면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해 봤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너 참 잘 한다’는 칭찬인 것 같다. 부족한 나를 다시 세워 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 학교가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대학에 법학과가 없어 편입을 해야 했다. 단국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편입허가서를 받아들고 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내가 할 수 없었던 공부였다. 이제 하나님과 동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3) 영어 못해 사법시험 낙방… 오기로 미 유학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만 해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려면 반드시 외국어를 선택해야 했다. 외국어에 소질이 없는 난 그래도 중학교 때부터 해온 영어를 하기로 하고 노력했지만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본이 부족한 영어를 법대 시절에도 소홀히 했다. 좋아하는 법률 공부에만 열중하다보니 영어가 문제였다.
대학 3학년 때 처음으로 사법고시 1차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과목 중 하나라도 과락이 있으면 떨어졌다. 그런데 영어에서 과락을 했다. 대입 예비고사 낙방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어떻게 영어를 잡을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영어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어휘력 독해력 문장력 그리고 문장구조의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다. 사법고시 2차 시험은 법 과목만 주관식으로 묻는 시험이기에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가 장애물이 돼 더 이상 나를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정복할 수 없는 영어가 원망스럽고 원수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4학년 때 사법고시 1차 시험에 다시 도전했으나 또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이번엔 졸업 전에 사시를 통과한 친구들이 셋이나 나왔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 나의 앞길을 책임지신다고 하신 하나님, 이제 제가 갈 길은 어디입니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법 공부이지만 영어 때문에 실패를 계속하니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리 절규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친구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법고시를 패스해 사법 연수원생이 되었다. 계속되는 실패에 숨고 싶었다. 그래도 계속 사법고시에 도전하려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친구들이 사법연수원생으로 법조인 훈련을 받을 동안 나는 대학원생이 되어 다시 사법고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 시절, 이른바 ‘대학원 특례법’이란 새로운 제도가 생겼다. 대학원 재학생은 군대를 연기하고 해외 유학을 허용하는 법률이었다. 영어의 관문을 넘지 못하면 내가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 새로운 법을 기회로 삼고 미국 유학을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미국 유학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극약 처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자! 미국으로.”
83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에 있는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떠나올 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안 새겠냐”며 말리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당시 유학은 사법고시에 떨어진 자존심을 조금 회복시켜주는 듯했다.
미국에 도착한 첫 번째 주일 한인 교회에 나갔다. 교민이 많지 않은 오마하는 교회도 무척 작았다.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치 집으로 돌아온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내 영어는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안 되는 ‘콩글리시’에 손짓, 몸짓으로 학교 등록도 하게 됐고,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었다.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뻔뻔할 수 있었다. 말 못하는 나보다는 못 알아듣는 그들이 더 답답할 것이라는 배짱까지 생겼다. 조각조각 단어만 이야기해도 미국 사람들은 퍼즐을 맞추듯이 내 영어를 알아듣고 일을 해결해 주었다. 드디어 영어가 처음으로 가까운 친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4) 대학원 등록위해 토플 550점 네번 도전
학교 공부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반에서 시작했다. 강사는 학생들끼리 서로 질문을 많이 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권했다. 어설픈 영어로 서로 이야기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영어가 조금씩 나아져 갔다. 또 기독학생회에서 운영하는 성경공부 클래스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웠다.
그 무렵 도서실에서 갈색 눈의 크리스를 만났다.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녀는 잘 웃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줍음이 많았던 난 말을 걸지 못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자신의 친구 이사를 도와 달라고 했다. 이삿짐을 다 나르고 처음으로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됐다. 그 후 친구가 됐다. 그녀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 같았다. 학교 리포트 타이핑과 영어발음 교정을 도와주었다. 미국인들은 악센트가 있는 외국인의 말을 들어주는 데 인내가 부족한데 그녀는 베트남 난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 어떤 미국인보다 내 말을 잘 이해했다.
1983년 당시 미국의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토플 점수는 550점이 넘어야 했다. ESL 과정 중에 토플을 통과해야만 가을 학기에 대학원을 갈 수 있었다. 봄 학기 중에 처음으로 토플 시험을 보았는데 500점 근처를 맴돌았다. 한 달 뒤에 다시 응시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가을 학기는 다가오는데 난 아직도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토플 점수를 받지 못해 대학원 정규과정을 등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학교 측은 나에게 특별한 배려로 대학원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토플을 통과하기로 하고 강의를 듣게 허락해 주었다.
