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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가 본 우리문화 1
1.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선생
혜곡 최순우 전집(兮谷 崔淳雨 全集) 발간사에서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혜곡 선생님의 생애를 '우리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일생을 정의 하셨다.
즉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우리의 아름다움과 같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한국 미에 대한 생각과
언행은 우리 미술의 본바탕에 대한 이해에서 우러나온것이라고 했다.
혜곡 선생은 1935년 조선고적 연구회 때부터 문화재 관련 일에 종사하셨는데 우리 고미술의 선구자인
개성의 고유섭 선생을 사사하면서 개풍군의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을 담당하면서 우리 미술과 문화에 대한
연구와 탐색을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국립박물관에 발을 들여 놓은 후 박물관 참사, 보급과장, 미술과장, 수석학예연구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시어 1984년 12월 작고하실 때까지 봉직하셨으니 박물관의 산
증인이었고 박물관의 기틀을 잡은 분으로 우린 기억한다
나는 그 분과 일면식도 없이 그저 그분이 한평생을 우리의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탐색하며 사신것을 동경
하여 그 분의 전집을 한 권 한 권 사모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 두 편 한국 미의 탐색 정신을 헤쳐 나갔다.
선생은 한국미에 대한 높은 견식과 안목을 실생활에 실천하여 보여주셨다고도 한다,.
그분의 집무실, 그분의 자택을 손수 꾸미시며 그분의 생각과 미의식을 실천에 옮겼으며 또한 주옥같은 글로
우리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신 분이다.
선생의 해박한 견식과 높은 안목으로 한국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담긴 수필과 해설원고를 평생 쓰셨으니,
그분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슴에 새기게 되고 한국미에 대한 눈이 트이게 된다.
깔끔하면서도 부드럽고 구수하면서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수준 높은 문학작품을 읽는 듯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력이 있다.
지금까지 출판사 학고재에서 선생의 유고를 정리하여 전집을 출간 한 후 다시 정선하여<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등 2권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외에도 주옥같은 글이 많이 있기에 블러그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 선생의 글을 정리하여
몇편 올린지 2개월이 넘었다.
앞으로도 선생의 한국미에 대한 탐구를 글을 통해 만나고 싶다. 틈나는 대로 올리려 하므로 애호인들의 일독을
권한다.
(혜곡 최순우 선생(1986~1984)
2. 慶會樓의 돌기둥
만약에 한국 建築 재료 중에서 화강석을 제한다면 한국 건축미의 인상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石塔이나 石橋는 말할것도 없고 기와집의 주춧돌과 기단, 돌 그리고 樓 마루의 네모 기둥이나 층대돌에 이루기
까지 화강석은 매우 널리 쓰이고 또 잘 어울린다.
한국 건축에 화강석이 이다지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좋은 화강석이 많이 난다는 말도 되지만 그 은은하고
도 정갈한 亞白의 색감이 우리네 성미에 잘 맞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이 화강석을 다루는 솜씨는 삼국 시대 때부터 보통이 아니어서 多寶塔이니 석굴암이니
불국사 돌계단이니 하는 뛰어난 화강석 건축이 많고 그 전통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이어져서 大院君이 19
세기 중엽에 재건한 慶福宮에도 화강석을 쓴 걸작 건축물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멋진 건축물은 慶會樓이다. 이 거대한 경회루 집채를 떠받치고 있는 화강석 돌기둥의
우람한 柱列을 보고 있으면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인의 性情과 솜씨가 너무나 잘 나타나 있어서 바로
이런 것이 實質美와 單純美를 아울러 지닌 한국의 멋이로구나 싶어진다.
돌의 살결은 비바람에 씻기어 적당히 부드러워졌고 그 은은한 백아의 네무 주열은 자자한 돌난간을 넘어서
연못 위에 긴 그림자를 비추어 소슬바람에 일렁일 때면 환상적인 아름다움마저 불러 일으킨다.
갸름하게 네모진 큰 연못 위에 3개의 다리로 이어진 네모진 큰 水閣 基壇을 쌓고 그 위에 또 이 우람한 네모
기둥의 주열로 경회루의 육중한 기와지붕을 떠받쳤으니,
네모의 구성이 보여주는 素直하고 간결한 선의 조화를 조상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원스럽고 엄청난 화강석 네모기둥의 주열리 또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그 예를 모른다.
만약에 경회루의 이 돌기둥들이 화강석의 은은한 흰빛이 아니었다든가 또는 경회루 안 기둥들처럼 변두리
기둥들도 둥근 기둥이거나 북경 紫禁城의 누각들처럼 기둥에 잔재주를 부렸다라면 경회루의 아름다움은
서먹서먹한 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경회루를 설계한 조선의 무명 건축가들과 이렇게 시원스러운 주열의 아름다움을 구상해서 그리로
이끌어 줄 비상한 눈을 여기에 자랑삼고자 한 째째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으며 답답하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크고도 담담한 아름다움과 멋의 본보기를 이 화강석 주열에서 역력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불국사의 대석단(大石壇)
크고 작은 자연괴석들과 잘 다듬어진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장단 맞춰 쌓아 올린 이 석단의 짜임새를
바라보면 안정과 율동, 인공과 자연의 멋진 諧和에서 오는 이름 모를 신라의 신비스러운 정서가 숨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 주는 것이다.
어느 해 초여름 불국사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미국 보스턴미술관 동양부장 페인 씨도 안개가 걷혀가는 이른
아침 고요 속에 잠긴 이 불국사의 앞뜰을 거닐면서 "나는 이제 미불이 되었구나"-미불은 중국 북송시대의 뛰어난
풍류인이며 만인이 우러르는 대예술가-하고 탄식한 일이 있었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눈맛이 시원한 視野 속에
아무런 거드름도 아무런 시새움도 없이 이처럼 고급한 아름다움이 이다지 편안하게 놓여질 수가 있을까.
멀리 눈을 들어 남산 줄기에 둘러싸인 벌을 바라보며 그 옛날 이 불국사의 無影塔을 맑은 물 위에 거울처럼 비춰
주었다는 影池가 아침 햇살에 그림처럼 빛나는데 절 뒤의 창창한 송림에선 바람도 없이 솔바람 소리가 이었다
끊겼다 하는 것이다.
土含山의 서쪽 기슭, 높지도 얕지도 않은 터전에 남향해서 동서로 이어진 이 석단의 오른쪽에는 이 절 정계단인
청운교, 백운교가 있고 이 돌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을 거쳐서 대웅전 앞뜰이 된다.
석단의 왼쪽 계단은 연화교, 필보교, 이 다리 위 층대를 올라가면 안양문을 거쳐서 극락전 앞뜰이다.
이 안양문과 자하문 사이에는 범영루가 우뚝 솟아 있어서 이 누마루 아래를 통해서 안양문에서 청운교 다리
밑을 거쳐 가는 꿈길 같은 步廊이 이어져 있고 불보살들이 옥보를 옮기며 오르내리는 게단으로 만들어진 청운교,
백운교의 중앙 계단에 서서 단상을 우러르면 자하문과 범영루 사이로 석가탑과 다보탑이 보랏빛 아침 햇살을
받는다.
조용한 시간을 틈타서 이 들을 거닐 때며언제나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손에 안 잡히는 나의 그리운 사람은 차라리 보살부처이기나 했으면 좋겠거니 생각하노라면 나는 금새 눈시울이
더워 오곤 한다.
불국사의 이 대석단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범영루 발밑에 쌓인 자연석 돌각담이었다.
우람스럽게 큰 기둥이 의좋게 짜여서 이 세상 太初의 숨소리들과 하모니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이 세계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누가 原形 그대로의 지지리도 못생긴(잘생긴) 돌들을 이렇게도 멋지게
다루고 쌓을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 나라 사람들 앞엔 아무리 무뚝뚝한 돌들도 하라는 대로 하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상북도 영주 浮石寺의 대석단들에서도, 그리고 강원도 춘천 淸平寺의 석단에서도 나는쾌재를 부른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솜씨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타고난 재질이라고 쉽게 밀어붙여 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석굴암을 뜯어 고칠 때만 하더라도 한국 안의 이름난 돌장이를 모두 뽑아다 시켜 보았지만 긑내
불국사의 돌각담 같은 재주를 부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맘속으로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돌각담을 쌓을 수 있는 돌장이의 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돌각담의 아름다움을
대견히 아는 좋은 눈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아마도 그러한 손을 길러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 봄 산색이 바뀌고 도 광선이 바뀌고 녹음졌던 절 숲, 枯林 나뭇가지에 초롱초롱 달빛이 반짝이는 정월
대보름 밤이면 아마 옛날 신라의 숱한 아가씨들은 떼지어 탑돌이를 하며 무슨 소원을 부처님께 빌었을 것이다.
소원이 있는 사람이면 마음이 외로울 때 이 들이 조용한 틈을 타서 이 석단 앞에서 석단의 크고 작은 돌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범영루 너머로 석가탑을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새벽이면 새벽대로 달밤이면 달밤대로 석가탑의 위 토막의 희망처럼 은은하게 멀게 가깝게 눈과 마음을 적셔
주는 것이다.(후략)
4.韓國의 탈
한국 탈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그 지지리도 못생긴 모습들이나 거칠게 다루어진 손길이 용하게도
이렇게 서로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굿거리나 타령같은 俗曲, 기껏해야 靈山曲 같은 가락에 맞추어서 짚신바람에 추어 온 이 탈놀이에는 아마
권위니 아첨이니 하는 따위의 잔 신경이 당초부터 필요치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눈꾼작이, 상좌, 왜장녀, 소무당, 노장, 취발이, 샌님, 미얄할미, 신하래비, 양반, 각시, 부네, 초랭이, 먹중,
말뚝이, 작은 애비 등 이 탈들의 구수한 이름들만 헤아려 봐도 어디서 이런 털털한 막걸리 냄새 같은 것이 물씬
풍겨 오는가 싶도록 민속적인 흥취가 짙어진다.
가지각색으로 야릇한 이 탈들의 눈웃음을 보고 있으면 제 고장 사투리에 신명이 나는듯 당장에라도 외어 넘길
봉산탈춤, 양주山臺, 그리고 河回別神 같은 생생한 탈놀이 대사들이 그들의 입전에서 아물거린다.
직업광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탈들을 한 번 얼굴에 덮어쓰면 북소리, 중쟁기소리에 저절로
어깻바람이 솟아나게 마련이고, 탈이 한 번 입을 벌리게 되면 보기 싫은 역겨운 것들 앞에 못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주책없은 수도승들의 破戒에 퍼붓는 신랄한 조소와 야유, 횡포하고 얌체없는 양반들에 대한 모욕과 풍자,
거기에 가난과 인습에 시달리는 서민사회의 愛憎과 탄식이 섞여 들어서 탈은 울고 웃고, 마을 사람들도 탈과
5. 운혜(雲鞋 :비단 신발)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雲鞋, 唐鞋, 紅鞋 등으로 불리는 여러가지의 비단신을 신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일반화
됐던 것은 운혜였는데 이 운혜는 가벼운 가
죽을 겹쳐서 신바닥을 만들고 예쁜 쇠징을 박았으며 신의 둘레는 천으로 두껍게 붙인 위에 연분홍색이나
연옥색 또는 연두색 같은 산뜻한 비단을 싸 발라서 지은 꿈 같은 신이다.
제비 부리 모양으로 생긴 그 예쁜 신 코나 신 뒤꿈치에 雲文 비슷한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 격식이었기 때문에
운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마른신, 갓신, 제비부리신 등으로 속칭되기도 하는 이 운혜는 외씨버선 예쁜 발 맵시를 한층 아롱지게
장식해 주는 매우 사치스러운 몸단장임에 틀림없다.
이 고운 신은 발등을 덮는 스란치마의 비단 스치는 소리에 감싸여 보일락 말락 해서 조선 여인들이 보여주는
가장 매혹적인 태의 하나이기도 했었다.
가을 봄 철 가려서 그리고 옷빛깔에 맞추어서 이 신은 여러 벌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나들이 갓신이 늘 깨끗한
것은 항상 청정한 그 여인의 인상처럼 사나이의 마음을 일렁이게 해주었던 것이다.(完)
6. 위원 단계석 일월연(渭原端溪石日月硯 )
벼루를 사랑하는 옛 한국 선비들의 소원은 翰墨의 본고장인 중국의 端溪石 벼루 하나 좋은 것을 갖는 일이었다.
중국에 나들이 할 수 있던 선비들은 첫째가는 선물로서 으레 단계벼루를 지니고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단계연이라 하면 중국 벼루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졌으며, 단계석 좋은 벼루들도 적지 않게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안에도 가지가지 좋은 벼루들의 산지가 있어서 평안북도 渭原의 靑石, 紫石, 雲文石, 충청북도
鎭川과 丹陽의 馬肝石, 충청남도 藍浦도 烏石, 황해도 海州의 艾石(애석) 등이 이름이 높았다.
