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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益齋亂藁) 이제현(李齊賢)생년1287년(고려 충렬왕 13)몰년1367년(공민왕 16)자중사(仲思)호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본관경주(慶州)초명지공(之公)시호문충(文忠)
益齋亂稿卷第四 / 詩 / 柳學士思菴
幾年傍路費光陰。閉戶端居志念深。黃卷展開春寂寂。靑燈挑盡夜沈沈。
風雲變態無窮事。天地同流只此心。思到無思眞有得。古人雖遠是知音。
사암(思菴) 유 학사(柳學士)에게
柳淑 | 1316 | 1368 | 瑞山 | 純夫 | 思菴 | 文僖 | 瑞寧君 |
몇 해를 길에서 세월만 허비했나 / 幾年傍路費光陰
문 닫고 앉았으니 생각만 깊어진다 / 閉戶端居志念深
고요한 봄날에 책을 펼쳐 보고 / 黃券展開春寂寂
어두운 밤에는 등불 심지 다 돋우었네 / 靑燈挑盡夜沈沈
풍운처럼 변하는 태도 끝없는 일이요 / 風雲變態無窮事
천지와 유행(流行)함은 이 마음뿐이라 / 天地同流只此心
생각도 없는 경지에 가야 참 체득이 있으니 / 思到無思眞有得
옛사람이 멀어도 이가 친구 되리라 / 古人雖遠是知音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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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齋亂稿卷第四 / 詩 / 小樂府
拘拘有雀爾奚爲。觸着網羅黃口兒。眼孔元來在何許。可憐觸網雀兒癡。
鵲兒籬際噪花枝。喜子床頭引網絲。余美歸來應未遠。精神早已報人知。
浣沙溪上傍垂楊。執手論心白馬郞。縱有連簷三月雨。指頭何忍洗餘香。
黃雀何方來去飛。一年農事不曾知。鰥翁獨自耕耘了。耗盡田中禾黍爲。
脫却春衣掛一肩。呼朋去入菜花田。東馳西走追蝴蝶。昨日嬉遊尙宛然。
新羅昔日處容翁。見說來從碧海中。貝齒赬唇歌夜月。鳶肩紫袖舞春風。
木頭雕作小唐鷄。筯子拈來壁上棲。此鳥膠膠報時節。慈顏始似日平西。
縱然巖石落珠璣。纓縷固應無斷時。與郞千載相離別。一點丹心何改移。
憶君無日不霑衣。政似春山蜀子規。爲是爲非人莫問。只應殘月曉星知。
익재난고 제4권 / 시(詩) / 소악부(小樂府)
움츠린 참새야 너는 어이하여 / 拘拘有雀爾奚爲
그물에나 걸리는 황구아가 되었느냐 / 觸着網羅黃口兒
보라는 눈은 어디에 두고서 / 眼孔元來在何許
그물에 걸리는 가엾은 새가 됐나 / 可憐觸網雀兒癡
까치는 울 옆 꽃 가지에 지저귀고 / 鵲兒籬際噪花枝
희자는 상 머리에 그물을 치네 / 喜子床頭引網絲
우리님 오실 날 멀지 않겠지 / 余美歸來應未遠
그 정신 미리 사람에게 알려주네 / 精神早已報人知
완사계 언덕 위에 버들이 늘어지고 / 浣沙溪上傍垂楊
백마랑 손잡고 심중을 터놓았네 / 執手論心白馬郞
처마에 쏟아지는 삼월 비라도 / 縱有連簷三月雨
차마 어이 내손의 향기야 씻어낼까 / 指頭何忍洗餘香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 黃雀何方來去飛
일 년의 농사는 아랑곳않고 / 一年農事不曾知
늙은 홀아비 애써 지은 농사인데 / 鰥翁獨自耕耘了
그 벼와 기장을 다 먹어치우다니 / 耗盡田中禾黍爲
봄 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 脫却春衣掛一肩
친구 불러 채마밭에 들어갔다네 / 呼朋去入菜花田
동서로 쫓아가며 나비잡던 일들이 / 東馳西走追蝴蝶
어젯날 놀이같이 완연하구나 / 昨日嬉遊尙宛然
옛날 신라의 처용 늙은이 / 新羅昔日處容翁
바닷속에서 왔노라 말을 하고서 / 見說來從碧海中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 貝齒赬唇歌夜月
솔개 어깨 자주 소매로 봄바람에 춤췄다 / 鳶肩紫袖舞春風
나무 끝에 조그마한 닭을 조각하여 / 木頭雕作小唐鷄
젓갈로 집어다 벽위에 놓았네 / 筯子拈來壁上棲
이 새가 울면서 시간을 알려오니 / 此鳥膠膠報時節
어머님 얼굴이 비로소 지는 해 같네 / 慈顔始似日平西
바윗돌에 구슬이 떨어져 깨지긴 해도 / 縱然巖石落珠璣
꿰미실만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 纓縷固應無斷時
님과 천추의 이별을 하였으나 / 與郞千載相離別
한 점 단심이야 변함이 있으랴 / 一點丹心何改移
매일같이 님 생각에 옷깃이 젖어 / 憶君無日不霑衣
흡사 봄산에 자규새 같네 / 政似春山蜀子規
옳고 그릇됨을 묻지를 마오 / 爲是爲非人莫問
응당 새벽달과 별만은 알리라 / 只應殘月曉星知
