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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샐리 티스데일 /Being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요약정리>
1.위험한 상황 2.저항
“사기그릇은 언젠가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다......사기그릇의 생명력은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p.14)
철학자이자 시인인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자연은 참으로 무례할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하고 통지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상징적 표현을 즐겨 쓴다. 특히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흥분하거나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혼미할 땐 여권과 가방을 찾거나 얼른 기차를 타러 가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런 표현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실제로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과 흡사하다.....(중략)
그 여행이, 그 여정이 어떨 것 같은가? 어떤 옷을 입고 싶은가? 미리 생각하고 가방도 싸야 한다.....(중략) 죽음 자체에, 당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좀 더 편해지고 싶으면, 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p.30-31)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애도의 다섯 단계,
1.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대응기제를 부정과 고립
2.(격노,시기,분개를 포함하는 분노)
3.불가피한 일이라면 그 일이 발생하는 시기를 늦출지도 모를 합의에 들어가는 협상,
4.엄청난 상실감에 빠진 우울
5.환자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울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용
이 다섯 가지 감정 상태를 정신의학 용어인 방어기제, 즉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대응기제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각기 다른 시간 동안 지속되고, 대체되거나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p.48)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50)
3.좋은 죽음
좋은 죽음이란 “환자와 가족과 돌보는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환자와 가족의 바람에 전체적으로 조화되며, 임상적,문화적. 운리적 기준에도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p.63)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이 우리 삶과 어울릴까? 우리가 살기 위해 애썼던 방식을, 살고 싶었던 방식을 죽음에도 반영할 수 있을까? 막연히 ‘좋은 죽음을 바라지 말고, ’적합한 죽음‘을 고민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p.77)
죽음을 가장 많이 목격하는 보호 시설, 가령 호스피스에서는 좋은 죽음을 어떻게 규정할까? ‘행해질 수 있는 일이 다 행해졌다고 판단될 때 조용히 떠나는 책임감 있는 ‘개인’이 전제된다.(p.77)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존엄성)를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토마스 브라운 경은 “죽음은 두렵다기보다는 죽음으로 인한 결과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수치와 불명예를 안긴다. 순식간에 외양을 흉하게 망가뜨려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아내와 자식들마저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랄 정도다”라고 적었다. 브라운 경은 죽음에 수반되는 ‘동정의 눈물’이 너무 싫어서 차라리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익사하고 싶다고 말했다.(p.78)
조력사를 택하는 사람들이 흔히 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품위 유지이다. 그런 죽음에 ‘존엄사’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준다.
우리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인권이라는 개념에는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존엄성을 지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난민과 전쟁 포로가 도움을 받아 마땅한 건 그들이 내재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수모’를 겪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엄성은 우리가 가진 핵심 자질인가, 아니면 통제력 행사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가?(p.79)
우리는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괴로움을 감추고 싶어한다.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죽음이 멋지게 보이길 바란다. 당신의 마지막도 특별해 보이길 바라는가? 초월적이고 영적인 죽음이길 원하는가? 하지만 죽음은 그저 처절할 뿐이다. 죽은 뒤에 벌어지는 일을 생각해보라.(p.80-81)
부처(식중독으로 임종시)-
“보라. 너희도 이러할지니라.
이런 일이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은 삶의 한 부분이요. 살아가는 방식의 한 부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왜 고개를 돌리려 하는가?”
->바로 우리가 주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편안할 수 있다는 것. 부처의 존엄성은 신체 기능의 소멸과 아무 관련이 없다.(p.83)
4.의사소통
죽어가는 사람을 방문할 때는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설정된 범위는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
범사에 감사해야지라고 압박하지 마라. 그들의 행동을 보고 넌 지금 협상 단계에 들어간 거야라는 식으로 아는 척하지 마라.
너를 위해 기도할게라고 말하지 마라. 이건 위기가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거야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라. 이런 말은 사이를 갈라놓을 뿐이다. 믿음과 신뢰, 선의와 헌신을 훼손할 뿐이다.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일 거야라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너라면...이라고 말하지 마라. 당신 친구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입장익길 바랄지도 모른다, 괜한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말고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서하고 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와주라. 그것도 당사자가 도움 받는 걸 수락했을 때만 나서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다음엔 입을 다물라. 환자는 도움 받을 준비가 됐을 때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p.109-110)
5.마지막 몇 달
임종을 앞둔 환자의 ‘간병’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 환자가 오밤중에 깨서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환자가 병상에서 떨어지면? 게다가 피까지 흘린다면? 당신은 환자가 침대에 토하거나 설사라도 하면 옷과 시트를 갈아줄 수 있는가? 밤을 꼴딱 새울 각오가 돼 있는가?
