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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홍릉(洪陵)
정의
조선 고종황제와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
개설
고종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함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1866년(고종 3)에는 민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 뒤 1895년(고종 32)에 이른바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되었는데,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 장사를 치르지는 못했다. 1897년(고종 34) 1월에서야 왕비의 시호를 명성, 능호를 홍릉으로 정하였다. 그해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연호는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에 따라 명성왕후 역시 황후로 추존되었고, 그해 11월에 양주군에 안장되었다. 10년 뒤인 1907년(융희 1)에 순종에게 황위를 넘긴 고종은 1919년에 승하하여, 양주 금곡(金谷)에 명성황후와 합장되었다.
조성 경위
명성황후의 능은 맨 처음 1895년 11월 16일에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정자각에 사용할 대들보를 구하면서 조성이 시작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동구릉 내에 정자각과 비각, 재실 등을 완공했으나, 그해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국장을 연기하게 되었다. 1897년(고종 34) 2월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해 11월 기존 산릉 터를 포기하고 새로 청량리에 조성된 홍릉에 명성황후를 예장하였다.
이후 홍릉의 자리가 좋지 못하다는 논의에 따라 홍릉을 옮기기 위해 천릉도감(遷陵都監)과 산릉도감을 설치하였고, 1900년(광무 4)에 새 능지를 현재의 위치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효정왕후(孝定王后)와 순명(純明) 황태자비의 장례, 경운궁 화재 등을 거치면서 연기되었고, 결국 1904년(광무 8)에 두 도감이 철폐되면서 천릉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21일에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명성황후의 재궁을 옮겨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마련한 홍릉에 합장하였다.
조성 상황
홍릉 천릉이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1900년에 새 산릉 터를 정한 뒤부터 1904년까지 산릉의 조성이 이미 진행되었던 상태였다. 침전·비각·안향청·내재실·어재실·예재실·각감청·상선 처소·나인 처소 등이 이때에 조성된 것이다. 결국 이 건물들은 1919년 고종의 국장 때 쓰이게 된다. 『매일신보』 1919년 1월 28일자의 ‘금곡어묘소(金谷御墓所)의 배치(配置)’를 보면 당시의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침전, 비각, 내재실, 어재실이 있다. 이는 현재의 홍릉 배치와도 같다.
홍릉은 동원(同園) 합장릉(合葬陵)으로, 능침 뒤로 3면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반구형의 봉분과 화문(花紋)이 조각된 12면의 병풍석을 두었다. 침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인데, 당시의 도설(圖說)은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高宗太皇帝山陵主監儀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대 기단을 네벌대로 놓고 박석을 깔았다. 침전 왼쪽에는 비각을 두었고, 침전과 홍살문 사이에 수복방과 수라간을 배치하였다.
변천
홍릉이 왕릉에서 황제릉으로 바뀌면서 정자각이 침전으로 대체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1897년 2월 25일 기록을 보면, 기존 왕릉의 일반적인 정자각은 정전과 배위청(拜位廳)을 합해 8칸 혹은 5칸 규모였는데, 이번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거하여 침전으로 일컫고 규모는 5칸으로 정하며, 배위청의 역할을 침전 내에 두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고종은 1897년에 명나라의 능제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중국공사로 북경에 있던 박제순(朴齊純)이 명나라 제왕의 능침 제도를 도사(圖寫)하여 보내오자, 그것을 참고하여 규모를 정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침전으로의 변모 및 십이간지석과 문무인석 등을 능침 위에 세우지 않고 침전 앞에 세우는 등의 변화는 황제릉의 격을 갖추려는 고종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高宗太皇帝山陵主監儀軌)』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明成皇后洪陵山陵都監儀軌)』
『매일신보』, 1919년 1월 28일.
홍릉(弘陵)
정의
조선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능.
