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문
지난 9월25일 임관50주 기념 회고록 ‘대열 반세기여정’의 발간경과 2차 보고에서 밝힌 대로, 오늘 11월1일 부터는 발간예정 책자 본문 중 이미 홈피에 올려 공개된 목차와 연보,각 병과별 약사, 동호회 및 지역포럼 약사, 개별 회고 기고문 외에 편집진이 작성한 일부를, 관련 도표들은 생략한 상태로, 대열 홈피에 올려 공유하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그 1탄으로 아래 내용을 올리면서, 이 내용이 어느 위치에 수록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앞에 책자의 항목표시도 함께 올릴 것입니다.
아울러 회고록에 사용한 사진들을 구재림 동기가 재편집한 동영상도 함께 올릴 것이며, 책자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자료로 수집했던 과거 사진들도 틈틈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진-
< '대열반세기 여정' 본문 소개1-육사 목표 이념 교가>
▣ 제 1부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대열의 생도시절 4년은
지성(知性)과 야성(野性)을 겸비한 대한민국 육군의 ‘정예장교’를 양성 배출하는 인고(忍苦)의 시간이었다. 특수목적 대학으로서 육사는 생도들에게 문무를 겸비한 리더를 양성하는 통합훈육과 교육을 실시했다.
통합훈육과 교육은, 교수부의 일반학 교육과 생도대의 내무생활과 체력단련, 그리고 군사학 교육과 군사훈련을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군인정신’과 ‘장교의 책무’에 부합하는 리더를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지식보다 지혜를 추구하였고, 절차탁마의 수련을 거듭해 선공후사의 단체정신을 함양했으며, 실전 같은 군사훈련에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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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의 목표와 이념
◇ 개교 과정
▷ 연혁
육군사관학교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1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로 태릉에서 개교하여 1기생 80명을 입교시켰고, 1948년 건국 후 9월5일 사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해방 후 국가·사회적 혼란기에 육사 1~9기는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지원하여 단기 40일, 장기 6개월간의 속성교육을 통해 장교로 임관되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2월에 ‘평양학원’이라는 군 간부양성소가 생겨서 일거에 800여 명씩 입소, 배출하여 북한군을 창설하는 중이었다.
육사 10기(생도1기)부터 정규 2년 과정을 시작했으나, 1기는 입교 1년 만에 6.25가 발발되어 곧바로 장교로 임관되었고, 2기 333명은 28: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6월 1일 입교했으나 입교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장교로 임관하지 못하고 아무런 계급도 군번도 없는 생도 신분으로 전방 상황이 위급해 전투원으로 포천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다. 낙동강 전투까지 거치면서 그 중 43%가 전사, 실종되는 큰 희생을 치렀다. 이후 생존자들을 부산에 모아 10월 23일에 150명을 소위로 임관시켰고, 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1996년에야 이들 전원에게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이후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진해에서 육사의 재 개교를 추진하였고 입학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혼잣말로 '이제야 되었구만' 하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뭐가 되었다는 의미였을까? 미국에서 오래 독립운동을 해오며 정예장교가 국가간성이라는 점을 Westpoint 방문을 통해 알았기에 유사시 나라를 구할 인재로서의 정예장교 양성의 터전 마련을 말한 것이었다.