특히 위원의 자석 또는 운문석 등은 일명 위원 단계석이라고 불리워지리만큼 벼룻돌로서는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벼루들은 일찍이 宋나라 翰墨의 대가 米불로 하여금 그의 저서 <硯史> 속에서 高麗硯이라는
이름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게 했었다. 돌의 자질로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지니는 공예적 재질은 벼루의
장식 조각의 세부에도 잘 드러났으며,
한국 벼루가 지니는 특이한 조형감각으로서 또다른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지금 유물로서 살펴보면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벼루들은 대개 靑石(天然 슬레이트)으로 깎은 風字硯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것은 중국의 後漢代 풍자연의 고격을 간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한국 벼루는 한국 독자적인 조형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들 조선 벼루들은 비록
격식은 중국 것을 따랐지만 세부장식 의장은 바야흐로 한국공예 특유한 맛으로 國風化되기에 이르렀다.
근래에 본 조선 벼루 중에서 가장 반갑게 본 것은 경상북도 안동 義城金氏 종가에 세전되어 온 16세기 양식의
위원 端溪石日月硯이다.
섬세한듯 싶으면서도 거칠고 거친가 하고 바라보면 성글고도 순정적인 자유로운 도안에서 조선적인 文氣의
담담한 매력을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권위에 찬 격식과 빈틈없는 조형으로 감싸인 중국 벼루의 장중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나는 가까운 곳에 친구를
둔 듯 싶은 스스롭지 않은 조선 벼룻돌의 아름다움에 한층 마음을 쏟게 된다.(完)
7. 한국의 주철술(韓國의 鑄鐵術)
우리 나라에서 銅으로 연장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은 근3천 년이나 되었고 鐵을 우리 손으로 제련해서 여러
가지 연장과 武具를 만들어 쓴 지도 벌써 2천 2,3백 년의 역사를 쌓았다.
특히 철을 단련해서 쓸모에 따라 알맞은 강도로 연장을 두두려 만들고 또 鑄鐵을 부어서 만드는 미술품의
鑄造法은 이미 신라시대에 매우 앞서 있었다.
忠南 瑞山 普願寺 옛터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온 우람한 鐵造如來坐像은 그러한 한국 고대의 뛰어난 철
주조 기술을 실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미국에서 열였던 <한국미술5천년전>의 중심 진열품 구실을 했던 鐵造佛像은 여러모로 여러 나라 전문가
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 까닭은 첫째 8세기나 9세기 무렵에 있어서 세계 여러 나라의 鐵鑄造術은 아직도 이 신라 鐵佛의 주조술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뚤째 이만큼 우람한 조각 미술작품을 다루기 어려운 鐵로 이처럼 원숙하게 주조한 한국
사람들의 금속工學, 셌째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는 거의 鐵造佛像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있어도 그 주조
술은 매우 어설펐다는 점 등이 그 주목거리였다.
말하자면 미술품 조각을 다루기 쉬운 銅으로 주조하는 기술은 이미 고대부터 여러 나라에서 익숙하게 이루
어져 왔지만 鐵은 銅처럼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섬세 정교한 주조는 피했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는 銅 생산이 적어서 銅이 흔한 일본으로부터 수입했었다는 흔적이 있으므로 신라 사람들은
수입에 기대야만 되는 銅 대신 鐵로 불상을 주조하는 방법을 개척해서 鐵鑄造法이 지니는 기술상의 난관을
용하게 극복하게 되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몇 해 전 서독에서 온 어느 금속공학 교수가 함게 이 鐵造如來像을 보는 자리에서 나에게 던진 질문을 지금도
가끔 되새겨 보고있다.
그는 매우 감명 깊은 말투로 "이만치 큰 미술 조각품을 이미 8세기에 이처럼 완벽하게 鐵로 주조할 수 있었던
당신네 나라가 왜 일본에게 졌느냐"고 했다.
그 때 내가 그에게 무어라고 대답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고 싶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은 우리 모두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데에서 스스로 깨달아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과거의 문화 중에서 세계에서 첫손을 곱을 만한 관록을 갖춘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오늘의
시점에서 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 고대 鑄鐵기술을 여기에서 들추어 보는
것이다.(完)
8.현동자의 몽유도원도(玄洞子의 夢遊桃源圖 )
해외로 흘러 나간 문화재 중에 哀惜을 느끼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겠으나 현동자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상심을 주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저번 구라파 여행의 歸途에 東京에 잠시 들러 온 K박사를 통하여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 도권의 원래 소장
자인 일본 九州 鹿兒島市의 園田才治씨는 전후 핍박한 가정형편으로 말미암아 가보로 세전되어 온 이 圖券을
방매하고자 수삼 년 이래 누차에 걸쳐 동경에 가지고 나왔으나 그때마다 적당한 구매자를 얻지 못했다는 것
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명품이 持出되어 전전하는 사이 근년 畵面의 손상이 현저하게 눈에 띄게 되었다 하며 신뢰할
수 있는 某 일본인 미술사가의 말로서 이것이 일화 7,80만엔이면 구득할 수 있다는 것과 또 과거에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일본국 법령의 구속을 받고 있던 이 도권이 戰後에 이미 그 지정에서 해제되었다는
사실로써 일본 국외로 반출이 가능하다는 근거가 밝혀진 것이다.
일화 7,80만엔 이라면 미화 약 2천 불에 해당하는 것으로 요사이 서울거리에 범람하는 신형 승용 자동차 한
대 값의 절반도 안되는 돈인데 우리 국보 중의 국보로 알려진 이 명화가 하필 다른 곳 아닌 일본에서 이다지
불우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저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圖券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도 알 수 없으나 벌써 오랜 옛날부터 九州 薩摩 지방에서 전승해
내려온 것이라 하니 필시 임진왜란 당시의 탈취품이었으리라는 것이 요사이는 정설로 되어 있다.
현동자 안견의 작품으로서 남겨진 것은 매우 희귀하여 이 몽유도원도 도권이 현재까지는 가장 확실한 유일
무이한 대작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덕수궁미술관에 그의 진적이라고 전해오는 적벽도라는 대폭이 소장되어 있으나 이것이 진적이라 하더라도
그 지닌 바 문화재로서의 값어치는 여기에 비할 바가 못된다.
현동자는 匪解堂 安平大君의 知遇를 믿어 그 無不通知한 작가적인 역량과 불굴하는 의욕으로 세종조에
있어서 가장 득의만만한 작가생활을 하던 분으로써 우리나라 고금을 통한 북종화풍의 가장 뚜렷한 偉材였던
것이다.
이 몽유도원도는 이러한 명수에 의하여 스스로가 뛰어난 문사요 또 墨客이며 그들 예술가들의 참다운 옹호자
였던 大世宗의 제3왕자 안평대군의 詩趣 무르녹는 어느 날 밤의 꿈 이야기를 더듬어 그의 청탁으로 그려진
현동자 일세일대를 빛내는 회심의 작품이었다.
안평대군의 호탕한 자필 題跋을 보면 세종 29년 4월 20일 야밤에 홀연히 전개되는 도원경에서 박팽년과
더불어 淸遊한 몽환의 詩境을 소상하게 적고 그 꿈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여 안견으로 하여금 이 그림을 제작케
했다는 연유를 유창하고 기개높은 문체로 밝혔다.
이 화폭 본래로 말하면 높이 1척2촌7분5리, 폭이 3척5촌의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일부 담채의 묵화산수
橫軸이었으나 前記한 안평대군의 題跋을 위시하여 박팽년, 성삼문, 김종서, 이현로, 박연, 이개, 고득종, 강석,
정인지, 신숙주, 최항, 이적, 하연, 송처관, 김(모), 윤자운, 이예, 서거정, 김수온, 우봉, 최탕 등 당대 제일급의
문인, 묵객, 학자, 명신 등 22인이 각기 문장과 서예의 역량을 다툰 跋記가 자필로 添花되어 있음으로써 이를
실지로 감정한 前記 전형필 씨 이야기에 의하면 거의 한아름에 가까운 큰 도권을 이루고 명화 몽유도원도
위에 금상첨화격이 되어 그 문화재적 가치를 한층 높이는 결과가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조선사상 일대 통한사를 연출한 세조조의 사화에 관련된 사육신, 생육신을 위시해서 그 반대당들
거의 전원이 의좋게 불과 그 얼마전 세종 29년 당시의 안평대군의 덕망 아래로 모두 결집되었던 역력한 자취
로써도 우리는 감개무량한 바가 있다.
조선회화사상으로 보아도, 서예사상으로 보아 제일급에 속하는 보물이요, 그 위에 조선 문화 건설에의 뚜렷한
脊梁이 된 학자, 명신, 문사 등이 한 권의 도권 위에 그 재능을 躍如하게 다투었다는 점이 얼마마한 장관인지는
이 명보가 쉽사리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남의 고장의 남의 손에 불우하게 놓여 있음으로 인하여 한층 절절한
감정을 금할 수가 없는 바이다.(完)
* 이 글은 호암갤러리에서 夢遊桃源圖의 전시가 있기 전의 글로 생각됩니다.
9. 韓國美라는 것(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
한국 사람들은 웬만큼 친한 사이에 서로 만나면 우선 첫마디로 익살스러운 농을 걸어서 서로의 오가는 정을
돋운다. 물론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익살이나 농이 적다는 말은 아니지만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네의
농은 그 감정의 차원이 다르고 또 그 빈도가 높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그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해학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달래고 그 익살과 농담속에는 풍자와 諦觀의
멋이 스며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도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슬픔의 아름다움과 해학의 아름다움이 함께 존재
한다면 이것은 우리네의 곡절 많은 역사 속에 몸에 밴 미덕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울다가도 웃을 일이라는 말은 물론 어처구니가 없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애수가 아름다울 수 있고 또
익살이 세련되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서정과 조형미에 나타나는 表現愛도 의당 이러한 것이 반영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요의 아름다움과 슬픔의 아름다움이 조형작품 위에 옮겨질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예술에서 말하는
寂照美의 세계이며 익살의 아름다움이 조형 위에 구현된다면 물론 이것은 해학미의 세계일 것이다.
檀園 金弘道의 풍속도에 나오는 인물들의 구수한 얼굴들과 익살스러운 표정과 동작 속에서 느껴지는 해학의
아름다움 속에는 오히려 지체할 수 없는 일말의 엷은 애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석굴암 十一面觀音菩薩의
맑고 깔금한 얼굴에서는 간절한 비원과 그 슬픔이 지닌 아름다움이 지극히 담담한 미소로서 나타나고 있다.
만약에 이러한 아름다움들을 '고요와 익살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불러 본다면 우리의 미술 작품에는 여기에
예를 들 만한 것이 적지 않다.
南里 金斗樑 작 '가려운 데를 긁는 개'의 익살스러운 표현과 고려 청자들이 지닌 가늘고 긴 곡선 그리고 담담한
푸른 빛이 보여주는 조용한 아름다움도 좋은 대조의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요와 익살의 아름다움'은 한국 미술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네의 조형작품의 逸品 속에는 우리는 스스로 마음이 조용해지거나 또는 홀로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는
내재적인 아름다움에 자주 부딪치게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 미술에 나타난 이러한 '익살과 고요의 아름다움'을 정리해 보면 이것은 '韓國美'가 지니는 두드
러진 특색의 일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完)
김홍도 씨름도
김두랑 개
10.수화(樹 話)
한국미의 특질이 논의될 때마다 그 대상으로 늘 폭넓게 다루어지는 것이 '멋'이다.
이 멋에 대해서 많은 학자와 시인들이 그 때마다 함축이 깊은 견해들을 세상에 펴왔지만 ,
실상 알듯 싶으면서도 아리송하고 잡힐듯 싶으면서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 멋의 세계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멋이 지닌 '멋'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멋이란 미술에도 문학에도 그리고 음악과
무용에도 흥건하게 스며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인간상 속에서도 그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지난 7월 26일 樹話 金煥基 형이 棄世했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 나는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수화는 그 작품에도 한국의 멋, 크게는 동양의 멋이 철철 흐르고 있지만 인간 됨됨이와 그 생활 자체가 멋에
젖어 있었다.
그의 수필은 그 독특하고 그 간결한 문장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산문시요, 그대로 '멋'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의 멋을 폭넓게 창조해 내고 멋으로 세상을 살아간 참으로 귀한 예술가였다.
내가 굳이 그를 화백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색과 예술가적인 폭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멋쟁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의가 너무 속된 것 같고 '멋家'라고 부르기에는 말이 서먹서먹할 뿐 참 아름답고
희떠운 사람이었다.
동양 미술을 보는 그의 안목도 매우 높아서 그가 좋아하는 그림과 글씨도 그 테두리와 차원이 분명했고 또
조선의 목공예나 백자의 참맛을 아는 귀한 눈의 소유자였다.