개설
홍릉은 도성 북쪽의 길지로 널리 알려진,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과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능인 익릉(翼陵) 곁에 마련되었다. 당초에 영조는 자신의 사후를 염두에 두고 혈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 놓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함께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원릉(元陵)에 안장되었다. 그에 따라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지금도 빈 채로 남아 있다. 홍릉의 석물이나 정자각 등은 왕실의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하라는 영조의 명에 따라 이전에 비해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조성 경위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704년(숙종 30)에 13세의 나이로 연잉군(延礽君)과 혼인하였다. 숙종과 숙빈최씨(淑嬪崔氏)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은 이때 두 살 아래인 11세였다. 그 뒤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이 되었으며, 1724년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은 50년 이상을 해로하였으나, 1757년(영조 33) 2월 15일에 왕비가 66세의 나이로 먼저 승하하였다. 이에 엿새 뒤인 2월 21일에 시호를 정성(貞聖), 능호를 홍릉이라 하였다.
영조는 왕비의 죽음을 애통해했으며, 친히 왕비의 행장을 지었다[『영조실록』 33년 3월 12일]. 산릉 터는 명릉과 익릉 곁의 을좌신향(乙坐辛向) 즉 서향으로 정하였다. 산릉 공역이 시작되자 영조는 친히 명을 내려 혈 자리 조금 왼쪽에 치우치게 해서 왕비의 무덤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그 오른쪽에 묻히려는 의도였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영조는 자신의 혈 자리에 십자(十字) 표시를 한 돌을 묻도록 했다[『영조실록』 33년 5월 13일]. 정성왕후는 승하한 지 약 4개월 만인 6월 4일에 안장되었다[『영조실록』 33년 6월 4일].
홍릉은 명릉과 익릉 곁에 조성되었는데, 그 북쪽 골짜기 너머에는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이 있고 남쪽에는 세조의 아들이자 사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능인 경릉(敬陵)이 있다. 그래서 홍릉이 조성된 이후부터는 이 5개의 능을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조성 상황
홍릉이 자리 잡은 곳은 조선초기부터 왕릉이 들어선, 이름난 길지였다. 18세기 초에는 숙종과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 조성되었으며, 언덕 너머에는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이 있었다. 영조가 이곳에 홍릉을 조성한 것은 자신의 부친인 숙종과 모후 인경왕후, 그리고 생모인 숙빈최씨의 무덤을 가까이에 두어 후대의 왕들이 이곳을 두루 참배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조가 처음 홍릉에 전배한 것은 이듬해인 1758년(영조 34) 1월 26일이었는데, 봉심·작헌례·재배례 등을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소령원에도 들렀다. 이후 영조는 여러 차례 친제를 행하였으며, 그때마다 명릉, 익릉 및 소령원에도 나아가 절을 올렸다.
영조는 왕실의 상례가 조선초기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며, 아울러 제사 의절을 간소화하려 하였다[『영조실록』 33년 8월 10일]. 그래서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1758년(영조 34)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하였다. 그런데 홍릉은 바로 그 전해인 1757년(영조 33)에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홍릉 조성을 담당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提調)는 다름 아닌 홍계희였다. 따라서 홍릉은 영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각종 석물은 이전에 비해 크기를 줄였으며,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정자각의 경우, 대신들이 인근에 위치한 명릉과 익릉처럼 정전 3칸과 좌우 익각(翼閣), 배위청 3칸 등 총 8칸 규모로 건립할 것을 청하였으나, 창릉의 예를 따라 5칸으로 조성하게 하였다. 또한 당초 영조의 사후에 쌍릉으로 조성할 것을 염두에 둔 까닭에 곡장을 넓게 설치하고, 양석(羊石), 호석(虎石)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도 모두 넓게 배치하였다.
변천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홍릉에 능을 마련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곧 소령원 부근 등 다른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국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동쪽의 옛 영릉 자리로 결정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 영조 자신이 준비해 둔 자리를 택하지 않고 다른 곳에 능을 조성한 것은 당시에 생존해 있던 정순왕후의 존재를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순왕후는 1805년(순조 5) 승하한 뒤 영조와 함께 원릉에 묻혔다. 그 결과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빈자리로 남았다.