‘좋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들의 죽음은 대부분 좋은 죽음이라 자신할 수 있다. 많은 이가 노인 보호시설과 실버타운, 요양원 등 노인과 환자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시설에서 좋은 죽음을 맞이한다.(p.140-141)
흑인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백인보다 훨씬 적다. 불치병에 걸렸는데 상급소생술을 받겠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백인보다 크다. 하나님이 고통에서 구원하고 기적을 이뤄줄 거라는 종교적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독실한 흑린 기독교도 사이에선 호스피스 시설에 들어가거나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는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완화의료팀에서 일하는 한 흑인 목사는 이러한 분위기에 반기를 든다. “그들은 치유를 갈망하고 기도하지만 죽음이 곧 치유라는 점을 깨닫지 못합니다.....당신이 원하는 치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사람은 태어난 이상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진 풍파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곧 치유입니다.”)(p.143-144)
어느 신경과 전문의가 호스피스 의사를 ‘죽음의 예술가’라고 적은 에세이를 보고 정말로 화가 치민 적이 있다.(보나마나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별로 없는 의사일 것이다.) 실제 죽음의 예술가는 죽어가는 당사자이다.(p.149)
->이 말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어려운 질문이지만 의사가 예술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온몸으로 스스로 혼자서 죽어가는 그가 진정 죽음의 예술을 펼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젠 세상과 하직할 장소를 결정할 시간이다. 뿌린 씨를 거둬야 할 시간이다. 집에서 눈을 감고 싶다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 이웃과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교회와 재향군인회와 모든 곳에 연락하라.
아는 사람과 단체와 조직에 죄다 연락한 다음엔 괜찮은 호스피스나 완화의료 프로그램을 신청하라, 깨알같이 적힌 문구를 꼼꼼히 살핀 다음 보장된 사항을 온전히 누리도록 하라.(p.152)
7.마지막 몇 주
‘죽음 태도 척도,’
이를 개발한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공포와 수용이 불안정한 휴전 상태로 공존한다.”고 추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예 회피하는 것을 구별하고자 했다.
“죽음이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불안하다.”
“죽음은 단연코 암울한 경험이다.”
“죽음은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여긴다.”
“모든 화합물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세상 만물은 서로 화합하여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사라진다. 이 말은 나 역시 화합하여 생겨났다가 결국 사라진다는 뜻이다.(p.156-157)
<원더풀 라이프-원제 : 사후(死後)> 일본영화 / 사람이 죽은 뒤 잠시 머무는 곳에 관한 우화.-가장 좋았던 순간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이 영화의 핵심내용.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살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고르느라 바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고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모험이나 경험,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였다.
뭔가를 이루고 난 뒤에 맛보는, 피곤하지만 뿌듯한 순간 말이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땀에 젖고 배도 고프고 여기저기 쑤시지만 집에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p.159)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사람의 몸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p.160)
음식을 서서히 중단하며 100세까지 생을 마감한 평화주의자 스콧니어링의 마지막 죽음을 준비하는 부분.(p.169)
모든 게 변한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든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같다가 돌연 마구잡이로 터진다. 그러다 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함께 길을 걷다 헤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걷거나 한 사람이 앞서고 나머지가 뒤따르며 걷는다. 갈림길에 이르러서 우리는 한동안 서성거린다. 그러다 한 사람이 몸을 틀고 한쪽 길을 따라 걸어가면 남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배웅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이 귀를 닫고 입을 다물고 싶어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당신의 직장이나 아이들 얘기도 더 이상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냥 홀로 걸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p.172)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뿌연 안개 속에서 해매다 결국엔 길을 찾아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차게 노래하며 씩씩하게 나아갑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한다.(p.173)
‘간섭받지 않을 권리’
보건의료에서 ‘무익함’이라는 말은 법률 용어로 사용된다. 의사와 일단의 사람들, 심지어 병원도 무익한 치료라는 이유로 고통만 연장시키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치료의 무익성을 제기한다고 바로 효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중략)
상심한 배우자나 자식에게 그런 말은 무력감과 죄책감을 야기한다. 무익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실제로 올바른 돌봄 행위인데도 말이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낼 때, 우리는 ‘플러그를 뽑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죽을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과도한 기술과 침습적 치료에서 환자를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죽을 자유를 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돌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p.174-175)
세상 만물이 전보다 더 사소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차이는 별게 아닙니다. 다만 만물의 모습이,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작가 데니스 포터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전의 말)
8. 마지막 며칠
영국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부고가 많이 실리기로 유명하다. 극히 간결한 문장의 사망 소식이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여기에 실린 죽음은 참으로 용이하고 자연스럽고 예견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사랑을 듬뿍 받았다. 93년 동안 멋진 삶을 누리고 잠시 앓다가 떠났다. 가족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생 살던 집에서 마음 편히 떠났다. 딸이 곁에서 지켜보는 와중에 94년을 일기로 사망했다. 집에서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쓰러졌지만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에서 떠났다.’