[주-D001] 황구아(黃口兒) : 참새의 새끼를 말한다.[주-D002] 희자(喜子) : 거미[蜘蛛]의 별칭인데, 거미가 내려오면 기다리는 사람이 온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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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齋亂稿卷第四 / 詩 / 昨見郭翀龍。言及菴欲和小樂府。以其事一而語重。故未也。僕謂劉賓客作竹枝歌。皆夔峽間男女相悅之辭。東坡則用二妃,屈子,懷王,項羽事。綴爲長歌。夫豈襲前人乎。及菴取別曲之感於意者。翻爲新詞可也。作二篇挑之。
都近川頹制水坊。水精寺裏亦滄浪。上房此夜藏仙子。社主還爲黃帽郞。
近者有達官戲老妓鳳池蓮者曰。爾曹惟富沙門是從。士大夫召之。何來之遲也。答曰。今之士大夫。取富商之女爲二家。否則妾其婢子。我輩苟擇緇素。何以度朝夕。座者有愧色。鮮于樞西湖曲云。西湖畫舫誰家女。貪得纏頭強歌舞。又曰。安得壯士擲千金。坐令桑濮歌行露。宋亡。士族有以此自養者。故傷之也。
耽羅此曲。極爲鄙陋。然可以觀民風知時變也。
從敎壟麥倒離披。亦任丘麻生兩歧。滿載靑瓷兼白米。北風船子望來時。
耽羅。地狹民貧。往時全羅之賈販。瓷器稻米者時至而稀矣。今則官私牛馬蔽野。而靡所耕墾。往來冠蓋如梭。而困於將迎。其民之不幸也。所以屢生變也。
익재난고 제4권 / 시(詩)
어제 곽충룡(郭翀龍)을 만나보았는데 그의 말이, 급암(及菴)이 소악부(小樂府)에 화답을 하려고 하였으나 같은 일에 말이 겹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에 대해서, ‘유 빈객(劉賓客)이 지은 죽지가(竹枝歌)는 기주(夔州)와 삼협(三峽) 지역의 남녀들이 서로 즐기는 사연이고 소동파(蘇東坡)는 이비(二妃)ㆍ굴원(屈原)ㆍ초 회왕(楚懷王)ㆍ항우(項羽)의 일을 엮어서 장가(長歌)를 지었는데 옛사람의 것을 답습한 것이었던가? 급암만은 별곡(別曲)으로써 마음에 느낀 바를 취하여 새로운 가사(歌詞)를 짓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두 편을 지어 도발(挑發)한다
도시 부근 하천에 제방이 터져 / 都近川頹制水坊
수정사 마당까지 물이 넘치네 / 水精寺裏亦滄浪
사방엔 오늘밤 선녀를 숨겨두고 / 上房此夜藏仙子
절 주인이 도리어 황모랑이 되었네 / 社主還爲黃帽郞
근래에 어떤 고관(高官)이, 봉지련(鳳池蓮)이란 늙은 기생을 희롱하면서 ‘너희들이 돈 많은 중[僧]은 따르면서 사대부(士大夫)가 부르면 왜 그렇게 늦게 오느냐?’ 하니 그 기생은 ‘요즈음 사대부들은, 돈 많은 장사치의 딸을 데려다가 두 살림을 꾸리거나 아니면 그 종[婢子]으로 첩(妾)을 삼는데, 우리가 진실로 치소(緇素)를 가린다면 어떻게 아침 저녁을 지내란 말이오?’ 하므로 온 좌중(座中)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우추(鮮于樞)의 서호곡(西湖曲)에,
서호의 화방에 뉘집 여자던고 / 西湖畫舫誰家女
전두를 탐내어 억지로 가무하고 있네 / 貪得纏頭强歌舞
하였고 또,
어떻게 해야 천금을 버리는 장사를 만나 / 安得壯士擲千金
상복에서 행로를 노래할 수 있을는지 / 坐令桑濮歌行露
하였는데, 송(宋) 나라가 망(亡)하자 사족(士族)들이 이러한 식으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다. 탐라(耽羅)의 이러한 곡은 아주 비루하지만 그러나 백성의 풍속을 보아 세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거꾸러진 보리 이삭 그대로 두고 / 從敎壟麥倒離披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 두었네 / 亦任丘麻生兩歧
청자와 백미를 가득 싣고서 / 滿載靑瓷兼白米
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 北風船子望來時
탐라(耽羅)는 지역이 좁고 백성들은 가난하였다. 과거에는 전라도에서 자기(瓷器)와 도미(稻米)를 팔러 오는 장사꾼이 때때로 왔으나 숫자가 적었는데, 지금은 관가(官家)와 사가(私家)의 소와 말만 들에 가득하고 개간(開墾)은 없는 데다가 오가는 관개(冠蓋)가 북[梭]같이 드나들어서 전송과 영접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그 백성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여러 번 변(變)이 생긴 것이다.