그가 평범한 돌 한 쪽이나 나무토막 하나를 어느 자리에 자리잡아 놓아도 그대로 그것은 멋일 수 있었고 그의
꺼청거림이나 음정이 약간 높은 웃음이나 말소리의 억양도 멋의 소산이라고 할 만큼 그는 한국의 멋으로만
투철하게 60평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언젠가는 나에게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둔 크고 잘 생긴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는 말을 하고 함께 폭소를 한 일이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 남기고자 하는 말은 그가 여러모로 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좀더 긍지를 갖고 자신있게 즐겁게, 그리고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인간상이 요긴하기 때문이다.
환갑이 지난 화가가 한 사람 세상을 떠났다는 정도로 우리 사회가 예사로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일
이라는 생각을 혼자해보고, 친구와 해보고 하는 것이다.
지난 7월 30일 신문회관에서 있었던 추모식 자리에 앉아 귀한 사람을 귀한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그리도 그리던 고국에 그의 유해나마 맞이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함게 마음이 아팠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
었을 것이다.
그 멋진 아호 '樹話'가 뜻하듯이 그는 우람하고 잘생긴 교목처럼 사색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우러를 수 있는
멋쟁이었다.(멋)
11. 白色의 아름다움
해방 후 미군이 처음 진주해 왔을 때 흑인병사들만으로 편성된 군악대의 순백색 제복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너무 잔혹하구나 싶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먹빛처럼 검은 피부의 젊은 흑인병사들과 그들이 입은 순백색 제복이 주는 흑백 대조의 아름다움은
곧 내 눈을 즐겁게 해 주었고 미국 사람들은 아마도 그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 후 여러 해 뒤 일이지만 나는 정식 손님으로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 미술관의
귀빈실에서 정식 영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크고 호사스러운 방 전체가 모두 순백색 羊皮로만 꾸며진 응접 의자들로 갖추어진 대 대해
적이 마음이 질렸었다.
앉으면 키가 넘는 부드럽고 푹신한 순백 의자에 앉아서 나는 언뜻 그 순백색 제복으로만 입혔던 흑인
병사들의 군악대를 상기해냈고 서구 사람들이 지닌 白色美에 대한 안목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듯 싶은 느낌
이었다.
어째든 나는 원래부터 흰빛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나의 그러한 백색 호상의 성정은 단순히 내 개인의 조상에게서 물려 받았다기보다는 우리 민족 전체의
집단개성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따지고 보면 한국 사람들처럼 백색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고 또
그것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은 또 없다고 할 만하다.
지금도 조선시대의 크고 작은 백자 항아리들 그리고 가지가지 모습의 백자 제기들과 문방구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늘어놓고 바라보면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한국과 한국인만이 빛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휘영청 맑고 개운하고 또 가슴이 후련한 이 아름다움, 이것은 장차 우리 한국 사람들만의 세계일 수는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白色美의 분야에 있어서 우리 한국인은 세계적인 기수되기에 충분한 관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白色美의 전통은 좀더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 멋지게 즐기는 오늘의 세계인들의 생활미술 속에 널리
메아리쳐 나가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完)
* 흰옷입기를 좋아한 민족이란 이야기를 어릴적 많이 듣고 자랐다.
11. 煙家(굴뚝 위에 얹어 놓은 部材)
'煙家'라 하면 연기나는 집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상은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굴뚝 위에 얹어 놓은 部材의
일종을 일컫는 고유한 명사이다.
이 煙家는 진흙으로 빚어 구워낸 사방 30cm 내외의 조그마한 기와집 모양의 도예품으로 벽돌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네모 굴뚝 위에 한 개 또는 복수로 얹어 놓아서 굴뚝 연기가 그 네 벽에 뚫린 창모양의 구멍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굴뚝에 씌우는 지붕 구실과 연기의 솟음을 고르게 하는 바람받이도 될 뿐더러 그 생김새가 잘
생겨서 굴뚝치례로서는 매우 성공적인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굴뜩 쌓기에 남달리 정성을 들이고 또 그 굴뚝이 후원의 造景에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전통은
한국 독자적인 양식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온돌방 구조에서 발생된 한국인의 창의였다.
宮苑은 물론이고 적어도 중류 이상의 조선 주택에는 반드시 남향받이 밝은 후원이 있게 마련이고 이 후원
에는 으례 집 본채에서 썩 물러나서 세워진 벽돌 굴뚝이 훤칠하게 세워지게 마련이다.
이 벽돌은 洋風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이었고 이 벽돌을 맵시있게 쌓기 위하여 벽돌의 면과 네 측면
을 모두 매끈하게 갈아서 썼으며 그 네모 굴뚝의 굵기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쾌적해서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나의 정원 조각같이도 보이게 마련이다.
이 굴뚝은 하나 세워질 때도 있지만 주택 구조와 규모에 따라서 복수로 세워지기도 한다.
때로는 후원이 넓으면 층단으로 된 장대석 돈대 위에 멀찍이 떨어져 세워져서 저녁 연기에 때맞추어 석양의
詩情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에 민족도 많고 나라도 많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굴뚝치레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또 큰 돈을 들이는
족속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굴뚝 기단은 으레 亞白의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받쳤으며 사람의 시선 높이의 알맞은 부위에는 백회와
회색 벽돌, 때로는 주황색 벽돌도 吉祥文字나 長生類의 도안을 모자이크해서 굴뚝 하나가 그대로 작품으로
보일 때가 있다.(後略)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12. 庶民적인 아름다움(韓國 古燈器展을 보고)
한국의 고등기가 지니는 아름다움은 대강 두 갈래의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왕실을 비롯한 王公, 귀족 등 상류사회에서 쓰던 등기들이 지니는 호사스러운 아름다움이며,
다른 하나는 서민사회에서 쓰던 등기들이 지니는 소박한 아름다움입니다.
김동휘 선생이 수집하신 고동기는 그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요샛말로 민예품의 범주에 드는 것입
니다.
민예품이라는 말은 민중적인 예술품이란 뜻을 줄인 말로서 말하자면 서민의 예술이란 뜻이 됩니다.
한국의 고등기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민예적인 고등기들이 지니는 올바른 아름다움을 잘 간추려서 매우
훌륭한 수집을 하신 분입니다.
민예적인 고등기가 지니는 올바른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 등기로서의 기능이 온전해야 되며 필요없는
장식이나 허세 그리고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정직한 작품을 으뜸으로 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등기는 등기로 쓰여지는 기능이나 그 목적 이외에 아첨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잔재주 그리고
신경질적 근시안적인 기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번 수원에서 열리는 <고등기전>에서 시민들은 우리 고등기들이 지니는 솔직하고도 다정한 서민적인
아름다움에서 적지 않은 감명을 받게 되시리라는 것을 믿어마지 않습니다.(완)
13. 젓갈
호사스럽고 기름진 요리는 어느 나라에건 자랑삼는 것이 몇 가지씩은 있다.
그러나 생물 특히 海物의 풍미를 날것대로 살려서 이것을 저장해 두고 즐기는 짭짤한 음식이란 나라마다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에 영양학을 공부하러 갔던 이태영 박사를 워싱턴에서 만나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한던
끝에 그는 한국 식품 문화 중에서 젓갈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서양
에서도 문화 전통이 뛰어난 나라, 예를 들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나라일수록 우리의 젓갈에 해당하는
음식이 많으며 영양학상으로 보아도 이것들은 매우 높은 의의를 갖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젓갈 종류를 잘 먹는 편이었고 지금도 시골 특히 해안지대에 여행하게 되면 은근히 그 지방
특산의 젓갈에 대한 기대를 갖고 가게 된다.
우리 나라의 젓갈 종류는 이만저만 폭이 넓은 것이 아니어서 이루 그 이름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폭이 넓은 것이 아니어서 이루 그 이름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호남지방이나 영남지방의 舊家에는
많으면 수십 종, 적어도 6, 7종의 秘藏하는 젓갈이 있어서 각기 그 집안의 風度를 은근히 자랑삼는 경우가 많다.
그 종류가 풍부하다는 것과 그 맛의 버라이어티가 넓다는 것은 그만치 젓갈이 오랜 전통을 지녔고,
또 한국 사람들의 미각이 여간만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명란젓, 대구알젓, 대구아가미젓, 창란젓, 호르래기젓, 새우젓, 곤쟁이젓, 꼴뚜기젓, 조개젓, 어리굴젓, 등
이루 이름을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양념 방법도 지방마다 집안마다 특색이 있어서 나는 젓갈 이야기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진다(완)
<곰소 젓갈 오젓>
14. 서울 산수
끊일 줄 모르는 자동차의 물결과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는 서울 거리의 잡답(雜沓) 속에서 '아름다운 서울의
산수'가 눈에 보이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아침 저녁으로 태평로 거리를 지날 때마다 세종로 넓은 대로를 거쳐서 훤히 트인 북녘 하늘
밑에 그림처럼 진좌(鎭座)해 있는 北漢連峰의 준엄 하고도 아기자기한 자태, 그리고 그 앞에 다가선 淸秀한
北岳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많다.
같이 걷는 사람에게 "서울은 아름답지?"해보기도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서울을 두고 끝내는 늙어 가야만
하는 寂寥感 때문에 남몰래 마음을 적시며 잡답(雜沓) 속으로 저절로 밀려갈 때도 있다.
말하자면 아직도 문학소년 같은 감상이나 낭만일는지는 모르지만 내 자신은 그래서 않될 것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아직도 그러한 稚氣 속에 踏步하고 있는 셈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으로 누구보다도 서울의 아름다움을 애틋하게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 그러한 즐거움 때문에 외로움과 괴로움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는 사나이라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늦가을 아침 안개 걷히는 태평로의 낙엽을 밟으면서 北漢을 바라보면 턱도 없이 행복해진다고 써놓으면
너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가사를 되풀이 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서울의 자연이란 문자 그대로 白沙靑松에 山紫水明한 고장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지금 수도 서울의 건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한 의욕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늘을 사는 大서울의 시민, 그리고 아름다움 서울을 죽고 싶도록 사랑하는 일개 시민으로서 바람직한 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말하자면 어제나 오늘의 서울을 알고 또 올바르게 내일의 서울이 지녀야만 할
미래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들이 서울 시민 중에는 얼마든지 있다.
결국 그 수많은 좋은 눈에 거슬리는 건설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이 된다. 잘생긴 바위 하나하나,
오종종한 오솔길 하나하나, 그리고 아늑한 구릉 한하나에는 비길 수 있는 존귀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용솟음치고 있다.
다시 돌킬 수 없는 자연미의 파괴를 역사와 전통의 도시 서울의 건설에서는 최소한으로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여기에 해본 것이다.(完)
* 서울 천도를 두고 국론이 갈리는 요즈음 최순우 선생의 서울 사랑과 亂개발을 걱정하는 마음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 일독을 권합니다..
15. 民藝라는 것
민예라는 말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흔하게 쓰여지고 있다. 민예관을 세우겠다는 사람도 몇 사람인가는
있고 수집하는 사람들도 꽤 늘어나서 인사동 거리나 중앙시장의 민예품 값이 엄청나게 뛰어오르기도 했다.
원래 이 民藝라는 말은 일본인 故 柳宗悅이 1920년대에 일으킨 이른바 민예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민예라는 뜻은 민중적 예술이란 말에서 오는 약어로서 말하자면 궁정이나 양반 등 상류사회에 떠 받치는
권위예술 작품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민중을 위해서 자라난 무명의 工匠을, 또는 민중 스스로의 뜨내기들이
만들어 낸 민중 속의 일상 用器, 用具, 民畵 등에 나타난 민중적인 조형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된다.
한국의 민예품은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서 매우 솔직하고도 순정적이며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너그럽고도 익살스러운 우리 民族의 마음씨가 어느 민족의 경우보다도 주저 없이 드러나 있는 점
으로 공예미 본질적인 미의 원천으로서 높이 평가되어 왔다.
과거의 이러한 한국 민중예술의 높은 차원을 오늘에 어떻게 계승해야 되며 또 어떻게 이 전통을 올바르게
후대에 이어주어야겠느냐 하는 문제는 민족 고유미의 창달이나 세계미술의 풍요에 우리 민족이 어떻게 이바지
하느냐는 문제와 더불어 우리의 당면 과제로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면에서 뜻있는 민간인이 이를 補備해야 될 것이고 민간의 힘으로 안되는 부면을
정부가 흔연하게 밀어주는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 있어서 문화 사업 발달에 나타난 正石의 하나로 되어 있다.
요즈음 관광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난 무수한 민속공예店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일은 그저 속성과 더불어
어디를 가나 너무나 일률적인 품종에서 받는 환멸이었으며 그 귀중한 물자들이 헛되게 버려지는구나 싶은
생각을 금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대 민속공예의 자속화는 과거의 뛰어난 우리것을 옳게 알 기회가 없었던 평범한 상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무지를 일깨우는 뜻과 더불어 사라져가는 민족 고유미의 샘터인 민중예술의 보전을
위하는 참다운 독지가가 나서서 민속박물관과는 분명하게 다른 한국민예미술관 하나를 세울 때가 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관계 당국과 同好 독지가 여러분에게 이 기회에 간절히 소망해 둔다.(完)
* 민간에서 만든 민예품 우리 조상의 손 때가 묻은 생활용품이 우리 집에도 몇 점 있는 지 살 펴 봅시다.
