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묵상과 설교> 7,8월호에 기고한 <예화 사용 설명서>의 한 꼭지입니다. 설교에서 약방의 감초와 같이 사용되는 예화의 중요성에 비해 설교학 책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다는 인상을 받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 예화의 타락을 막는 법
예화는 죄가 없다
위대한 강해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는 설교에서 예화를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화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예화가 회중의 육신적인 본성에 영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예화를 드물게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로이드 존스와 같이 오늘날에도 엄격한 강해설교자들은 예화 자체에 대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계심은 타당합니다. 대체로 회중들은 할 수만 있다면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예화로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화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설교자는 예화를 선용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회중들이 설교시에 들었던 성경 구절보다 예화, 혹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것은 회중에게 그것이 보다 기억하기 쉽다는 반증입니다. 굳이 이것을 나무라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설교자 자신도 주일밤이면 자신이 오늘 한 설교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회중이 예화라도 기억해 주니 어찌보면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에 성경구절만이 가득하다고 해서 성경적인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담고 있는 설교입니다.
진리의 종, 예화
무엇보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예화 사용의 대가셨습니다. 심지어 그 분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막 4:33) 예수님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소재들을 설교의 예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못 배운 사람도,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하늘의 진리를 이해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의 예화 사용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요, 회중을 향한 사랑의 동기에 기인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설교가 아니라 회중에게 맞는 형식의 설교를 추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예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예화를 설교의 종으로 잘 길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화의 오용과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세 가지 원리가 필수적입니다.
첫째, 적절한 수의 예화를 사용하라
진리의 잔치상에도 적절한 수의 종들이 필요합니다. 종들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에서 적절한 예화의 갯수는 몇 개일까요? 혹자는 로이드 존스의 경우처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한 설교에서 2개에서 4개의 예화가 적당하다고 말합니다. 나름대로 타당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설교자가 설교신학에 준거한 방향성은 가질지라도 한 설교에 적절한 예화의 개수를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화사용의 목적이 회중에게 진리를 밝히고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적절한 예화의 수는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의 이해나 수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보다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존 스토트의 설교에는 예화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스펄전의 설교에는 각 대지마다 어김없이 많은 예화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그들이 설교해야 했던 회중의 차이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가 런던의 중심가에 자리한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에서 주로 영국의 지성인을 상대로 설교했다면, 스펄전(Spurgeon)은 런던 남부의 터버너클 교회(Tabernacle Church)에서 주로 교육수준이 낮은 회중들을 대상으로 설교했습니다. 따라서 정교하고 밀도있는 스토트의 설교와 달리 스펄전의 설교에 예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한 편의 설교에 몇 개의 예화가 적합하냐 하는 논의는 본질적으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회중의 수준을 고려하여, 예화가 진리의 햇빛을 가리지 않으며 동시에 진리의 빛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예화들을 사용하면 됩니다.
설교자는 하늘의 진리를 땅에 전하기 위해 땅의 소재와 땅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때에 그 설교는 일상의 삶을 사는 우리의 회중에게 들리고 기억될 것입니다.
둘째, 예화는 입장할 타이밍이 있다
예화는 설교 전반의 흐름 속에서 진리를 알현(謁見)하기 위해 설교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적절한 타이밍이 있습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고 잘못 들어온 예화는 설교의 흐름을 끊고 전열을 흐트러 버립니다. 따라서 예화가 설교의 메시지를 잘 서빙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와 타이밍을 신중하게 정해야 합니다.
“회중의 관심을 확보하기 위한 설교의 서론 즈음인가?”
“설명이 필요한 이 지점인가?”
“흥미와 집중력이 떨어질 중반인가?”
“아니면 진리의 절정인가?”
설교자는 설교의 전체 흐름과 강조점을 고려하여 예화를 적절한 위치에 배치해야 합니다. 때로는 진리의 불꽃의 기름으로, 때로는 노곤한 졸음을 깨우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때로는 목이 마를 즈음에 조용히 물을 가져다주는 지혜로운 웨이터처럼 예화는 적절한 타이밍에 겸손하게 들어왔다가 겸손하게 나가야 합니다.
셋째, 예화는 ‘거듭’나야 한다
필자의 생각에 많은 설교자들이 행하는 가장 빈번한 실수는 예화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설교에 차용하는 경우입니다. 종종 이런 예화는 불필요한 정보들을 너무 많이 포함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세한 정보나 복잡한 상황을 설교에 있는 그대로 담다보면 예화의 본래적 의도는 상실되고 설교의 흐름은 깨어져 버립니다.
예를 들어 ‘생명을 살리는 포옹’(The Rescuing Hug)으로 유명한 쌍둥이 아기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예화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1995년 10월 17일, 미국 매사추세츠 메모리얼 병원에서 카이리와 브리엘이라는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쌍둥이 아기의 부모는 하이디와 폴 잭슨입니다. 그리고 그 쌍둥이를 돌보는 간호사는 19년 경력의 게일 캐스퍼리언 간호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화는 평범한 회중을 위해 거듭나야 합니다. 그냥 “미국의 한 병원에서 쌍둥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병원의 이름이나 담당 간호사의 이름, 혹은 그 부모의 이름은 이야기의 전개상 필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나친 정보는 이야기의 집중을 방해합니다. 회중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야기의 전개에 불필요한 정보들은 단순화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에 회중들은 이야기에 더욱 귀기울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교훈에 집중하게 됩니다. 비록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예화 사용의 이러한 작은 차이들은 설교에 기여하거나 흐름을 방해할 수 있고, 회중의 집중력을 획득하거나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화에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게 예화를 조율하고 다듬으라는 뜻입니다. 예화는 광산에서 막 캐낸 원석과 같습니다. 원석을 깎아 보석으로 만들 듯, 예화 역시 세공이 필요합니다. 장인의 정신으로 설교자가 예화를 섬세하게 가공할 때 진리의 메시지는 예화의 거울에 반사되어 더욱 영롱하게 빛날 것입니다.
p.s. 보다 자세한 강좌는 Youtube <손동식의 거인들의 설교학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