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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해/배우,국악인-여수 밤바다/장범준 작가/작곡
여수 밤바다
아름다운 얘기가 있거네게 들려주고파
오정해: 이 소리 좋아하시죠,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혹시 노랫말 들리셨어요? 여수 밤바다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라는 가사가 들리는데~ 오늘 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여수 밤바다에 서린 아픈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오정해---------------------------------
이야기 들었소?
여수에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요!
여수, 순천, 벌교, 하동, 구례, 다 난리가 났다 안허요.
경찰이라고 죽고, 빨갱이라고 죽고
목숨 건진 사람들도 무서워서 암말도 못하고
가슴에 피멍만 들었다 안허요.
아이고 아버지~ 이 원통을 누구에게 전하리까~
아이고 어머니~ 그날 여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오.
아이고 내 새끼야~
-----------------------1948. 여순사건 좌익군인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특별히 배우 오정해씨께서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절규에 저는 온 몸에 전율이 돋는데요~
박상영/작가: 온 몸에 털이 다 섰어요~
최원정: 사실 강렬한 무대였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恨이 그대로 느껴져요~
최원정: 恨을 아시는 구나~
이시원/배우: 한국의 한을 아세요?
다니엘: 저 지금 한국 생활 12년차 입니다.
최원정: 우리 오정해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장원입니다. 1992년 미스 춘향진! 그렇죠? 그리고 대표국악인이신데~ 이번에 우리가 국악인의 공연을 직접 본거예요.
일동: 정말 영광입니다.
박상영: 제가 처음 방송에 나온다고 그럴 때 아버지께서 별로 반응이 없다가 이번에 오정해님과 함께 방송에 나온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들 성공했다 이러시더라구요. 비로서 인정을 받게 해주신 오정해 선생께 감사드리고~
최원정: 멀리갈 필요가 없어요. 박태균 교수님이 섭외소식을 듣고 짝~짝~짝`~ 물개 박수를 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고의 스타시죠. 서편제 송하, 태백산맥 소하~ 품위도 있고~국보적인 소리의 왕~
오정해: 잠깐 물 좀 마셔도 돼죠~?
다니엘: 오늘 팬미팅 날인데요.
최원정: 아예 자세도 그냥 트셨어요.
오정해: 사실은 태백산맥이란 작품전에 서편제를 했지만 원래 영화사에서 제작을 할려는 순번은 태백산맥이 먼저 였더라구요 (태백산맥(1994) 보다 먼저 개봉한 영화 서편제(1993)). 제가 워낙 그때는 어릴 때니까 자세한 설명은 안해주시는데 위에서 어떤 힘으로 태백산맥을 지금 촬영하면 안된다 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그래서 서편제가 먼저 들어가게 됐다는 얘기까지만 들었어요.
이시원: 영화 촬영하면서 개봉할 때도 압박이 심했다고 알고 있어요. 고발도 많이 당하고요.
오정해: 협박도 하고 개봉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단체도 있었고~
박태균: 태백산맥은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구요. 이게 10권짜리인데 제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그걸 사가지고 열흘 동안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이걸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1권이 끝나면~ 2권이 궁금하고~ 2권이 끝나면 3권이 궁금하고~이게 그 당시 국가보안법으로 고발됐고 그때 재판을 거의 10년 동안 했죠 (태백산맥(조정래作)-1994년 8개의 반공단체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발 2005년 3월 무혐의처분). 결국은 무혐의로 끝났지만 사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 라고 해도 그만큼 그 당시까지는 이념의 틀이라는 게 강고하게 있었던 것 같애요.
박상영: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태백산맥 같은 경우는 1983년부터 1989년 까지 6년에 걸쳐서 연재가 됐었대요. 단지 6개월도 아니고 6년씩이나 했다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지와 세상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는 강력한 창작자로서의 소명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최원정: 자, 오늘 소설의 배경이 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여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열쇠라고 말하는데 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겠습니다.-------------(인간 모형을 테이블로 올리면서) 이승만 前대통령, 그리고 김구 임시정부주석, 백선엽 장군, 이분은 누군지 알겠어요? 박정희 前대통령~-------------------
이시원: 어마 어마한 분들이네요~
최원정: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48년 여수로 가보겠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 4.3사건진압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죽이며 5시간만에 여수를 장악한 군인들은 다음날, 바로 순천까지 장악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어렵살이 창설된 군이 국가를 향해 총뿌리를 겨눈 것이다.
최원정: 자, 군인들이 출병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박태균: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거거든요. 진압을 하기 위해서 출동을 하는 군인들이 우리는 출동을 할 수 없다. 진압을 할 수 없다 하고 반란을 일으킨 거지요. 그러니까 여수를 얘기할려면 4.3을 이해해야 돼요.
이시원: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이름하여 시원한 브리핑~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대한 독립만세 3.1절 행사가 있었습니다. 3만명 가량의 군중이 모였는데요. 그런데 기마병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채이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그걸 보고 모른채 지나가버렸대요. 군중들은 당연히 분노했겠죠. 사과를 요구하면서 도민들이 경찰서로 몰려 갔는데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생각한 경찰이 탕! 탕! 하고 총을 쏩니다. 6명이 죽고 8명이 다치죠. 제주도민들은 파업으로 항의했고 미군정은 참여자를 체포하고 갈등은 증폭되었습니다. 그러길 일년여, 문제의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제주도민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남한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봉기합니다 (남조선노동당 주도, 제주도민 봉기 (1948.4.3)-미군철수, 남한단독선거 반대,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 결국, 5.10 총선거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 3개 선거구중 두 곳이 무효화 돼죠. 그래서 제주도는 결국은 빨강이(좌익)의 섬으로 낙인이 찍히죠. 8.15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됐고 이승만 정부는 강력진압을 요구합니다 이에 여수 14연대가 출동명령을 받았던 거죠. 브리핑 끝.
최원정: 4.3사건은 저희가 1시간을 다루어도 모자라는 중요한 사건인데 이시원씨가 짧게 브리핑으로 사건개요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씨는 이거와 관련해서 프로그램 몇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다니엘: 저는 제주 KBS에서 3박4일 정도, 중요 장소를 돌면서 찍었는데 너무 인상 깊었어요. 이건 사실 역사책에서 그냥 살짝 언급되는 부분인데 직접 가서 사람들한테 얘기를 듣고 목격자들의 얘기도 들으니까 아~ 이건 잊을 수 없는 시간인 것 같애요.