16. 粉靑沙器의 아름다움
한국의 산삭은 흙이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이렇게 다정하게 빚어졌다. 그리고 아름드리 한국 소나무의 장작
불이 수백 년을 두고 천오백도의 더운 입김을 뿜어 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무수히 길러 냈다. 말하자면
정다운 내 나라 산천 정기의 조화라고 할까.
그리고 흥겨운 내 고장 장작불의 마술이라고 할까 어쨌든 내 고장 내 민족의 이름을 이렇게 수다스럽게 주워
섬겨도 오히려 모자랄 듯만 싶도록 朝鮮 粉靑沙器는 우리 민족의 체취와 생활정서를 너무나 진하게 풍겨주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나라에 무수한 민족들이 서로 뽐내면서 산다. 그리고 시대를 바꾸고 종류를 바꾸어 그들이
낳아 온 무수한 사기 그릇들이 각기 제민족의 이름을 걸고 뽐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 분청사기처럼 우쭐하거나 뽐낼 줄 모르고 살아온 족속은 정말 드물다.
말하자면 조선 자기는 이렇게 뽐낼 줄 모르는 것으로서 한몫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옛 철인 소크라테스는 “무화과 나무로 만든 국자도 쓸모만 있으면 아름답다”고 했는데, 분청사기의 아름다움도
따지고 보면 쓸모가 있고 소박하고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이것이 바로 소크라
테스가 말한 工藝道의 올바른 면목을 보이는 곳이라고 해야겠다.
어쨌든 분청사기는 한국공예미술사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한 한국적인 풍토양식을 갖추었고, 또 우리의 생활
정서를 꾸밈없이 솔직히 표현해서 마치 뭇 한국 사람들의 순박한 숨결을 듣는 것만 같으니 가히 이것을 민중
적인 공예미라고 할까.
이 분청사기들을 한창 대량 생산하던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185개소의 관영 분청사기 가마가 있었다고
『世宗實錄』地理志는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명 무명의 얼마나 더 많은 분청사기 민간 가마가 있었던
가는 오늘날 전국의 窯址(요지) 조사로써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가 이렇게 대량샹산해서 일상생활에 별로 자랑삼지도 않고 써 오던 소박한 그릇들을 일본인들은 이미
5백 년 전부터 마치 보물처럼 탐내어서 임진왜란 때만 해도 그들은 무수한 陶工과 시설을 그들의 본국으로
끌고 갔으며, 드디어 우리의 모든 요업시설과 인적 자원은 고갈되어 戰後에는 다시 再起하지 못한 채 분청
가마는 끝장이 나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탐욕은 그럴 만한 연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식이 없는 소박한 매무새,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탐탁스러운 힘, 시작된 곳도 끝간 데도
모르는 어리숙한 선, 익살스러우면서도 때로는 눈물겨운 그 모습, 저들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天定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茶道 속에 신선하고 아름다운 새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뺑뺑이꾼이니, 店놈이니 店漢이니 해서 세습적인 제도에 얽매여 천시만 받아오던 무명 도공들의 손길이
얼마나 건전했는지, 그 리고 그 지향하는 공예미의 방향이 얼마나 올바랐는지를 이제 알 때가 온 것이다.
현대 세계 陶藝 미술은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다. 그 하나는 소위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이고, 또 하나는
일본인 濱田, 富本 또 그의 동인이던 영국의 버나드 리위 등 일본계의 디자인이다.
일본계 디자인의 근저를 흐르는 아름다움의 방향은 조선 도자의 아름다움이며, 이제 세계적 거장이라고
일컫는 일본계 작가들은 모두 수백 년 전 조선 무명 도공들의 무심한 경지를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뒤덮는 일본계 陶藝의 붐, 이것을 말을 바꾸면 현대에 되살아나는 5백 년의 수명을 지닌 조선 도자의
아직도 앳된 아가씨 모습임에도 틀림이 없다(完)
17. 한국 건축미와 우리의 가옥
우리 나라의 미술, 이를테면 신라시대의 불상이니 고려시대의 청자기니 하는 것이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줄은 대개 알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건축, 그 중에서도 주택의 세련된 그리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고 또 아껴주는 사람은 그리 흔하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눈에 너무 익숙해지고 또 너무 친근해서 그만 무심해 버리기 쉬운 때문
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상은 요사이 일본식이나 서양식 주택양식이 우리의 현대 주택 속에 혼선이 되어 들어
와서 일견해서 산뜻하고 멋져 보이는 소위 문화주택, 또는 양옥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 같이 세계가 좁아지고 문화의 교류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인의 생활 속에 있어서
생활 능률이나 생활양식, 그리고 생활정서가 여기에 발맞추어져야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판없이 남의 것만을 새롭고 훌륭하게 보려는 것은 문화전통이 신통치 않은 말하자면 세계의
시골뜨기가 할 일이요, 적어도 우리 민족처럼 오래고도 당당한 문화전통을 이어온 민족에 있어서는 부끄러
워해야 할 풍조의 하나라고 하겠다.
우리의 다른 문화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주택은 세상에 내놓아 아직도 새로우며 또 아름다운 요소를 참
많이 지니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생활정서는 이 온상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비원에 있는 演慶堂, 창덕궁에 있는 樂善齋, 그리고 雲峴宮의 여러 주택들은 이러한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주택 양식을 잘 반영한 것이며 그 소담하고도 간박한 구조미는 고려 자기나 신라 불상에 못지 않은 민족
적인 문화재이며 이러한 아름다움과 멋의 基調는 우리의 현대 주택과 생활정서 속에 풍성하게 전승되어야만
한다고 생각된다.
일찍이 간디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 생활문화의 고유한 아름
다움을 풍성하게 지니고 있는 우리의 주택은 충분히 국제적일 수도 있고 현대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장미의 향은 장미꽃에, 국화의 향기는 국화꽃에서 풍겨야 한다.
衣裳과 우리 생활감정의 아름다움, 그리고 남성들이 보는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은 이 전통적인 한국
주택에 담겨져야만 제격을 이룰것만 같다.(完)
<昌德宮 樂善齋>
18.文化財雜記 8 맹견도(猛犬圖)
이번 미국에 가서 전시되고 있는 우리 고미술품 중에 덕수궁미술관 소장인 猛犬圖라는 개그림이 한 장 있다.
원래 이그림은 덕수궁미술관에서 사들일 때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고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는 士能
이라는 김홍도의 아호 낙관이 찍혀 있어서 그대로 김홍도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던 모양이다.
그림 솜씨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기법에 서양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해서 차츰 그림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고 그 후 김홍도의 작품으로 비정할 자료가 희박하다 해서 결국 필자미상으로 해두자는 것이
정설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작년 여름 이 그림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석조전에서 다른 국보들과 함게 국내 전시회를 갖게 되었고
이 전시에서도 필자미상으로 설명되었음은 물론, 이 전시회 기간중에 의외로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관심이
이 그림에 끌리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여러 소년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즉 “우리 교과서에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왜 필자미상이라고 했습니까?”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 때 이 소년들의 질문에 대해서 장황하게 긴 이야기를 설명할 기회가 없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 그림의
유래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마 己未年 이전의 어느 해 가을 春谷(고희동) 선생이 찾아간 北村(서울)의 어느 댁에서 마침 주택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장지문 두껍닫이를 찢어낸 종이 속에 찢어진 채로 나타난 속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림도 비범하고 작풍도 재미있어서 버리려는 것을 얻어 가지고 心田(안중식) 선생댁 사랑으로 들어가서
心田, 小琳(조석진), 貫齋(이도영) 여러분 앞에 보여드리게 되었다. 여러 분 앞에 나타난 이 정체 불명의 古畵는
단연 관심을 끌게 되었고 과연 이 그림은 누구의 그림이냐는 것이 문제가 되었음도 물론이었다.
결국 정체 모를 이 그림은 “이만한 솜씨를 보이려면 단원밖엔 없을 테니 단원으로 해두세”로 결말이 나고
얼마에 팔렸는지는 잊었지만 그 그림은 後日 덕수궁미술관으로 들어와 보물이 된 것이었다.
덕수궁미술관의 기록을 들춰 보니 1918년 4월21일 金敦熙 선생에게서 20원에 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고
春谷 선생 말씀을 들으면 그 때 얼마에 팔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돈으로 여러 선생님들과 3,4일 동안이나
요리집에서 약주를 진탕 사 잡수시는 밑천이 되었다고 하니 이 그림의 이력도 이만저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完)
* 저도 어릴 때 國史와 美術 교과서에 단원 金弘圖의 作品으로 명기되어 있어 그렇게 알았는데 어는 날
갑자기 작자미상이란 해설을 보고 당황한적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 1997. 4. 18 於 동아일보
굵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배를 쭉 깔고 먼 곳을 응시하는 맹견 한 마리, 정확한 명암과 투시,
살아있는 근육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맹견도>의 모습이다.
40대 전후라면 중고교 시절 미술교과서에서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으리라. 단원 김홍도 작품이라는 것과
함께. 그러나 이 맹견도는 단원의 그림이 아니다. 최근 정신문화연구원의 허균 연구원이 <얼과 문화> 4월
호에<서양화법으로 그린 의문의 그림 맹견도>를 발표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원복 학예연구관이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중략 : 위 본문 내용과 비슷함)
단원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인가. 허씨나 이씨 모두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우선 서양 화풍의 냄새가 짙다는 점에서 추적을 시작하고 있다. 명암법, 투시법 등이 바로 그 예,
이같은 서양화법은 영정조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따라서 낯선 화법의 맹견도는 중국에서 서양화법을
배운 조선인이 그렸거나 서양화법을 익힌 중국인이 그려 한국에 유입됐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씨는 여기에 중국에서 활약하던 서양화가일 가능성 하나를 더 들고 여러모로 중국 그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
그림의 주인공인 개 역시 토종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 그림이 아니라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이광표 기자)
19. 文化財 雜記 5 - 장승
韓國의 民俗 關係 文化財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장승이다. 이 遺物은 멀리 上古時代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 민간 신앙의 기념비적 존재로서 病苦와 재액(災厄) 속에 항상 가난하게 살아온 대다수 서민생활
위에 한가닥 위안의 지표가 되어온 것이다.
이즈음도 시골길을 걷노라면 가끔 洞口 밖에 서 있는 수살대나 장승들의 奇古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格이
있는 당당한 往年의 佳作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들 장승들 사이에 어울려 있는 유구한 서민사회의 생활정서는 마치 우리 민족을 길러낸 자장가와도 같은
것으로서 아기들이 들어도 재미있어 할 어른 세계의 동화를 얼마든지 간직하고 있으니, 病苦와 災厄을 막아
주는 장승일뿐만 아니라 그의 콧구멍을 후벼서 甘草와 함께 달려 먹으면 아기를 갖게 해준다는 장승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승들이 우리 民俗文化財의 소중한 유물임에 틀림이 없고 이 문화재 중 좋은 작품을 찾아내어
보존을 꾀해야 되리라는 것은 문화재 보존 관계자들이 지닌 묵은 현안 중의 하나였음도 물론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아직 이러한 현안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장승들은 썩어만 가고 세상은 바뀌어 갔다.
보스턴 市에 머무르고 있던 작년 초여름의 어느 날 그 곳에서 북쪽으로 한 35분 기차로 갓 씨램이라는
조그만 항구를 찾은 일이 있었다.
이 씨램市에는 미국 안에서도 오랜 박물관 중의 하나인 피바디박물관이 있었고 이 박물관에 우리 나라의
근사한 장승이 진열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한국, 일본 것이 진열된 큰 민속품 진열실 안에서 관연 우리 나라의 거대한 장승 한 쌍이 이채를 끌고 있었다.
이제까지 국내에서도 본 일이 없는 당당한 것으로서 아마 現存한 세계 최대의 장승이라고 단언할 있으리라고
믿어진다.
그 깊고 刻明한 조각과 굵고도 늘씬한 체구 등 아마 그 높이가 20數 척에 달하는 것이었으며 천장이 통해진
중앙 홀에 용립(聳立)해서 이 방의 잡귀들을 마음껏 질타하고 있었다.
장승하면 마치 우리 나라의 간판처럼 自他가 내세우면서도 왜 우리 국내에는 좋은 유물이 남겨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 피바디박물관의 위대한 장승을 보면서 야릇한 시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세속적인
욕심에서라기보다 이 거창스러운 유물을 이미 수십 년 前世紀에 있어서 數萬里 밖에서 옮겨간 그 고장 사람
들의 형안(炯眼)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完)
20. 韓國 美術史 및 理論의 開拓者(高裕燮 先生회고)
1944년 6월 28일 又玄 高裕燮 선생을 마지막 들가로 내모시는 초여름 아침은 때 아닌 바람이 거세게 子男山
중턱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별식장의 차일들이 마구 바람에 펄럭이고 상복의 미망인과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애처러운 얼굴 위에
흐트러지곤 했다.