난 정치학과에 입학해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려 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내가 하고 싶은 국제법을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학을 공부해 보니 한국에서 공부했던 사회과학 및 법률지식의 바탕으로 이해가 빨랐다. 공부도 재미있었고 도서실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시험을 준비한 탓에 성적도 아주 우수했다. 비록 토플 점수는 낮았어도 학과공부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학기 중 세 번째 토플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점수가 조금 모자랐다. 토플 점수가 550 이상이 안 나오면 지금 잘하고 있는 공부도 소용없을 판이었다. 반드시 가을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토플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온 길이 영어 때문에 또다시 막히게 될 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날 때 공항에 배웅 나왔던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법고시 떨어진 녀석이 유학 가더니 그러면 그렇지”라고 할 것 같았다.
만사를 제치고 지난 토플 기출문제를 하나하나 풀어 가면서 내가 틀린 이유를 분석했다. 반복해서 토플 문제를 풀어보니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이 되며 조금씩 자신이 생겼다.
네 번째 토플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통과하면 나는 가을 학기 성적을 인정받고 다음 학기 등록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따리를 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지?’ 군대를 연기하고 2년 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석사 장교를 지원할 수 있기에 나는 마지막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전에는 공부에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가면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쳐다볼지 걱정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이젠 다 내려놓고 기꺼이 한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창피한 것도 남의 눈치 보는 것도 다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에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토플 시험에 응했다. 드디어 발표 통지를 담은 우편물이 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봉투를 열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5) 미국헌법 과목 낙제 충격에 우울증 증세
주님은 내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네 번째 토플 시험의 결과는 ‘통과’였다. 그날의 기쁨은 ‘나도 할 수 있구나’였다.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지각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감사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 성적도 좋았고 토플도 무난히 통과했으니 전공 분야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나 문과 공부는 영어의 이해가 부족하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또다시 높은 수준의 영어를 요구하는 인문계 학문의 깊이가 새로운 장벽으로 다가왔다.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미국헌법 과목에서 C학점을 받았다. 대학원에서의 C학점은 낙제를 뜻한다. 최소한 B학점은 받아야 통과할 수 있었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 내 몸은 점점 말라갔다. 식욕도 없고 무기력했다. 눈을 감으면 “그러면 그렇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지 않더냐” “저 녀석은 안 된다니까”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대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데,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고 귀에서는 친구들의 비웃음 소리가 나 한 순간도 쉴 수 없습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 누군가 가만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성경 구절을 읽어 주는 듯했다. 그렇다. 나의 힘으로는 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나는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처럼 힘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나의 우울증 증세를 눈치 챈 유학생 부부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인가보다. 마음속에 ‘할 수 없을 것 같다’란 생각을 했을 때는 죽고 싶고 모든 것이 다 의미 없어 보였는데 이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힘이 나고 다 좋게 보였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보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면서 C학점을 준 교수에게 오기가 발동했다. 헌법 교과서와 노트를 무조건 외우고 수업시간에 무조건 말이 되든 안 되든 질문을 해댔다. 나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고 커원 박사는 조금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기특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그 어렵다는 헌법 과목에서 B+학점을 받았다. 우울증으로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갈 뻔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주위의 도움으로 잘 극복해 한 번의 좌절을 넘은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수없이 왕래했던 나의 유학 시절은 승리나 패배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노라면 패배가 부르고 있었고, 패배로 절망하고 있는가 하면 승리가 손짓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즐기시며 훈련시키셨다.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도 중요하지만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주말에는 웨이터를 보조해주는 버스보이(bus boy), 일식집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덧 정치학 석사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논문이었다. 보통 석사학위 논문은 한 학기 안에 마치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했다. 그러나 난 꼭 해야만 했다. 석사 장교로 가기 위해선 마지막 봄 학기에 석사학위 논문을 끝내야만 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6) 미 유학 버팀목 돼 준 크리스에게 프러포즈
1985년 봄, 석사학위를 받고 군복무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 집안 어른들은 나를 보자마자 결혼을 하라고 하셨다. 중매쟁이가 우리 집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미국에서 대학원도 마쳤고 6개월간 석사장교로 군복무만 마치면 다시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근사한 포장 때문에 선 자리가 꽤 많이 들어왔다.