홍릉은 애초 계획과 달리 정성왕후 한 사람만 안장되었으나, 같은 권역에 명릉, 익릉 등이 있어서 서오릉으로 불리며 이후 왕들이 자주 참배하는 능이 되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세 차례 이상 홍릉을 참배했으며, 그 뒤 순조, 철종, 고종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서오릉에는 조선시대에 모두 5개의 능과,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묘인 순창원(順昌園)이 있다.
관련 사항
홍릉을 포함한 서오릉은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20세기에는 몇 개의 능원이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1969년에는 경종의 생모 장희빈(張禧嬪)의 묘인 대빈묘(大嬪墓)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고, 1970년에는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던 수경원(綏慶園)이 옮겨졌다.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이다.
참고문헌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정성왕후]산릉도감의궤([貞聖王后]山陵都監儀軌)』
『홍릉지(弘陵志)』
화소(火巢)
정의
능(陵)·원(園)·묘(墓)의 산불을 막기 위해 해자(垓子) 밖의 초목을 불사른 곳.
내용
화소(火巢)는 해당 능원의 영역 표시가 된다. 그래서 그 안에 투장(偸葬)하면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죄를 묻고 기한을 정하여 파서 옮겨야 한다. 화소외안(火巢外案)은 화소의 바깥 안산(案山)을 말한다.
1786년(정조 10) 6월 26일에 묘소도감(墓所都監)이 화소의 경계를 정하는 일로 “고양군수(高陽郡守)유증양(柳曾養)이 형지(形止)를 간심(看審)한 뒤에 도감에서 군정(軍丁)을 지급하여 해자(垓子)를 팔 것입니다. 바깥 화소의 안이라 하더라도 백성의 가사(家舍) 및 평전(平田)으로서 묘소에 크게 관계되지 않는 경우는 예전대로 머물러 살면서 농사를 지어먹도록 하겠습니다. 내룡(來龍)의 협맥(脥脈)으로서 수목(樹木)을 기르지 않을 수 없는 곳을 뽑아내 척량(尺量)하니, 산전(山田)이 1결(結) 25부(負) 9속(束)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값을 지급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용례
辛卯 憲府啓曰 京居常漢李尙華 偸葬翼陵火巢內 請令攸司依律科罪, 刻期掘移[『숙종실록』 23년 7월 13일]
참고문헌
『홍재전서(弘齋全書)』
효릉(孝陵)
정의
조선 인종과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의 능.
개설
효릉은 인종의 유교에 따라 그의 부모인 중종과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정릉(靖陵) 곁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침이 천봉되어, 오늘날 효릉 곁에는 장경왕후의 희릉(禧陵)만 남아 있다.
조성 경위
인종은 1545년(인종 1) 7월 1일에 승하하였는데, 그 전해에 승하한 부왕 중종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효를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부모의 곁에 묻어 줄 것과 상장(喪葬)에 관한 것은 모두 소박하게 하라는 유교를 남겼다. 이 같은 인종의 유교는 인성왕후를 통해 언문(諺文)으로 승정원(承政院)에 전달되었다. 또 인종의 유교에 덧붙여 인성왕후 자신 또한 인종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였다.
인종의 뜻에 따라 산릉 터를 고를 때 가장 먼저 고양에 자리한 정릉 부근을 살펴보았다. 정릉의 백호(白虎) 언덕 너머에 있는 간목산(艮木山)이 형세가 좋으므로 그곳을 능지로 정하고[『명종실록』 즉위년 7월 11일], 능침을 조성하여 10월 15일에 장사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 11월 19일에는 인성왕후가 승하하였는데, 역시 왕후의 뜻에 따라 효릉에 동원(同原)으로 능침을 조성하고 이듬해 2월 15일에 안장하였다. 그해 10월에 수리 공사가 있었는데,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산릉 공역에 신중치 못한 부분이 많아 노수신(盧守愼)을 총호사(總護使)로 임명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1년 10월 1일]. 이때 인종의 봉분 주변에만 병풍석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성 상황
인종의 능에는 병풍석을 두었으며, 두 능을 함께 묶어 난간석을 둘렀다. 두 능침 주변으로 동·서·북 삼면을 두르는 곡장(曲墻)을 설치하였고 혼유석은 각각 1개씩 봉분 앞에 두었으며, 중앙에 장명등 1좌와 좌우 망주석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합설하여 1쌍씩 배치하였고, 마석과 호석을 2쌍씩 두었다.
