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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83) : 코로나가 주는 교훈 4 (심판)
마태복음 23:34 ~ 3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 장로님께서 옛 사람들이 쓰는 그 음력 달력이 참으로 잘 맞는다 그런 얘기를 하십니다. 실제로 저희도 한참 더울 때 입추였습니다. 야 이렇게 더운데 무슨 입추야 입추, 라고 불평했지요. 무슨 가을이 벌써 와, 이렇게 더운데 라고 했는데 그 입추가 지나자마자 조금씩 조금씩 더위가 물러나더니 요즘에는 새벽에 이불이 없으면 추워서 잠을 못 자 할 정도로 선선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수요일 기도할 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인 부르키나 파소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 박소연 김정남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날 선교 보고와 선교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그 5년 동안 사역하시다가 오랜만에 가족 전체가 아이들도 같이 데리고 한국에 오셔서 재충전을 좀 갖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보통 그 부르키나파소의 기온은 40도 50도 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뉴스를 보니 뉴스 일기 예보에서 내일 한낮의 기온이 37도가 넘으니 외출을 조심해 주십시오 라고 얘기하니까 그 선교사님 자녀가 엄마 37도는 시원한 건데 왜, 외출을 조심해야되 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웃으면서도 마음이 찡했습니다. 이 선교사님 가정이 그 50도가 넘는 그 힘든 선교지에서 정말 선교를 감당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두 곳에 파송선교사를 보내고요, 그리고 19 곳에 협력선교사, 그리고 네 곳에 협력 선교기관을 돕고 있습니다. 박소연 선교사님처럼 코로나 시대에 우리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선교지에서 힘들게 그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지요. 우리도 코로나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렵다고 하지만 더 힘들고 더 어렵게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겨내야 먼 곳에서 힘들게 사역하는 우리 선교사님들이 함께 힘을 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또 마음 만큼은 평안하게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코로나를 선교사님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내서 다시 우리 연동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우리 방송을 통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단기선교 갑시다. 코로나가 끝나면 단기선교 갑시다. 여러분 다 말씀하셨죠. 약속하신 겁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나면 여러분 다 단기선교 가셔야 됩니다. 마태복음에 말씀 여든 세 번째 (83) 마지막 말씀입니다. '코로나가 주는 교훈 심판' 이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지난 4주 전부터 '코로나가 주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 신앙인들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있는가 첫 번째는 '겸손' 이었죠. 저희들이 코로나 이전까지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면서 또 우리의 신앙도 굉장히 성숙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에 우리 신앙이 괜찮아 우리의 믿음의 삶이 괜찮아 하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아 그렇지 않았구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 신앙에 겸손함이 필요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불어 최근에 이상기후나 지구 온난화로 우리의 피조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고통과 신음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가 이 창조 세계를 향한 우리 신앙 가운데 겸손함이 필요하다 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 코로나가 터지니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옳느냐? 아니 영상으로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냐? 그런 예배가 옳으냐 그르냐 라는 문제로 따졌지만, 계속해서 함께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이제 그 예배에 대한 질문은 예배가 무엇이냐 예배 본질이 무엇이냐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를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묻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저는 신앙의 본질 무엇이냐 라는 것에 살아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야곱의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다 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코로나는 우리로 하여금 진실된 삶이 신앙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코로나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이 가면을 쓴 위선과 다시 거짓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고 그 가운데 우리는 진솔하고 솔직한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세상과 함께 울고 이웃과 함께 웃는 그런 교회 그런 신앙이 될 때 이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다 라고 말씀드렸죠. 오늘은 마태복음에 강해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동시에 코로나가 주는 교훈에 대해 4번째 마지막 말씀으로 그 주제는 '심판' 입니다.