미국에 있는 크리스가 생각났다. 한국으로 떠나올 때 시카고 공항까지 배웅해준 그녀는 작별을 슬퍼하며 계속 울기만 했다. “크리스, 당신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남자는 당신이 아니잖아요.” 난 할 말을 잃고 슬피 우는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힘든 미국 생활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였던 그녀는 늘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용기를 주었으며 삭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항상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희생하고 도왔으며 함께 있는 동안 늘 웃었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어쩌면 난 진작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나는 서양 여자와 결혼한다는 걸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부모님이 좋은 가문의 아가씨와 선을 보라고 하실 때마다 내 귀에는 “그 남자는 당신이 아니잖아요”라는 크리스의 음성이 쟁쟁하게 들렸다.
그건 사랑이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친구 이상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내 마음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군대 가기 하루 전날 밤, 부모님께 미국에서 사귀던 미국 여자가 있는데 결혼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으나 그 다음날 군대 가는 아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셨는지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보거라”고 말씀하셨다. 군대 가면 혹시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기대하셨던 것 같다. 심한 반대에 부딪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나 기뻤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가 다니는 직장으로 그날 밤 전화를 했다. 미국은 낮이었다. 그녀는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하러 일리노이로 잠시 갔다고 했다. 내일이면 입대하는 나는 급한 마음에 전화를 받은 그녀의 직장 상사에게 “크리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으니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내는 내가 자기 보스를 통해 프러포즈를 했다고 놀려대곤 한다.
86년, 크리스와 결혼한 후 캘리포니아에 있는 10개의 로스쿨에 입학원서를 냈다. 입학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한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카페테리아 서빙 일과 식료품 배달, 그리고 주말에는 세탁소 잡일을 했는데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겨우 하루 소득 20달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트럭 한 대에 실린 물건을 옮긴 후, 끼고 있던 가죽장갑이 걸레처럼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던 일이다. 외국인에게 부림 받으며 일하던 이때의 경험들이 아마 이민자들을 돌아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10개 로스쿨 중 입학거절을 당한 곳이 7곳이나 되었고, 2곳은 합격 대기자에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산타클라라 대학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란 단어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목이 메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늘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이루어주시는 주님, 은혜가 넘치옵니다. 주께서 시켜주신 인생수업으로 더 강해지고 더 겸손해지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7) 미국 변호사 시험 두번 도전 끝 합격
미국 로스쿨에서는 판례법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영미법 제도에 입각하나, 한국은 독일과 프랑스 법에 바탕을 둔 대륙법 제도를 택하고 있다. 한국에서 법을 공부했던 난 모두 백지화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법체계를 배웠다. 가장 어렵다고 하는 로스쿨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2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받아 경제적 부담이 많이 줄게 됐다. 로스쿨 3학년 때 국제적십자회의 디렉터이며 국제 공법의 권위자인 지리 토먼 박사가 교환교수로 와서 국제법을 강의했다. 국제법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1990년 5월, 드디어 산타클라라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스쿨을 졸업하기 전 스탠리 쿡(Stanley Cook) 법률사무실에 취업됐지만, 일은 변호사 시험이 끝나는 8월 초부터 정식으로 하기로 했다. 스탠리 쿡 변호사는 캘리포니아 주 부검찰총장을 지내고 미국사회와 한인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변호사였다.
졸업 후 두 달 동안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특강을 들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지난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이 특강을 통해 복습하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한다. 7월 말, 시험장에 일찍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험장소가 바뀌었다면 큰일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험감독이 가끔 빌딩을 헷갈려 하는 응시자가 있어 밖에서 보고 있었다고 했다. 헐레벌떡 뛰어가 겨우 시험 시간에 맞춰 들어간 나는 심장이 뛰고, 머리가 띵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간신히 시험을 치렀다.
변호사 시험이 끝나자 쉴 틈 없이 스탠리 쿡 법률사무소에서 수습변호사로 일하게 됐다.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이민법이었다. 한인 사회가 있는 곳에서는 이민 문제 한두 가지씩 없는 집이 없기 때문에 이민법이 가장 필요한 분야였다. 앞으로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 같았다. 변호사 시험 발표가 나고 자격증만 받으면 끝나는 걸로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다. 시험 보는 날 너무 당황한 탓에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떨어진 것이다. 사무실에 낙방 사실을 말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동료들은 “다시 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그 무렵 아메리칸대학교 로스쿨 입학 허가서가 도착했다. 만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면 입학 허가를 무시했을 텐데 그 상황에선 캘리포니아에 남아 다시 시험에 응시할 것인지, 학교가 있는 워싱턴DC로 갈 것인지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때 아메리칸대 로스쿨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아메리칸대 로스쿨로 가서 국제법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어차피 워싱턴DC로 가야하니 변호사 시험도 그곳에서 보자.”