능침 아래 49보 즈음에는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 규모의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 효릉의 정자각은 원래 좌우에 익각(翼閣)을 갖춘 5칸 규모의 정전과 배위청 3칸으로 이루어진 총 8칸의 건물이었으나, 좌우 익각이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총 6칸만 남아 있다. 또 정자각 아래 서쪽에는 수라간 2칸, 동쪽에는 수복방 2칸이 있었으나,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정자각 남쪽에는 홍살문이, 동쪽에는 1753년(영조 29)에 세운 표석과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있다. 영조 연간에 비(碑)와 비각을 갖추지 않은 능소에 비를 세우는 공역이 대거 진행되었다. 1753년 1월에 11일에 도감을 설치하고 효릉 외에 장릉(章陵)·강릉(康陵)·태릉(泰陵)·희릉의 공역과 함께 이루어졌다[『영조실록』 29년 1월 11일]. 『효릉지(孝陵誌)』에는 당시의 건물 배치가 간가도(間架圖)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실에 대한 기록은 『춘관통고(春官通考)』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살문 서쪽으로 약 90보 거리에 10칸 규모의 전사청을 두었고, 그 옆에는 2칸의 제기고를 조성하였다. 또 전사청 서쪽에는 재실 4칸과 안향청 7칸을 두었으며, 그 남쪽에 연지(蓮池)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효릉지(孝陵誌)』「정자각도(丁字閣圖)」(규장각 奎1655)
신지혜, 「왕실상장례에서 대비의 역할 변화」, 『藏書閣』26, 2011.
효정묘(孝章廟)
정의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제향하기 위한 사묘(祀廟).
개설
진종(眞宗)으로 추존된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우(祠宇)이다.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彰義宮) 내에 건립되었으나 정조 때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으로 추존되어 종묘에 신위를 봉안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위치 및 용도
효장세자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기 위한 곳이다. 현재 경복궁의 서쪽 통의동에 있었던 영조의 잠저 창의궁 내에 있었다.
변천 및 현황
효장묘에 신위가 봉안된 효장세자는 1719년(숙종 43)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4년(영조 즉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영조실록』 즉위년 11월 3일] 다음 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영조실록』 1년 2월 25일].
1726년(영조 2)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와 가례를 올렸으나[『영조실록』 3년 8월 28일],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훙서했다[『영조실록』 4년 11월 16일].
훗날 영조에 의해 이복동생 장조(莊祖)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에 추존되었다. 시호(諡號)는 효장(孝章)이다. 1908년(융희 2) 순종 때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순종실록』 1년 5월 11일].
1729년(영조 5) 효장세자의 대상(大祥)이 끝나고 신위를 봉안할 사묘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이 동궁(東宮)에 속한 것이니 사세가 편할 것이라 하여 그곳에 건립하기로 결정되었다. 1730년(영조 6) 에 사우(祠宇)가 완성되었다[『영조실록』 6년 6월 19일]. 정조 때 종묘에 부묘하면서 효장묘의 기능은 없어졌다.
형태
효장묘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를 통해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
효창원(孝昌園)
정의
조선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
개설
문효세자는 1782년(정조 6) 9월에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784년(정조 8) 8월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세의 나이에 병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 자리인 고양 율목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44년 10월 9일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조성 경위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문효(文孝)로 정하였다[『정조실록』 10년 5월 22일]. 묘의 위치는 명종의 능인 강릉(康陵)이나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의 국내(局內)가 거론되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고양 율목동으로 결정하였다.
묘호(廟號)는 문희(文禧), 묘호(墓號)는 효창(孝昌)으로 정하였으며[『정조실록』 10년 6월 20일], 윤7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 정조는 친히 비명(碑銘)과 정자각의 상량문을 지어 내렸다.
