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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1) 子曰: “事君尽礼, 人以为谄也。” |
The Master said, "The full observance of the rules of propriety in serving one's prince is accounted by people to be flattery." |
[今译] 孔子说: “侍奉国君,一切按照周礼要求的礼节去做,别人就认为你是对国君谄媚。” |
* 孔子(BC 551年 9월 28일~479年 4월): 공구(孔丘). Confucius. 중니(仲尼), 春秋時期의 魯나라. 지금의 山東省 곡부(曲阜, 취푸)에서 出生. 유학(儒學). 思想家, 敎育家, 政治活動家. |
儒家 學派를 創始함. 魯나라의 歷史冊인 『春秋』를 編纂하였다고 하며, 또 五經을 修訂하였다고 한다. 私學을 처음 만들었고, 傳統的인 貴族敎育을 打破하였다. |
代表 作品에는 『春秋』, 『십익(十翼)』, 『論語』(=孔子가 죽은 後, 그의 弟子들이 編纂함)가 있다고 한다. |
p.243~244
黄氏曰(黄氏名祖舜字繼道二山人)孔子於事君之禮非有所加也如是而後盡爾時人不能反以為諂故孔子言之以明禮之當然也
↳黃氏曰 孔子於事君之禮에 非有所加也요 如是而後盡爾어늘 時人不能하고 反以爲諂이라 故로 孔子言之하여 以明禮之當然也시니라
-黄氏曰: (黄氏名祖舜 字繼道 二山人) 孔子께서는 事君之禮에 (別途로) 加한 바를 有치 않으셨으니, 또한 如是와 같은 而後에라야 盡일 뿐인 것이다. 時人은 能치 못하고서 도리어 諂으로 여기니, 故로 孔子께서 그것을 言之하시길 禮之當然으로서 明하신 것이다.
〓황씨(黃氏, 黃祖舜)가 말하였다. “孔子께서 임금을 섬기는 禮에 더한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요,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當時 사람들은 能히 하지 못하고 도리어 阿諂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이를 말씀하여 道理의 當然함을 밝히신 것이다.”
* 黃氏(황씨, 1,100年~1,165年): 黃祖舜(황조순) 字는 繼道(계도). 南宋 福建 福清 平南里大壤(지금의 屬福建省福清市東瀚鎮大壤村) 사람 |
p.244
(葉氏少藴曰如拜下之類違衆而從禮宜時人以為諂也)
(↳葉氏少藴曰 如拜下之類 違衆而從禮宜 時人以為諂也)
(-葉氏少藴(성씨 섭, 쌓을 온)曰: 마치 (子罕 3章의) 拜下之類와 같은 境遇에 衆들과는 違이지만 從禮함이 宜이거늘, 時人들이 諂으로 여긴 것과 같은 것이다.)
(〓葉氏少藴이 말하였다. “마치 堂아래서 절하는 境遇와 같이 大衆들과는 어긋나지만 禮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거늘, 時人들이 阿諂으로 여긴 것이다.”)