미국 변호사 시험은 7월과 2월에 치러진다. 2월에 있을 워싱턴DC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시립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했다. 드디어 변호사 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공부 때문에 5년 동안 미루어왔던 아기가 생겼다. 나의 첫 아들 벤자민이 태어난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했다. 현재 돈을 벌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이 공부가 끝나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들지 않았다.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쫓아 열매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음 같이 그 하는 일이다 형통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메리칸대에서 좋아하는 국제법 공부를 하다보니 시간이 빨리 지났다. 1년 만에 국제법 LLM(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국 학위란 모든 것을 다 배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8) 교포사회 돕기 위해 이민법 개선 앞장
워싱턴DC에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햇볕이 들어올 수 있는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서 무슨 업무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했다. 스탠리 쿡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민법을 배웠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엔 돈이 없어 광고를 못해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 곳도 없었던 상태에서 기도하며 이민법 관련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양마켓에서 발행하는 주간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상담 코너가 있는 걸 보고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민법 칼럼을 쓸 수 있다고 하니 편집장은 그렇지 않아도 교포사회에서 가장 관심 있는 이민법 기사를 쓸 수 있는 변호사를 찾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기사를 써주면 원고료 대신 5단반짜리 광고를 무료로 내주겠다고 했다. 비록 작은 주간지였지만 내 사진과 함께 이민법 칼럼이 나가자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1인 3역을 했다. 변호사, 변호사 보조원, 리셉셔니스트의 역할을 했다. 컴퓨터가 없어 중고 타자기를 100달러를 주고 구입해 이민국 양식 서류를 타이핑했고 변호사 편지도 일일이 다 처리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습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됐다. 기도가 끝나면 바로 이민법 기사를 정리했다. 내가 쓰는 글이 지금은 주간지에 실리지만 언젠가 책으로 발간되어 많은 이들의 길잡이가 되길 바랐다. 주간지에 칼럼이 실리면서 전화 상담도 차츰 많아졌고 사무실에 찾아와 사건을 맡기는 클라이언트도 늘기 시작했다. 이민 전문 변호사로 자리 잡게 됐다. 일이 바빠지면서 직원을 채용하고 컴퓨터도 구입해 사무실로서의 모양새를 차차 갖추어 갔다.
1994년 한국 최초의 미 이민법 책 ‘알기 쉬운 미국 새 이민법’을 출간했다. 이민 전문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워싱턴에 유일하게 있었던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민 상담을 하게 됐다. 그 사이 둘째아들 제이슨이 태어났다. 이후 95년 ‘미국은 가깝다’란 이민법 사례집을 출간했다. 이후 ‘공자는 미국에 있다’ ‘당신도 미국에 갈 수 있습니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이전 책도 그랬지만 책의 인세는 모 단체에 기부해 선한 일에 쓰고 있다.
이민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던 중 이민법에 관련된 최초의 인권 이슈가 나타났다. 그것은 주한 미 대사관의 차별적 비자 발급 관행에 대한 시정이었다.
당시 영주권을 신청한 사람은 방문비자(B-2)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통례였다. K씨는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이유로 10년 동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이 돼야 했다. 그때 비이민 비자 신청서를 ‘OF-156’이라 했고, 신청서엔 “노동허가서를 신청한 적이 있습니까?” “이민 청원서를 접수한 적이 있습니까?”란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방문비자를 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 단지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문비자를 거부당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판단돼 액션을 취하기로 했다.
K씨의 방문비자가 거절 된 후 이틀 만에 나는 미 대사관 총영사에게 변호사 공문을 보내 K씨는 방문 후 반드시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미 대사관의 비이민비자과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비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난 법적 근거를 요구했다. 과장은 99년 11월 16일자 공문에 영주권 신청자는 한국과의 ‘극도의 강한 연대(unusually strong ties)’를 밝혀야만 방문비자를 내줄 수 있다고 했다. 이 편지 하나 때문에 난 약 4년 동안 법적 투쟁을 했고 결국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상대로 법정 소송까지 벌이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9) ‘부당한 비자 거부’ 10년 투쟁 끝 철폐
주한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는 가족의 만남을 막는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민법 어디에서도 ‘극도의 강한 연대’를 요구하는 법 조항이 없다. 미 국무부에 이에 대한 법적 의견서를 요청했으나 역시 대사관의 설명만을 되풀이했다.