오정해: 제주에 가면 무명천 할머님이 계세요. 총을 턱에 맞으셔 가지고 평생을 무명천으로 가리고 사셨대요 (무명천 할머니 故진아영씨). 저는 직접 그분 댁에 가서 사진을 보고 너무 소스라쳤고, 4.3사건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거와 제주도에서 현장에서의 아픈 분들을 직접 만났을 때 느낌은 정말 비교할 수가 없는데~
이시원: 주민들께서 4월달에 쉽게 잊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최원정: 제주 사건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그걸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게 바로 여순사건의 시작인 거잖아요?
오정해: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데 명령을 거부한다는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최원정: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불복종이 아니라 거의 항명을 한 거잖아요. 혹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 것 같애요?
오정해: 그렇지 않아도 제 남편하고 그런 생각으로 얘기를 나눠봤어요.
이시원: 남편분께서 군인이라고 들었거든요.
오정해: 결혼해놓고 군대를 갔어요. 군인하고 조금 살았죠. 직업이 군인이 아니고~ 좀 빨리 결혼을 했어요. 만난지 4일만에 프로포즈를 받고 그냥 바로 결혼을 했어요.
최원정: 뭐가 그렇게 급하셨어요?
오정해: 저는 안급했어요. 그분이 급해서 막 몰아치니까 이름도 못 외우고~ 4일 동안 부를 일이 없잖아요. 그냥 네~ 네~그랬는데 결혼하기로 하고 이름을 물었죠.
다니엘: 지금 이름 알고 계시죠?
오정해: 지금은 이름 알죠. (군대명령에)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할거냐? 라고 물었더니 저랑 생각이 같더라구요. 일단 가긴 가요. 군대는 명령을 지켜야되니까. 그런데 우린 같은 국민에게 총을 쏘진 않고~ 명령은 지키되 같은 국민들한테 총을 쏠 수 있느냐 총을 내려 놓는 거죠.
최원정: 그런데 이 순간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한번쯤은 다 하셨을 것 같애요. 군인 반란의 배경에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가 있는데 사건 전개를 보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박금수 박사님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군사전략전문가 박금수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제14연대 소속 남로당원들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연대 반란군 작전 전개과정
1948년 10월 19일 저녁-작전개시
10월 20일 01:00-여수경찰서 습격
10월 20일 03:00~03:30-여수경찰서 점령
10월 20일 05:00-여수 읍사무소 및 시내 주요기관 점령
10월 20일 오전-순천역 도착 반군합류
10월 22일-전남 동부 6개군 점령 (여수,순천,광양,고흥,구례,보성)
세발의 예광탄과 함께 작전이 개시됩니다.
박금수: 그런데 여러분, 예광탄이 뭔지 아세요?
일동: 몰라요.
박금수: 총알이 나가는데 원래 안보이잖아요. 총알이 나가는 궤적이 보이게 빨간 빛을 내는 탄이 바로 예광탄이 되겠습니다. 이 반란 작전은 예광탄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반란작전의 세력이 처음으로 간 곳은 바로 병기고와 탄약고였습니다. 당시 14연대 무기고에는 미군에서 지급한 M1소총과 60 미리 박격포, 그리고 일제시대에 썼던 99식 소총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3천정이나 있었는데요. 이것은 소총이긴 하나 당시로서는 최신식으로 알려져 있었던 M1개런드 소총이 되겠습니다 (M1개런드(Garand)소총-미국에서 제작한 후 1936년부터 양산한 반자동 소총). 이 M1소총은 특징이 반자동 소총이에요. 반자동 소총이라 재장전할 필요없이 계속해서 쏠 수 있는 쏘면 자동으로 재장전이 되는 반자동소총이었구요. 구경이 탄환의 직경이 7.6 미리였어요. 굉장히 파괴력이 강했고 M1 소총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도 널리 쓰였습니다. 그리고 요 소총은 99식이라고 부릅니다. 99식 소총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M1 소총과 맞서기 위해서 탄환의 직경을 7.7 미리로 키웠어요. 그런 소총이 되겠는데 이건 반자동은 아니었구 여기 레버가 있어요. 노리쇠를 볼트액션이라 해가지고 넣었다 빼서 쏘고 탄피 빼고 다음 쏘고 이런 식의 소총이 되겠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자체 총기를 생산 하지 못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미군이 준 M1 소총이거나 또는 일제가 남기고 간 소총을 미군이 본인들 탄환에 맞게 개조했다고 해요. 이것들을 한국군에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약고에는 이런 총알이 무려 56만발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자, 그리고 저녁 7시 50분, 19시 50분에 비상나팔이 불리게 되는 이 비상 나팔소리를 듣고 연대원 2700명 정도가 연병장에 집합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날 저녁 10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제주도 출병이 조금 앞 당겨 졌구나 생각하였죠. 이때 봉기를 사전에 계획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이었던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뛰어올라 외칩니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 그렇게 반란은 시작됐습니다. 저녁 8시쯤에 모여서요 무기를 다 획득한 다음에, 다음날 새벽 1시에 여수 경찰서를 습격합니다. 반란군과 경찰이 시가전을 벌이게 돼요. 약 2시간만인 새벽 3시쯤에는 여수 경찰서를 점령을 하게 돼구요. 그리고 여수 시내의 읍사무소 등 주요 기관을 점령을 해서 인공기를 내걸게 됩니다. (최원정: 인공기를 걸었구나). 이렇게 단시간 만에 여수를 점령한 14연대는 파죽지세로 쉬지도 않고 순천으로 달려가요. 이때 순천쪽에 파견나와 있던 남로당원인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2개 중대, 인원 2, 3백명 정도가 14연대와 합류를 하고 순천경찰과 대치를 합니다. 순천경찰은 반란군에 맞설 추가 병력증원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제4연대가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광주 4연대는 순천경찰의 편에 서질 않고 바로 14연대와 합류를 합니다. 반란군에 합류를 하게 되는 것이죠.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군에는 4자가 들어가는 연대번호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짐작이 좀 되시죠~
이시원: 14연대, 4연대 둘 다 4자가 들어가서 그런 거예요?
