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밑 가덕도에서 태어나, 그러나 내가 태어난 내 외가의 외할아버님께서는 술병에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따라 어쩔 수 없이 나도 일찍 가덕도에서 나와 부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4학년쯤에 고려말엽부터의 선영이 있는 경북 영일군 청하면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가자마자 나를 반긴 건 그 시골동네 아이들의 후덕한 환대였다.
그들은 도시에서 살다가 와서 시골생활에 덜 익숙한 나를 이런 훌륭한 노래로 환대했다. ㅡ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괴기.^^ 물론 나는 그들의 놀림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얼마 있지 않아 그들도 내가 서울출신 아니란 걸 알고, '야. 절마 저거 서울내기 아니란다.' 하며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나 도무지 그 동네 아이들과 빨리 친해지지가 않았다. 나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그 아이들이 가진 생활방식, 즉 보리나 밀이 익기 전에 서리하여 불에 그슬려 먹는다거나, 개구리를 잡아 몸통은 떼버리고 보리 줄기에 다리만 엮어서 구워먹는 방법 등을 내가 몰라서 그럴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집 옆에 나 보다 한 15살쯤 윗벌인 형님한 분이 계셨는데, 그 형님 이름이 바로 '청갭이'(靑甲)였다. 그러나 우리가 호칭하기는, 야, 청갭아~였다. ^^ 아마도 그 형님의 선친께서 이름 지으시기를, 삼천갑자 동방삭은 못되더라도 그저 한 갑자 동안만이라도 아무려나 푸른 청춘으로 꿋꿋하게 살라고 지어준 이름 같은데, 내가 그런 건 그 형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동네아이들의 공동호칭이 그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의 그 극성스런 악다구니에도 씩~ 한번 웃고는, 커다란 꼴망태를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어서 들로 나가곤 했었다. 그 형님은 바보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어릴 때 그 형님의 선친은 태생과 근본이 상당히 뼈대 있는 양반급 시골 토호였는데, 딸만 아마 내리 일곱 낳고 첩얻어서 낳은 쉰둥이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귀한 아들이라고 너무 위한 게 화근이 될 줄이야. 김장배추 속떡닢같은 어린 것에게 병 없이 튼튼히 자라라고 산삼 녹용을 들입다 독에 퍼 넣듯이 한 반년 장복을 시켰더니, 아이가 잔병이 없이 튼튼하게 크기는 했는데, 그만 바보가 되어 버렸다 한다.
늦게 본 자식이라 금방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이미 출가외인 되어버린 누이들은, 설상가상 배 다른 바보 동생을 못 본체 해 버려서, 그 때 그가 살던 집이 먼 외조부뻘 되는 집이라 그 집 어른께서 거둬주시는 모양이었는데, 말이 거둬주는 거지 그냥 일반 머슴과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늘 혼자였고, 그러고 보니 그 즈음 나도 혼자였다. 바로 옆집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이들과 한동안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노는 내가 측은했던지, 감꽃 떨어지면 감꽃을 금방 한 소쿠리 주워주기도 했고, 내 머리통만한 감자를 짚불에 익혀 주어,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내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 어머니께서는 그런 나에게 무슨 질병이라도 옮길까봐 같이 놀지 못하게 끈질기게 말렸으나, 나는 그나마 청갭이 아니면 시골의 그러한 느낌이든가 색깔, 맛 등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 한번은 어머니께 들켜서 이번엔 청갭이가 단단히 욕을 먹고 혼쭐이 났다.
그 이후로 청갭이는 우리 집을 스쳐 지나가다가 멈칫 서서 나를 힐끗 측은한 눈초리로 멀리 바라보기만 하다가 갔을 뿐, 우리 집 마당에 아예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정도의 어려움에 굴복 당하여 포기할 만큼 나약하였다거나 용감했다거나하는 그런 종류의 마음보다도, 처음 해 보는 시골생활에서의 그 신기한 자연에 더 가까이 접촉하고픈 욕구가 강렬했던 것 같다.