1년이 지나자 K씨마저 미국 방문을 포기했다. 난 포기할 수 없었다. 변호사비도 받지 않고 주말까지 일하는 나에게 아내는 건강을 생각해 제발 쉬라고 했다. 밤잠을 설쳐 위장병이 재발됐다. 의사는 방치하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2000년 6월 20일, 워싱턴지역 한인회 회장단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언론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 대사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한 모임에서 레인 에번스 미 연방 하원의원을 만났다. 당시 10선 의원이었던 그는 일본군 정신대와 고엽제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인권운동에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주한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에 대한 나의 뜻을 이해하고 국무부에 편지를 보내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답변은 전에 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의 오기는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2001년 7월 10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에번스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다. 에번스 의원의 기조연설 후 내가 부당한 비자 거부에 대한 법적 설명을 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에서는 ‘극도의 강한 연대’에 대한 법적 해석을 회피했다. 마지막 카드로 2002년 4월 15일, 미 국무부의 수장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상대로 워싱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법원은 “국가 행정행위는 재판 관할권을 벗어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난 승복하지 않고 두 번째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K씨가 미 대사관에 방문비자를 신청하니 영주권 신청한 것과 관계없이 방문 비자를 발급해주었다. 4년만의 결과였다. 드디어 2003년,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에번스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20년 이상 행해온 한국인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차별적 비자 발급 관행이 종식됐음을 알렸다. 최근 미 국무부에서는 방문비자 신청서에서 “영주권을 신청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삭제하였다. 이는 10년만의 성과이며, 전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낳았다.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 관행에 시정을 요구하며 벌였던 첫 번째 인권운동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권운동은 피나는 외로운 전투였기에 다시 나서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일간지에서 혼혈인을 돕는 한 사회봉사자의 기고를 읽었다. 한국에서 혼혈인은 학교에서 놀림을 당해 학업을 중도 포기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해 변변한 직업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을 읽는 중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들이 마치 내 아이처럼 느껴졌다.
당시 미국 유학 붐이 일고 있던 터라 나는 학생비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 이민법을 집필 중이었다. 2003년 9월, ‘미국 비자로 미국 유학 쉽게 가기’란 책을 한국에서 발간했다. 책에서 나온 기금을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에게 전달하고 혼혈인 인권 개선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송 목사는 혼혈인 인권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시도했다. 한국에선 비교적 빠른 시간에 혼혈인 인권운동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역법에서 ‘혼혈아’를 ‘혼혈인’으로, ‘혼혈인’ 대신 ‘다문화가족’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또 혼혈인은 군대에 갈 수 없다는 병역법이 개정돼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입대할 수 있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10) 탈북 여성이 ‘하나님 간증’ 온 몸에 전율
한국에서 혼혈인 운동의 장벽을 느끼고 미국에서 잊혀진 아이들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레인 에반스 의원에게 ‘혼혈인 자동시민권 부여 법안’을 상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미국에서 이미 영주권을 가진 혼혈인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차후에 제2의 법안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혼혈인들에게 미국에 올 수 있는 법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4월, 에반스 의원은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5개국 혼혈인 자동시민권 부여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2006년 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에반스 의원의 법률고문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회 초청을 받아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에반스 의원에겐 장거리 여행이 무리였지만 그는 법안통과 경과보고와 한·미 우호간담회 등을 위해 기꺼이 방문해주었다. 그러나 혼혈인 법안은 한국이나 미국 내에서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약 1주일 뒤 슈퍼볼의 MVP 하인스 워드가 혼혈인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에반스 의원은 지병인 파킨슨병으로 은퇴했고 난 2007년 3월, 마이클 미셔드 하원 의원을 통해 사장돼 있던 혼혈인 법안을 미 하원에 재상정했다. 그러나 의회의 냉담한 반응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난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혼혈인 법안을 위해 상·하원 의원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띄우고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 또 하인스 워드가 혼혈인 법안을 지지해 주길 기도해 본다.