긴 조사를 들으며 거센 바람에 시달리는 뜰가의 원추리꽃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시골 도시 하나가 온통
해쓱하게 빛을 잃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뜰 앞에 피는 원추리꽃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고 문득 그날 그 때의 추억이 되살아
나서 나는 곧 이름 모를 감상에 젖곤 한다.
이제는 고고미술 동인들을 비롯해서 제법 수가 늘어난 후진들이 우현 선생이 걸어가신 길 위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온통 일본인 학자들 重圍 속에서 문자 그대로 孤軍奮鬪하고 계셨다.
선생의 저술 목록을 일별(一瞥)해도 곧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회화, 조각, 공예, 건축의 각 분야에서 우리
미술의 전통과 그 진가의 究明에 그 결곡하고 짧은 생애를 불태우셨고 사회의 계몽에 焦心하신 뜻이 다시금
우러러 보이는 것이다.
학문적인 논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짧은 생애에 비하면 신문 잡지류의 기고도 놀랄 만큼 많았다.
이것은 우리 미술사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론, 미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룬 선생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깊은 정열을 보여 주신 것이다. 말하자면 선생은 한국미술사의 개척자로서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술이론
분야에서도 처음으로 무게있는 업적을 우리 사회에 남겨 주신 분이다.
즉 선생의 저서 <韓國美術史 及 美學論考> 제2부에 수록된 10편의 논고는 선생이 미학자로서 다룬 이러한
깊이있는 現代美術觀과 藝術論의 편모를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채로운 것은 <協展觀評>이라 題하신 전람회 평이었다.
숨막힐 듯한 왜정치하 속에서 총독부 官展과 맞서서 화단에 끈기있는 민족적인 저류를 이루어 온 <서화협
회전>의 작품들을 그 해박한 에술관을 통해서 종횡으로 해부하신 솜씨는 이제 읽어도 그 명쾌한 감명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구나 <서화협회전> 존재의 의의를 계몽한 대목은 당시의 중압아래에서도 굽힘없는 선생의 기백의 일면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선생은 子男山室의 서재에서 10년 동안 연구에 골몰하는 동안 건강을 그르쳤고 끝내 子男山室에서 棄世
하셨지만, 선생이 일상하신 말씀으로 보면 할 일을 못하고 살아가기보다 한국 미술의 진가와 전통의 올바른
체득을 위해서 심신을 모조리 불사르시고 자진하신것이다.
선생이 생존하셨던 어느날 서재로 찾아온 어느 방문객이 “선생님 그렇게 공부만 하시면 일찍 돌아가십니다.”
하고 말을 건넸을 때 선생이 의연히 대답하신 일이 있다. “모르고 오래 살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하고 싶은
공부나 하다가 죽지요.”(6월 26일 20주기일에)
21. 又峯 趙熙龍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그림에는 文氣가 깃들인다는 것은 아무의 그림에서나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매우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작가중에도 문기가 없는 속된 그림만 남긴 사람이 적지 않고 그 반면
그림의 솜씨는 서투르더라도 풍기는 문기 때문에 늘 눈맛이 환한 그람만 남긴 작가들도 있다.
따라서 그림도 능숙하고 문기 높은 그림이라면 錦上添花格이 된다. 又峯 趙熙龍(1797~1859) 같은 작가는
이러한 의미로 그림도 좋고 문기도 높은 작가의 한 분으로서 가히 작가의 인품이나 학식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봉은 그림뿐만 아니라 詩文과 書藝가 뛰어났으며, 특히 秋史體의 眞髓를 터득해서 또 따를 이가 없으리
만큼 방불한 글씨를 쓴 분이었다.
매화를 즐겨 그려 梅수라는 雅號까지 지닌 분이어서 매화를 주제로 한 그림중에 걸작이 많고 또 난초나
산수화 등 문기 높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 분의 그림과 추사체의 畵題 글씨는 비할 것이 없으리 만큼 잘 어울릴 뿐더라 수묵으로 질풍같이 휘몰아쳐
그린 호탕한 붓자국에 흐르는 詩情의 멋은 이른바 詩, 書, 畵 一致의 경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그 분의 사색이나 畵意에 구김살이 없고 그 분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淸秀한 그의 인품마저
느기게 해 주니 과연 문인화가다운 화가였다고 할 수 있다.
봄 눈이 강산에 구름처럼 쌓인 山居의 주변에 淸香을 뿜으며 피어나는 매화나무 숲을 그려서 이렇게 압도
적인 筆力을 발휘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닐 뿐더러 그림 자체가 그의 추사체 서예에서 단련된 굳건한 필력
에서 오는 속도와 힘의 結晶인 가닭에 그의 준法이나 구도에 독창적인 멋이 깃들어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한 바탕을 이루어 주었다.
어째든 19세기 전반기 그림으로서는 무섭게 신선한 감각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고, 또 이 작가는 豹菴
姜世晃(1712~1791), 阮堂 金正喜 같은 분들과 더불어 회화 비평과 회화론에서 다 비상한 눈과 이론체계를
지녔던 분이다.
그의 <壺山外史> 같은 저술의 내용도 그러한 함축의 일면을 보여 준 저작으로 그의 업적 중의 하나에
속한다.(完)
22. 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
申紫霞(신위)의 <경수당집> 이인문 題畵조에 "선왕을 모시던 화사 중에 뛰어난 사람은 그대와 단원이더니
뜬구름인 양 단원은 이미 가 버리고 그대만이 이승에 남았구나"라고 한 대목이 있다.
원래 이인문과 단원은 공교롭게도 모두 1745년생인 동갑내기였으므로 같은 무렵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함께 두각을 드러냈음을 이 <경수당집> 기사가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다만 김홍도는 남종화풍을 절충한 한국 사실 풍경화에 독특한 자기체를 세워서 국풍화한 한국 산수화의 고
유한 정취를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민사회의 생태와 서정을 주제 삼은 풍속화를 개척한 선구적인 작가
였던 반면 이인문은 보다 더 대륙화풍에 익숙하고도 충실한 화가로서 특히 산수화에 매우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이인문의 산수화는 단원의 그것에 비해 강한 개성이나 풍토적인 체취가 덜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다양하고도 원숙한 그의 묘사기법은 화단에 단연 두각을 드러내 주목을 끌었으며 간혹 수묵 담채로
된 실경 산수, 예를 들면 斷髮嶺望金剛圖 같은 작품은 그 기법이 참신해서 마치 근대의 수채화 같은 서구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주로 중국의 명대 화단에 일어났던 浙派 그림의 감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산수화가 그의 특장이었
으나 명나라에서는 이미 그 후반기에 남종화풍이 크게 진출해서 남북종 절충 양식이 성행했으므로 자연
이인문의 그림에도 남화적인 작용이 곳곳에 노정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어째든 이인문은 18세기 말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서울 화단의 총아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장수를 누린
사람이었으므로 남긴 작품도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도 국립박물관에 있는 江山無盡圖卷은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 장장 수백 리에 뻗쳐서
전개되는 대자연의 양상을 매우 환상적으로 표현한 정력적인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풍경에서 한국의 자연 정취를 실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음은 그의 화풍의
본바탕에 연유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보통 얻을 수 있는 시골의 첨사 벼슬을 지낸 것으로 전해졌으나 어느 지방이었
는지 알 수가 없으며 77세의 장수를 누린 분이었다.(完)
<斷髮嶺望金剛圖>
23. 毘盧峯圖
謙齋 鄭敾이 그린 금강산 그림 중에는 간혹 斷髮嶺望金剛圖라는 작품들이 있다. 대개는 작은 소품에 불과
하지만 단발령에서 먼 동해쪽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는 두 세 사람의 선비들을 近景으로 하고 안개 저쪽에
솟아오른 비로봉과, 이를 둘러싼 금강 連峯을 遠景으로 그린 직품들이다.
이러한 겸재의 그림을 본 사람이면 으레 단발령에 올라서면 환하게 터진 동해쪽으로 금강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보이려니 하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이다.
春谷 高羲東(1886~1965) 선생이 아직 동경미술학교 학생이던 때 이 단발령망금강도의 實景을 보고자
李道榮 선생과 함께 일부러 먼 길을 돌아서 단발령에 올라보니 청명하게 갠 날씨에 시야는 끝간데 없이
맑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금강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자, 춘곡 선생은 비로서 겸재의 그러한 그림이 익살
스러운 상상화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바로 그분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겸재처럼 금강산을 올바로 보고 느끼고 또 지극히 사랑한 화가는 과거에 또 없었고, 눈을 감으면 바로 그의
머리 속에는 금강산 1만 2천봉 굽이굽이가 선하게 펼쳐젔을 것이니 그러한 환상을 가져봄 직도 한 일이다.
어째든 이 毘盧峯圖 대폭을 바라보면 호방한 그 분의 氣槪나 구상의 雄渾함에 압도되면서 단발령망금강도
이야기가 언뜻 생각나서 엄숙에 가까운 야릇한 흥겨움마저 느끼게 된다.
금강산을 그려서 이처럼 큰 氣宇를 표현한 예가 과거의 어느 화가에게도 없었고, 이처럼 큼직한 폭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빠른 붓끝으로 단숨에 그려 낸 듯싶은 이 작가의 장한 筆力 같은 것은 다시 길러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금강산을 그리려면 바라보는 각도와 화면 구성이 천태만상일 수 있지만, 비로봉의 웅대함과 皆骨山 1만 2
천의 신비스러운 봉들을 이처럼 신나게 단폭의 화폭에 구성한 그 상상력은 架空的이라고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금강산의 크고 장엄함을 너무나 올바로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靈感의 세계라는 느낌이 깊어진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모양의 비로봉이나 흘립(屹立)한 산봉들은 실경으로는 아무 곳에도 없지만 금강산의
크고 맑은 정기를 이보다 더 집약적으로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먹빛의 濃淡을 가려서 쓴 水墨一色의 붓자국의 자유자재라든지 붓끝의 움직임에 마디마디 맺힌 힘과 속도를
자신있게 간직한 점이라든지 좀처럼 아무도 흉내내기 힘든 筆跡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구상은 금강산을 夢寐間에도 잊지 못하고 살아온 겸재가 꿈속에서 얻은 영감의 소산
이라고나 할는지.
어째든 범속한 화가의 붓끝으로는 엄두도 내기 힘든 후련한 그림이며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의 아름
다움이란 때로는 이렇게 웅혼할 수도 시원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의 표본을 우리는 이 그림에서 역력히 보았
다는 느낌이다.(完)
24. 枯淡의 美, 疏散의 韻(제3회 李基雨 書藝,篆刻展)
상형문자로 출발한 한자가 문자효용을 능률화하기 위하여 점차로 추상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었고
추상화된 한자의 형태미는 동양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으뜸이 되어 온 것이다.
서예나 전각이 이렇듯 오랜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언제까지나 새로울 수 있는 여건은 실로 이러한
동양미의 조종을 이루는 추상미의 세계와 그 시대 각개 작가가 지니는 개인미가 복합되어서 항상 부차적인
시대감각을 함축성 있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장 전통적인 서예가 늘 새로울 수 있으려면 작가 자신의 개성이 뚜렷해야 하고 세련된 시대감각이
잘 반영되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즉 기법의 세계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위에 오랜 전통을 지닌 서예나 전각에 있어서
작가의 뚜렷한 개성처럼 빛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에도 하고 많은 서예가가 명열했지만 근세의 완당 같은 분이 그렇게 애틋하게 추앙되고 있는
것은, 물론 그분의 학문이나 위인에도 있겠으나 그분의 예술이 발산하는 탈속한 개성미가 빛나는 데에 더
큰 매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서예계에 희구하는 것도 실로 이러한 개성미의 작가라고 할까. 이번 개인전에서뿐만 아니라
철농의 작품은 우리 서예계에서 드물게 보는 개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翰墨의 각 부문에서
한결같이 그 고담의 미, 소산의 운을 멋지게 풍기고 있어서 한묵의 세계에 친할 기회가 없었던 일부 교양인
이나 젊은 세개들에게 주는 계몽적 효과도 매우 컸다.(완)
<철농 전각 작품>
25. 文化財 雜記 6 -석굴암
한국 부처님들의 얼굴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하면 좀 우스운 이야기같지만 외국에 나가면 거리나 학교같은
곳에서 곧잘 우리 한국 사람을 맞추어 낼 수 있듯이, 여러나라 부처님이 모여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늘
눈여겨 돌아보노라면 정말 한국 부처님의 얼굴이 고향 친구처럼 눈에 익어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
큰 미술관이라 해도 우리 나라 부처님의 수가 얼마 안되니까 대개는 중국 불상들하고 섞어서 한 방에 진열
하는 예가 많았고 심지어는 같은 진열장 속에 중국, 일본, 네팔, 싸이암 등 여러 나라의 부처님들 속에 한데
끼어 진열한 예도 적지 않았지만 이런 진열장 앞에 서더라도 으례 한국 부처님이 먼저 한국 친구를 알아보기나
하는 듯이 우리 부처님 얼굴이 훤하게 먼저 보이니 즐겁다.