* 石林葉氏(석림섭씨, 1,077~1,148年): 姓은 葉(섭)이고, 名은 夢得(몽득), 字는 少蘊(소온)이다. 葉夢得(섭몽득). 號는 石林(석림)이다. 宋나라 蘇州(소주) 吳縣(오현) 사람. |
哲宗(철종) 紹聖(소성) 4年(1,097年) 進士(진사)가 되어 翰林學士(한림학사)를 맡아 士大夫들이 派黨(파당)을 짓는 일에 대해 極論(극론)했다. 穎昌府(영창부)에서 일할 때 常平粟(상평속)을 열어 貧民들을 救恤했고, 宦官 楊戩(양전) 等의 收奪을 抑制했으며, 貪官汚吏들을 逮捕하다가 結局 逐出되었다. 龍圖閣直學士(용도각직학사) 等을 지냈다. 平生 배우기를 좋아해 博學했고, 特히 詞(사)를 잘 지었다. |
著書로는 『春秋』에 精密하여 『春秋傳춘추전』과 『春秋考춘추고』, 『春秋讞춘추얼』, 『春秋指要總例춘추지요총례』, 『石林春秋석림춘추』 等이 있다. 그 外 著書로는 『建康集건강집』과 『石林詞석림사』, 『避暑錄話피서록화』, 『石林燕語석림연어』, 『石林詩話석림시화』 等이 있다. |
* 參考: 如拜下之類: 「子罕」篇 3章에 |
子曰 麻冕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緇布冠 以三十升布爲之 升八十縷 則其經二千四百縷矣 細密難成 不如用絲之省約 |
孔子께서 이르시기를 “麻冕(마면)이 禮이거늘 오늘날에는 純(준)인 生絲로 하니, 儉素한지라(省略을 말한다.) 나는 大衆들을 쫓으리로다. →치포관(緇布冠)은 30승(升. 새)의 布로 만드는데, 1升은 80루(縷:올)이니, 즉 그 날실(經絲)은 2,400縷이다. 細密하여 만들기 어려우니, 실(絲)을 用함에 省略함만 못한 것이다. |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臣與君行禮 當拜於堂下 君辭之 乃升成拜 |
堂下에서 절하는 것이 禮이거늘 오늘날에는 堂上에서 절을 하니, 驕慢한지라 비록 大衆들과 어긋날지라도 나는 堂下를 따르리라.”라 하였다. →臣下와 君主가 禮를 行함에 마땅히 堂아래에서 절하는 것인지라, 君主가 그것을 辭讓하면 이내 올라와 절을 하였다. |
⇒ 君子處世 事之無害於義者 從俗可也 害於義 則不可從也 |
君子의 處世에 事함이 義에 해로움이 없는 것에는 風俗을 쫓아도 可할지나, 義에 해로울 지면 즉 可히 쫓을 수 없는 것이다. |
* 麻冕 緇布冠也 * 純 絲也 * 儉 謂省約 * 泰 驕慢也 |
* 冠禮 치포관(緇布冠): 시가(始加)에서 관자(冠者)의 머리에 씌워주는 冠이다. * 치관(緇冠): 선비들이 平常時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冠이다. |
p.244
○程子曰聖人事君盡禮當時以為諂若他人言之必曰我事君盡禮小人以為諂而孔子之言止於如此聖人道大德宏此亦可見
↳○程子曰 聖人事君盡禮를 當時以爲諂이라하니 若他人言之면 必曰 我事君盡禮어늘 小人以爲諂이로되 而孔子之言이 止於如此하시니 聖人道大德宏을 此亦可見이니라
-○程子曰: 聖人께서의 事君盡禮를 當時는 諂으로 여겼으나, 萬一 他人이 그것에 대해 言之일지면 必로 曰하기를 ‘我는 事君에 盡禮이거늘, 小人들은 諂으로 여기도다!’라 하였거늘, 孔子之言이 如此로만 止하셨으니, 聖人의 道大德宏함을 此에서도 또한 可히 見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자(程子, 伊川)가 말씀하였다. “聖人께서 임금을 섬김에 禮를 다함을 當時 사람들이 阿諂한다고 말하였으니, 萬一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면 반드시 ‘내가 임금을 섬김에 禮를 다함을 小人들이 阿諂한다고 하는구나!’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孔子의 말씀은 <小人이란 말씀을 하지 않고>, 이와 같음에 그치셨으니, 聖人의 道가 크고 德이 넓음을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 程子(정자): 程明道와 程伊川, 곧 程顥, 程頤두 兄弟를 말함. |
程頤(정이, 1,033年~1,107年): 字는 正叔. 號는 伊川. 諡號는 正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出生. 伊川伯에 封하여졌으므로 伊川先生이라 尊稱된다. 兄인 정호(程顥: 程明道)와 함께 주돈이(周敦頤: 周濂溪)에게 배웠고, 朱子는 伊川의 四傳弟子가 되었다. 兄과 아울러 ‘二程子’라 불림. |
程朱學의 創始者로 알려졌다.(儒敎哲學者) ‘理’를 最高의 範疇로 삼아 道學을 體系化하고 發展시킴. 著書에 《定性書》ㆍ《識仁篇》 등이 있다. |
哲宗 初에 司馬光·呂公著 등의 推薦으로 國子監 敎授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秘書省 校書郞)·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拔擢(발탁)되었다. 그러나 王安石·蘇軾(소식) 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黨禍)를 입어 쓰촨성[四川省] 푸저우[涪州]로 歸養 간일도 있다. |
p.244
(胡氏曰聖人事君盡禮非自賢以駭俗内交以媚君也亦曰畏天命畏大人而已矣)
(↳胡氏曰 聖人事君盡禮 非自賢以駭俗 内交以媚君也 亦曰畏天命畏大人而已矣)
(-胡氏曰: 聖人의 事君盡禮는 自賢함으로서 俗을 駭(놀랄 해)하게 하고 内交로서 君에 媚케 함이 아니라, 또한 ‘畏天命하고 畏大人하다.’라 曰할 뿐인 것이다.)