[주-D001] 급암(及菴) : 민사평(閔思平)의 호.[주-D002] 유 빈객(劉賓客) : 유우석(劉禹錫)이 빈객 벼슬을 지냈으므로 이른 것이다.[주-D003] 이비(二妃) : 요(堯) 임금의 두 딸로 뒷날 순(舜) 임금의 비(妃)가 된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가리킨다.[주-D004] 치소(緇素) : 치(緇)는 흑의(黑衣), 소(素)는 백의(白衣)로 중[僧]과 속인(俗人)을 가리킨 말이다.[주-D005] 전두(纏頭) : 기생들에게 상품(賞品)으로 주는 비단을 말한다.[주-D006] 어떻게 해야 …… 있을는지 : 금전 때문에 지조를 무너뜨린 기녀를 탄식한 말이다. 상복은 지명(地名)으로 상간(桑間)ㆍ복상(濮上)을 가리키는데,《禮記》 樂記에 “상간ㆍ복상의 음악은 망국(亡國)의 음악이다.” 하였고, 행로는 《시경(詩經)》소남(召南)의 편명(篇名)인데, 여인들이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노래한 시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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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卷十九 / 忠淸道 / 瑞山郡
人物
高麗 鄭仁卿。高宗末,蒙兵來屯稷山、新昌二縣。仁卿夜攻有功,補諸校。忠烈朝,授西北面都指揮使,官至中贊。初以舌人知名,所至有聲績。
柳淑。忠惠朝登第。從恭愍王入侍元朝。忠穆卽位,恭愍僚佐多不守節,淑獨不變。恭愍卽位,拜代言,錄燕邸侍從功爲一等。歷版圖判書、樞密院直學士。又錄誅奇轍功,賜安社功臣鐵券。紅巾之亂,淑決策南幸,進樞密院,後拜僉議贊成事。忤辛旽,罷封瑞寧君。淑乞退許之,將相大臣門生故吏咸餞于郊。淑賦詩,其末聯云:“不是忠衰誠意薄,大名之下久居難。” 淑旣去,旽勢日熾。旽恐淑復用,必欲加害,以淑詩譖于王曰:“淑以范蠡自居,以句踐比王。” 王愈疑,乃命杖之,除名籍沒,旽遂縊殺于靈光。及旽誅,王始知其然,悼甚,雪其冤。諡文僖。後配享恭愍廟庭。
柳淑 | 1316 | 1368 | 瑞山 | 純夫 | 思菴 | 文僖 | 瑞寧君 |
柳實。淑之子。驍勇善騎射,累遷禮儀摠郞,官至密直副使。
本朝 柳方善。淑之曾孫。有詩名。永樂中,遭家禍流永川。後遇赦從便,學者多從之遊。《泰齋集》行于世。
柳允謙。方善之子。登第,官至大司諫。有文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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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柳淑) (1324~1368)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 기철(奇轍) 일당을 제거한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이 된 뒤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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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齊賢1 | 1287 | 1367 | 李之公 | 慶州 | 仲思 | 益齋, 櫟翁 | 文忠 | 雞林府院君 |
金倫 | 1277 | 1348 | 彥陽 | 無己 | 竹軒, 戇村 | 貞烈 | 彥陽府院君 |
閔思平 | 1295 | 1359 | 驪興 | 坦夫 | 及菴 | 文溫 | 驪興君 |
閔思平妻金氏 | 1302 | 1374 | 彥陽 |
李穡 | 1328 | 1396 | 韓山 | 穎叔 | 牧隱 | 文靖 | 韓山伯 |
급암시집(及菴詩集) 민사평(閔思平)생년1295년(고려 충렬왕 21)몰년1359년(공민왕 8)자탄부(坦夫)호급암(及菴)본관여흥(驪興)시호문온(文溫)특기사항최해(崔瀣)와 교유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 東國四詠。益齋韻。
獨跨靑騾訪碧山。山僧應是後豐干。不因此老閑饒舌。誰作黃扉上相看。
右金侍中乘騾訪江西惠素上人
千尺雲根聳北山。古賢遺跡畫應難。自從相國題詩後。多少行人指點看。
右崔大尉冒雪游城北皺岩
蟾影圓流露桂枝。夜深斗覺爽襟期。世人誰是知音耳。一曲廣陵空自知。
右鄭中丞月下撫琴
万柄亭亭上下池。幽人乘興獨尋詩。一番細雨蒸荷氣。數里香風泛柳絲。
右郭翰林雨中賞蓮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급암시집 제2권 / 율시(律詩) / 동국사영. 익재 시의 운〔東國四詠益齋韻〕
홀로 푸른 노새 타고 푸른 산을 찾아가니 / 獨跨靑騾訪碧山
산승은 아마도 풍간의 후신이리 / 山僧應是後豐干
이 노인의 쓸데없는 수다가 아니었다면 / 不因此老閑饒舌
누가 공을 황색 문의 재상으로 보았겠나 / 誰作黃扉上相看
위 내용은 김 시중(金侍中)이 노새를 타고 강서(江西) 혜소 상인(惠素上人)을 방문했다는 고사를 읊은 것이다.
천 척의 바위가 북쪽 산에 솟아 있으니 / 千尺雲根聳北山
옛 현인의 유적은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우리 / 古賢遺跡畫應難
재상이 시를 쓴 뒤로부터 / 自從相國題詩後
많은 행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세히 본다네 / 多少行人指點看
위 내용은 최 태위(崔大尉)가 눈을 무릅쓰고 성 북쪽 추암(皺岩)에서 놀았다는 고사를 읊은 것이다.
달빛 흐르며 계수나무 가지를 드러내니 / 蟾影圓流露桂枝
깊은 밤 마음이 상쾌함을 갑자기 깨닫노라 / 夜深斗覺爽襟期
세인들 중에 누가 지음의 귀를 가졌나 / 世人誰是知音耳
〈광릉산〉 한 곡조는 부질없이 자신만 아네 / 一曲廣陵空自知
위 내용은 정 중승(鄭中丞)이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탔다는 고사를 읊은 것이다.
연꽃 일만 줄기가 위아래 연못에 꼿꼿이 솟았는데 / 万柄亭亭上下池
한가로운 이 흥을 타고 홀로 시 찾으러 왔구나 / 幽人乘興獨尋詩
한 번 내린 이슬비에 연꽃 향기 피어오르니 / 一番細雨蒸荷氣
몇 리에 뻗친 향긋한 바람이 버들실을 띄우네 / 數里香風泛柳絲
위 내용은 곽 한림(郭翰林)이 빗속에 연(蓮)을 감상했다는 고사를 읊은 것이다.