박금수: 그렇죠
다니엘: 반란의 역사가 있어서 그런가?
박금수: 너무 빨리 맞추셨어요. 당시 여순 반란의 주도세력이 4연대와 14연대였습니다. 그래서 4자라는 숫자에 반란의 이미지가 더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 그 숫자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원정: 죽을 死 자가 아니라 반란에 참여한 부대가 들어간 숫자 4자이기 때문에~
박금수: 만 하루도 안돼서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은 부대를 재편해서 3개의 부대로 나눕니다. 그래서 순천으로부터 서쪽으로는 벌교, 북쪽으로는 학구, 동쪽으로는 광양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19,20,21일, 3일째에는 벌교를 장악하구요. 그리고 4일째에는 전남 동부의 6개군을 장악합니다. 저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I’ll be back.
최원정: 꼭 돌아오세요.
박상영: 그런데 사건개요를 보니까 굉장히 봉기가 일어나자 마자 단시일내에 주변 일대를 다 장악을 했잖아요. 미리 계획했거나 짜지 않고는 이렇게 빠른 시간에 장악하는게 가능했을까요?
박태균: 그런 얘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전에 다 계획이 됐고 남로당 중앙에서 지시를 하고 다 계획대로 작전대로 간게 아니냐?
최원정: 북한 개입설도 있고 그렇죠?
박태균: 그쪽에서 온 게 아니냐 그러는데 그 증거가 없어요.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된 상황입니다. 8월 15일에 정부수립이 되고 이제 막 나라 행정권이 조금씩 들어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허술했던 상황으로 봐야 해요. 만약에 이걸 북한 중앙에서 계획을 했다면 여수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애요. 여수가 너무 고립되어 있는 지역이에요. 거기서 무엇을 해가지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에는 지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박상영: 그럼 굳이 38선 근처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최남단에서 지창수가 봉기를 일으킨 이유와 목적이 도대체 뭘까요?
박태균: 저는 우발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딜레마죠. 제주도를 간다 제주도에 가서 총을 안쏜다. 그것도 명령 불복종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애초에 안가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러면서 제주도민들이 했던 것과 똑 같은 구호를 가지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우린 통일정부 수립을 해야된다. 이 구호를 가지고 총구를 꺼꾸로 돌린 거지요. 어차피 내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여기서 한번 해보자 라고 한 부분들이 강하지않았나~
최원정: 아까 교수님께서 지창수 연설 중에 경찰을 타도하자 그걸 내걸잖아요? 그게 먹혔던 것 같애요. 당시 해방 직후에 군경 사이가 계속 안좋았는데 그 한 마디에 남로당원들이 불끈해서 뭉친 거죠.
이시원: 우리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해방 이후에는 경찰의 80% 이상이 친일파였다고 했잖아요. 그에 반해서 군대에 모인 청년들 같은 경우에는 친일경찰한테 수탈을 당해서 고난 받던 사람들이었을 테구요. 그렇게 따지면 아주 자연스럽게 적대관계가 형성됐을 것 같거든요.
박태균: 경찰의 주류는 친일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를 고문을 했거나 잡았던 경력을 가진 경찰들이지만, 군은 좀 달라요. 군에도 기본군의 한 축은 일본육사나 만주군에서 나온 분들이 한 축을 차지하지만 군내에는 광복군 출신도 있었고 중국군 출신도 있었고 또 하나 중요한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잡힐 위기에 그 당시에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죠.
최원정: 군이란 데는 신원조회도 하지 않았나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였어요?
박태균: 이 생각을 해야 되는게 그 당시에 주민등록증이 없었습니다.
박상영: 행정시스템이 완벽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박태균: 당시에는 창군이 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병력을 확충하는게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어요. 그것 때문에 미군정에서 정치적 중립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따로 사상검증을 진행하지를 않았다고 해요.
최원정: 사실 정부수립 두 달만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요.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통치력이 시험받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다니엘: 아무리 생각해도 국민들은 그 당시에는 통일정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을 때였고 사실 유엔도 남한 단독정부 승인 전이었잖아요.
이시원: 미군도 철수를 해야되는 상황이고 한번도 관심이 없었다고 알고 있고~
오정해: 정부 수립이 8월이고, 이 사건이 10월이면 두달도 채 안된 사이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박태균: 거기다 또 다 선생이 말씀하셨지만 12월에 가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유엔에서 승인을 하게 됩니다 (1948년 12월 12일). 승인하기도 전이었구요. 국가가 유지가 될려면 사실 돈과 이데올로기와 물리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물리력인데 그게 흔들린 거예요.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아까 시원씨가 얘기한 것처럼 미군은 나갈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소련군이 나가고 나면 소련군과 미군이 들어온게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정부수립이 되면 우린 나간다였는데 소련군은 12월에 나간단 말예요 (1948.12.25). 그러면 미군도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어요. 그런데 미군이 12월에 안나갑니다. 왜, 이 사건 때문에 안나갑니다. 이게 어찌 됐던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는데 물리력이 이렇게 흔들려요. 나가면 우리가 지금까지 노력한게 물거품이 되는게 아니냐 그래서 미군 철수가 1949년 6월까지 밀리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니엘: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김구 선생은 끝까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잖아요. 이승만 측에서는 아 이게 김구 세력 쪽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주장을 했다는 군요.
최원정: 김구 선생이 여순사건의 배후에 있다~?
이시원: 아무리 그래도 백범 김구 선생은 우익인데 설마 남로당과 도모를 했을까요?
박태균: 당연히 아니겠죠!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에 다녀오고 북한에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만났다고 하더라도 다녀와서 사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어요. 북에 가서 약속을 받았어요. 첫번째, 남한에 대한 전기를 끊지 않는다, 두번째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더라도 북쪽은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는다. 북쪽이 약속을 다 안지킨 거예요. 여기 내려와 가지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을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이승만 입장에서는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이시원: 역시 정치 9단~
최원정: 너무 아무데나 갔다 부치면 안돼요.