이것은 일례로 든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민족문화의 개성이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확실하게 미술작품 위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은 모름지기 한국 사람들이 자랑삼을 수 있는 맨 첫번째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은 京都帝大의 총장을 지냈고 일본 고고학 미술사학계의 거두로서 소위 경도파의 많은
학자를 길러낸 濱田耕作 박사가 그의 저서 속에서 우리의 至寶 석굴암 조각을 "아나도 이것은 唐土에서 온
명공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썼던 대목이 있다.
물론 석굴암 조각의 양식적인 면이 盛唐 조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에는 異議가 없으나 여러 부처님들의
얼굴 위에 한결같이 나타나 있는 우리 한국 조상들의 조촐하고도 따스한 얼굴 모습의 반영은 모든 한국 벗님
들의 얼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자신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에 나는 즐거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즉 미국에서 만나본 여러 한국 부처님과 꼭 같은 정다운 모습으로 이 석굴암 부처님이 한국 사람인 나를 속히
알아봐 주신 까닭이다.(完)
26.古藍 田琦(1825~1855)
이조 5백 년 화단사에 명멸한 鬼才 화가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고람은 가장 뛰어난 격조를 보인
귀재 중의 귀재였다. 특히 고람은 지식인으로서 詩,書,畵에 모두 뛰어난 경지를 보였음은 완당 김정희가
고람에게 준 대련 글씨 속에서 한 찬사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이 된다.
즉 "그림은 麻谷의 새 법을 보였는데 시는 石帆의 옛 가락이도구나-고람의 시와 그림이 더할 수 없이 아름
답기로 이 글귀를 주노라" 한 대목이 그것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고람의 예술과 생애를 전해준 기록으로는 又峯 趙熙龍이 그의 <호산외사>에 남긴
田琦傳이 있으며 그 속에서 우봉은 전기의 인품과 예술을 가리켜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몸체가 우람하면서도 면모가 빼어났으며 古韻과 幽情이 넘쳐서 마치 晉, 唐의 畵中人인양싶기도 하다.
그의 작품 山水煙雲圖를 보면 蕭散簡澹해서 원나라 그림의 묘법을 잘 그려 냈으되 그 필의는 우연하게 이루
어진 것이며 원나라 화가의 기법을 배워서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詩도 매우 격이 높았으며 고람의 그러한
안목과 필력이 양성된 것은 그가 압록강 이동에 그 예술의 기준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나이 겨우 30에 집에서 병사했다."
우봉은 고람보다 근 30년이나 연장자였으나 연소한 고람 아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했던 모양으로
이 밖에도 <석년망년록>을 비롯해서 고람에 관한 절절한 글발들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고람의 작품에는 우봉이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 元末 대가들의 남종화풍을 연상시켜 주는 뛰어난 산수화들이
많으며 柴門月色圖는 그러한 작품으로서 피마준으로 된 煙霞山水의 가작이다. 또 溪山苞茂圖, 秋山雜秋圖 등
작품은 문인화풍의 素描로써 고람 예술의 높은 詩情과 文氣가 실감되는 걸작 소품들이다.
고람은 1825년 생으로 30세에 질병으로 요절했으며 이름은 在龍, 字는 而見, 瑋公, 奇玉 등으로 바꿔 썼으며
호는 고람과 함께 杜堂이라고도 불렀다. 衡堂 劉在韶와 우의가 깊어서 같은 호를 공용해서 二草堂이라고도
부른 일이 있으며 이 이초란 杜와 衡을 뜻하는 것이었다.(完)
27. 한국 호랑이
조선시대의 그림 중에서 범을 그린 작품이 많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사람들과 범과의 관계가 다른
민족보다 깊다는 것과, 또 바구어 말하면 한국 사람들은 범을 좋아한다는 말도 된다.
실상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이 그런 법에는 어딘가 범 같지 않은 범이 많고, 심지어는 이 사람들이 범을
알고 그린 것인지 모르고 그린 것인지 의심할 만큼 제대로 생긴 범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조선시대 후반기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 초기의 범 그림만 하더라도 명화라고 할 만한 작가의
작품이 적지 않아서, 한국은 과연 범의 나라구나 하는 농담을 하게도 된다.
조선 초기의 범 그림 중에서도 李上佐의 猛虎圖(현재 일본에 있음) 같은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위엄과
박력에 압도감을 금할 길이 없게 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雷聲闢靂과 휘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네 발을 버티고 번갯불을 향해서 咆哮하는 억척스럼운 범의 위엄을 대담하게 표현해서, 나의 망막 속에 지금도
지워지지않는 감동을 심어 주고 있다.
이 밖에도 高雲(1495~?)이 그린 맹호도 같은 작품은 전부 시시한 범의 모습을 너무나 여실하게 표현해서
외극에 있는 동안 시간 여유를 얻으면 동물원으로 호랑이를 만나러 가는 나의 버릇을 실감나고 즐겁게 해 주는 요
인이었다.
옛날에는 동물원도 없었을 터이고, 산 호랑이를 불러 놓고 그릴 수도 없었을 터인데, 한국 화가들은 어찌
이다지도 범의 생태를 잘 그린것인지, 나는 외국의 여러 종물원에서 우리 옛 그림에서 본 것과 꼭 같은 느낌의
범들을 만날 때마다 설명판을 훑어보았고, 그런한 범은 예외없이 원산지가 동북 아시아, 만주, 코리아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구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째든 한국 사람은 범의 늠름한 風度와 넓은 도량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인간을 해치기도 하는
맹수로서, 또 한편으로는 우상화된 두려운 神으로서 범을 섬기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山神堂에 가 보면 으례 잘 생긴 큰 범을 거느리고 있는 山神 그림을 모셔 놓았으니, 말하자면 범을 거느린
산신의 모습은, 한국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또 존엄하게 생각하는 도량 넓은 범의 化神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맹호도는 玄齋 沈師正(1707~1769)이 갑오년에 그린 것이라 畵題에 쓰여 있으나, 심사정 생전에 甲午年은
서기 1774년이며 그는 1769년 돌아갔으니, 이 그림은 후세 사람이 보고 화제를 쓴 것인지 필자를 몰라서
심사정으로 해 둔 것인지 모르지만, 영맹스러운 한국 범의 생태를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한 걸작품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범을 섬기는 마음이나, 범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엇갈려서 일어나는 우리의 생활 정서 속에서
풍기는 미의 요소 중에서 적지않이 범의 숨결이 스며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完)
28.毫生館 崔北의 表訓寺圖
崔北은 奇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적인 긍지도 대단했던 사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최북이 九龍瀑에서 술이 만취되어 "天下名人 최북이 天下名山에서 죽는다"고 물로 뛰어들어 이를
구해 내느라고 주위 사람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奇人 최북다운 이야기의 한 도막이다.
이 表訓寺圖는 九龍瀑에서 투신 소동을 벌였던 그 무렵의 작품이었는지 또 다른 금강 유람에서 얻은 畵興
이었는지 분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橫幅으로 이루어진 표훈사 주위의 勝景이 마치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
처럼 시계가 사뭇 시원스럽게 전개되어 있다.
화면의 중심에 소리치고 흐르는 여울물과 그 위에 놓인 虹橋에 이 그림의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橫側에서 바라본 표훈사가 가람은 근경을 이루는 산기슭에 일부가 가려져 있다.
일종의 평원산수법에 가까운 그림으로 內山과 外山이 거의 같은 레벨로 그려져 있는 것도 금강산의 깊이와
넓이를 실감케 해 주는 묘사로서 동시에 다른 작가들의 그림보다는 이색적인 布置法이라고 할 만하다.
又峯 趙熙龍의 <壺山外史> 崔北傳에 나오는 기록대로 하면 최북은 중국 元末 4대가의 필두인 黃大痴를 매우
숭배했다고 하므로 최북은 황대치의 남화풍에서 강하게 영향받았다고 보아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이념이 그러했을 뿐 사실은 자유분방한 자기류의 寫山水法이 한층 강하게 세워져서
황대치풍의 남화산수풍은 그 여운을 느끼게 해 줄 정도에 불과하다.
崔北 茂州人이었다 하나 그의 가계나 출신은 물론 알려진 것이 없고 생년과 卒年도 분명하지 못하다.
다만 그의 향년이 49세였다는 것이 <壺山外史>속에 전해져 있을 뿐이다. 최북의 初名은 '埴'이었다 하며
字는 聖器, 有用,七七. 등으로 쓰였고 호는 만년에 가장 많이 쓴 毫生館을 비롯해서 三奇齋, 居其齋 등이
있었다. (完)
29. 石芝 蔡龍臣
화가 채용신은 평안도 嘉山 고을의 義妓 崔紅蓮의 영정 운낭자 27세상을 그린 사람으로 이름이 먼저 알려
졌지만 원래가 조선시대 말기를 대표할 만한 초상화가로서 많은 화업을 남긴 분이다.
본래 平康 채씨로서 1848년 2월 4일에 나서 1941년 6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면 규리에서 작고하기
까지 94세의 장수를 누린 사람이었다.
이미 1899년과 그 이듬해인 1900년에 걸쳐서 그는 고종황제의 御眞 제작을 비롯해서 조선시대 역대 왕의
御眞을 移摹했다.
채용신은 그 공적으로 漆谷과 定山 군수를 역임했는데 그를 채정산이라고도 부르게 된 것은 그러한 까닭
에서이다.
그가 남긴 초상화로 지금 세상에 알려진 뚜렷한 작품은 정읍군 武城書院에 남아 있는 최치원 영정, 구례
黃梅泉 사당에 남아 있는 매천 영정, 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田艮齋, 崔勉菴, 雲娘子(27歲像) 영정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운낭자 27세상에 나타난 묘사 기법이다.
즉 운낭자가 입고 있는 치마 주름의 굴곡과 그 陰影을 색채의 농담으로 표현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자유스러운 그도에서 서양화 기풍을 느끼게 해주는 점이다.
우리 회화에 나타난 이러한 서양화 기법의 영향은 이미 18세기 말 것으로 보이는 필자 불명의 맹견도와 그
이후의 몇몇 작품에서 예를 볼 수 있으나 이 운낭자 초상에 나타난 서양화풍의 영향은 그보다 한층 새로운
것으로 중국을 거쳤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을 거쳐 거쳐서 파급된 외래 양식의 수용이었다고 해석된다.(完)
30. 仁旺霽色圖(鄭敾)
조선시대의 수백 名畵家들 중에서 서울의 풍경을 寫生畵로 가장 많이 그려 남긴 작가는 謙齋 鄭敾(1676~
1759)이다. 말하자면 서울을 사랑하고 서울의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을 즐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겸재의 서울 그림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仁旺霽生圖나 壯洞八景이니 淸風溪니 하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골짜기를 중심으로 한 풍경의 그윽함을 묘사한 것들이다.
그것으로 보면 겸재는 그 근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음직도 하고 또 그곳이 좋아서 여름 가을 없이 물소리를
즐겼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그 그윽하던 水石과 松林이 모두 변형돼서 覆蓋되었거나 볼품없는
양회집들이 들어서서 市井化해 버렸지만, 그 때만 해도 마치 심산유곡을 연상케 했음이 그의 그림에서 은은히
풍겨 나고 있다.
오다 가다 草堂이나 山齋 한 채쯤 그리고는 낭랑한 물소리가 솔바람에 섞여 계곡을 넘나드는 곳에서 그는
사위를 완상하고 소요했음에 틀림없다.
이 인왕제색도는 全鎣弼 수집품 속에 있는 대작 청풍계도와 함께 아마 그의 산수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근처를 그린 많은 편화들을 보고 있으면 모두 그의 호탕하고도 독특한 준법의 원숙함에 우선
눈이 끌리게 되지만 정작 이 인왕제색도를 보고 나면 이 그림 한 장을 남기기 위해 겸재는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리만큼 눈맛을 후련하게 해 준다.
아마 지금 청와대 근처의 언덕 위에서 비 갠 어느 하오 적연한 이 인왕의 검푸른 모습을 바라보고서 불시에
북받치는 감흥을 누를 도리가 없어서 단숨에 그려 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도 비 기운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계곡에 뽀오얀 안개가 차분히 가라앉아 가고, 주저없이 그어 내린 묵묵한 바위 벼랑의 준법은
海東 산수화의 제일인자라는 聲價에 마땅한 솜씨를 과시하고 있다.