조성 상황
묘의 조성을 담당하는 묘소도감(墓所都監)의 도제조(都提調)는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명선(徐明善)이 맡았다. 당초 1752년(영조 28)에 조성한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를 참조하려 했으나, 정조는 굳이 치수를 정하지 말고 준비되어 있는 재료를 써서 검소하게 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정자각의 크기도 의소묘보다 작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기록된 석물과 정자각의 크기를 살펴보면, 의소묘에 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설은 곡장 안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망주석을 배치하고,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馬石)을 설치하였다. 정자각은 정전 3칸 전면에 배위청 2칸이 달려 있는 ‘정(丁)’ 자 모양으로 건립했으며, 비각과 신도비각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변천
1879년(고종 16)에는 세자와 세손의 묘에 전배하는 의절을 높이고, ‘묘(墓)’를 ‘원(園)’으로 격상시켰다. 그에 따라 효창묘도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일제강점기인 1944년 효창원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석물은 유지되었으나 정면에 배위청이 있었던 정자각이 일자형으로 변형되었다. 서삼릉으로 옮긴 뒤 원래 효창원 일대는 효창공원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에는 이곳에 김구, 이동녕, 이봉창, 차이석, 윤봉길, 종성환, 안중근의 묘를 모셨다.
관련 사항
문효세자의 장례를 치른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효창묘의 왼쪽 등성이에 안장하였다[『정조실록』 10년 9월 14일][『정조실록』 10년 11월 20일]. 의빈묘는 원래 효창원과의 거리가 100보가 채 되지 않는 가까운 위치에 조성되었다.
의빈묘의 상설로는 곡장, 혼유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표석, 제각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삼릉으로 이장된 곳에는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라고 쓰인 표석과 혼유석만 남아 있다. 효창원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는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와 그 딸인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가 있었다[『순조실록』 29년 4월 20일].
참고문헌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후릉(厚陵)
정의
조선 정종과 비 정안왕후(定安王后)김씨(金氏)의 능.
개설
후릉은 시신을 모시는 현궁이 석실로 된 쌍릉이다. 석실로 만들고 그 위에 각각의 봉분을 얹은 쌍릉이다. 오늘날의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백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능직(陵直)과 권무(權務) 2명, 수호군(守護軍) 40호를 두었으며, 호마다 밭 2결을 주어 관리하게 하였다.
조성 경위
1412년(태종 12)에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송경(松京) 해풍군(海豐郡)백마산 기슭에 안장하고 능호를 후릉이라 하였다. 산릉의 공역은 조선초기에 왕실 공역을 주로 담당했던 박자청(朴子靑)이 맡아보았다.
정종은 산릉 조성 후 정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의 서쪽에 있던 흥교사(興敎寺)를 혁파하지 않고 재궁으로 삼았으며 선종(禪宗)에 붙여 밭 250결을 주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정종이 승하하였는데, 합장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영역(瑩域)의 흙을 바꾸고 함께 묻어 쌍분을 조성했다.
조성 상황
후릉은 조선초기의 풍습에 따라 석실로 조성되었다. 정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쌍분을 만들고 주변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세웠다. 봉분 맨 앞쪽 상단 계체석(階砌石)에는 혼유석 2기와 양석 및 호석을 번갈아 배치하였다. 중계(中階)에는 석등 2기, 문인석 2쌍과 마석 2쌍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 2쌍과 마석 2쌍을 두었고, 중계와 하계의 동서에 각각 작은 돌층계를 설치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왕릉은 봉토분이므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봉분이 내려앉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왕실에서는 정기적으로 능상(陵上)을 보수했는데, 이는 후릉도 다르지 않았다. 능상을 보수한 일 외에 후릉의 개수(改修)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먼저 1544년(중종 39)에 화재로 불타 버린 정자각을 다시 지었다. 1666년(현종 7)에는 봉분과 석물의 개수를 논의했으나[『현종실록』 7년 10월 26일], 봉분 내에 문제가 있으면 공역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상석(象石) 및 석물만 보수하였다. 마지막으로 1755년(영조 31)에는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이전의 왕릉과 더불어 비석과 비각이 세워졌다.