박태균: 기본적으로 지금 반란을 일으킨 군대에서 나온 얘기가 단독정부 수립 반대한다. 우린 분단정부 반대한다. 통일정부를 원한다. 김구 선생이 한 얘기가 그거잖아요. 난 분단정부 반대한다. 통일정부 수립되어야 된다. 엮을 수 있는 맥락이 있는 거예요.
박상영: 메시지가 같으니까~
이시원: 한 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이 김구와 남로당이 관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이걸 가짜 뉴스로 엮은 거네요.
박태균: 그렇죠, 사실 소문을 누가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여순지역에 있는 김구 선생을 과거에 지지했던 세력들이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러면서 혐의가 이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몰리고 물론 나중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최원정: 가짜 뉴스가 판을 쳤대요.
박태균: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 가냐 하면은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가 재판정에서 그 얘길해요. 김구는 빨갱이다. 그 얘기의 근원 중의 하나는 여순 사건문제도 있어요.
다니엘: 어쨌거나 이승만 前대통령은 반란을 빨리 진압해야 되잖아요.
최원정: 빨리 확실히 진압해야 되는게 이제 목표가 되었어요. 그 진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I’ll be back. 박금수 박사님! 전해 주십시오.
-----------------I am back. 1948.10.21. 군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을 방위해야 되는 수도권의 부대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부대를 전남지역에 투입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이전까지 군은 전쟁 같은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연대급 이상 부대들 간의 합동작전 경험이 전무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계통의 혼란이 왔고 게다가 통신장비 또한 미비한 상황이어서 정확한 상황의 전파, 명확한 명령의 전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지어는 아군끼리 서로 적군인 줄 알고 오인해서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는데요. 어쨌던 이런 우여곡절 끝에 10월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10월 24일에는 보성과 벌교를 탈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수가 남았는데요. 이 여수야 말로 반드시 반란진압을 하는데 있어서 여수탈환이 바로 상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천이나 벌교, 광양 지역들은 탁 트인 벌판이고 곡창지데인데 그런데 여수의 지형은 육지쪽으로 들어가야 돼요. 오늘 날에도 우리가 순천에서 여수로 갈 때는 산이 많고 터널을 많이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해안가를 보면 대부분 절벽이나 뻘인데 뻘이 굉장히 넓어요. 그래서 바다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몇차례 상륙작전을 시도하기는 해요. 어설픈 상륙작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참고로, 이를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문적이고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부대, 바로 귀신 잡는 해병대가 창설이 되는 데요. 1949년 4월 15일에 해병대가 창설됩니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은 여순사건 전과 후로 나눌 수도 있겠네요.
박금수: 제대로 된 독자적인 작전을 해 본 계기가 여순사건이 되겠죠. 이러한 여수의 특성상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합동작전을 벌여야만 탈환이 가능했구요. 마침내 10월 27일 여수탈환에 성공합니다. 이후로는 지리산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반란군을 상대로 한 토벌작전, 즉 빨갱이 섬멸작전이 전개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상, 박금수였습니다-------------
최원정: 군인들의 반란이 굉장히 빨리 진압이 됐군요.
박태균: (반란군이) 준비를 안한 거죠.
최원정: 우발적인 사건인 거군요.
박상영: 이 사건이 주는 파급력이 워낙 컸던 게 여순반란뿐만이 아니라 지방지주들이나 관료들이 많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요. 심지어 군청에서는 경찰서장이 구타를 당한 뒤에 산채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죽임 당한 사건도 있었고요.
최원정: 지주들이나 우익인사들을 막 척결하는 영화에서도 그 장면들이 묘사가 되더라구요.
오정해: 벌교 같은 경우는 대지주와 소작인들 간의 앙금들이 워낙에 많았던 터라~
이시원: 또 이렇게 들어보면 굉장히 짧은 시간에 진압이 됐는데 잔인한 반란군의 행태를 보고나서 그 보복심리도 상당했을 것 같애요.
박태균: 아무래도 그 당시에는 반란에 가담을 했거나 또는 반란 과정에서 인민위원회 재판을 열어가지고 우익이나 지주나 이쪽에 가해를 한 사람들을 응징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 사람들을 색출하는 것에 죄책감보다는 당연히 이 사람들을 색출해야 한다. 범죄자란 생각을 갖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해서 뽑아내게 하는 이런 과정들이 결국은 비극을 더 키우게 된 것 같애요.
최원정: 부역자 색출하는 장면인데 저게 이제 운동장에 세워놓고 딱 갈라놓았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가를 수 있죠 (여수 서국민학교 운동장-오른쪽 사람들이 부역혐의자, 이들 중 89명 처형<1948.10. 사진작가 이경모>).
박상영: 뒤에 불도 타고 있고 지금 난리네요~
박태균: 이게 반란군에 가담했거나 반란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색출해 내는 과정입니다.
이시원: 색출하는 방법이 손가락으로 저 사람 빨갱이야 라고 지적하면 빨갱이가 되는 거예요?
박태균: 그런 겁니다. 지적을 합니다.
박상영: 그럼 사람들끼리 서로 지목을 한 거예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정말 공포였겠네요.
오정해: 그래서 지금도 전남에는 그 색출과정에 대한 원한 때문에 양쪽 집안이 절대 혼인은 안된다. 이런 집안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이시원: 집안의 원수가 된 거죠.
최원정: 그럴 수 있겠네요 철천지 원수가 된 가정들이 있었겠네요.
오정해: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이 안들어갈 수가 없어요.
박상영: 내가 싫어하니까 너 빨갱이야!! 이런 경우도 분명히 있었어요.
오정해: 정말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박태균: 사실은 그래서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색출과정에서 지목을 안해서~ 그래서 이게 굉장히 개인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지니까 그 이후에 후유증이 굉장히 큰 거지요.