(〓胡氏가 말하였다. “聖人께서 君主를 섬김에 禮를 다함은 스스로를 어질게 여겨 속인들을 놀라게 하고 内交로서 君主에게 阿諂함이 아니라, 또한 ‘天命을 두렵게 여기고 大人을 두려워한 것’이라 이를 뿐이다.”)
* 胡氏(호씨, 1098年~1156年): 名은 胡寅, 字는 明仲, 南宋의 儒學者, 致堂先生으로 불렀다. 諡號는 文忠이다. 胡安國의 동생의 아들인 조카이다. |
宋나라 건녕(建寧) 숭안(崇安) 사람. 휘종(徽宗) 선화(宣和) 3年(1,121年) 進士가 되었다. 흠종(欽宗) 정강(靖康) 初에 불려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좨주(祭酒) 양시(楊時)에게 공부했다. 高宗 建炎 年間에 장준(張浚)의 薦擧로 기거랑(起居郞)에 발탁(拔擢)되었다. 上書하여 金나라에 對抗할 對策을 陳述하고 苟且하게 和議하는 것에 反對했는데, 語調가 懇切하고 剛直했다. |
소흥(紹興) 年間에 中書舍人이 되어 金나라에 使臣 보내는 것을 極力 沮止하다가 엄주(嚴州)와 永州의 知州로 나갔다. 官職은 예부시랑 겸 직학사원(禮部侍郞 兼 直學士院)까지 올랐다. 진회(秦檜)가 政權을 잡자 몹시 꺼려하여 朝廷을 誹謗하고 貶下했다는 理由로 罷職되어 新州에 安置되었다. 秦檜가 죽은 뒤 復職했다. 著書에 『論語詳說』과 『讀史管見』, 『비연집(斐然集)』이 있다. |
p.244
(○趙氏曰聖人必至禮而止故曰盡豈於禮之外又有加益哉當時君弱臣强事上簡慢反以為諂)
(↳○趙氏曰 聖人必至禮而止 故曰盡 豈於禮之外又有加益哉 當時 君弱臣强 事上簡慢 反以為諂)
(-○趙氏曰: 聖人께서는 반드시 至禮로 하고서야 止하셨기 때문에, 故로 曰하기를 盡이라 한 것이니, 어찌 禮之外에 또 益을 加함이 有하였으리오? 當時는 君弱臣强이였기에 事上에 簡慢히 하고서도 도리어 諂으로 여긴 것이다.)
(〓○趙氏가 말하였다. “聖人께서는 반드시 禮를 至極히 하고서야 그치셨기 때문에 ‘다한다.’라 한 것이니, 어찌 禮 以外에 또 보태고 더할 것이 있었겠는가? 當時는 君主는 弱하고 臣下가 强하였기에 위를 섬김에 簡慢히 하고서도 도리어 阿諂으로 여긴 것이다.”)
* 趙氏(조씨): 名은 순손(順孫)이고, 字는 화중(和仲), 격재선생(格齋先生)이라 稱함.? |
* 簡慢간만: 소홀(疏忽)히 하고 업신여김. |
p.244
(○新安陳氏曰按黄氏就盡字上深味之程子就人字上深味之於此見得聖人意思氣象可謂味聖言之法
(○新安陳氏曰 按 黄氏就盡字上深味之 程子就人字上深味之 於此見得聖人意思氣象 可謂味聖言之法
(-○新安陳氏曰: 按컨대, 黄氏는 盡字上에 就하여 그것을 深味之하였고, 程子는 人字上에 就하여 그것을 深味之한 것이다. 此(黄氏,程子)에서 聖人의 意思와 氣象을 見得할 수 있으니, 可히 聖言을 味하는 法이라 謂할 수 있겠다.)