심판, 코로나가 우리에게 이것이 심판이다 라는 것으로 아주 강렬하게 주지를 시켜주고 있습니다. 내 가까운 가족 이웃 친구가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 고통을 우리 눈 앞에서 보게 되었죠. 그 고통이 혹시 나의 경험 내 것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공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평생 경험하지 못한 것을 지금 경험하면서 매우 불안해 하고 걱정하면서 때로는 공포심에 빠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은요 학교도 가지 못합니다. 학생인데 학교를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손도 잡지 못합니다. 동화 책에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서로 놀면서 술래잡기 할 때 서로 몸을 대고 피부를 서로 스킨십을 하는 이런 얘기들이 동화 이야기 중에 나와 있는데 이제 동화 책에만 있는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학교의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배는 당연히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가 되는데 어느새 이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예배가 보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라는 것을 가르치고 배워왔는데, 코로나가 그 예배를 보게 만들었고요 예배를 우리 신앙의 2차적인 것으로 차 순위로 만들었습니다.
코로나가 가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친구를 불신하게 만들었고 서로를 감시하는 세상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모습이 심판의 모습이냐? 종말의 모습이냐 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34 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마지막 말씀을 한번 잘 보십시오. 더러는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동네로 따라다니고 쫓아다니면서 박해하고 핍박하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두고 한 쪽으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악의 근면성 악의 집요함 악인들의 성실성 악한 자들이 부지런하다는 겁니다. 죄를 범하고 악행을 하는데 부지런하게 집요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동에서 저 동네를 쫓아다니면서 박해하고 핍박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악인들이요 사단과 마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믿음의 삶이 그래야 하는데 성실함과 그런 집요함이 우리 신앙이 그래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악인들이 악한 세력들이 지금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이 동네를 쫓아다니면서 집요하게 아주 성실하게 악행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코로나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우리 서로가 지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백신이 만들어지면 코로나가 종식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좀 잡히는 듯하더니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돌파 감염을 시키고 있습니다. 악인들은요 악한 세력들은 집요합니다. 동네 동네를 쫓아다니다 좀 잡힐 것 같더니 변이 바이러스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서 끝까지 세력으로 우리를 죽이려 하고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코로나가 그렇습니다. 다시 대유행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들은 더 의심하게 됩니다. 더 불신하게 됩니다. 하다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랑 싸워야 하는데 사람들끼리 싸웁니다. 종말의 때 모습, 심판받는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은 다음의 두 가지의 메세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특별히 코로나를 통해 종말과 세상의 끝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말이 무엇인지를 메시지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비전을 품고 살아야 할 지를 깨닫게 하는 데 그 가운데 두 가지를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코로나가 종식 되면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인가? 아니요, 이제는요 위드 코로나 With Corona 라고 코로나와 함께 사는 우리의 일상에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삶으로 살아야 할까?
첫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종말과 심판의 메세지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 곳곳에서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지요. 환경 운동가들은 이상기후와 지구 온난화가 바로 이 종말의 징조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의 기록을 보면 이 자연 재해를 통해서 매번 지구의 종말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 중에 그런 소리는 사실 역사 속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물론 지금의 지구의 온난화 이상기후로 지금 기온이 올라가고 그곳에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 즉 종말의 징조처럼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수천년 전부터 종말과 심판의 모습입니다. 화산이 터지면 지진이 나면 곧 하늘의 신이 노했다고 얘기하고요 태풍이나 가뭄이 들면 어떡하든 그것을 이겨보려고 그것이 종말과 심판으로 얘기하던 때가 있었죠. 어찌 되었던 지금도 그것을 우리는 종말의 징조로 봅니다.
그 다음에 종말의 모습으로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빠는 남자, 엄마는 여자라고 말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성경대로 가족을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가족을 얘기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무지한 집단 미개한 집단이 되고 맙니다. 그런 세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족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차별이요 혐오라고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이 종말의 때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얘기하지요. 뉴스와 신문을 보면 돈과 보험금 때문에 어린 자녀를 죽이고 부모를 상해하고 살해하는 그런 기사와 뉴스들을 봅니다. 어떻게 자신의 피붙이를 돈 때문에 물질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종말의 때 모습 아니겠습니까?