이시원: 그래도 나름의 심사기준이 있었다고는 하는데요. 총을 소유한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자른자, 그리고 바지를 벗겨봐서 미군용 팬티를 입은 사람, 또 봉기때 여수를 장악했을 때 인민위원회가 나누어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는 자를 색출을 해서 처형을 했다고 하는데~ 전 이게 남이 쓰던 걸 입을 수도 있고~
최원정: 지금 사실 옷이 벗겨진채 혐의자들이 경찰과 우익 인사들에게서 심문받고 있는 그런 장면인데요~ 이렇게 색출이 되서 즉결 사형당해서 버려진 시신들의 모습입니다 (즉결처형된 시신-칼 마이던스). 저거 너무 끔찍 하네요.
이시원: 이 시기를 순천에서 겪으신 분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가 6.25 때보다 더 무서웠다고 해요.
오정해: 아니 군경인데 그러면 윗선에서 어떤 승낙을 했다든지 아니면 최소한 묵인이라도 가능해야만 이게 가능한게 아녜요?
박태균: 네, 묵인을 했거나 아니면 저는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이승만 모형) 이분이 뭔가 그래도 묵인한 뭔가 있을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시원: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1월 8일에 발표한 담화내용을 봤더니,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러한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고 해요.
다니엘: 아니, 아동 까지라도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제거~ 어떤 법령이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
이시원: 정말 어린 아이 그 어린 아이가 뭘 알겠어요 부녀자들까지도 이렇게 이런 색출과정에 포함되었다고 하는게 너무 비인간적인 거 같애요.
박태균: 저는 여기서 제일 중요했던 건 즉결처분이 있었다는 거에요. 아무리 전쟁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어떤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군법재판에 회부해서 그것에 의해서 재판을 하고 이 사람을 처벌을 해야되는데 여순 사건 때는 그거 없이 처분을 했다 라는 것이죠.
박상영: 그럼 이전에 어떤 증거나 절차나 재판 다 필요없이 그냥 바로 죽일 수 있었던 그런 얘기네요.
박태균: 저희가 본 사진에서 처럼 색출된 사람들, 이건 불순분자 이고 공산주의자다. 바로 즉결처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묵인을 했던 것입니다.
박상영: 한 마디로 권한을 쥐어준 거네요.
다니엘: 지리산에서 아직도 반란군들이 저항 중이었으니까 그쪽 주민들이 굉장히 곤란을 많이 겪었을 것 같애요.
이시원: 양쪽에서 총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낮에는 진압군에 의한 부역자 색출).
----------------------영화에서: 진압군이 떨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끌어내어 데리고 간다. 영길네도 나오더라고~, 남편이 입산 안했는가? (한 아낙이 끌려 나온다), 용강 아재!, 아재 아들 내보냈지? (한 남자가 끌려 나간다). 代殺(대살)-입산자 가족 대신 처형, (또 한 남자 끌려 나간다). 아재는 빨갱이들한테 소 줬지? 내가 준 것이 아녀, 빼앗아 간 것이여! (밤에는 반란군에 의한 처형과 식량 수탈).
반란군: 인민을 배반하고 악질 반동분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소, 동무들! 불타는 적개심, 이 반동분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우리의 변치 않는 투쟁의지와 단결을 다짐합시다!
진압군: 칠곡리 주민 여러분! 전 주민들은 오늘 17시 부로 이 마을에서 즉시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빨치산 물자제공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움). 이 마을에 출몰하고 있는 잔비도당들이 완전토벌될 때까지 이 마을은 소개될 예정 이오니 주민 여러분은 빠짐없이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울부짖으며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
1949년 11월 11일 전남도청의 피해 조사결과
사망자-------------11,000여명
가옥파괴----------1만호 이상
이재민------------삼십만명
박태균: 2005년에 여수 지역사회 연구소가 인명피해 중 민간인을 따로 조사를 했는데요. 반란군이 죽인 민간인 사망이 152명이었고, 그 반대로 여수가 회복이 된 다음에 군경이 죽인 사람은 2117명이었다 라고 해요. 그런데 희생자 중에는 사실 연좌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최원정: 발설을 안하시는구나~
박태균: 그때 죽었어, 어, 그러면, 그때 공산주의자들하고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가있습니다. 사실 그것까지 따지면 전체 희생자수는 더 늘어 날 수도 있어요.
이시원: 과연 여기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이 진짜로 다 공산주의자냐 총 들고 협박하는데~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을 수도 있고, 또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 않았을까요?
박상영: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기본적으로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본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즉결처분으로 다 죽인다고 하는게 말이 안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니엘: 사실 빨갱이 라고 얘기 하는 건 되게 쉽죠. 어떤 적폐를 만들고 너희들이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애국자가 아니다 빨갱이다 이런 식으로 낙인 찍어 버리는 거죠.
이시원: 사상적 다름을 선과 악의 2분법으로 나눠 버리는 거니까~
-------------------영화 중에서-------------------------
남자: 그러니까 남편이 빨갱이 짓 못하게 말렸어야지! 자식들 굶기면서 빨갱이 짓 하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여자: 입은 삐뚫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어! 자식이 굶으니까 빨갱이 짓 하제, 빨갱이 짓 해서~
남자: (내리 치면서) 미쳤나?
여자: 왜 때려?
남자: 뭐?
여자: 나 틀린 말 했소? 서러움 중에 굶는 서러움이 제일 큰 것인데 한쪽에서 못 먹어서 부황든 사람들이 허찬하게 많은디 있는 사람들은 쌀 가마니 쌓아 놓고 유가 해먹고 떡 해먹고, 요건 세상이 어찌 사람사는 세상이에?
남자: 이런! (여자의 따귀를 때림) 말로 해선 안된다!
여자: 어서 죽여라, 이놈아!
박상영: 소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인 하대치가 입산하기 전에도 소작쟁의에 참여하기 전에도~ 거기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아부지 지반 암만도 마씨오~
이시원: 아니~ 그런 말이 어서 ~ 어른 넘겨 드려~(태백산맥 원고가 오정해로)
오정해: (오정해씨가 원고 낭독) 아부지 지발 암말도 마시오. 목심 내걸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도 있는디 뺏긴 지 밥그릇 찾아묵는 일도 못헌다면 그것이 무슨 사내 새끼다요. 그라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은 나 알고 있당께요. 그려도 허고 허고 또 허야지 응 작인없는 지주놈들도 없는 법잉께요.