나는 청갭이가 늘 일을 하는 동네 근처의 밭이나 논으로 찾아갔다. 으레 소를 산 밑에 매어두고 논이나 밭일을 하곤 하였는데, 나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논이나 밭에서 달려 나와 그 두툼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하였다.
그는 정말 마술의 손을 가졌었다. 개천에 손을 담그면 까무잡잡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가재가 잡혀 올라왔고, 큰 나무에 손을 대면 매미, 장수하늘소, 반딧불이가 달려 나왔으며. 논에 손을 담그면 우렁이나 미꾸라지, 가물치, 밭에 손을 담그면 감자나 고구마 무가 올라왔다. 작은 나무에 손대면 열매가 쏟아졌고, 산에 들어가면 갖가지 이름 모를 숱한 꽃들을 쥐고 왔다.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늦봄 하얀 찔레꽃을 한 아름 꺾어 가시에 긁힐까봐 어름 넝쿨 껍질을 얇게 벗겨 줄기를 감아 나에게 주었는데, 그 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서 잠시 정신이 아뜩하게 나갔다 들어온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하도 예쁘고 향기가 좋아서 집에 가져와 주둥이 기다란 호리병에 꽃아 두고 두고두고 냄새를 맡았다. 밖으로는 아련하고 안으로는 아득하게 덧없던 그 향기ㅡ. 세월이 몇 년 지났던 것 같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툇마루에 앉아서 나비들이 폴폴 날아다니는 마당을 보고 있노라면 그 무르익은 햇살에 온 산천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어느 봄날에, 청갭이는 그 동네를 떠났다.
어깨 너머 들은 얘기로 그 집 아들들도 그새 논밭 일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컸고, 별로 많지도 않은 전답이나 또한 신통찮은 살림살이에 입이나 하나 덜어보자고, 다른 동네 머슴으로 돈 받고 팔아넘긴 모양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리 속 깊은 슬픈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그 때쯤에는 나도 시골살이에 제법 익숙해졌고, 더군다나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동네 아이들과 몸 부딪히며 어울려 늦봄 냇가에서 뜰채로 피라미 잡이에 열중하던 터였다.
개천에 발 담그고 아이들에게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러한 친한 사람과의 이별이라던가 하는 것이 별로 현실적으로 실감은 나지 않았고, 잠깐 뜨악했을 뿐, 곧 다시 만날 수 있으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우리 동네로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무정한 세월 위로 거침없이 세월이 흘렀으며 그 세월 위로 또 다른 세월이 무참하게 흘렀다. 너도 나도 모두 다 돈벌이가 수월한 객지로 떠났으며. 어느 순간 이번엔 드디어 나도 그 동네를 멀리 떠나 객지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리고 몇 십 년이 더 흘러, 이제야 그 동네서 아득하게 먼 다른 동네에 머무는 나를 본다. 나는 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머무는 어린 시절 시골생활에서 얻은 그 소중한 것들의 모든 근간에는 '청갭이' 그가 머무르고 있었음을…….
그러나 사람들이여. 사람이 안들 무얼 어떻게 얼마나 알겠나? 몇 십 년 후 나에게 되돌아온 그에 대한 소문은, 그는 끝끝내 결혼도 못하고 자식도 없이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이 머슴 생활을 하다가, 이미 몇 년 전에 저 먼 강원도 이름 모를 산골에서 늙고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을 그 동네 사람들. 아아, 삼년 안에 흔적도 남지 않을 봉분 없는 평토장이라도 좋았으려니, 평생 남에게 해코지 한번 한 적 없이 아름다운 마음씨로 순박하게 살았던 '청갭이' 그를, 찔레꽃 향기 흐드러지는 양지바른 쪽에 묻어주었을까? ㅡ 音 이병우 ‘혼자 갖는 茶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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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골의 풍경을 잘 그린
글이네여 나 또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익숙하네요
시골에 청갭이 같은
사람은 하나씩 있는것 같어여
울 동네도 있어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