[주-D001] 풍간(豐干) : 당(唐)나라 명승(名僧)의 이름이다.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두 중이 미친 것처럼 행세하여 절에서 천대를 받았는데, 풍간이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가 한산과 습득에게 가서 절하니, 한산과 습득이 말하기를 “풍간이 입이 싸구나.〔豐干饒舌〕”라고 하였다. 여기서 풍간이라 한 것은 혜소 상인이 수다스럽다는 말이다.[주-D002] 황색 문 : 삼공이나 승상 등이 공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관청 문 위를 황색으로 칠하였기에 황비(黃扉)라는 명칭이 생겼다.[주-D003] 김 시중(金侍中) : 정추(鄭樞)의 《원재집(圓齋集)》 권상 〈동국사영(東國四詠)〉에는 김부식(金富軾)으로 되어 있다.[주-D004] 최 태위(崔大尉) : 정추(鄭樞)의 《원재집(圓齋集)》 권상 〈동국사영(東國四詠)〉에는 쌍명재(雙明齋) 최당(崔讜)으로 되어 있다. 최당(1135~1211)은 고려 중기의 문인이다. 1171년(명종1)에 관계(官界)에 나아갔다가 신종(神宗) 때 치사(致仕)하였다. 장자목(張自牧)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주(詩酒)로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리었다.[주-D005] 광릉산(廣陵散) : 혜강(嵇康)이 형(刑)을 받고 죽을 때에 탔던 거문고 곡조이다. 그는 이 곡을 타면서, “이것이 〈광릉산〉이란 곡조인데 전일에 원효니(袁孝尼)가 나더러 가르쳐 달라는 것을 아껴 불응하였더니, 이제 이 곡조가 세상에서 아주 사라지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列傳》[주-D006] 정 중승(鄭中丞)이 …… 고사 : 정추(鄭樞)의 《원재집(圓齋集)》 권상 〈동국사영(東國四詠)〉에는 정서(鄭敍)가 동래에 유배 갔을 때의 고사라고 하였다. 정서는 참소를 받고 동래와 거제에 유배되어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사람으로, 인종과 의종 때의 문인이다.[주-D007] 곽 한림(郭翰林) : 정추(鄭樞)의 《원재집(圓齋集)》 권상 〈동국사영(東國四詠)〉에는 곽예(郭預)로 되어 있다. 곽예(1232~1286)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선갑(先甲)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행동이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글을 잘 짓고 서법(書法)에도 능하여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호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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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卷之二十一 / 七言絶句 / 東國四詠益齋韻
獨跨靑驢訪碧山。山僧應是後豐干。不因此老閑饒舌。誰作黃扉上相看。
右金侍中乘驢訪江西惠素上人
千尺雲根聳北山。古賢遺跡畫應難。自從相國題詩後。多少行人指點看。
右崔大尉冐雪遊城北皺岩
蟾影圓流露桂枝。夜深斗覺爽襟期。世人誰是知音耳。一曲廣陵空自知。
右鄭中丞月下撫琴
萬柄亭亭上下池。幽人乘興獨尋詩。一番細雨蒸霞氣。數里香風泛柳絲。
右郭翰林雨中賞蓮
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동국사영익재운(東國四詠益齋韻)
민사평(閔思平)
김시중승로방강서혜소상인(金侍中乘驢訪江西惠素上人)
혼자 푸른 나귀를 타고 푸른 산을 찾았노니 / 獨跨靑驢訪碧山
그 산의 어느 중은 아마 풍간의 후신이었으리라 / 山僧應是後豐干
이 늙은이의 실없이 싼 입이 아니더라면 / 不因此老閑饒舌
누가 그를 황비의 상상(수상(首相)으로 보았으리 / 誰作黃扉上相看
최대위모설유성북추암(崔大尉冒雪遊城北皺巖)
천 척 높은 바위 북산에 솟았나니 / 千尺雲根聳北山
옛 현인의 끼친 자취 그리기도 어려우리 / 古賢遺跡畫應難
상국이 거기에 시를 제한 뒤로는 / 自從相國題詩後
많은 행인들이 가리키며 자세히 보네 / 多少行人指點看
정중승월하무금(鄭中丞月下撫琴)
달빛은 이슬 젖은 계수 가지에 흐르는데 / 蟾影圓流露桂枝
밤이 깊자 갑자기 서늘함을 깨닫겠네 / 夜深斗覺爽襟期
세상사람 그 누가 소리 아는 귀인가 / 世人誰是知音耳
한 곡조 광릉산을 부질없이 혼자 아네 / 一曲廣陵空自知
곽한림우중상련(郭翰林雨中賞蓮)
아래위 못에 싱그러운 만 송이의 연꽃 / 萬柄亭亭上下池
그윽한 사람은 흥을 타고 혼자 시를 찾나니 / 幽人乘興獨尋詩
한 번의 부슬비는 안개 기운을 찌는데 / 一番細雨蒸霞氣
몇 리의 향기로운 바람은 버들 가지에 흐늘흐늘 / 數里香風泛柳絲
[주-D001] 풍간(豐干) :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두 중이 미친 것처럼 행세를 하여 절에서 천대를 받았는데, 풍간(豐干)이란 중이 말하기를,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가 한산과 습득에게 가서 절하니, 한산과 습득은 말하기를, “풍간이 입이 싸구나[饒舌].” 하였다. 풍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이라 한다. 여기서는 혜소(惠素)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이가 김시중(金侍中)이 정승인 줄 모를 만큼 야인(野人)의 행색을 하고 절로 찾아갔다는 것이다.[주-D002] 광릉산(廣陵散) : 혜강(嵇康)이 형(刑)을 당하여 죽을 때에 거문고를 한 곡조 타면서, “이것이 광릉산(廣陵散)이란 곡조인데 전일에 원효니(袁孝尼)가 나더러 가르쳐 달라는 것을 아껴서 불응하였더니, 이제 이 곡조가 인간에서 아주 끊어지는구나.”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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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고(牧隱藁) 이색(李穡)생년1328년(고려 충숙왕 15)몰년1396년(태조 5)자영숙(穎叔)호목은(牧隱)본관한산(韓山)시호문정(文靖)특기사항이제현(李齊賢)의 문인, 삼은(三隱)의 한 사람
牧隱詩藁卷之二十七 / 詩 / 成壯元來言。歲前游合德。拜掃外舅墳墓而歸。因懷思菴。走筆以寓一哀。石珚
柳淑 | 1316 | 1368 | 瑞山 | 純夫 | 思菴 | 文僖 | 瑞寧君 |
功成自古久居難。不是忠衰始掛冠。縱認鷲姦將下手。難敎鴆毒自摧䏏。
琵琶一曲哀調急。煙月五湖歸興闌。當日隨龍盡凋喪。光巖寂寂暮雲寒。
목은시고 제27권 / 시(詩)
성 장원(成狀元)이 와서 말하기를 “세전(歲前)에 합덕(合德)에 가서 외구(外舅)의 분묘(墳墓)에 성묘하고 돌아왔다.”고 하므로, 인하여 사암(思菴)을 생각하여 붓을 달려 써서 일애(一哀)를 부치는 바이다. 성 장원의 이름은 석연(石珚)이다.