후릉은 북한에 있어서 오늘날의 모습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가보고 싶은 왕릉과 그 기록-풀어쓴 후릉수개도감의궤』에 따르면, 봉분과 상설(象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정자각은 초석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한다.
관련 사항
후릉은 왕릉 중에서 석물이 가장 간략하다는 이유에서, 1698년(숙종 24) 노산군(魯山君)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그 묘를 장릉(莊陵)이라 하여 다시 조성할 때 그 의절(儀節)의 예가 되었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가보고 싶은 왕릉과 그 기록-풀어쓴 후릉수개도감의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휘경원(徽慶園)
정의
조선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묘.
개설
정조의 후궁인 가순궁(嘉順宮) 수빈박씨는 순조의 생모이다. 1787년(정조 11)에 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2년(순조 22) 12월 26일에 창덕궁보경당(寶慶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원호(園號)를 ‘휘경’, 시호를 현목(顯穆)으로 정하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해당하는 양주배봉산(拜峯山) 아래 옛 영우원(永祐園) 자리 왼쪽에 장사하였다[『순조실록』 23년 2월 3일].
그 뒤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릉하면서 수릉과 휘경원이 풍수상 좋지 않음이 거론되어 휘경원을 순강원(順康園) 오른쪽으로 옮겼고, 1863년(철종 14)에는 다시 광릉(光陵) 근처로 천장하였다.
조성 경위
1822년(순조 22) 12월 26일에 수빈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흘 뒤인 12월 29일에 원호를 ‘휘경’으로 정하였다. 그 뒤 관상감에 명하여 묘 자리를 물색했는데, 화성(華城)의 옛 향교 터는 좌향이 맞지 않았다. 그밖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禧陵) 터, 양주배봉산, 공덕리(孔德里)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었는데, 민가가 많은 공덕리 대신 민가의 수효가 많지 않은 배봉산으로 결정하였다[『순조실록』 23년 1월 19일].
조성 상황
1823년(순종 23) 초장시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영우원이 있던 자리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는데,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개칭하고 천장하면서 묻어 둔 석물을 다듬어 사용하였다. 그 뒤 1855년(철종 6)에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묘인 순강원 오른쪽으로 옮겼다.
1차 천봉할 때에는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 표석은 구 표석을 갈아 천봉 내용을 적었으며, 석물과 정자각은 새로 제작하지 않고 옮겨 설치했다. 1863년(철종 14)에 터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2차로 세조의 능인 광릉 인근의 양주 달마동에 천봉하여 임좌병향으로 예장하였다. 총호사(摠護使)는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좌근이 맡았고, 1차 천봉 때와 마찬가지로 석물과 정자각을 새로 짓지 않고 옮겨 사용했다.
현재 휘경원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으며 문인석, 마석,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양석과 호석이 2쌍씩,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변천
고종대에 세자나 세손의 묘를 ‘원(園)’으로 승격시키고, 그에 속한 관원의 명칭을 정비할 때 그중 휘경원의 영(令)과 참봉(參奉)은 모두 수봉관으로 삼되, 한 자리는 참하(參下)의 문관을 차출하여 30삭이 차면 6품직으로 올리며, 한 자리는 종친부에서 30세 이상인 선파인(璿派人)을 선임하여 순차에 따라 다른 벼슬에 승급시키도록 하였다[『고종실록』 7년 12월 13일]. 한편 1901년(광무 5) 수빈박씨를 수비(綏妃)로 높였다[『고종실록』 38년 10월 11일].
관련 사항
1907년(융희 1)에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묘를 수빈박씨의 묘가 있던 휘경원 경내 서쪽 기슭에 손좌(巽坐)로 정하였다[『고종실록』 44년 6월 10일]. 이때 묘의 명칭도 수빈박씨의 원호(園號)를 그대로 사용하여 휘경원이라 불렀다. 경빈김씨의 묘는 1949년 7월 6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의 귀인, 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현목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휘경원천봉도감의궤(徽慶園遷奉都監儀軌)』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휘릉(徽陵)
정의
조선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조씨(趙氏)의 능.