또한 경제 양극화 라는 말이 종말의 징조를 우리에게 보게 합니다. 나라 안에 국민들의 경제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나라 대 나라가 서로 먹고 사는 문제가 서로 너무나 양극화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 아이티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지진에 홍수까지 일어났습니다. 지진도 다 복구가 안됐는데,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고통가운데 신음에 빠져 있습니다. 설상가상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한 선진국의 학자가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너희 나라를 떠나라 길을 떠나는 것이 너희들이 살 길이다 라는 것이 대안이었습니다.
아무리 내 땅이 지진과 홍수로 내 집이 없어지고 내가 삶의 터전이 없어질지라도 어떻게 내고향 내 나라를 버리라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대안으로 얘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여러분 이미 뉴스를 통해서 다 보셨을 것입니다. 지난주 텔레반 정부에 의해서 탈취당했습니다. 탈레반 정부는요 여성 차별에 대해서 매우 폭력적인 정부입니다.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또 밖에 나올 때는 남자와 함께 나가야 되는데 혼자서는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이니까 그 나라의 역사이니까 그런 정도 참아줘야지 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사는 국민들도 그 나라에서는 도저히 내가 살 수 없으니 나 살려달라면서 막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 끝을 잡고 있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뉴스 영상에 나왔습니다.
철조망 위로 가시가 나와 있는 그 곳에 내 아이만큼은 이런 나라에 살 수 없다고 그곳에서 그 갓난아이를 계속해서 넘기려고 하는 그 모습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넘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제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정말이지요 심판의 때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곳곳에서 종말과 세상의 끝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지구의 멸망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거 같다. 이 땅에 이것이 마지막이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요? 물론 그런 것들이 종말의 징조를 보여 주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37절에서 3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의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서울아 뉴욕아 런던아 북경아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도시를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 주님이 계신 곳 지금으로 얘기하면 우리 교회 이 성전을 향해 부르짖고 계신 겁니다. 신학적으로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이 표현은 하나님의 탄식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보고 탄식하시는 것이죠. 예루살렘아 연동교회야 한국교회야 하나님의 탄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세상이 일상적으로 곳곳에 자연 재해가 지구의 종말이 올 것 같고 성경대로 엄마 아빠 아들 딸을 부르는 것도 차별이요 혐오라고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평등법이라고 한 이유로 통용되는 세상이 종말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의 종말은 그렇게 오지않는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38절에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지게 될때 세상의 끝이 오리라. 너희의 집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교회야 교회야 바로 그 교회가 황폐하게 될 때 세상의 끝이 온다는 거지요. 세상의 곳곳이 무너지고 쓰러지고 신음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날지라도 종말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고 이웃을 향해 중보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이 아무리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도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 다우면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교회 나올 때 성도가 성도다울 때 하나님은 이 땅에 종말을 이루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34절의 말씀대로 선지자들과 지혜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셨다 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진짜 종말은 바로 교회와 여러분 같은 성도들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신앙의 본질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며 박해할 때 하나님은 너의 집 너희의 교회 너희가 중보하는 그 세상을 이제 황폐하게 만드시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의 징조가 종말 같이 보일지라도 코로나가 심해서 세상이 끝날 것처럼 보여도 교회가 살아 있고 성도들이 있으면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종말의 징조를 보여줬을 지라도 아 교회, 너희들이 아직 성도로 거룩한 자로 서있구나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구나 그래 너희들이 아직 제대로 서 있다면 교회답게 서있다면 성도답게 서있다면 내 종말을 미루리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진리를 박해하고 신앙의 본질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면 바로 그때 교회로 부터 시작된 종말과 세상의 심판은 시작됩니다. 교회가 의롭지 못할 때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 때 바로 교회로부터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전은 교회 아닙니까?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심판이요 하나님의 저주라고 세상이 외칠지라도 진정한 심판은 교회와 성령의 전인 성도들이 타락하고 부패하게 될 때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뭐라고 앞부분에 증거합니까? 하나님의 집 교회와 성전에서 심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라고 베드로 사도가 증거하지요. 