자고로 공을 이루면 오래 있기 어렵나니 / 功成自古久居難
충성이 쇠해서야 사퇴하는 게 아니라네 / 不是忠衰始掛冠
비록 취간이 손을 쓰려는 걸 알았더라도 / 縱認鷲姦將下手
짐독이 스스로 슬퍼하게끔은 어려웠으리 / 難敎鴆毒自摧肝
비파 한 곡조엔 슬픈 가락이 몹시 급했고 / 琵琶一曲哀調急
달빛 흐린 오호엔 돌아갈 흥이 무르녹았지 / 煙月五湖歸興闌
당일에 임금 따르던 이들은 다 몰락하고 / 當日隨龍盡凋喪
적적한 광암사에 저녁 구름만 차갑구나 / 光巖寂寂暮雲寒
[주-D001] 사암(思菴) :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인 유숙(柳淑)의 호이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 평리(僉議評理),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는데, 평소 그의 충직(忠直)한 성품을 두려워했던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다가 뒤에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絞殺)당했다고 한다.[주-D002] 자고로 …… 어렵나니 : 춘추 시대 월(越)나라의 대부(大夫) 범려(范蠡)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말하기를 “큰 명성을 누리는 자리에는 오래 있기 어려운 것이다. 또 구천의 사람됨은 환난(患難)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안락(安樂)함을 같이 누리기는 어렵다.” 하고, 구천을 하직하고 오호(五湖)에 배를 띄워 떠나 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3] 취간(鷲姦)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진 간신(姦臣) 신돈(辛旽)을 가리킨다.[주-D004] 짐독(鴆毒) : 짐조(鴆鳥)의 깃을 술에 담가 마시면 그 독이 사람을 죽인다는 데서, 사람이 유흥(遊興)이나 일삼는 것은 짐독과 같이 사람을 해친다 하여, 예로부터 유흥을 일삼는 것을 짐독에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곧 간신(姦臣)의 흉계(凶計)로 임금의 총명이 흐려진 것을 짐독에 비유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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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 | 1328 | 1396 | 韓山 | 穎叔 | 牧隱 | 文靖 | 韓山伯 |
牧隱文藁卷之七 / 序 / 寄贈柳思菴詩卷序
君子有終身之樂。一朝之樂。不足以爲我樂也。無適無莫。動靜俯仰。怍與愧不少萌。則所謂我者。湛乎其中存焉。死生壽夭。天也。吉凶榮辱。人也。皆非我也。而我以爲喜懼則情勝矣。情勝不已。天始滅矣。如是而曰我有終身之樂。吾不信也。爵之所以貴我也。祿之。所以富我也。富我者。必能窮我。貴我者。必能賤我。而我不敢不聽命焉。以其在彼而不在我也。是以。素非我有而一旦加乎我。雖窮貴極富。而我不以爲喜也。喜且不可。況以爲終身可樂乎。所謂可樂者。吾自知之尒。父不得予之子。夫不得奮諸婦。夫天下之至親而至密者。莫如父子夫婦。而猶且不得而相予相奪。其必有所以然者矣。不徒知之。又踐之必。外患於是乎絶矣。思菴先生蓋近之。居京師十一年。同列推其行高。與國政十四年。同朝服其量弘。由布衣位台鼎。亦可謂盛矣。然而無一毫自得之意形於言動。視其居處。視其服食。視其所與游。盡一世之號爲富貴者。視其貌則猶布衣時。其不以一朝之樂爲可樂者歟。十數年間。巍然赫然。能保其終者蓋寡。先生從容進退。不以軒冕在亡爲榮辱。昔也居廟堂。樂其道之行。今也在田里。樂其身之全。身全道亦全矣。追惟前日如行雲流水。已無蹤迹。獨其愛君之心與吾終身之樂。不可須臾之相離也。可離。豈吾所謂可樂者哉。成均司藝康子野。先生之門人也。將求詩諸公間。而爲考槃之助。以予深知先生。屬以敍。余故略言其大槪。周不云乎。逃空虛者。聞人足音跫然而喜。矧吾文乎。其必擊節而歎曰。相知之不可無於世也如此夫。
목은문고 제7권 / 서(序) / 유사암(柳思菴)의 시권(詩卷)에 기증한 서문
군자에게는 종신토록 즐길 낙이 있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 같은 것은 자신의 낙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겠다. 무적(無適)하고 무막(無莫)하는 가운데 동정(動靜)과 부앙(俯仰)의 사이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할[怍與愧] 여지가 없게 된다면, 이른바 나의 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 담연(湛然)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생(死生)과 수요(壽夭)는 하늘에 속한 일이요, 길흉(吉凶)과 영욕(榮辱)은 사람 사이에 속한 일이니, 이것은 모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때문에 기뻐하고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정욕(情欲)이 나를 이기는 것이다. 정욕이 나를 이기는 현상이 계속되면, 내 속의 천성(天性)이 없어지기 시작할 텐데, 이렇게 하고서도 “나는 종신토록 즐길 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 말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관작(官爵)은 나를 귀하게 해 주는 것이요, 봉록(俸祿)은 나를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이지만, 나를 부유하게 해 주는 자는 반드시 나를 빈궁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요, 나를 귀하게 해 주는 자는 반드시 나를 천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그런 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상대방에게 있고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닌데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질 경우, 그것이 비록 더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부귀(富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은 기뻐해서도 오히려 안 되는 것인데, 더군다나 종신토록 즐길 낙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종신토록 