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아기가 자고 있어요.
김명화
현관문을 여니 문고리에 비닐봉지가 걸려있다. 그 안에는 작은 메모와 함께 돌떡이 들어있다. ‘안녕하세요. 우리 쌍둥이들 첫돌이라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맛있게 드시고 많이 축하해 주세요. 1303호.’ 예쁜 손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돌떡은 그냥 먹으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떡 준 사람의 취향을 모르니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 끝에 봉투에 현금을 넣어 올라갔다. 현관 벨을 누르려니, ‘쉿! 아기가 자고 있어요.’라는 귀여운 표지가 붙어있다.
다시 내려와 봉투에 동 호수를 적어 종이가방에 넣어 올라갔다. 그 아기 엄마가 한 것처럼 현관문에 종이가방을 걸어두고 왔다. 마침 시장하던 참이라 식탁에 앉아 네모나고 조그만 떡 상자를 열었다. 하얀 백설기 하나랑 동그란 수수떡이 네 개 들어있다. 단숨에 다 먹었다. 밖에 일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로비 층 문이 열리는데 쌍둥이를 태운 유모차가 내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얼른 내려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다.
“아기들 돌 축하해요. 떡 잘 먹었어요.”
뜬금없이 아기엄마가 나에게, “손자를 봐주세요?”하고 물었다. 아니 아들과 둘이 살고 있어요. 했더니 아기가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현관에 표지가 붙어있어 손자를 데리고 왔나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볼일을 보고 내 집 앞에 도착해서야 우리 집 현관에도 위층과 비슷한 표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서야 두 해 전 이사 왔을 때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붙어있던 스티커를 제거하지 않고 둔 것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스티커를 뗄까 말까 하다가 그냥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앉았다. 향기와 함께 생각을 마신다. 이곳은 전에 내가 살던 아파트와는 많이 달랐다. 길을 가면 아이들이 안다고 인사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스스럼없이 초인종을 눌러 나누어주는 인심은 이 동네에는 없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사는 동안 이웃이 아는 척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아래층 사람들도 조용하고 옆집마저도 조용했다. 가끔 승강기 안에서 통로 사람들을 만나도 눈인사하거나 목만 까딱하지, 마스크 속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저녁을 먹으며 또다시 생각에 잠긴다. 간간이 쇠젓가락이 사기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와 아삭아삭 씹는 김치소리만 내 옆을 지키고 있다. 옆집에는 위로 딸 둘에 막내아들 하나 있던데 어떻게 저렇게 조용하지? 잠자리에 누웠다. 돌떡주인공 쌍둥이들 돌이 오늘인가 어제인가, 그것도 안 물어봤네. 그러고 보니 딸 쌍둥인지 아들 쌍둥이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온종일 우리 통로 사람들의 사정이 궁금하다. 갑자기 어쩌면 내가 무언의 철벽을 쌓고 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기 전에 현관문을 열고 ‘쉿! 아기가 자고 있어요.’라는 자석 표지판을 떼어냈다.
아침 일찍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현관문에 그 표지판을 띄어버린 결과는 택배기사가 가장 민감했다. 모니터로 누구인가 확인하니 아무도 없고 택배 물건이 도착해 있다. 어제 주문한 싱싱한 꽃게가 벌써 왔다. 물건을 주문하고는 잊어버렸다가 현관문을 열면 ‘택배 왔네.’ 하고 가지고 들어왔는데 새로운 현상이다. 지난날에는 당연했던 것이 신선하게 내 의식을 두드려 깨운다.
푸성귀 과자 세 봉지를 종이봉투에 담았다. 옆집 현관문에 살짝 걸어두고 들어왔다. 오후에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 새댁이다.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한 통 들려있다. 몸은 괜찮으시냐는 인사와 함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들어오라고 했다.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집 새댁은 우리 현관문 앞에 표지판을 집안에 누가 아파서 조용히 해달라는 소리로 들렸다 한다. 담소를 나누는 한 시간 내내 미안해서 몸이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다. 그들은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우리 집 끝 방과 붙어있는 아이들 방을 부부의 방과 바꾸었다 했다. 거기다가 차마 조용히 살고 싶어서 아기가 자고 있다는 표지판을 떼어내지 않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런 표지가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위층에서 돌떡을 가지고 와서야 알았다는 구차한 변명을 했다. 그 덕에 위층 쌍둥이 가족이 이사 온 지 한 달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급박하게 환경이 바뀌어 간다. 아마도 옆집 아주머니가 전령인 듯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길에서 밝게 인사하기 바쁘다. 안겨있는 어린 아기도 가지고 있는 사탕을 불쑥 내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하나 때문에 바뀐 것은 아닌 듯하다. 이제야 그들이 나를 평범한 동네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우리 집 초인종은 택배기사가 제일 많이 누른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물건을 갖다 놓고 쿵쿵쿵 노크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덩달아 우리 집 강아지도 바빠진다. 조용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벨 소리와 노크 소리에 한껏 목청을 높여 누가 왔다고 짖어댄다. 이걸 다시 붙여? 떼어 놓았던 자석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초승달 위에 오동통한 아기가 입에 공갈 젖꼭지를 물고 잠들어있다. 모습이 너무 귀엽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 붙일 수는 없다. 잠시 솜씨를 발휘하여 간단한 표지판을 만들어 붙였다.
‘벨을 누르지 마세요. 강아지가 짖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