개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 인조와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고, 1651년(효종 2)에는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효종 10)에는 효종이 승하하고, 이어 1674년(현종 15)에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그 복식이 문제가 되어 예송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688년(숙종 14)에 승하하였는데, 경기도양주군에 자리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옆 유좌(酉坐)의 언덕에 묻혔다.
조성 경위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 8월 26일, 창경궁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하였다. 문정전(文政殿)에 빈전과 혼전을 차렸고, 산릉은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 옆으로 결정하였다. 장렬왕후의 산릉을 이곳으로 정한 것은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에는 이미 원비인 인렬왕후(仁烈王后)가 합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각 능의 국내(局內)를 살핀 끝에 건원릉 옆 유좌묘향(酉坐卯向)의 길지를 선택하였고, 그해 12월에 발인하여 국장을 치렀다[『숙종실록』 14년 12월 16일].
조성 상황
휘릉의 현궁(玄宮)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은 봉분을 만들어 난간석을 둘렀으며,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두었다. 봉분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정전(正殿) 3칸에 좌우 익각(翼閣), 배위청(拜位廳) 3칸으로 이루어진 8칸 규모로 조성되었다.
변천
휘릉의 정자각은 1762년(영조 38)에 처음 중수되었다. 이어 1770년(영조 46)에 새로 사초(莎草)하고 곡장이 무너진 것을 수리하였으며, 1793년(정조 17)에 다시 한 번 정자각을 수리했다. 1865년(고종 2)에는 여름 폭우로 여러 능이 사초가 내려앉고 곡장이 무너지는 등의 해를 입었는데, 이때 휘릉의 곡장도 무너져 개수하였다.
또한 1879년(고종 16)에는 동구릉에 속한 모든 능의 비각과 정자각을 수리하였다. 1897년(고종 34)에는 5월 20일 새벽에 화재로 휘릉의 정자각이 타 버리자,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이우면(李愚冕)과 조정희(趙定熙)를 중건청(重建廳)의 당상으로 삼아 중건 공사를 진행했다[『고종실록』 34년 10월 31일]. 상량문(上樑文)은 홍문관(弘文館) 태학사(太學士)김영수(金永壽)가 지어 올렸다.
관련 사항
휘릉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희릉(禧陵)
정의
조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장경왕후는 중종의 제1계비(繼妃)로,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에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이듬해 단경왕후(端敬王后)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뒷날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는데, 광주(廣州)에 있는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하였다. 그 뒤 희릉의 입지가 불길하다는 김안로(金安老)의 주장에 따라 1537년(중종 32)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성 경위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경릉(敬陵)과 헌릉 부근이 산릉의 물망에 올랐다. 중종은 자신이 죽은 뒤 합장하여도 봉분은 쌍분으로 할 것을 염두에 두어 터를 골랐는데, 그 결과 헌릉 서쪽 언덕이 능지(陵地)로 결정되었다. 현궁(玄宮)의 자리를 잡고 땅을 파 내려가던 중 큰 돌이 깊이 박혀 있어 파낼 수 없게 되자,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겨 희릉을 조성했다.
그런데 희릉이 한강 건너 광주 땅에 조성됨에 따라 발인일이 문제가 되었다. 3개월 만에 발인할 경우에는 길일이 없고, 5개월 만에 발인할 경우 장마로 길이 진창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발인일을 2개월 만인 윤4월로 정하여 국장을 진행하였다.
조성 상황
희릉의 현궁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은 봉분을 만들어 난간석을 둘렀으며,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호석과 양석 각 4개씩을 배치하였다. 봉분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두었다. 맞배지붕으로 된 정자각은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1515년 산릉 공역 당시에 희릉의 터가 왕릉으로 삼기에는 불길하다는 소문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경왕후를 그대로 그곳에 예장했다. 그러나 아들 김희(金禧)를 부마로 들인 김안로가 1537년(중종 32)에, 희릉의 입지가 불길하니 당시 능 조성에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하고 능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희릉을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 안으로 옮겼다. 더불어 희릉의 조성을 담당했던 김안로의 정적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희릉의 곁에 능침을 만들고 두 능을 합하여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중종의 능은 1562년(명종 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 곁으로 천장되었고,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만 남게 되었다.