즐길 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라서, 설령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이요, 남편이라도 아내에게서 뺏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지극히 친근하고 지극히 밀접한 관계 중에서도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보다 앞서는 것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줄 수도 없고 상대방에게서 뺏을 수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머릿속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 몸으로 반드시 실천해 나간다면, 밖에서 오는 환란 같은 것은 여기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암(思菴 유숙(柳淑)) 선생은 대체로 이런 경지에 가까이 다다르신 분이라고 할 것이다. 경사(京師)에 머무른 11년 동안에는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높은 행실을 추앙하였고, 국정(國政)에 참여한 14년 동안에는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심복하였다. 그리하여 포의(布衣)로부터 시작해서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보면 이 또한 성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생 자신은 털끝만큼도 자득(自得)하는 뜻을 말이나 행동 사이에서 보인 적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을 보거나 음식과 복장을 보거나 더불어 노니는 자들을 보면, 모두 한 세상의 부귀한 자라고 일컬어질 만도 하였는데, 정작 그의 모습을 보면 포의의 신분으로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을 가지고 종신토록 즐길 낙으로 삼지 않는 분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10여 년 간에 걸쳐 드높이 현달해서 빛나게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을 보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몸을 제대로 보전한 경우는 대개 드물다고 할 것인데, 선생은 조용히 진퇴를 하면서 관작과 봉록이 있고 없는 것을 영욕(榮辱)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옛적에 묘당(廟堂)에 있을 적에는 그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지금 전원(田園)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몸이 온전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자신의 몸과 도를 모두 제대로 보전한 분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지나간 옛일이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흘러가 듯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그래도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과 종신토록 즐길 자신의 낙만큼은 마음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잠시라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내가 이른바 종신토록 즐길 낙이 될 수 있겠는가.
성균 사예(成均司藝) 강자야(康子野 강호문(康好文))는 선생의 문인이다. 장차 제공(諸公)의 시편(詩篇)을 얻어다가 선생의 은거(隱居)에 도움이 되게 하려 하면서, 내가 선생을 깊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해 왔기에, 내가 대체적인 내용을 약간 말하게 되었다. 장주(莊周)가 말하지 않았던가. “텅 빈 골짜기에 숨어서 사는 사람은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법이다.[逃空虛者 聞人足音跫然而喜]”라고. 그런데 하물며 우리의 이 글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선생도 무릎을 치면서 이렇게 탄식할 것이 분명하다. “서로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주-D001] 무적(無適)하고 …… 된다면 : 선입견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中庸)의 도리에 따라 올바른 의리를 행해 나가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군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꼭 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관적인 편견을 배격하고, 오직 대의(大義)에 입각해서 행동한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는 공자의 말이 나오고,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것이 군자의 두 번째 낙이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텅 빈 …… 법이다 :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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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고(圓齋槀) 정추(鄭樞)생년1333년(고려 충숙왕 복위 2)몰년1382년(우왕 8)자공권(公權)호원재(圓齋), 무형자(無形子)본관청주(淸州)초명연(衍)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이제현(李齊賢)의 문인, 이색(李穡) 등과 교유
圓齋先生文稿卷之上 / 詩 / 東國四詠 座主益齋侍中命賦
金侍中 富軾 騎騾。訪江西惠素上人。
孤雲出岫大江流。相國騎騾境轉幽。何事往來多邂逅。山僧沽酒共登樓。
雙明崔大尉 讜 雪後騎牛。遊城北雛岩。