(〓○新安陳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黄氏는 ‘盡’字에 그것을 深味하였고, 程子는 ‘人’字에 그것을 深味한 것이다. 여기서 聖人의 意思와 氣象을 알 수 있으니, 可히 聖人의 말씀을 吟味하는 法이라 이를 수 있겠다.”)
* 新安陳氏(신안진씨, 1,252年~1,334年): 陳櫟(진력), 南宋과 元初에 걸쳐 活動한 學者임. 南宋의 滅亡을 經驗하고, 朱子를 宗主로 삼아 學問 活動을 한 사람이다. |
* 亦曰畏天命畏大人而已矣: 「季氏」篇 8章에 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小人 不知天命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
孔子께서 이르시기를 “君子는 3가지 敬畏함이 있다. 天命을 두려워하고, 德있는 元老를 두려워하며, 聖人의 말을 두려워한다. 小人은 天命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함이 없고, 元老를 업신여기며, 聖人의 말을 冒瀆(모독)한다.”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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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八佾 3-18-1> 子曰:「事君盡禮,人以為諂也。」 [자왈: 사군진례, 인위위첨야] |
[飜譯 by sjc] 子曰:君主를 섬길 때 禮를 다하면 사람들은 阿諂이라고 여긴다. |
[英譯] The Master said, "The full observance of the rules of propriety in serving one's prince is accounted by people to be flattery." |
【原文】 3-18-1 子曰:“事君尽礼,人以为谄(1)也。” 3-18-1 子曰:「事君盡禮,人[以為]*諂也。」 |
[構文 分析 by sjc] 子(<孔子)曰(to say):「事(to serve)君(a ruler)盡(to exhaust)禮(a propriety),人(a man)以為(to consider)諂(to flatter)也(<語助詞)。」 |
[註釋 by sjc] *[動]~이라고 여긴다〖consider as〗 |
[中文 註釋_飜譯 by sjc] (1)(曲意迎合)〖to adulate; to flatter] |
[中文_飜譯 by sjc] 孔子说: “我完完全全按照周礼的规定去事奉君主,别人却以为这是诌媚呢。” è孔子曰:“나는 完全히 周礼의 规定에 따라 君主를 받들어 모시는데, 다른 사람은 오히려 이것을 阿諂이라고 여긴다。” |
[日文 & 註釋_飜譯 by sjc] * 諂 … おべっか。è阿諂[阿諂] * 木村英一(1906~1981)は「先生のお言葉、(今の魯国では、不当に君がないがしろにされている。)君に事えて(臣下として当然の)礼をつくすと、人は皆(私が君に)こびているかのように思っている」と訳している(『論語』講談社文庫)。 è「先生님의말씀、(지금의 魯国에는、不当하게 君主가 업신여겨지고 있다。)君主를 섬기고(臣下로서 当然한)礼를 다한다면、사람들은 모두(내가 君主에게)阿諂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論語』講談社文庫)。 * 下村湖人(1884~1955)は「先師がいわれた。君主に仕えて礼をつくすのは当然だ。然るに世間ではそれをへつらいだという」と訳している(現代訳論語)。 è「先師께서 말씀하셨다。君主를 섬겨 礼를다하는 것은 当然하다。그러나 世上에서는 그것을阿諂이라고 말한다」(現代訳論語)。 |
[口語訳]先生が言われた。『君主に仕えるに当たって礼の義務を尽くせば、人はそれを君主のご機嫌取り(へつらい)だという。』 è 先生님께서 말씀하셨다。『君主를 모심에 있어서 礼의 義務를 다한다면、사람들은 그것을 君主에게 阿諂한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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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human-inquiry/ROMj/4 - blog.naver.com/lsd0266/ - blog.daum.net/messe576/ - blog.naver.com/himinz/ - blog.naver.com/hotsun111/ - blog.naver.com/mgjang1/ - blog.daum.net/spaceandtime/2406 |
* 參考: 論語集註大全1 * 위 7개의 blog를 編輯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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