이 말씀은 곧 세상에 징조가 제아무리 무섭고 두려운 종말을 보여줄지라도 우리 교회가 우리 믿는 자들이 깨어 기도하고 있으면 종말 같은 고난 중에 선을 행하고 미쁘신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탁한다면 반드시 그 안에 하나님은 구원을 보여주실 것이고 우리 가운데 이 세상을 회복할 능력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코로나에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종말이다 세상의 심판이다 세상의 마지막 때이다 라는 세상 이야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종말은요 교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심판은 성령의 전인 저와 여러분 교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전이 우리의 성령의 전인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영혼이 기도하며 바른 신앙을 삶을 살아간다면 지금의 이 고난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좌우로 치우치지 마시고 정도를 걸으시는 연동에 모든 성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의 말씀과 우리가 지금까지 겪는 이 코로나의 고난가운데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일까?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 라는 하나님의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39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전체를 보면 굉장히 절망스럽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처럼 어둡고 절망스럽고 좌절스럽습니다. 그저 이제 황폐한 집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되죠. 그런데 그런 절망과 고통만이 읽혀진 말씀 가운데 맨 마지막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물론 이 39절의 말씀도 서술어가 부정적으로 부정으로 쓰여져서 굉장히 절망스럽게 느껴집니다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다시 한번 생각해서 읽어 보십시오. 또 뒤집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좀 뒤집어서 해석하면 저는 공동번역으로 이렇게 편집해서 만들어봤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의 입으로 찬양할 때에 비로소 너희는 정녕 나를 보리라' 이렇게 해석이 되겠죠. 악한 세력이 부지런합니다. 악인들의 집요함 때문에 선지자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의 피에서부터 그 당시에 숨겨졌던 사갈의 피까지 계속해서 순교의 피가 흘러 넘쳤고 지금도 순교의 피가 곳곳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성선과 교회는 황폐해지고 파괴되고 무너지게 되는 종말 같은 세상을 보게되더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나를 찬양하고 나를 예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정녕 나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죠. 코로나 시대니까 아니야 아니요 코로나 시대에도 동일하게 6.25 전쟁 때도 저와 여러분이 고통가운데 있을 때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왜 그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이 땅에 때로는 종말과 심판 같은 징조가 나타나는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멸망과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해서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종말을 보지요. 기후 변화 가운데 세상이 끝날 날이 오는구나 걱정 근심이 빠집니다. 도덕과 윤리의 상식과 공의가 무너진 이 인간 영혼이 아니라 동물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이 땅 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예수님을 통해 오직 예수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죽음과 허무 종말과 마지막 만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믿고 영생 얻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삶을 누리게 허락하셨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소망인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코로나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 인들은 심판 코로나의 종말 절망과 허무를 도와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와서 까지도 코로나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그 가운데 절망하고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지금의 삶이 절망스럽고 종말의 때와 같은 마음일지라도 주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며 그 믿음을 잃지 않고 지켜낸다면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될 것이다. 신앙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생이 될 것이다.
최근에 한 목사님께서 30대 40대 소그룹과 줌으로 심방을 하고 모임을 가지셨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여러분 교회가 뭘 여러분께 해줬으면 좋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답이 나왔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젊은 세대들이니까 목사님 저희들 예배할 때 교회 성전에도 잘 가지 못하니 온라인 예배를 좀 잘 만들어 주십시오. 온라인 처치 온라인 교회를 좀 잘 만들어 주십시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분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심방해 주십시오. 심방 해달라는 겁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코로나 시대에 건강과 안전 생각하시고 오시기 힘들었을 때 전화로 목사님 저 가고 싶은데 못 가요 저 심방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젊은 성도들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이고요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만나고 교제하고 더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더라는 겁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을 보았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가 여전히 교회에 관심이 있다는 보았습니다.