관련 사항
희릉은 서삼릉의 하나로 효릉(孝陵), 예릉(睿陵)과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가정당(嘉靖堂)
정의
덕수궁 석어당 북쪽에 위치한 목조 건물.
개설
1896년(고종 33)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慶運宮) 수리를 명하였고, 1897년(광무 1)에 경운궁으로 임어하였다. 1896년 당시에는 오로지 즉조당(卽阼堂) 하나뿐이었으나, 이후 왕이 거처할 수 있는 건물이 생겨났다. 이때 정전으로 활용되던 즉조당 동쪽에 침전 건물로 중층의 석어당(昔御堂)이 있었고, 그 북쪽에 가정당(嘉靖堂)이 건립되었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의 함녕전(咸寧殿)에서 화재가 일어나 즉조당과 석어당을 비롯하여 영복당(永福堂)·함희당(咸喜堂)·함유재(咸有齋) 등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가정당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여 빈전(殯殿) 의례를 행할 때에 고종의 재궁(梓宮)에 덮을 명정을 다시 쓰는 개명정(改銘旌) 의례를 가정당에서 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1907년(융희 1)~1910년(융희 4)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를 살펴보면, 가정당은 즉조당의 동쪽에 위치하는 석어당 뒷마당에 자리하였다. 가정당의 용도는 명확하지 않으나, 침전 뒷마당에 있는 작은 건물로 왕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창덕궁의 정침인 대조전 후원에도 가정당이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 기록은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이왕직(李王職)에서 수만 원의 건축비를 들여 창덕궁 내 후원에 건립하였는데, 왕과 왕비가 재미있게 소풍할 집으로, 그 이름을 가정당이라 하였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가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1925년에 창덕궁에 건립한 가정당은 덕수궁의 가정당을 옮겨지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덕수궁의 석어당 뒷마당에 있는 가정당의 용도도 창덕궁의 가정당과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변천 및 현황
1896년에 경운궁에 여러 전각을 건립할 때 석어당과 함께 건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04년에 경운궁의 대규모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1919년에 고종의 장례 때까지 활용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출간된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京城府都市計劃調査書)』에 수록된 항공사진에서는 가정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각감청(閣監廳)
정의
조선후기에 왕의 초상화, 어필, 인장 등을 봉안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잡직 관서의 궁궐 내 청사.
개설
각감청(閣監廳)은 잡직 관원인 각감(閣監)이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御筆), 어제(御製), 왕실 족보, 새보(璽寶), 인장(印章), 보감(寶鑑) 등을 봉안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위치 및 용도
각감청은 경복궁 북쪽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의 장안당(長安堂)과 집옥재(集玉齋), 보현당(寶賢堂) 일원의 사이에 있었으며,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 등에 약 60칸으로 묘사되었다. 창덕궁에도 규장각(奎章閣) 소속의 각감청이 있었다.
형태
경복궁 내 건청궁의 장안당 서쪽에 있는 각감청은 남북으로 연이은 2개의 직사각형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대부분의 공간은 창고였다. 북쪽 마당 주변으로는 거의 창고이고 남쪽 마당 주변의 건물에는 청(廳), 방(房) 등이 배치되었다. 전체 60칸 정도이다. 각 마당으로 진입하는 일각문은 모두 동쪽으로 나 있어 건청궁과의 공간적 연계성이 높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5년(고종 32) 8월의 을미사변 때 김홍집(金弘集), 정병하(鄭秉夏), 유길준(兪吉濬) 등이 각감청에서 명성왕후(明聖王后) 폐위의 조칙(詔勅)을 작성하였다[『고종실록』 33년 9월 4일].
참고문헌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