한국 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그윽하고도 신명나게 그린 작가 겸재는 오늘날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고마운
한국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完)
31. 출세한 '호리꾼'
예로부터 우리 욕 중에 '掘塚을 할 놈'이라는 지독한 욕이 있다. 남의 조상 산소나 파헤칠 놈이라는 뜻이
겠지만 어쨌든 못된 사람을 천시하는 매우 나쁜 욕중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오래 전부터 이런 욕이 있었던 것을 보면 옛날에 이미 우리 사회에는 남의 묘나 파헤쳐 먹고 사는 족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 굴총을 전문적으로 하는 새그룹이 생긴 것은 조선 말엽부터인 것 같다.
伊藤博文이 소위 통감이라는 감투를 쓰고 서울에 와 있을 무렵, 이미 일찍부터 고려 청자기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던 일본 사람들이 빨랫줄 같은 伊藤博文의 세도를 그늘 삼아 마음 놓고 우리네 조상들의 墓 속을
노리는 소위 '掘塚業'을 시작한 것이다.
이 하수인들의 군상을 그들은 '호리(掘)'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우리들은 거기에 '꾼'字 하나를 더 붙여서
'호리꾼'이라고 부르게 된 모양인데 일본인들의 말을 빌리면 물주는 자기네들이지만 그 하수인들은 처음
부터 '조센징'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伊藤博文은 어떤 의미로 그 굴총업자들의 '오야가다'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伊藤이 그들에게서 사들인 고려청자가 수천 점에 달했고 이로 말미암아 서울에 와 있는 일본인 사회에는
한때 靑磁狂 시대를 現出했었다고 술회한 그의 심복 부하 三宅長策의 말을 빌리면 오야가다의 누명을 벗을
도리가 없어진다고 하겠다.
伊藤은 서울 장안에 나오는 청자를 닥치는 대로 수십 점 수백 점씩 '도리'해 가지고는 기분내키는 대로
본국의 왕실이나 친지에게 선사했으며, 1년에 한 두번 있는 본국 나들이 때는 큰 짐짝으로 배에 실어간
것이 부지기수였다 하니 당시의 행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굴총기술의 연원으로 보나 조직으로 보나 오늘날에도 성행하고 있는 우리 굴총업자들은
일본인들의 陋習을 이어받은 것이며 年條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 옛날의 황금시대를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굴총여행을 떠난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호리꾼의 말을 듣고 그만 실소
하고 만 일도 있지만, 이젠 굴총업도 제법 발달해서 조직망, 정보망이 정연하다고 하고, 이 굴총업자들이
파낸 물건들은 소위 '가히다시(買出)'꾼들의 손으로 거두어져서 각지의 골동상인들의 손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E골 같은 데는 삼남일대의 이러한 출토물을 다루는 거상이 진치고 있다는 게 그들의 말이다.
나의 신분을 모르는 시내 어느 구명가게 골동상에서 얻어들은 이야기이지만 "요새 한국에 고고학자가 어디
있나요, 호리꾼들이 고고학자지요. 대학교수나 고고학자보다 호리꾼이 더 잘 알아요. 호리꾼들이 아니면
우리 나라 문화재가 어디서 나옵니까."
이쯤되면 '호리꾼'도 '굴총할 놈'으로부터 무던히 출세한 셈이 되니 '掘塚家'쯤으로 경칭을 붙여주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完)
32. 蓮潭 金明國
좋은 작가의 좋은 그림이란 늣늣하고도 시원스러우며 또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작용해 오는 비상한 감명
같은 것이 따르기 마련이다.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같은 그림도 말하자면 좋은 작가의 좋은 그림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그림
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기개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숨에 그려 내린 인물의 윤곽과 한점의 실수도 없는 세부의 붓끝까지 신기스러울 정도로 생명감이
스며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그림이 지니는 기교의 비밀 같은 것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즐겁다.
그림이란 낱말 그대로 주저없이 그려진 붓자국에서 동양화로서의 참맛과 격조가 나타나는 법이며 서양화
에서도 반 고호나 모네, 시슬레이 같은 인상파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그림의 비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붓자국이 뚜렷해서 속이 시원해질 때가 있다.
말하자면 한 점 한 획도 뇌까림이 없는 정확한 필력과 붓자국에서 우리는 회화 예술의 비밀을 역역히 볼
수있다는 말이다.
연담 김명국은 조선왕조 인조시대의 화가로서 임진왜란 이후 침체되었던 화단에 발랄한 생기를 불어
넣었던 대가였으며 우리 화단의 재건뿐만 아니라 1636년과 1646년에 전후 두 차례나 조선 통신사의 수원
으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한국 화단의 관록과 조선인의 기개를 일본 지식인 사회에 과시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활달한 작품들이 적지 않이 당시의 일본 조야에 남겨져서 지금도 일본 안에는 연담의 작품
들이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달마도도 그가 일본에서 그려져 일본에 남겨두고 왔던 작품의 하나였으며 우리 박물관이 일본에서 사들여
온 것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간의 국교가 다시 열린 직후 일본을 찾은 우리 사절단의 감개는 과연 어떠했는지
달마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적어도 예술가 김명국의 가슴속을 탁 털어 표현한 조선인의 기개같은 것을
느끼는 듯도 싶고 보란듯이 일본 지식인들에게 이런 그림을 그려준 그의 뜻이 한층 돋보이기도 한다.
연담 김명국은 安山 김씨로 字는 天汝, 호는 蓮潭, 醉翁이었으며 命國, 鳴國으로도 쓰인 문헌이 있다.
연담은 선조 33년(1600) 庚子에 출생했으며 그의 장년기인 36세 때와 46세 때에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화단에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음은 전기한 바와 같다.
鄭來僑의 <浣巖集>에 보면 연담은 천생으로 성품이 호협하고 술을 즐겨서 언제나 술에 취하면 한층
畵興이 돋우어져서 걸작을 낳았다고도 한다.(完)
33. 舞樂圖(金弘道1745~1810?)
단원 金弘道(1745~?)의 풍속도를 보고 있으면 서민 사회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화면에 넘쳐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쁘다든지 미끈하다든지 하는 느낌보다도 이렇게 익살스러운 표현이 앞선다는
것은 단원이 서민사회의 생태를 너무나 잘 보고 잘 알고 또 사랑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천민으로 처우받는 대장장이나 풍각쟁이 또는 마부나 머슴들의 생활에서 풍기는 사는 즐거움을
이처럼 익살스럽게 그렸다는 것은 당시 사회나 畵壇으로서는 뜻하지 못하던 일이었으니 단원이 남겨 준
이들 풍속화는 한걸음 앞선 단원의 사상이나 그의 사람됨이 반영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 미가 지닌는 장점의 하나는 구수함이요, 또 은근그러움이며, 때로는 익살스러움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러한 서민적인 대상 속에서숨김도 과장도 없이 풍겨 나는 일종의 흥겨움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려자기나 조선 자기 또는 불상조각이나 건축 등 각 분야의 작품에서 이러한 아름다움의 요소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발견된다면, 이것은 이것은 거의가 서민 자신들의 위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농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왕실의 권위나 종교의 권위를 돋우기 위한 작품 같은 것에는 그 상대방의 주문에 따라 위엄과
기교가 앞서야 되고, 따라서 한국 사람들의 본바탕 생활 문화나 생활, 감정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표현
하는 서민 감정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 김홍도의 그림도 산수화나 신선도 같은 본격적인 작품에는 이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익살이나 구수함보다는 높은 품위와 그의 영감에서 오는 세련된 아름다움이 앞서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그림의 대상을 이러한 서민사회의 생태에서 잡으면, 익살과 구수한 흥겨움이 붓끝과
그의 가슴속에서 용솟음쳤던 것이다.
이 舞樂圖는 그의 <風俗圖帖>에 있는 한 조각의 소품에 불과하지만 풍악의 박자가 숨가쁘게 높아가는 데
따라 舞童의 옷자락에서 사뭇 바람이 일 듯 춤추며 돌아가는 동작의 속도가 한눈에 느껴짖는 듯싶다.
피리를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나이는 입김ㅇ에 양볼이 부풀어 있으며, 양손에 북방망이를 들고 뒤를 돌아
보며 북을 울리는 사나이의 얼굴과, 긴 大芩을 불며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앉은 자세 등이 이 흥겨운 장면의
묘사를 비범한 構圖와 布置로써 이루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 그림이 자칫 잘못하면 격식에 얽매이거나 운동감이 죽기 쉬운 폐단을 곁들이기 쉽지만,
大檀園의 出衆한 회화적인 역량은 살아서 날뛰는 이 흥겨운 群像을 표현해서 그 다양한 운동감과 선율의
해화를 멋지게 이루어 놓은 것이다.(完)
34.美人圖(蕙園 申潤福1758~?)
서양에서는 중세나 근세의 초상화 하면 으례 아름다운 여인을 연상할 만큼 미인들의 초상화가 많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경우는 왕가나 사대부 선비들의 집안에서 부인들의 초상화를 남긴 예가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하면 춘향이니 계월향이니 운낭자 최홍련이니 하는 義妓들의 초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초상화들도 오래된 초상화는 거의 없어져서 조선 말에 채용신이 그린 최홍련의 초상화 한
폭이 겨우 조선 미인 초상화의 여운을 남겨 주었을 뿐이다.
蕙園 申潤福(1758~?)은 風流男兒나 기녀들의 생태를 그려서 조선시대 花柳界의 戀戀한 생활정서를
뛰어난 솜씨와 情愛로써 후대에 전해 준 귀한 업적을 남긴 분이었는데, 이 작가가 실존인물 특히 초상화
적인 美人圖를 많이 남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故 全鎣弼씨 소장품 중에 이러한 미인도 한 폭이 있음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이 미인도가 지니는
초상화적인 뜻이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 비록 그 畵題에서 그림의 본인이 누구였는가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필시 어느 풍류남아의 소첩일 수도 있겠으나, 순정적이고 앳된 얼굴에 나타난 미소의 품위로
보나 옷맵시에서 느끼는 세련된 풍김으로 보나 오히려 지체있는 어느 선비의 소첩이었으리라고 상상하고
싶어진다.
삼단같이 윤나는 큰 트레머리의 한 쪽에 자줏빛 댕기가 살짝 내비꼈고, 자주고름에 달린水瑪瑙(수마노)
삼작노리개를 그 희고 연연한 손으로 매만지는 포즈가 이만저만한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초생달 같이 길고 가는 실눈썹과 귀 뒤로 하늘거리는 잔 귀밑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이 초상에서 풍기는
艶麗(염려)하고도 신선한 풍김을 바라보고 있으면 혜원이라는 작가가 그 수많은 풍속도를 그린 것은 어쩌면
이러한 본격적인 미인도를 그리기 위한 발돋움과도 같은 작업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이 미인도에는 爛熟한
느낌이 넘치고 있다.
고려 때 풍류왕자였으며 뛰어난 화가였던 恭愍王이 열애하는 그의 아내 魯國大長公主가 앳된 나이에
産苦로 죽어가자, 상심한 나머지 그린 애절한 초상화가 지금도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 혜원의 이 미인도와
함께 한국의 여인을 그린 초상화로써 쌍벽을 이루었을 것이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초상은 한 줌 재로 변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지금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혜원의 미인도 앞에 끌리는 어리석은 사나이의 향수만이
담담하게 서린다고 해야겠다.(完)
35.兢齋 金得臣(1754~1823)의 破寂圖(파적도)
조선시대 풍속도 하면 으례 蕙園 申潤福(1758~?)이나 檀園 金弘道(1745~1822)의 작품을 연상할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兢齋 金得臣의 풍속도가 여간한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遺作이 드물다.
김득신과 김홍도 그리고 신윤복은 모두 같은 연대의 화가로서 圖畵署의 畵員을 지냈으니 그 교우관계나
화풍에 서로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 세 사람의 화가들이 이렇게 나란히 풍속화 작품
들을 남겨 놓게 된 것은 현실생활에 주제를 둔 풍속화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는 새 時代思潮의 호흡에서도
서로 주고 받은 자극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윤복의 풍속도에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都會的인 세련이나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구수
하고도 익살맞은 서민사회의 일하는 풍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이 김득신의 풍속도에서는 機智와 諧謔의
즐거움이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김득신의 작품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이 풍속도첩의 내용들을 보면
언뜻 김홍도의 亞流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김홍도의 작품에 은은히 흐르는 인간들의 품위나 은근한
詩情에 비하면 김득신의 작품에서는 풍김이 또 다른 익살과 재치가 엿보인다고 하고 싶다.
어느 봄날의 한낮 툇마루에서 자리를 치던 老境의 한 부부앞에서, 아껴 키우던 병아리를 도둑고양이가
물고 뛰는 스릴있는 장면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된 이 그림을, 나는 그의 풍속도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한다.
다급한 어미닭은 필사적으로 새끼를 구하려고 덤벼들고, 뒤를 돌아보는 고양이를 쫓아 영감은 긴 장죽을
치켜들고 사뭇 툇마루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딛는 절박한 풍경이 너무나 한국적이며 너무나 서민적인 익살과
정서를 보여주는 까닭이다.