▷ 육사인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육사 장교들의 희생과 헌신을 배제하고 애국집단을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러한 자부심을 가진 육사인들은 전쟁 후에도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의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과 진정한 애국심으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것임에도 이론(異論)이 없다. 그래서 육사인들은 군을 내 집같이 여기고 대한민국과 육사를 동일시하는 강렬한 주인의식 또는 적장자(嫡長子)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고 그 가족들까지도 자부심을 갖는 강한 연대감(連帶感)이 종교적 순교(殉敎) 정신의 수준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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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의 상징들 (모표· 부대표지· 교기· 교가)
▷ 육사 모표
▷ 육사 부대표지
▷ 육사 교기
▷ 육사 교가
작사: 공중인(孔仲人) 작곡: 김순애(金順愛 )
▶ 교가 해설
제 1절
유구(悠久: 아득하게 오래됨) 푸른 그 슬기, 핏발(←빛발: 힘차게 뻗어 나가는 빛의 기세)을 돋혀(←돋쳐: 해나 달 따위가 솟아오른 것, 또는 무엇이 겉으로 생겨나옴), 풍진노도(風塵怒濤: 세상의 험난한 시련과 도전의 비유) 헤쳐 나갈 배움의 전당, 무쇠같이 뭉치어진(←뭉친) 육사 불꽃은, 모진 역사 역력히(←역역歷歷: 자취나 기미, 기억 따위가 환히 알 수 있게 또렷하게 나타나는 모양) 은보래(銀보래: 은빛 물보라)치리
※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푸르른 육사의 슬기가 힘찬 기세로 밝은 빛처럼 뻗어 나오는 기상을 표현. 모진 역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은빛 물보라로 또렷하게 나타나게 될 것임을 찬양
제 2절
아사달(阿斯達: 단군이 고조선 개국 시 도읍으로 정한 지명) 기리 누려 여기 반만년, 변함없는 그 기상 하늘을 외쳐, 천추만리(千秋萬里: 천추는 시간상으로는 천 년, 만리는 거리상으로 10,000리로서, 시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과 공간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 오랜 역사와 온 천하) 바람결은(←바람결에) 이야기 하리, 백사 고쳐 쓸어져도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에서) 육사 혼이야 (이때 백 번을 다시 죽어 쓰러지는 대상은 ‘육사 혼’이 아니라, 육사인의 ‘몸’이라 보아야) 가고 오지 않으리 오질(←오지) 않으리 (한시漢時에서 많이 쓰이는 ‘불여귀不如歸’ 혹은 ‘거불귀去不歸’에서. ‘거불귀’, ‘불여귀’라는 시적 표현을 사용한 옛 시들을 참고해 볼 때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가능하다.
첫째, 조국을 위해 사지死地로 떠나는 육사인의 충정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죽음을 당했던 형가를 기리기 위해 중국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영형가>에서는 형가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서 장도에 오르는 부분을 묘사하기를 “심지거불귀心知去不歸 차유후세명且有後世名: 마음으로는 알고 있지 가고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렇지만 후세에 이름을 남기리라”라고 하였다. 즉, 형가가 대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충정의 의기를 ‘거불귀’라는 구절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 전장에서 쓰러져 돌아올 수 없는 육사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이다. 조선시대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집현전에서 수학했던 조상치는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과 그에게 끝까지 충성한 사육신을 추모하며 지은 <봉화단종자규사>라는 시에서 “불여귀불여귀不如歸不如歸: 돌아가지 못하리”라 노래하였다.
셋째, 육사 혼은 결코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가고 오다’는 말은 ‘왔다 갔다’한다는 식으로, 변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가고 오지 않는다’ 는 것은 백번을 고쳐죽어도 그 의지가 변함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다.
넷째, 앞으로 전진하고, 뒤로 물러서 돌아오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하겠다.
※ 천추만리, 즉 오랜 세월 동안 온 천하에 무언가 자신이 이야기 하고 싶은 바를 바람결에 실어 전하겠다고 노래. 단심가에서도 백골이 진토 되어 넋조차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지만, 임 향한 일편단심의 충성심만큼은 쓰러지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 즉, 몸은 백 번을 다시 죽어 쓰러져 없어진다 하더라도 육사 정신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후렴
아~ 영용 영용(英勇: 빼어나고 용맹함, 보통 무인들을 칭송할 때 ‘영용무쌍英勇無雙하다’고 한 의미), 이제도 앞에도 한결 같아라. 온누리 소리 모아 부르네, 그이름 그이름 우리 육사!
※ 예전 육사교가
태백산 삭풍 속에 정기엄정(正氣嚴正)타
영봉의 천지마다 길이 흐름은
반만년의 유구한 배달민족성(培達民族性)
천만대의 핏줄 받은 청구(靑丘)의 건아
울창한 태릉무대(泰陵武臺) 우러러 서니
새 대한의 희망인 사관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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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열반세기 여정을 책자로 편집하는 것만도 어렵고 큰 일이다.
이 책을 차근 차근 손에 들고 조금씩 나누어 읽도록 배려해 준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1부에서 육사목표ㆍ이념을 다시 새겨보고 교가에 담겨있는 뜻을 음미하니 마음이 새롭다.
지금 육사에 입교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