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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호 (2022.09.17) [170]
[학술기획] 율곡과 송시열이 극찬한 이후백의 재발견 바른 정치로 ‘통합’ 이끈 경세가… 관료 리더십 본보기로 재조명 활발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의 표상, 500년 지났어도 귀감
부정과 타협 않고 공정한 인사로 신망, 탕평 힘쓴 실천가
500여 년 전 조선 중기에 활약한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명종에서 선조 연간의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졌지만 공정한 인사로 당쟁을 피하고 탕평과 통합을 주창한 정치가이자 경세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후백의 이런 행적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 등장한 ‘공정’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 8월 20일 서울 연세대학교 대우관 각당헌에서 뜻깊은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후백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청련 이후백의 학문과 관료정신’을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공정의 가치가 얼룩지고 혼탁함이 더해가는 세상에서 청백리 이후백 선생의 업적은 물론 정치가 실종된 현 세태에 선생이 남긴 탕평과 통합의 정치를 되새겨보는 귀한 자리가 됐다. [편집자 주]
이후백은 어려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조선 중종 15년, 경남 함양에서 현감을 지낸 이국형(李國衡)과 나주 임씨(林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 자가 붙은 이상 상주(喪主)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단호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백은 15세에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해 서울로 올라와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전라도 강진으로 이주했고, 21세 때 군수 홍처성의 딸이며 조모 정부인의 질손 홍씨와 결혼했다. 강진에 거처하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다. 특히 김인후를 매우 존경하여 전라도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자주 찾았다. 20대에 진사초시에 장원하고 35세인 1555년(명종 1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7품 승정원 주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후백은 시학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에 기대승,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 등과 중앙정계에 진출해 사림시대를 열어나가는 데 함께 기여했다.
이후백은 38세 때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호당은 세종이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던 제도다. 신숙주, 김안국, 이율곡 등이 사가독서를 한 대표적인 문신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키운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558년(명종 13년)에는 호남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파견되었는데 엄하고 강직한 성품이 온 나라에 소문이 나서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사직하고 떠난 지방의 탐관오리만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이후백은 부귀와 사치, 재물을 멀리하고 근검절약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후백이 36세 때 과거에 급제해 고향에 성묘차 들렀을 때 어려서 함께 공부했던 옥계(玉溪) 노진(盧稹, 1518~1578)이 지례 현감으로 있었다. 그는 노진을 만난 뒤 ‘급제하여 고향으로 갈 때 지례 현감 옥계 노진에게 주다’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말 한 필에 따르는 아이 하나, 내 모습 초라하여/ 관리들 나를 보고 ‘배 따는 일꾼’이라 잘못 아네/ 누가 알았으랴 (급제하여) 명광궁에 시부 바쳐/ 머리에 어사화 꽂고 오색 향기 드날린 줄.”
이런 청빈이 몸에 배어 있었기에 이후백은 임금인 명종에게 다음과 같은 직언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왕이 된 사람은 세금 걷는 액수가 적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을까 근심해야 합니다. 지방 수령들이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은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피를 긁어모아 일부를 임금에게 상납하는 것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나라는 병들고 원망의 소리는 임금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나라는 물질적인 이득으로 이익을 삼지 않고 의로써 이익을 삼아야 합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로 꼽혀
1575년(선조 8년) 이후백은 국경지역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부임하자마자 백성을 위해 세금과 부역을 대폭 감면하고 관원들의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당시 이후백이 세금을 지나치게 감면하는 바람에 감영 창고가 텅 비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2년 뒤인 1577년 10월 이후백이 이조판서로 영전해 한양으로 떠나자 함경도 백성이 크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당시 [선조수정실록]에는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떠난 뒤에 백성이 그의 선정을 사모해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물러난 지 8년쯤 뒤 암행어사 허봉(許葑)이 함경도를 순찰했을 때 길에서 만난 백성마다 모두 이후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율곡은 이후백의 청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후백은 벼슬에서 직무를 다하고 몸단속을 청간(淸簡)하게 하였으며, 지위가 육경(六卿, 육조판서)에까지 이르렀으나 빈한하고 소박하기가 유생(儒生)과 같았다. 또 뇌물을 일체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 결백함에 탄복하였다.”