일동: 박수~
다니엘: 호남이 곡창지대 잖아요. 일제 때는 엄청 수탈당했고 해방 후에는 조금 살만하다 싶었는데 친일 경찰한테 수탈당하고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는 사실 북쪽에서 어느 정도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었다는 소식 자체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나 농부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 같애요.
최원정: 굉장히 혹 했을 것 같애요. 내 새끼들이 굶어 죽는데~
이시원: 들어보니까 지주와 친일파에 대한 불만,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을 하지 않고서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법적인 절차없이 처벌을 했다는 게 우리나라 역사의 과오가 아닌가, 싶네요.
박태균: 그런데 이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어요. 이게 우리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계엄령이 선포 된 거예요.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법무관이 내려갑니다. 계엄령이란 계엄을 어기면 그걸 군사재판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완룡 이란 분이 내려갑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임자가 한 달 안에 그 빨갱이들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하고 올라오라 그렇게 되어야만 계엄령을 해제하겠다 라고 얘기하죠. 이 위기가 얼마나 잔인한 방식의 통제와 학살로 이어지는가 하는 걸 보여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이 계엄령이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엄령이란 비상시기에 대통령의 권한으로 선포할 수가 있지만 사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다룰 법령들이 있어야 돼요 (계엄법 제정 1949.11.24, 최초의 계엄령 선포 1948.10.21). 그런데, 이게 정부수립 초기, 아직 법령마저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다니엘: 그건 법이 아니라 권력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거지요.
일동: 그렇죠.
최원정: 그런데 이제 군 내부에서도 공산주의자 색출이 이루어진다면서요.
----------------------------군 내부 공산주의자 색출 숙군(肅軍)----------------처형장으로 향하는 군인들, 2개월 동안 진행된 여순사건 관련 숙군 결과, 재판 2817명 사형 410명 무기징역 563명 오전 재판 오후 사형 확인 사살---------이후 한국전쟁까지 숙군 지속 총처형 인원은 확인불가
-------------------------------충격--------------------------
최원정: 손이 바르르 떨리지 않으세요?
오정해: 군인들이 제 아들 또래니까 (이걸 가족들이 보면은-----)
최원정: 말이 안나와 가지고~ 이런 동영상이 남아~
박태균: 저게 미군쪽에서 다 촬영을 했고요. 사실은 저 시대는 저희가 지금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와는 다른 시대였다 라고 봐야 됩니다.
이시원: 재판 2817명에 사망이 410명 이었는데 사망자중에 억울한 분도 많을 것 같거든요.
박태균: 있었을 겁니다. 있었을 건데 정부의 입장에서는 정부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물리력이고, 그게 군인데 군내에서 총구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는 정부한테 굉장히 큰 위기가 오는 거구,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빨갱이를 숙청하는 거죠. 군내에 있는 좌익분자들을 색출해 내는 겁니다.
최원정: 저분들의 표정이 너무 생생하잖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동영상을 잠시 머리 속에서 지우고요. 마지막 남은 사람 얘기를 하겠습니다. 박정희 당시 소령, 박정희 前대통령의 모습인데, 아셨어요? 박대통령이 연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정해: 전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이시원: 저는 살짝 듣긴 들었어요. 남로당 당원이었다. 근데 이때 살아남았거든요 어~ 이게 안들켰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걸 누가 도와주었다 라는 설이 있더라구요.
박태균: 여순 사건 당시에 소령이었는데 남조선 노동당의 군내의 총책이었다 라고 얘기가 되고 있죠. 수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은 자기 주위에 있었던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되어있다 라거나 사상이 불순하다거나 한 사람들에 대해서 다 보고를 한 거죠. 그러면서 이제 원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됩니다.
최원정: 사형선고까지 받았어요?
박태균: 네, 네, 그 당시에 한국군의 핵심이라고 했었던 김창룡, 여기 백선엽, 또 한 분이 하우스만 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주한미군에서의 군사고문 역할을 했던 분인데 이 분들이 박정희 구명운동을 합니다. 박정희는 좀 살려주어야 된다.
이시원 & 오정해: 왜요?
박태균: 그거에 대한 또 하나의 공헌이 있었던 거죠. 박태균: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나왔지만 2년을 다니고 거기서 굉장히 성적이 좋아서 또 일본 육사를 나왔습니다. 엘리트 군인으로서의 부분들이 참고되어서~
박상영: 군인으로서 쓰임이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거죠.
박태균: 그리고 사실은 박정희 소령이 그때 모든 명단에 대해서 제공을 하지 않았다면 군내에서의 숙청작업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가 없었어요.
박상영: 그게 가장 메인 요인 이라고 볼 수 있군요.
최원정: 창군 당시에는 우리 군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된다~ 이런 기조가 있었다면 이제는 대놓고 사명감으로 반공 멸공을 실천하는 군대가 된 거에요.
박태균: 그렇죠, 저는 군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전반적으로 사회적으로 반공교육이 본격화 되기 시작을 하는데 사실 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은 이승만 정부에게는 굉장히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 안에서 한국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 (1949.12.1. 공포)-반국가 활동을 규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제정한 법률).
최원정: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국가보안법을 말하는 건가요?
박태균: 그렇죠, national security law 라고 하는 게 바로 여순 사건으로 인해서 처음 제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다니엘: (여순사건이)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박태균: 여순 사건으로 사회가 굉장히 불안해진 상황에서 사회를 통제해야 되는데 통제가 쉽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비정상적인 법을 갔다 놓는 거죠. 준전시 상태를 만드는 거죠.
박상영: 정말 여순사건이 대한민국의 곳곳에 엄청난 많은 영향을 미쳤네요.
박태균: 중요한 건 첫번째 이 사건이 과연 무엇을 요구하는가, 당시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사건이었는가, 두번째는 여순 사건은 4.3사건과 마찬가지로 시작 과정에서는 좌익 사람들이 사건을 촉발을 했지만 이후에 나타나는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문제는 분명히 규명을 해나가야 한다.