‘사랑을 듬뿍 받았다. 99세의 “고령”으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p.185-186)
여러분의 임종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나요? 나의 부고장을 미리 한 번 써보세요.
NODA(No One Dies Aione)는 홀로 외롭게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를 위해 자원봉사자가 곁을 지켜주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늘 여기에 살짝 거부감이 있다. 임종 환자가 마지막 몇 달과 몇 주를 외롭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임종 순간에 꼭 관객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홀로 죽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홀로 있을 때 죽으려 한다. 몇 주 동안 홀로 남겨진 적이 없던 사람들이 간병인이나 배우자가 잠시 화장실 간 틈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왜?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만큼 정중하고 너그럽고 고상할 수 있다.(p.187-188)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그 경험을 혼자 오롯이 느끼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임종을 앞둔 사람을 잠시라도 혼자 있게 하라. 불안하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라.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하라.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어쩌면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일어나도 괜찮을 것이다.
“이젠 내 걱정 하지 말고 편히 가셔도 돼요.”(p.188)
죽음의 문턱에선 누구도 진정으로 혼자 있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유형과 무형, 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가르는 선이 너무나 흐릿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영적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를 ‘임종현상’이라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본다면, 그 죽음이 외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점을 명심하세요.”(p.198-199)
나는 죽어가는 사람이 길을 찾는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그들은 손에 나침반 같은 걸 들고서 길을 찾고 있다. 문득 리키 리 존스의 아름다운 노래.<러닝 프롬 머시>가 떠오른다. 나는 죽어갈 때 이 곡을 꼭 틀어달라고 할 생각이다. 리키 리 존스는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한다.
“저기 문이 있어요. 그 문으로 들어갈 거예요. 난 그 문이 어디 있는지 알거든요.”(p.200)
여러분은 이 삶의 마지막에서 어떤 노래를 듣고 싶나요?
9.마지막 순간
시신 마리 하우는 죽음의 순간을 어떤 것의 종료나 중단이 아닌 완성으로 여긴다. 삶의 총결산인 셈이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맛보는, 피곤하지만 뿌듯한 느낌에 대한 영원한 기억이요. 예전엔 미처 몰랐던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마리 하우는 <죽음, 마지막 방문>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침내 / 누군가가 당신의 구두끈을 절대로 풀리지 않게 묶어주었다.”(p.213)
10. 시신
우리는 사람에서 사물로, 고기로, 썩은 고기로 진화되고, 결국엔 웅덩이로, 새로운 파리로, 흙과 뿌리로 진화된다.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과 구더기만큼 탄생의 충만함과 죽음의 충만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게 있을까? 파브르는 이렇게 썼다.
“구더기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동물과 인간, 거지와 왕이 모두 똑같다. 거기서 당신은 진정한 평등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평등을 얻는다.”(p.250)
메멘토 모리. 기억하라, 그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p.256)
죽어서도 쓰이는 육체가 탄피로, 폭죽으로, 연필로, 스테인드글라스로도 만들어진다니 과학의 발전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수장, 풍장, 매장, 우주장 등의 장례문화의 발전과 죽은자를 위한 리소메이션이라는 친환경 화장이라는 바이오 화장이라고도 한다. 알칼리성 가수분해는 오래전부터 죽은 가축을 처분하는데 사용돼왔다. 불로 태우는 대신, 물과 수산화칼륨 속에 담근 채 176℃의 온도로 가열하는 것이다. 몇 시간 뒤, 살과 조직은 모두 녹아버리고 깨끗해진 뼈는 푸석푸석해져서 금세 분쇄가능하다. 화장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연료도 상당히 적게 사용하며 수은 수증기도 배출되지 않는다. 불꽃이 없는 불과 물의 결합으로 뜻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p.259)
11. 애도
애통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억의 띠가 되어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다.(p.268)
애통 회복 세미나에서 누군가가 울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울면서 말도 하라’고 부드럽게 권한다. 감정은 말에 담겨 있지, 눈물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생각과 감정을 말로 토로하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사라진다. 겉으로 드러낸 감정의 깊이는 단순한 눈물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 같다..... 눈물은 진정한 아픔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할 뿐이다.
애통과정에는 늘 후회가 따른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애통은 후회하는 마음이다. 분노하는 마음이다.(p.274)
12.기쁨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시니어의 마지막 말.
부록1
죽음 계획서 준비하기
부록2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부록3
장기와 조직 기증
부록4
조력사
리키 리 존스의 <러닝 프롬 머시>
https://youtu.be/jLnF64h6b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