큰 트레머리를 한 부인의 벗은 발 모습이나 영감의 버선발 맵시도 대조적이고, 부인의 얼굴 표정을 보고
있으면 웃는 상인지 우는 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구수하면서도 친근감이 가는 우리들 시골 아주머니의
얼굴 그대로이다.
영감이 쓰고 있던 감투가 땅에 떨어져서 구르고 있으며, 나래를 편 암탉의 뛰는 자세는 자신도 흥에
겨워서 一筆揮之한 듯 싶은 것은 붓끝의 움직임에 빠른 속도와 숨가쁨이 스며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고 하겠다.(완)
36.小塘 李在寬(1783~1837)의 漁夫圖
又峯 趙熙龍이 쓴 <壺山外史>에 실린 小塘 <李在寬傳>을 읽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관은 어려서 부친을 여읜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서 그림을 팔아서 겨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소당은 원래 스승에게서 그림을 배운 일은 없었지만 스스로 옛 화법을 터득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하늘이
내린 천재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당은 산수화나 인물화를 비롯한 자연계의 모든 事象의 표현이 묘를 다했으며 더욱이 뛰어난 것은 인물
초상화 솜씨였다.
이러한 솜씨는 아마도 上下 百年 동안에는 또 없는 솜씨라고 할 만하다. 일본 사람들도 해마다 동래관을
통해서 소당의 화조 그림을 사갔으며 永興 璿源殿에 모셨던 李太祖의 영정이 도난당했을 때도 훼손된 이
영정을 서울 경희궁에 옮겨 놓고 소당으로 하여금 고치도록 했다.
소당은 그 공으로 登山僉使의 벼슬을 얻었으나 이 벼슬에서 풀려서 집에 돌아온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소당의 나이 55세였다" 이 간단한 전기의 내용으로 보아 소당은 뛰어난 천재로서 미술비평
가이기도 한 우봉에게서 최대의 찬사를 받은 드문 화가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은 오늘에 전해진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이 <소당화첩>
한 권 에 담긴 작품만 가지고도 그의 예술가적인 관록을 충분히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만하다.
이 소품 산수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그가 늘 즐겨서 그리는 산수의 布置, 즉 원경이 없거나 또는 희미한
자연 속에 초연하게 들여세운 주인공의 탈속한 자태에 생명을 부여하는 비밀을 알만도 하고 또 그 맑고 조
용한 詩情의 높은 격조를 좀처럼 흉내낼 만한 적수가 없었다는 점도 실감이 되는 듯도 싶다.
마치 이 그림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 한 사람의 주인공을 위하여 집약되었다는 느낌이 깊고 또
초저녁 으스름 달밤에 낚싯대에 물고기 몇 마리를 드리우고 건들거리며 다리를 건너는 조인공에 주의가
몰려 있어서 달을 보고 짖어대는 사립문 밖 개 한 마리와 대조되어 초가 오두막집의 아늑한 저녁 정서에
한층 은근하고도 따스한 느낌을 곁들여 주고 있다.
소당은 1783년생이다. (完)
37. 玄齋 沈師正(1707~1769)
과거에 화가 沈師正의 예술과 그 화업을 가장 분명하게 평론한 분은 표암 강세황이었다.
즉 <槿域書畵徵>에 나오는 그의 玄齋畵帖題跋에 보면 "玄齋의 그림공부는 沈石田(沈周)法으로부터 비롯
하였다.
처음에는 皮麻준 또는 米法의 大混點을 했으나 중년에 이르러서 비로서 大斧劈준을 쓰게 되었다.
대체로 玄齋는 繪事에 관해서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으나 그 중에서도 花卉와 草蟲 그림을 더 잘 했으며
그 다음이 새그림(翎毛), 그 다음이 산수화였다. 따라서 그는 산수 그림에 힘을 더 썼고 인물 그림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豪邁하고 淋리한 품에 있어서 때로는 謙齋에 미치지 못하나 勁健雅逸한 맛은 오히려
謙齋를 앞질렀다고 할 수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이상의 비평을 보면 玄齋는 산수화에 한층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자인하고 산수화 작품에 더 정진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玄齋의 산수화가 시원치 않았다는 뜻으로서보다는 그의 花卉와 草蟲 그림이 당시 화단
에서 拔群해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말하자면 현재의 화훼와 초충 그림들이 지니는 무르익은 솜씨라든지 그 독보적인 색감을 보면 과연 조선
5백년 화단에서 따를 이가 없구나 싶은 반면 산수화가로서의 그의 작품들 또한 두드러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뜻한 필치로 온건하게 다룬 大斧劈준의 묘미라든지 본고장 솜씨를 딛고 넘어설 만큼 淋리하게 환친
米法의 신선한 감각이라든지 장년기 이후의 玄齋 작품들은 당시의 燕京 화단에 내놓아도 뒤질것이 없을
만큼 당당한 것이었다.
다만 玄齋의 작품에서 느끼는 우리의 욕구 불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나 한국인으로서 좀더 뚜렷한 개성을
발휘해 주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玄齋 작품으로서 미국 후리어 미술관이나 보스턴 미술관 등 외국에 전래된 작품들이 흔히 중국화가의
작품으로 오인받고 있는 사례는 연경 화단을 추종하는 데에만 충실했던 그의 화풍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풍조는 그 당시 서울 화단의 通弊였다.
이 蝦마仙人圖는 비록 片畵에 불과한 소품이지만 도꺼비와 더불어 가락을 맞추어 덩실거리는 仙人의
모습 속에 脫俗한 작가 자신의 풍모가 어려 있는 듯 싶을 때가 있다.
玄齋는 靑松 沈氏 竹窓 沈廷胄의 아들로 1707년에 나서 1769년에 63세로 돌아갔으며 겸재 정선에게서
사사해서 후세에 謙齋 鄭敾, 觀我齋 趙榮석과 더불어 소위 三齋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完)
<沈師正 蝦마仙人圖>
38. 阮堂 笠극圖(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阮堂像)
阮堂 선생의 영정은 원래 예산에 있는 사당에 正本이 안치되어 있고 寫本 또는 小影 2, 3례가 세상에 전해져
있다. 이 사본이나 소영들은 거의 許小痴의 그림이며 모두 조그마한 小幅이어서 아마도 阮堂의 門下 또는
그분을 추모하는 분들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품들은 모두 정장한 반신상으로 완당의 우수한 풍모를 잘 傳寫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장상에
비해서 매우 이채로운 阮堂 笠극圖(입극도) 한 폭이 일찍이 葦滄宅(吳世昌)에 오래 소장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알고 있던 일이었다.
이것이 이번 이가원 교수의 소장이 되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소품이 마치 고 전형필 씨 소장의 朱鶴年 筆 蘇東坡 笠극圖(입극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왕년에 이 東坡笠?圖를 완당이 소장하게 되었던 사실로 보아 완당의 문인인 小痴筆에 이런 작품이
능히 있음 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언뜻보면 삿갓에 나막신을 신은 隱士 차림의 완당 선생 모습이 정장상에서보다는 좀 덜 또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면모의 됨됨이가 다른 正裝像에서처럼 歷然함을 알 수 있다.
그분은 학문과 예술로써 그리고 고매한 인격으로 거의 100년에 한 분쯤이나 있음 직한 분이며 그 어진
모습을 이렇게 笠극圖로써 대하고 보면 한층 깊은 감회를 금하기 어렵다.
阮堂 金正喜 선생은 경주 김씨, 정조 10년(1786) 6월 3일 이조판서 魯敬의 子로 예산에서 탄생했으며
철종 7년(1856) 10월 10일에 그 빛나는 학덕을 남기고 71세로 별세했다.(完)
(白蓮 池雲永 소동파 입극도)
39.蕉園 金碩臣의 道峯圖
檀園 金弘道나 兢齋 金得臣 같은 그 시대 선베화가들의 盛名에 눌려서 자칫하면 蕉園의 이름은 희미해
지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蕉園 金碩臣의 秀作들을 살펴보면 초원 그림은 復軒도 檀園고
兢齋도 아닌, 초원 자신의 청신한 스타일을 세웠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어찌보면 謙齋?의 여운도 풍기는 듯싶고 거칠고 성근 듯 싶으면서도 시원스러운 화면 포치 속에 암벽과
骨山이 흔한 한국 자연의 정취를 흥건하게 터 잡아 준 의미에서도 초원은 다시 한 번 봐야 될 화법을 남긴
사람이라고 한 만하다.
蕉園은 復軒 金應煥의 조카였는데 복헌에게 後嗣가 없어서 초원이 그 양자가 되었고 兢齋 金得臣과
逸齋 金良臣은 그와 친형제 사이로 말하자면 초원은 화원의 집안에서 生長해서 화원으로 立身했던 사람
이었다. 그의 양부 복헌이 작고한 해에 초원의 나이(1758년생)는 이미 32세였고 그의 형 긍재는 4살 맏이
었다.
따라서 蕉園의 그림은 그 양부와 형 兢齋 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 당시 복헌의 문하에는 성명을 떨치던 檀園 金弘道가 있었는데, 김홍도는 초원보다 13년이나 맏이었
으므로 단원에게서 받은 감화 또한 컸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초원 작품으로 근래 알려진 것 중에서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도봉산 계곡의 景勝을 그린 道峯帖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의 흔연한 詩興이 맑은 淡彩 속에 넘나고 있어서 그의 붓자국에서 느껴지는 쾌적한
감촉의 속도와 함께 화가로서 지니는 그의 품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도 하겠다.
蕉園 그림이 보여주는 이러한 감각은 그의 산수의 특색을 이루는 동시에 그 무렵 한국 산수화가 도달한
하나의 새 경지였다고 보아도 과찬이라고는 할 수 없을것 같다. 초원은 화원을 오래 지냈고 후에 司果
벼슬을 했다고 하나 卒年이나 그 後嗣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남은 것이 없다.(完)
40. 한낮에(春色滿園中 蕙園 申潤福)
혜원의 풍속화 중에는 한낮의 情事를 암시한 장면이 적지 않다. 넘어서는 안 될 사이를 넘어서
일어나는 은밀한 정사란 밤시간이면 서로에게 주인이 있어서 장해가 많지만 오히려 전원이나
깊숙한 후원 등 뜻 아니한 곳에서 뜻 아니한 시간에 이루어지기 쉬운 한낮의 정사에는 희한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다.
혜원은 그러한 묘미를 그리고 싶었고 또 그러한 상상에서 얻어지는 異常的인 감흥을 매우
실감나게 우리에게 전달해 준 셈이 된다. 이 작품 속 남녀는 언뜻 바라보면 마치 사진이라도
찍고자 나란히 태를 내고 서 있는 내외간처럼 보이기도 쉽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은 남남 사이에 뜻 아니한 시간에 뜻 아니한
곳에서 마주친 것인지 또는 미리 약속해 둔 장소인지에서 은밀하게 密會를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인은 통상복 차림에 흰 행주치마를 두르고 바른 팔에는 무청같이 보이는 싱싱한 푸성귀가
담긴 채소 바구니를 끼고 있으며 사나이는 그 푸성귀 바구니를 한 손으로 휘어 잡으며 여인에게
다가서고 있어서 이 두 사람의 거동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인은 상반신을 삐치는
체하고 있지만 눈길은 부드럽고 사나이의 얼굴에도 장난기가 담뿍 어리어 있다.
畵題에도 春色滿園中이라 했고 또 草亭 같은 건물이 배경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 어느 초당의
후원 같이도 느껴지지만 어째든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이 젊은 남녀가 잡거니 잡히거니 하면서
이상한 흥분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혜원은 바로 이 장면까지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며
그 뒷일은 그림을 보는 사람 각자의 상상대로 즐기라는 뜻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종이 한 겹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春畵의 상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한 점이 이 계통
혜원 그림의 장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남녀 사이가 주종간이었건 외간 남녀 사이였건
姦通을 의미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낮에 이루어지는 그러한 스릴을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제 나름대로 즐기라는 말이 될 것이다.
원래 한국의 춘화란 대개 이렇게 은근한 표현을 특색으로 할 때가 많다. 특히 은근한 표현은
깊숙항 어느 후원의 草亭, 댓돌 위에는 브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능글맞게 생긴 사나이의 신 한
컬레, 그 옆에는 가냘픈 여인의 비단 갖신이 가지런히 놓이고 미닫이가 꼭 닫혀 있는 경우이다.
넓은 후원에 인기척은 없고 4월의 훈풍에 홍도, 백도 꽃가지가 간들거릴 뿐 방안은 잠잠
하기만 한 그러한 어느 봄날 오후의 비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지난 왕조시대의 이러한 여성
생활의 다면을 이 그림에서 이렇게 바라보면 남의 일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우리 일 같이도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그림들이 지닌 회화적인 아름다움 외에 그러한 世俗事 표현 때문에 혜원이
뼈대없는 好色作家라는 지목을 받게 되어도 미안스럽고 또 조상들의 적나라한 사랑의 생태에도
우리들의 지나친 推斷이나 억측이 심해도 서운한 일이 아닐까 한다 (下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