다니엘: 결국은 두가지 역사적 사실을 앞으로 보는데 어느 한쪽만 치우치면 제대로 된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양쪽을 다 봐야 되고 4.3 사건은 그래도 비교적 좀 반성도 많이 하고 대통령도 사과하고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여순사건은 애매한 것 같애요. 좌익 군인들로부터 시작한 반란의 역사이니까~
이시원: 그래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고 해요. 여순 사건 당시 29살이었던 순천역 철도원 장환봉씨가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돼서 총살되었다고 해요. 다행히 2020년 1월 20일 7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어요. 유족과 지역사회 사람들이 이 판결로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많이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최원정: 민간인들이 학살된 여수 만성리 마래터널 입구에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데요. 모습이 이렇습니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2009년 10월 19일----------이 뒷면이 말줄임표-------점 6개로 마무리가 되었어요.
논쟁들이 많아서 갈등들이 있어서 이렇게 처리되었다고 하는데 오늘 여러분, 같이 한 시간 얘기 나누면서 여기에 채워져야 될 문구가 분명히 하나씩 떠올랐을 것 같애요. 부탁드려 볼까요, 제가? 여기 또 준비 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정말 비극적인, 하지만 너무 중요한 사건인데 말 줄임표 점 6개로 마음 아픈 일이예요. 오정해님께서 진작에 다 쓰셨네요~ 뭘 쓰셨써요?
오정해: 이 비를 세우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아픔을 잊지말고 함께 기억하고 그 아픔이 현재 진행형이다 보니까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그 아픔은 덜 아프지 않을까. 그래서 묘비 보면은 가족들의 이름을 쓰잖아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라고, 그 마음 나도 압니다 라고 자기 이름을 써넣어 채워져 가면 어떨까.
박상영: 사료깊은 비문이었네요.
최원정: 제 이름도 같이 적어주세요. 교수님, 마무리 해주시죠.
박태균: 저는 여순사건에 의해서 희생된 분들의 유족분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구요. 이분들이 원하는 건 보상도 아니고 보복도 아닙니다. 그냥 내 가족이 왜 죽었을까. 이분들이 정말 저들이 얘기한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었는가 다 한결 같이 원하시는 것이 진실을 밝혀 주세요. 누가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과거사에 발목 잡히면 미래에 못나가는 게 아니냐 이분들이 얘기하는 건 발목 잡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진실만 밝혀달라 저는 진실을 밝히면 저희가 모두 같이 미래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최원정: 영화 태백산맥에서 그 소하가 마지막으로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하는데 특별히 배우 오정해씨께 싯김굿 장면을 부탁드리면서 이 시간 마무리할까 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61회 1948년 여순사건, 군인반란에서 정리).
① 1948.10.19.밤, 제주 4.3사건진압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죽이며 5시간만에 여수를 장악한 군인들은 다음날, 바로 순천까지 장악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어렵살이 창설된 군이 국가를 향해 총뿌리를 겨눈 것이다.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것, 진압을 위해서 출동을 해야 하는 군인들이 우리는 출동할 수 없다. 우린 진압할 수 없다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 그러니까 여수군인반란을 얘기할려면 제주4.3을 이해해야 된다.
②, 1948.10.19. 저녁 7시 50분, 비상나팔소리에 연대원 2700명 정도가 연병장에 집합, 이들은 그날 저녁 10시에 제주도 출병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 봉기를 계획했던 사람 중에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뛰어올라 외친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그렇게 반란은 시작됐다. 반란군은 저녁 8시쯤 모여서 무기를 다 획득한 다음에, 다음날 새벽 1시에 여수 경찰서를 습격한다. 반란군과 경찰이 시가전 전개, 새벽 3시쯤에 여수 경찰서 점령, 그리고 여수 시내의 읍사무소 등 주요 기관을 점령을 해서 인공기를 내건다. 단시간에 여수를 점령한 14연대는 파죽지세로 순천으로 달려가서, 순천쪽에 파견나와 있던 남로당원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2개 중대, 인원 2, 3백명 정도는 14연대와 합류하고 순천경찰과 대치, 순천경찰은 반란군에 맞설 추가 병력증원 요청, 그래서 광주에서 제4연대가 이동을 한다. 그런데, 광주 4연대는 순천경찰의 편에 서질 않고 바로 14연대와 합류한다. 반란군과 한 통속이었다. (참고로, 이로 인하여, 현재 대한민국 군에는 4자가 들어가는 연대번호를 쓰지 않는다, 왜냐면 14연대와 4연대 둘 다 4자가 들어가는 반란의 역사, 4자라는 숫자의 나쁜 이미지 때문이다).
③ 국가가 유지 될려면 돈과 이데올로기와 물리력인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물리력이 여순 군인반란사건으로 흔들렸다. 이 사건이 그래서 중요하다.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정부수립이 되면 나간다. 소련군은 12월에 나간다 (1948.12.25). 미군도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어서 12월에 나가야 된다. 그런데,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는데 물리력이 불안하다. 미국이 지금까지 노력한게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미군 철수가 1949. 6월까지 연기된다. 이게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됐다.
④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차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 두 가지 약속을 받았다. 첫번째, 남한에 대한 전기를 끊지 않는다, 두번째,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더라도 북쪽은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김일성은 하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배신당했다.
⑤ 1948.10.21. 군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방위를 위한 수도권 부대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부대를 전남지역에 투입, 그런데 우리군은 연대급 이상 전투경험이 없었다. 부대들 간의 합동작전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지휘계통의 혼란이 왔고, 통신장비가 미비하여 정확한 상황 전파, 명확한 명령 전달에 문제가 생겼다. 심지어는 아군끼리 서로 적군인 줄 알고 오인사격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2일에 순천을 탈환하고, 10월 24일에 보성과 벌교를 탈환하고, 그리고 여수가 남았는데, 마침내 10월 27일에 여수를 탈환한다. 여수탈환을 계기로 우리군은 상륙작전을 전문적이고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해병대를 1949년 4월 15일에 창설한다.