兩山松櫟雪培堆。驀水穿雲路幾回。莫說袁安高枕興。何妨牛皆覓詩來。
鄭中丞敍謫居東萊。每月明。彈琴違曙。
雲盡長空月在天。橫琴相對夜如年。帝鵑曲盡思無盡。誰把鸞膠續斷絃。啼鵑中丞所製曲名
郭翰林 預 冒雨賞蓮有詩
荷花漠漠雨絲絲。▦頃方塘景特奇。應爲吟安一箇字。塵中折角立多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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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中丞敍謫居東萊。每月明。彈琴위違曙->彈琴달達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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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中丞敍謫居東萊。每月明。彈琴違曙。敍는 인명 다른 3수 시제처럼 작은 포인트로
*鄭中丞敍謫居東萊。每月明。彈琴違曙。
雲盡長空月在天。橫琴相對夜如年。帝鵑曲盡思無盡。誰把鸞膠續斷絃。啼鵑中丞所製曲名
郭翰林 預 冒雨賞蓮有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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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견帝鵑曲盡思無盡。誰把鸞膠續斷絃。啼鵑中丞所製曲名->제견啼鵑
*본문 帝鵑의 제는 결획을 빼고 읽은 것이니 啼자가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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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집(陶隱集) 이숭인(李崇仁)생년1347년(고려 충목왕 3)몰년1392년(공양왕 4)자몽가(蒙哥), 자안(子安)호도은(陶隱)본관성주(星州)(경산(京山))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이집(李集)ㆍ정도전(鄭道傳) 등과 교유. 삼은(三隱)의 한 사람
陶隱先生詩集卷之三 / [詩] / 秋日雨中有感
琵琶一曲鄭過庭。遺響凄然不忍聽。俯仰古今多少恨。滿簾踈雨讀騷經。
他鄕作客頭渾白。到處逢人眼不靑。淸夜沉沉滿窓月。琵琶一曲鄭過庭。此思菴先生臨絶之詩也。謹錄如左。
가을날 빗속의 감회〔秋日雨中有感〕
비파 한 곡조 〈정과정〉 노랫소리여 / 琵琶一曲鄭過庭
그 유향 처연하여 차마 듣지 못하겠네 / 遺響凄然不忍聽
고금을 부앙컨대 한이 얼마나 서렸을꼬 / 俯仰古今多少恨
주렴 가득 성긴 빗속에 〈소경〉을 읽노라 / 滿簾疏雨讀騷經
“타향의 나그네살이 중에 머리는 온통 백발, 도처에 만나는 사람마다 눈길이 곱지 않네. 맑은 밤 깊어가며 창에 달빛 가득한데, 비파 한 곡조 〈정과정〉 노랫소리여.〔他鄕作客頭渾白 到處逢人眼不靑 淸夜沈沈滿窓月 琵琶一曲鄭過庭〕” 이것은 사암(思菴)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은 시이다. 여기에 삼가 이렇게 기록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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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서회기조호선배(書懷寄趙瑚先輩)
유숙(柳淑)
타향에 나그네 되어 머리 모두 세었거니 / 他鄕作客頭渾白
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눈길이 차가워라 / 到處逢人眼不靑
맑은 밤은 깊어 가고 달빛 가득한 상 아래 / 淸夜沈沈滿床月
한 곡조 비파 타노니 정과정곡일러라 / 琵琶一曲鄭瓜亭
[주-D001] 정과정곡(鄭瓜亭曲) : 고려 의종 때에 정서(鄭叙)가 동래(東萊)로 귀양가 있으면서 임금을 생각하여 비파를 탔는데, 그 곡조를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한다. 과정(瓜亭)은 정서의 호(號)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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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三 / 記 / 趙氏林亭記
平壤趙氏。自貞肅公佐忠烈王事元世祖。蔚爲元臣。諸子皆大官。二子忠肅公。尤爲厚重君子。至今稱道不置。其子判書公以病乞安養于平州之南鐵峯之東。其子兄弟侍側。以奉朝夕。此趙氏林亭所由作也。
趙氏之仲子通禮門判官名玩者
세종실록 / 세종 23년 신유(1441) 8월 16일(경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완(趙玩)이 졸(卒)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권오돈 (역) | 1971
來曰。吾父母卜居于此蓋有年矣。屋廬之苟完。饔飧之苟給。蓋自吾舅氏思菴公淪喪之後。雖所以自奉者淡乎其無復遺味。忘其形以忘于世。樂於身以樂于心。所以送餘年。庇後昆者。粗得其道。而吾兄弟怡恰愉愉。扇枕於其中。其樂又如何也。方其夏景舒敷。山光水氣沈浸於上下。雨意雲容變化於朝夕。所以樂吾親之心。又天之所以玉成於趙氏也。吾兄弟者。實快於心。然不可以宣之口。又不筆之。將無以廣吾孝思。林亭之作。將與逃賦而入山之深。邀名而標境之勝者無以異矣。請先生記之。予曰。凡君子之養其親。有心志口體之異。若趙氏兄弟。蓋兼之矣。平之爲州。近於京邑。士大夫置別墅者多矣。往來之便。仕已之同也。官事稍簡。或休暇之隙。匹馬而往。豈獨林亭娛親之可述。其道途吟詠風景之美。兄弟當自得之又深矣。予也病也。足不出門者數年矣。故於趙氏兄弟。尤爲歆艶焉。故於末略及之。
伯氏名瑚。吾門生也。
목은문고 제3권 / 기(記) / 조씨 임정기(趙氏林亭記)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이 충렬왕(忠烈王)을 보좌하며 원 세조(元世祖)를 섬겨 성대하게 원(元)나라의 관원이 되면서부터 여러 자제들이 모두 대관(大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둘째 아들인 충숙공(忠肅公 조연(趙璉))이 특히 중후(重厚)한 군자의 면모를 갖추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송해 마지않고 있다. 그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이 병으로 사직을 청한 뒤에 평주(平州 평산(平山)의 옛 이름) 남쪽 철봉(鐵峯)의 동쪽에서 안식을 취하며 휴양하자, 그의 아들 형제가 옆에서 모시면서 아침저녁으로 봉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씨의 임정(林亭)이 세워지게 된 연유이다.
