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언(記言) 허목(許穆)생년1595년(선조 28)몰년1682년(숙종 8)자문보(文父), 화보(和父)호미수(眉叟), 태령노인(台嶺老人)본관양천(陽川)시호문정(文正)특기사항정구(鄭逑)의 문인. 청남(淸南)의 영수
記言別集卷之六 / 書牘[二] / 答學者
吾以無能。徒以古文名世。老來其文益簡奧。其輕重取捨。無一字一句散漫。此古論撰者之體法如此。此可與知者言。非俗輩耳目所悅也。來示云云。果然有此說也。凡記事之法。詳其大而略其小。取其華而尤致志於其要。故孔子紀不言居家事親從兄之節。其弟子傳顏淵不言孝。惟曾子,閔子言之。此皆擧其大而言之。非孔子,顏淵之行。不賢於曾子,閔子也。世俗之論。不擧細行。則以爲沒其實而無稱。稱大節則以爲衆人所知尋常而不取。豈不可笑。如南冥者。能大言高行。特立不顧。不屈於萬乘之尊。視富貴如浮雲。輕一世而傲前古。其所取尙。專在於秋霜烈日壁立萬仞八字。其志不爲不高。而論其學則一傳而得仁弘。仁弘之術。專用法家。慘刻無恩。言必稱春秋之義。正其法則其子可以廢母之惡。去人倫之重而不顧。至於身被極刑。而猶不覺悟。至今其人隱然尊師。其心竊謂曰。南冥之傳法在此。此當逬諸四裔。不與同中國者也。南冥之末弊。至於如此。然南冥者。古之所謂高士。若其人在世。吾亦願見而一識其爲人也。然與之友則吾不爲也。龜巖。古之賢大夫之知禮好古者也。視二人則南冥高。龜巖不高。南冥奇。龜巖不奇。人情莫不好奇而慕高也。然龜巖無弊。至於鯤變氏。人品之高下又不同。人非聖賢。安得無過。其人峻絶。致人訾謗不小。然其心事不苟。旣見稱於前輩。吾亦嘗閱其詩。知其出於庸衆人遠矣。所謂見絶於鶴峯者。未知何事。必使此人而有當絶之惡子。無乃鶴峯之太過耶。自南冥之絶龜巖。仁弘之所以攻龜巖者。造飾辭說。不近不似。無所不至。此衆人所知也。其生陷害良善。意欲快矣。鯤變氏。以龜巖之子孫。老於晉之南境。其生之困且辱。可謂極矣。得免與禍敗相終。亦幸也。其訾毀萬端。吾亦六十年來已苦於耳矣。未知鶴峯見其過而絶之耶。聞其過而絶之耶。抑其所謂絶之者。信耶不信耶。皆未可知也。自朋黨來。是非晦塞久矣。況仁弘者流之弊。吾嘗目見之審矣。何可勝言。吾平生聞人之言。未嘗不返思而自勉。至於此。獨未之專信。而亦不以爲悔也。若使鶴峯。無此事而有此言。此必有爲仁弘左袒者。爲此言也。
기언 별집 제6권 / 서독(書牘) 2 / 학자(學者)에게 답하다
내가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고문(古文)만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늙어가면서 문장이 더욱 간결하고 심오해져서 그 경중과 취사에 한 글자, 한 구절도 산만함이 없게 되었으니, 옛날 논찬자(論撰者)들의 체법(體法)이 이와 같았던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는 있어도 시속의 무리들이 보고 듣기를 좋아하는 바가 아니오.
보내 준 편지에서 운운한 것은 과연 이러한 설이 있소. 무릇 일을 기록하는 법은 그 큰 것을 상세히 하고 작은 것을 간략하게 하며, 아름다운 것을 취하되 그 요점에 더욱 뜻을 두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가 집안에서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른 일을 말하지 않았고,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안연(顔淵)에 대해서는 효를 말하지 않고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에 대해서만 말했으니, 이는 모두 그 큰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지 공자와 안연의 행실이 증자나 민자건보다 훌륭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오. 그런데 세속의 논의는 자잘한 행실을 거론하지 않으면 그 실제를 덮어 두고 말하지 않았다 하고, 큰일을 일컬으면 사람들이 다 아는 바라고 하여 심상히 여겨 취하지 않으니, 어찌 우습지 않겠소.
남명(南冥)과 같은 사람은 대담한 주장과 드높은 행실로 홀로 우뚝 서서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아, 존귀한 만승(萬乘)의 천자에게도 굽히지 않고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며 한 세상을 가볍게 보고 전고(前古)를 업신여겼소. 그가 취하고 숭상한 바는 오로지 ‘추상열일벽립만인(秋霜烈日壁立萬仞)’이라는 여덟 글자에 있었으니 그 뜻이 고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그러나 그 학문을 논하자면 한 번 전하여 정인홍(鄭仁弘)을 얻었는데, 정인홍의 학술은 전적으로 법가(法家)를 써서 참혹하고 각박하여 은혜라고는 없었소. 말끝마다 《춘추》 대의를 일컬으며 그 법대로 하면 아들이 어머니의 악을 응징해도 된다고 하여 중대한 인륜을 저버리고도 돌아보지 않았고, 극형을 당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깨달을 줄을 몰랐던 것이오. 지금까지도 그들은 은연중에 스승을 높이고, 마음속으로는 내심 ‘남명의 전법(傳法)이 여기에 있다.’ 하니, 이들은 국경 밖으로 멀리 내쳐서 나라 안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해야 할 자들이오. 남명의 말폐(末弊)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러나 남명은 옛날의 이른바 고사(高士)라 하겠소. 그가 만약 세상에 있다면 나 또한 한번 만나 보아 그 사람 됨됨이를 알고자 하겠지만, 더불어 벗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지 않을 것이오.