⑥ 우리군에 의해 패배한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했기 때문에 반란군을 상대로 지리산 토벌작전, 즉 빨갱이 섬멸작전을 전개한다. 반란군이 빨리 진압된 걸로 봐서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여순반란 사건 2~3일간 반란군에 의해서 지방지주들이나 관료들이 많이 살해당하였다, 심지어 군청 경찰서장이 구타를 당한 뒤에 산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⑦ 반란군이 여순을 장악한 상황에서 벌교 같은 경우는 반란군과 소작인들에 의해서 대지주가 죽임을 당했고 이건 현재도 지주와 소작인들 간에 앙금으로 남았다. 반대로 당시 잔인한 반란군의 행태를 목도하고 그 보복심리도 상당해서 그 당시에 반란에 가담했거나 또는 인민위원회 재판을 열어서 우익이나 지주에게 가해를 한 사람들은 응징을 당하는 죽이고 죽이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당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은 그게 죄라고 생각하지를 안했다. 이런 과정들이 결국은 비극을 더 키우게 되었다.
⑧ 사실 색출과정에서 지목을 안해서 살아난 사람도 있다. 이게 개인 감정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그 이후에 후유증이 굉장히 컸다. 그래도 나름의 심사기준은, 총을 소유한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자른자, 그리고 바지를 벗겨봐서 미군용 팬티를 입은 사람, 또 여수를 장악했을 때 인민위원회가 나누어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는 자를 색출해서 처형을 했다. 색출이 되면 즉결 사형당해진다.
⑨ 반란군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저항 중이었다. 그쪽 주민들은 굉장히 공포에 시달렸다. 양쪽에서 고초를 당했다. 낮에는 진압군에 의한 부역자 색출, 진압군이 떨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끌어내어 데리고 간다. 영길네도 나오더라고~, 남편이 입산 안했는가? (한 아낙이 끌려 나온다), 용강 아재! 아재 아들 내보냈지? (한 남자가 끌려 나간다). 代殺(대살)-입산자 가족 대신 처형, (또 한 남자 끌려 나간다). 아재는 빨갱이들한테 소 줬지? 내가 준 것이 아녀, 빼앗아 간 것이여! 밤에는 반란군에 의한 처형과 식량 수탈.
⑩ 반란군: 인민을 배반하고 악질 반동분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소, 동무들! 불타는 적개심, 이 반동분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우리의 변치 않는 투쟁의지와 단결을 다짐합시다! 진압군: 칠곡리 주민 여러분! 전 주민들은 오늘 17시 부로 이 마을에서 즉시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빨치산 물자제공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움). 이 마을에 출몰하고 있는 잔비도당들이 완전토벌될 때까지 이 마을은 소개될 예정 이오니 주민 여러분은 빠짐없이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울부짖으며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
⑪ 1949.11.11. 전남도청의 피해 조사결과-사망자-11,000여명, 가옥파괴-1만호 이상, 이재민-삼십만명, 2005년에 여수 지역사회 연구소가 인명피해 중 민간인을 따로 조사결과: 반란군이 죽인 민간인 사망이 152명, 그 반대로 여수가 회복이 된 다음에 군경이 죽인 사람은 2117명, 희생자 중에는 연좌제 문제로 발설을 안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⑫ 호남이 곡창지대인데 일제 때 엄청 수탈당했고 해방 후에는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친일 경찰한테 수탈당하고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북쪽에서 토지를 무상분배한다는 소식이 굶주리는 사람들이나 농부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내 새끼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부모들에게는 굉장한 미혹이었을 것이다. 고로, 지주와 친일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법적인 절차 없이 처형했다는 건 우리나라 역사의 과오다.
⑬ 이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한국 현대사 최초 계엄령 선포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법무관 김완룡이 내려간다. 계엄을 어기면 그걸 군사재판에서 다룬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임자가 한 달 안에 그 빨갱이들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하고 올라오라 그렇게 되어야만 계엄령을 해제하겠다. 이 위기가 얼마나 잔인한 방식의 통제와 학살로 이어지는가 하는 걸 보여준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이란 비상시에 대통령의 권한으로 선포할 수가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다룰 법령들이 있어야 했다(1949.11.24-계엄법 제정/ 1948.10.21-최초의 계엄령 선포). 이게 정부수립 초기, 아직 법령마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⑭ 여순 군인반란 사건으로 군은 충격을 받아 내부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섰다. 肅軍이다, 2개월 동안 진행된 여순사건 관련 숙군 결과, 재판 2817명 사형 410명 무기징역 563명, 숙군작업은 한국전쟁까지 지속 총처형인원은 확인불가
⑮ 이승만 정부에서 정부를 지킬 수 있는 최후 보루가 군대인데, 군내에 총구를 거꾸로 정부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는 정부한테 굉장히 큰 위기다. 그래서 군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 작업, 소위 군대내 빨갱이를 숙청해야했다. 그런데, 박정희 前대통령이 남로당 당원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박정희 前대통령은 소령이었는데 남조선 노동당의 군내의 총책이었다. 박정희는 원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다, 수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백과 보고로 군내 숙군작업이 빠른 시간내에 종결되었다. 그 당시 한국군의 핵심인 김창룡, 백선엽 장군, 또 한 사람 하우스만이 있다. 이분은 주한미군 군사고문 역할을 했던 분인데 이 분들이 박정희 구명운동을 했다. 박정희는 살려주어야 된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나왔고 거기서 또 일본육사를 나왔다. 엘리트 군인으로 장차 군에 쓰임이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다, 더 중요한 요인은 박정희 소령이 군내 모든 좌익군인 명단을 제공해서 숙청작업이 빨리 이루어지는데 공헌을 했다.
⑮-1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곳곳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law)이 제정되었다. 군이 창군 당시에는 정치적 중립 유지기조였다면 이제는 대놓고 반공 멸공을 사명감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반공교육이 본격화 되었다. 반공은 이승만 정부에서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은 좌익 사람들이 사건을 촉발했지만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문제는 규명을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보는데 어느 한쪽만 치우치면 규명이 제대로 안된다. 양쪽을 다 봐야 된다. 제주 4.3사건은 비교적 반성도 많이 하고 대통령도 사과하고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좌익 군인들로부터 시작한 군사반란의 사건으로 애매하다. 그래도 작은 변화는 여순 사건 당시 29살이었던 순천역 철도원 장환봉씨가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되서 총살되었는데, 다행히 2020년 1월 20일 7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족과 지역사회 사람들이 이 판결로 다른 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도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