청탁 배격하고 공정한 인사 단행
이후백은 36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5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 동안 관인(官人, 공직자)으로 일했다. 12년은 명종 치세기에, 11년 동안은 선조 치세기에 활동했다. 명종 치세기가 당하관으로서 홍문관과 의정부, 사헌부 등 핵심 문한관(文翰官)으로 성장하는 시기였다면, 선조 치세기는 당상관(정3품 이상)으로서 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관료의 지위에 있었다. 강제훈 고려대 교수는 그를 두고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관인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179쪽 기사 참조)
관료로서 이후백은 무엇보다 강직했다. [선조수정실록]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시사한다.
“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기개가 있었다. 그가 비록 문한(文翰)에 종사하였지만 몸단속을 엄숙하게 하였고 말할 때나 조용히 있을 때에도 절도가 있었으며 기쁜 표정과 언짢은 표정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자제들이나 아랫사람들이 감히 시사의 득실에 대하여 묻지를 못했다.”
이후백은 1577년(선조 10년)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된다. 그는 주 임무인 인사 문제에서 늘 공정한 논의를 펼치고자 노력했다. 권력자의 인사 청탁이나 위세에 흔들리지 않아 위기를 겪기도 여러 번이었다. 명종 18년부터 그의 인물평에는 일관되게 ‘정도를 걷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강직함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사례로 이율곡이 지은 [석담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전한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말끝에 벼슬을 부탁했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효렴부]라고 적힌 책자 하나를 보여줬는데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돼 있었다. 이후백은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오.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벼슬에 임명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부하 관료나 여러 사람에게 두루 물어서 합의가 된 뒤에 임명했다. 혹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임명했으면 밤잠을 못 이루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我誤國事)’고 할 정도였다.”
이율곡은 “이후백 같은 공정한 마음은 비할 사람이 없다”며 청렴결백함을 높이 평가했다. 후대인들은 이후백이 이조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공정할 수 있었던 이유로 공인(公人) 정신을 꼽는다. 이후백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로 꼽힌다.
이후백은 이순신(1545~1598) 장군의 강직한 공직자관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지역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함경도 관찰사가 이후백이었다. 이후백은 1575년(선조8년)부터 함경도 관찰사로 일했는데, 이듬해인 1576년 변방의 여러 진(鎭)을 순행하면서 장수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치렀다. 실력이 없는 장수에게 곤장을 때리는 벌을 주는 등 군대를 엄정하게 관리했다. 그래서 붙은 당시 이후백의 별명이 ‘곤장 감사’였다.
이순신의 강직한 공직관에 영향 미쳐
이순신은 그 무렵 함경도 최북단 삼수 고을 동구비보(압록강 상류에 있는 이순신의 첫 번째 근무지)의 권관(종9품 경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572년에 무과에 응시했다가 불의의 낙마로 낙방한 이순신은 1576년에 급제한 그해 12월 하급 장교로 막 부임한 터였다. 초임 무관이니 군기가 딱 잡혀 있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범에 대응하는 소임을 충실히 했고, 활도 잘 쏘아 이후백에게 칭찬받았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후백이 순신을 한번 보매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정성껏 우대하여 계급의 절차를 차리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조용히 이후백에게 그 형벌의 위엄이 자못 과중함을 간하였다. 후백이 미소를 보내며 ‘내 어찌 이유 없이 형벌을 남용하겠는가. 변장(첨사·만호·권간 등 장수들을 일컬음)들이 무신의 직분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세’라며 순신의 청을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있다. 이후백이 이순신의 건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로를 알아보며 교류가 시작됐을 것이라는 게 후세 학자들의 견해다.
이후백이 세상을 떠난 뒤인 1580년 7월, 이순신은 전라도 고흥의 발포 만호(종4품 무관)로 영전했다. 어느 날 그의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발포진 객사에 늙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거문고 재료로 사용하고자 군관들을 보내 베어 오라고 명했다. 이순신은 “관청 객사의 나무는 관가의 소유물이다. 또 심어서 배양한 지 수십 년이거늘 하루아침에 베어 국용에 쓰지 않고 사적인 물품을 만들려 함은 불가하다”며 거절했다. 군관이 성박에게 돌아가 순신의 말을 그대로 보고하자 성박이 대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오동나무는 끝내 취하지 못하였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은 [이순신 파워인맥]이라는 책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이후백은 기호학파 사림으로서 영남과 호남, 서인과 남인 간 대립을 완화하고 국론을 통합하려고 애쓴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율곡은 “이후백은 동서분당에서 서인으로 지목받았지만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아서 신진들도 꺼리지 않았다”며 그가 동인에서도 배척받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8월20일 ‘연안이씨 청련가(靑蓮家)의 가풍과 그 계승 양상’이라는 학술대회 주제 발표에서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난 이후백이 전라도 강진으로 이주한 뒤 주요 활동기는 서울에서 보내면서 인적 연결망이 선대는 경상도, 후대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형성되게 됐다”면서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 간 대립이 격화하던 시대에 이후백과 청련가는 화합과 균형의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탕평 인사 주창하고 국론 통합 힘써
이후백이 과거에 급제한 1555년은 10년 전 일어났던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 즉위년 1545년 윤원형 일파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의 여파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기였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청련이 중앙에 진출한 당시는 ‘사화(士禍)정국’에서 ‘사림(士林)정치’로 이동하는 과도기였는데, 청련이 이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며 “국왕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하며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고 양편의 도덕적 주체를 확립했다”고 설명했다.