이에 비해 구암(龜巖)은 옛날의 어진 대부로서 예를 알고 옛 도를 좋아한 사람이었소. 두 사람을 비교하면 남명은 고상하고 구암은 고상하지 않으며, 남명은 기이하고 구암은 기이하지 않소. 인정은 누구나 기이함을 좋아하고 고상함을 숭상하는 법이오. 그러나 구암은 폐단이 없었소.
곤변(鯀變) 씨에 이르면 인품의 고하(高下)가 또 같지 않았으니, 사람이 성현이 아닌 바에는 어찌 과실이 없겠소. 그 사람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남의 비방을 부른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그 심사는 구차하지 않았소. 그리하여 이미 전배(前輩)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나 또한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서 그가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출중하다는 것을 알았소. 이른바 학봉(鶴峯)에게 배척당했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배척당한 악한 자식이 있게 했다면 학봉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소.
남명이 구암을 배척한 뒤로부터 정인홍이 구암을 공격하는 데 얼토당토않은 말을 꾸며 내어 못하는 말이 없었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오. 그는 생짜로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해쳐서 자신의 뜻을 통쾌하게 하려 하였소. 곤변 씨는 구암의 자손으로서 진주(晉州)의 남쪽 지경(地境)에서 늙었으니, 그 생애의 곤궁함과 욕됨이 극에 달했다고 할 만하오. 그나마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면한 것만도 요행이라 할 것이오. 온갖 방법으로 헐뜯는 말을 나 또한 60년 동안 귀가 아프도록 들었소. 학봉은 그의 과실을 보고 배척한 것인가요, 그의 과실을 듣고서 배척한 것인가요? 아니면 이른바 배척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닌가요? 이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소.
붕당이 생겨난 이래로 시비가 어두워진 지 오래되었소. 더구나 정인홍의 유폐(流弊)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보아 왔으니, 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소. 내가 평생 남의 말을 들으면 일찍이 돌이켜 생각하며 스스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만은 유독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또한 후회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소. 만약 학봉이 이렇게 한 일이 없는데도 이런 말이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반드시 정인홍을 편드는 자가 이 말을 만들었을 것이오.
[주-D001] 추상열일벽립만인(秋霜烈日壁立萬仞) : 사람들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일컬어서 “가을 서리처럼 매섭고 여름 햇볕처럼 따갑다.〔秋霜烈日〕”라고 한 말과, 조식이 평소 “장부의 행동거지는 무겁기가 산과도 같아서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서 있다가 때가 이르렀을 때 펴야 하는 것이다.〔丈夫動止 重如山岳 壁立萬仞 時至而伸〕”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東岡集 卷17 南冥先生言行錄, 韓國文集叢刊 50輯》[주-D002] 구암(龜巖) : 이정(李楨, 1512~1571)으로,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이며, 구암은 그의 호이다. 부친은 담(湛)이다. 1536년(중종31) 별시 문과에 입격하였다. 어릴 때는 송인수(宋麟壽)에게 학문을 배웠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구암집(龜巖集)》, 《성리유편(性理遺編)》, 《경현록(景賢錄)》 등이 있다.[주-D003] 곤변(鯀變) 씨 : 1551~? 구암 이정의 손자로, 자는 자거(子擧), 호는 백인재(百忍齋)이며, 부친은 응인(應寅)이다. 1570년(선조3)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사부(詞賦)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집으로 《백인재유고(百忍齋遺稿)》가 있다. 허목의 동생인 허의(許懿)의 처 사천 이씨(泗川李氏)가 이곤변의 손녀로, 미수와는 인척 간이었다. 《記言 卷42 許松禾葬銘, 韓國文集叢刊 98輯》 《龜巖集 卷2 附錄 墓碣銘, 韓國文集叢刊 33輯》[주-D004] 학봉(鶴峯) : 김성일(金誠一)의 호이다.[주-D005] 남명이 …… 뒤로부터 : 남명 조식이 이정을 배척한 것은 경상도 진주(晉州)의 음부옥(淫婦獄) 때문이었다. 음부옥은 진주의 고(故)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嶽)의 후처 이씨(李氏)의 음행 소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옥사이다. 이 사건에 조식과 이정이 서로 다른 입장으로 미묘하게 대립하다가 급기야 조식이 이정과 절교하고, 조식의 문인들이 과부 이씨와 간부(姦夫)의 집을 헐고 향리에서 내쫓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이 일은 조정에까지 보고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이정의 손자 이곤변이 그 조부의 결백함을 밝히기 위해서 ‘졸변(拙辨)’을 짓고, 조식의 손자 조준명(曺浚明)이 이를 반박하는 ‘반변(反辨)’을 짓는 등, 두 사람의 사후에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쪽 집안과 지역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鄭萬祚, 宣祖初 晉州 淫婦獄과 그 波紋, 韓國學論叢 22, 國民大學校韓國學硏究所, 1999》 미수는 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