사실 많은 청년들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지요 떠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그 세대들이 갖고 있는 것을 저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중 2병이다 라고요. 여러분 중 2병이 뭔지 아십니까? 제 딸이 최근에 중 2병에 빠졌었고요,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 거기서 좀 빠져 나왔는데요 이런 겁니다. 너 꿈이 뭐니? 없어요. 먹고 싶은 거 있니? 없어요. 그럼 좋아하는 거 있어? 없어요. 하고 싶은 거 있니? 없어요. 없어요. 그런 대답만 하는 게 중 2병입니다. 저는 젊은 세대들이 교회와? 왜 와? 나는 여기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 없어 라고 얘기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젊은 세대 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교회에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다움을 지키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희망만 있어도 목회를 할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이제 교회에 희망이 없다. 그런 재능 있으면 다른 일을 찾아 봐라. 그거 뭐 교회에 재능 기부 할 일 있냐? 다른 데서 돈 버는 걸로 재능을 사용해라. 교회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 코로나 때문에 이제 교회는 망했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면요 교회가 황폐해지면 진짜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 교회를 지켜야지요. 이 교회 안에 소망과 희망이 있는 것을 보여 줘야지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코로나지만 심방해 주십시오. 나는 그 한마디 그 관심 있는 모습이 제 안에는 목회 할 수 있는 힘이 됐고요 여전히 교회가 소망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목회할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에서 계속해서 함께 기도하는 성도님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수치들이 좋아지셔서 지금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다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직 정신을 깨어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에 계시기에 코로나 상황에서 아무도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새벽마다 수요 기도회마다 그 분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분들이 그대로 녹음해 가서 간호사한테 전달해 가지고 간호사가 누워있는 사경을 헤매는 그 성도님 귀에다 대고 지금 이렇게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들려줬는데 그 나빳던 수치들이 점점점 좋아지더니 지금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려면 코로나 검사를 하고 계속 들어가야 되고 뭐 심방은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이 목사님 줌 Zoom 으로 심방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동안 어머니 얼굴도 못 봤는데 어머니도 좀 보여드리고 어머니 보여드리면서 줌으로 심방합시다. 예 좋습니다. 합시다. 그래서 심방했습니다. 심방을 준비하면서 저는 지난 주에 2차 백신을 맞았는데, 저한테는 좀 부작용이 심하게 왔습니다. 주사를 맞고 제 팔에 주사 맞은 왼쪽 팔이 심한 근육통이 생겨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잘 때 이쪽으로 누워서 자지도 못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반나절 계속 코피가 났습니다. 부작용 때문에 내가 혹시 어떻게 되면 어떻게 하나 불안과 걱정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분 심방을 해야되는데 하나님께 강력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부작용에 쓰러지면 안되지요. 저 이거 이겨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줌으로 심방 하니 그저 편하게 뭐 영상으로 보니깐 그냥 기도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 분을 위해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아침부터 성도님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찾아가면서 예수님께서 취하였던 그 사건들에 그 말씀대로 하나하나 그 기도문에 담으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성령님께서 그곳에 임재하게 될까 그 기도문을 수 없이 수정하고 편집하면서 기도문을 만들어서 줌 심방 할 때 기도할 때 그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제게 백신 부작용이 싹 사라졌습니다.
제 마음에 뜨거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회에 소망과 희망이 있는 것이 우리가 뭐 바깥에 대단한 이유도 없고 구제 봉사에 뭐 대단한 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작은 자에게 주위에 전하고 소망을 전하고 그래도 줌으로라도 전화로라도 서로 소통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내 힘이요 능력이요 나를 살리시고 내 치유자 되신다 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것이 교회의 소망이요 교회 심방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 마태복음 강해 마지막 그리고 코로나가 주는 교훈에 대한 마지막 말씀을 저는 준비하면서 두 가지 평범한 진리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 두 가지는 이것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코로나가 우리를 호랑이 굴에 끌고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을 다시 세우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우리는 그 속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교회만이 희망이다 라는 것이죠. 코로나가 우리를 절망과 황폐의 굴로 끌고 가지만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고 삽시다. 그래도 맨 마지막이 되면 우리 교회 우리의 신앙이 소망이요 희망이 될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얘기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코로나때 쓰러지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그 실낱 같은 구원의 소망 그 희망을 붙잡고 살아가며 우리의 신앙을 지켜냅시다. 그런 신앙의 교훈 가운데 코로나 포스트코로나가 아닙니다. 위드 코로나 코로나와 함께 동행하게 될지라도 코로나에게 지지하지 아니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담대한 신앙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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