이후백은 50세에 도승지가 된 후 선조의 어명을 받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의 서문을 작성하여 사화로 죽임을 당한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이 이룩한 도학의 계통을 확립했다. 1575년(선조8년) 명종비 인순왕후 국상 때에는 을사사화 공신 지위를 박탈하는 선조의 교서를 대신 지어 결과적으로 을사사화 피해자들을 복권하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은 이후백 사후 이후백의 후손 이석형의 요청을 받아들여 1688년 이후백의 행장(行狀)을 작성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후백은 교서에서 화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사악한 간신들이 명종의 이목을 가렸던 사실을 배척하고, 명종의 두터운 우애를 나타내면서, 봉성대군의 원통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었다. 명백하고도 통쾌하여 읽는 사람으로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글이었다…신인의 원통함이 일시에 깨끗이 씻어졌으니 항상 경탄하고 존경했기 때문에, 행장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이후백이 을사사화 때 공신을 부정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은 자신의 소신대로 당쟁을 완화하고 화합시키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백은 당시 모든 당쟁이 ‘인사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해야 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백이 1578년 사망한 후 조선정치사에서 고질적인 병폐였던 조정의 당파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이 때문에 당대 사림들 사이에서 “청련이 살아 계시면 당쟁이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고결하고 맑은 선비, 한시의 대가
이후백은 문장이 뛰어났고 한시의 대가였다. 정조대왕 문집 [홍재전서]에도 그는 문장으로 이름난 관료로 거론된다. 우암 송시열도 “명백하고 통쾌한 문장으로 의지와 기개에 감동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이후백의 이름도 시에서 연유했다. 심경호 고려대한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이후백의 조부 이세문(李世文)이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과 같은 대시인이 되기를 염원해서 ‘이백의 후인’이라는 의미의 후백(後白)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백의 자(字) 계진(季眞)은 이백을 처음 인정해주었던 하지장(賀知章)의 그것과 같고, 이후백의 호 청련(靑蓮)은 이백의 호와 같다.
시인으로서 이후백의 재능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하나는 나이 8세 때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그의 재주를 시험해보기 위해 탑 옆에 심어놓은 소나무를 두고 ‘탑반송(塔畔松)’이라는 시제를 주면서 시를 지어보게 했다. 이에 후백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관찰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작은 소나무 탑 둘레에 심으니/ 탑(관찰사)은 높고 솔(이후백)은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어울리지) 않네/ 사람들아 소나무 낮다고 탓하지 말라/ 후일 소나무는 높고 탑이 도리어 낮을 것이니.”
일찍부터 이후백의 기상이 범상치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백은 호남의 문신이자 가사문학 대가인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 선생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셨다. 송순은 퇴계 이황(李滉)과 학문을 논했고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 후학을 길러냈다. 송순이 87세 되던 해에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연(回榜宴)이 담양 면앙정에서 열렸다. 잔치가 끝난 후 송순이 정자에서 내려올 때 제자인 정철, 임제, 고경명, 이후백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스승을 메고 언덕길을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네 제자는 후일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후백과 기대승이 문장을 겨룬 일화가 실려 있다. 광주목사 오겸이 두 사람을 초청해 이틀간 문장 시합을 시켰는데, 첫날은 이후백이 시 짓기에서 이기고, 둘째 날은 기대승이 문장 짓기에서 이겨 서로 비겼다고 전한다. 이후백의 문집 [청련집]에는 한시 100여 수가 전하는데, 그중 이런 시가 있다.