인권운동은 단시간에 결과를 얻기 어렵다. 내가 하는 작은 인권운동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로 시작하는 아주 극히 감성적인 면이 많다. 비자 거부 때도 그랬고 혼혈인 문제도 그랬다. 나의 욱하는 감정이 내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면 그때는 아무도 못 말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인으로부터 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들어온 탈북자의 영주권 취득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며칠 후 초췌하고 마른 몸매의 30대 초반 여자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난 일상적인 질문을 하면서 상담을 진행할지 말지 고민했다. 일단 그녀는 돈이 하나도 없어 변호사비는 고사하고 영주권 취득에 따른 접수비며 수속비까지 내주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녀가 목숨을 건 탈북 과정을 이야기하는 중 갑자기 간증을 했다. 그녀는 지난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맥을 못 추는 단어인 ‘하나님’이 그녀 입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그건 하나님이 나에게 이 여자를 도우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다.
탈북자는 심각한 식량난과 경제적 곤란 때문에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의 난민은 미국 이미법상 난민 지위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2004년 10월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의해 경제적 이유로 북한을 탈출한 사람에게도 난민 자격을 부여해 미국 입국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이 북한인권법에 의거해 그녀가 미국에 난민 지위로 입국한 1년 후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탈북자였던 김미자씨는 1년 만인 2008년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북한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 가운데 첫 영주권 취득자가 됐다.
당시 한국 언론에선 탈북자 첫 영주권 발급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전 세계 미디어가 보도했다. 더 놀라운 사건은 보도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인권법이 극적으로 4년 더 연장된 것이다. 북한 인권법은 2004년 10월부터 2008년 9월 30일까지 유효한 한시 인권법안이었다. 2008년 9월 초만 해도 북한인권법의 연장이 어려울 것이란 추측이 만발했다. 그러나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잊혀진 탈북자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었기에 북한인권법 연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모든 것은 우리의 뜻이나 생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역경의 열매] 전종준 (11·끝)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포기를 몰랐다
워싱턴에서 약 20년간 이민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클라이언트들이 이민문제뿐 아니라 다른 문제로도 고통받는 것을 많이 본다. 그들은 “전 변호사님이 제 일을 다 알아서 처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자주 말한다. 미국 변호사들은 당장 언어 소통의 문제가 있어 통역을 대동해야 하니, 일 처리 시간과 경비가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문제만 갖고도 일이 많았던 나는 계속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한번은 내 클라이언트가 다른 법적 문제가 생겨 추방을 당할 수도 있어 다른 변호사와 연결이 시급한데 그 변호사는 마침 휴가 중이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태울 때 머릿속에서 “로펌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이민 케이스에만 열중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클라이언트에게 이민 외에 또 다른 법률문제가 생겨 다른 법률사무실과 일하게 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로펌을 열려고 몇몇 변호사들을 만나 보았는데, 만나는 변호사들마다 반대를 하네요. 그들은 로펌의 어려운 이야기만 해주면서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편하고 돈도 더 버는 거라며 극구 말리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듣더니 어차피 교포들을 위해 시작하려 하고 그들의 아픔과 힘든 것을 나누려 한다면 쉬운 일만 일어나고, 좋은 일만 일어나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꼭 로펌을 해야 한다면 전 변호사가 먼저 그 장을 열어 보라”고 말하면서 더 기도해 보라고 했다.
그날부터 열심히 기도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나에게 좌절과 실망 속에서도 응답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셨던 주님께 남은 길을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누군가 로펌을 열어야 한다면 그 장을 전 변호사가 열어 보라’고 한 지인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이것이 응답이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들을 통해 응답하시는 걸 난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 로펌을 통해 약한 자를 돕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자.’ 변호사가 되어 편하게 정착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받은 은혜를 나눠 주라”며 내 등을 떠미셨다.
‘워싱턴 로펌’을 열고 보니 예상했던 대로 민사, 형사 그리고 이혼 문제가 많았다.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었다면 부부가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만 더 사랑을 보여 주었으면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희생했으면 모두가 편안했을 텐데 후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로펌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내가 이제 비로소 교포들의 아픈 곳을 만져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호사로서 경륜이 오래될수록 난 사건의 판단을 함부로 내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나의 법조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예견하지 못한 결과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케이스를 진행하다 보면 인간의 법으로 절대 불가능한 데도 어떤 때는 통과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놀라기도 한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법이 과연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예상하지 못한 것을 예상하라’가 내 변호사 생활의 모토이다. 처음에는 잘못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세운 모토였다. 그러나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것을 예상하라’에는 실수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축복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젠 예상하지 못한 축복이 항상 함께할 것을 믿으면서 미리 감사하고 미리 기뻐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에 반대말은 없다’는 것이다.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었고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거라는 걸 알았다. 나 역시 실패하지 않았으면 성공을 몰랐을 것이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감사를 몰랐을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내 인생 여정이 나를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