“가랑비 주룩주룩 내려 돌아갈 길을 잃었는데/ 나귀 타고 가는 십 리 길 바람이 부는구나/ 가는 곳마다 들매화가 늘어지게 피어 있는데/ 은은한 향기 속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네”
매화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고결하고 맑은 선비 정신을 잘 나타내는 꽃이다. 선생의 꼿꼿한 청백리 선비 정신은 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윽한 매화 향기로 남아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백은 죽음도 예사롭지 않았다. 말년에 호조판서 재임 때 예조판서를 지냈던 죽마고우 노진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마침 이후백도 며칠 휴가를 내어 함양에 성묘를 하려고 내려왔던 참이었다. 이후백은 노진의 영전에 곡을 하고 돌아와서는 하룻밤 새 영면하고 만다. 이후백과 노진은 학문과 명망이 높았고 함양에서 태어나 전라도로 이주하여(노진은 남원에 거주) 호남인으로 자리매김이 된 사실까지 유사했다. 말 그대로 지기(知己)였다. 이후백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큰 인물을 잃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죽마고우 조문한 다음 날 세상을 떠나다
이후백은 사후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주장한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추봉(追封)됐다. 종계변무는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친원파인 이인임의 아들이다’라고 200년 동안 잘못 기록됐던 것을 바로잡은 것을 말한다. 이후백은 청백리에 녹선(錄選, 벼슬에 추천)되는데, 당대의 관료들은 이를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이후백 선생 사후 그의 자손들은 이후백이 거주했던 강진과 영암 등에 세거하며 호남의 유수한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청렴하고 충직한 기상으로 대표되는 연안이씨 청련가(靑蓮家)의 가풍은 그 후손들에게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후백의 손자 충의공(忠毅公) 이유길(李有吉, 1576~1619)이다. 이유길은 21세인 1597년 이순신이 이끈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9품직 제수와 함께 ‘충효’ 글자를 받는다. 이유길이 1618년 광해군 재위 시 함흥판관으로 있을 때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때 이유길은 도원수 강홍립, 좌영장 김응하 등과 함께 중군장으로 심하(지금의 심양) 전투에 참전, 투항한 강홍립과 달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창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옷소매를 찢어 ‘三月四日死’ 다섯 글자 혈서를 써서 애마의 말갈기에 매어주고는 말고삐를 잘라 채찍질을 해 보낸 뒤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3일 동안 달려서 고향집에 와서 비명을 지르고 죽은 그 말의 무덤이 파주 광탄면에 지금도 의마총(義馬塚)으로 남아 향토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유길은 숙종과 정조, 순조를 거치면서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충의공 시호를 받는다.
이후백의 탕평과 통합 정신도 청련가에 면면히 이어졌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이후백의 자손들은 기호학파에 속했음에도 퇴계학(退溪學)에 대한 학습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퇴계학의 수용을 통해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학문적 외연을 확장하려 했다. 이를 위해 퇴계학 관련 서적을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그 책을 구하면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탐독하며 토론했다”고 한다. 김학수 교수는 “학문의 영역에서 볼 때 이들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이자 태도였지만 조선을 아는 우리 눈에는 매우 낯선 풍경으로 비친다”고 말했다.
청련가의 가풍,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이후백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인사권자가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 자기가 빚진 사람, 권력자의 소개나 청탁을 받은 사람들을 그들의 능력이나 전문성을 묻지 않고 마구 임명한다면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학술대회 축사에서 “선생은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 간 대립이 격화하던 시대에 화합과 균형의 가치를 내면화해 가풍으로 확립한 보기 드문 인물”이라며 “지역과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요즘 시대가 반성적으로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공정한 인사, 탕평과 통합, 공인 정신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금 500여 년을 뛰어넘어 이후백 선생을 되살려야 할 이유일 것이다.
[박스기사] 청련(靑蓮) 이후백
이후백(1520년~1578년)은 한국의 명문가로 통하는 삼한갑족(三韓甲族)중 첫 번째인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이씨(李氏) 부사공파다. 자(字)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청련거사(靑蓮居士),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청백리로 한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곧고 맑은 성정에 뛰어난 학식과 빼어난 문장으로 사림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를 지냈고,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호조·형조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했고,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강직한 관료였으며 서인·남인 간 대립 등 당대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론 통합에 한평생 애썼다.
이후백 사후 1590년 강진의 후학들이 이후백을 제향하기 위해 서봉서원(瑞峰書院)을 창건했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1924년 호남 유림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박산서원(博山書院)으로 개칭했다.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이철진 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장(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이후백의 직계 후손이다. 윤관 전 대법원장은 청련가의 사위로 모친이 이후백 후손이다.
-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