조씨의 둘째 아들로서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으로 있는 완(琬)이라는 자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님이 여기에다 터를 잡고 사신 뒤로 대개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거처하실 곳도 그런대로 구비되었고 드실 음식도 그런대로 갖추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개 우리 구씨(舅氏)인 사암공(思菴公 유숙(柳淑))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생활을 담박하게 하는 가운데 더 이상 맛보고 싶은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만, 형체를 잊음으로써 세상의 일도 자연히 잊게 되고 몸을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도 자연히 즐겁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부모님이 여생을 보내면서 후손을 보호해 주는 그 도리가 조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우리 형제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선침(扇枕)을 하고 있으니, 그 즐거움이 또 어떻겠습니까. 바야흐로 여름날의 경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면, 산 빛과 물 기운이 위아래에서 스며들어 촉촉이 적셔 주는 가운데, 비가 오려고 할 때의 풍경이라든가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아침저녁으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있으니, 이것은 또 하늘이 우리 조씨의 임정(林亭)을 완전무결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가 마음속으로는 실로 유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입으로 떠벌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또 이에 대해서 또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어버이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널리 드러낼 수가 없게 되어, 임정을 지은 것 역시 부역(賦役)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나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승경(勝景)을 표방한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군자가 자기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조씨 형제와 같은 경우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조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평주(平州) 고을로 말하면, 경읍(京邑)과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사대부의 별장이 많기도 한데, 벼슬을 하고 있거나 그만두었거나 간에 왔다 갔다 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조씨 형제들도 관청의 일이 조금 한가하거나 휴가를 얻을 틈이 생기면 필마(匹馬)로 드나들곤 할 테니, 어찌 유독 임정에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는 일만 서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도로 상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흥치 역시 형제들 스스로 터득한 점이 또 깊으리라고 여겨진다.
나는 병이 들어서 문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조씨 형제에 대해서 더욱 부러운 마음이 들기에, 끝에다 이 점을 조금 언급하게 되었다. 백씨(伯氏)는 이름이 호(瑚)로, 나의 문생(門生)이다.
[주-D001] 선침(扇枕) : 어버이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어버이를 위해 침상에서 부채를 부쳐 시원하게 해 드리고[扇床枕], 추운 겨울철에는 자신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렸던[身溫席]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黃香》[주-D002] 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 : 심지의 봉양은 어버이의 뜻에 맞추어 드리는 것을 말하고, 구체의 봉양은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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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집(大峯集) 양희지(楊熙止)생년1439년(세종 21)몰년1504년(연산군 10)자가행(可行), 정보(楨父)호대봉(大峯)본관중화(中和)
大峯先生文集卷之一 / 詩 / 題鄭瓜亭
他鄕作客頭渾白。到處逢人不見靑。淸夜沈沈滿窓月。琵琶一曲鄭瓜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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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기좌랑조호(寄佐郞趙瑚)
유숙(柳淑)
칠십 인생은 옛부터 드물어라 / 七十人生自古稀
공명의 중요한 자리 위태로움 많느니 / 功名要路足危機
분양의 완전한 한평생 만 번 다행이거니 / 分陽終始亦萬幸
띠풀집 푸른 산에는 시비가 없도다 / 芧屋靑山無是非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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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 慶尙道 / 東萊都護府 / 古跡
瓜亭。 在府南十里。 今廢。 鄭敍仕高麗, 以恭睿太后妹婿, 有寵於仁宗。 毅宗朝被譖, 放歸田里, 王謂曰: “行當召還。” 然久而不召, 乃築亭種瓜, 撫琴作歌, 以寓戀君之意, 詞極悽惋。 自號瓜亭。 樂府《鄭瓜亭》卽其曲也。 亭基至今存焉。 ○李齊賢作詩解之曰: “憶君無日不霑衣, 正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祗應殘月曉星知。” ○鄭樞詩: “雲盡長亭月在天, 橫琴相對夜如年。 鵑啼曲盡思無盡, 誰把鸞膠續斷絃?” ○韓脩詩: “半輪江月上瑤琴, 一曲新聲古意深。 豈意如今有鍾子? 只應彈盡伯牙心。” ○柳淑詩: “他鄕作客頭渾白, 到處逢人眼不靑。 淸夜沈沈滿窓月, 琵琶一曲鄭瓜亭。” ○李崇仁詩: “琵琶一曲鄭瓜亭, 遺響悽然不忍聽。 俯仰古今多少恨? 滿簾疎雨讀騷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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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집(松堂集) 조준(趙浚)생년1346년(고려 충목왕 2)몰년1405년(조선 태종 5)자명중(明仲)호우재(吁齋), 송당(松堂)본관평양(平壤)시호문충(文忠)
松堂先生文集卷之一 / 七言絶句 / 書農堂壁上
十頃方塘五畝陰。寒光疏影綠沈沈。夢魂誤入金鑾殿。時覺流鶯送好音。
其二
茅屋低低樹遍陰。海棠花上雨沈沈。京洛美人都不見。爪亭歌斷有餘音。
송당집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농당의 벽에 쓰다〔書農堂壁上〕
하나〔其一〕
열 이랑 네모난 못 다섯 묘에 그늘지니 / 十頃方塘五畝陰
시린 빛 성긴 그림자 푸른 빛 짙어지네 / 寒光疏影綠沈沈
꿈속의 혼 잘못해서 금란전에 들었다가 / 夢魂誤入金鑾殿
흐르는 꾀꼬리 곱게 울 때 그때 깨어났네 / 時覺流鸎送好音
둘〔其二〕
초가집 나직하여 나무 두루 그늘지고 / 茅屋低低樹遍陰
해당화 그 위로는 비만 부슬 내리네 / 海棠花上雨沈沈
서울 임은 도무지 뵐 수 없는데 / 京洛美人都不見
〈정과정곡〉 끊어져도 남은 소리 들려오네 / 瓜亭歌斷有餘音
[주-D001] 금란전(金鑾殿) : 당 덕종(唐德宗) 때 금란파(金鑾坡) 위에 세운 전각으로, 당나라 때 문인 학사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다. 여기서는 관각(館閣)을 가리킨다.[주-D002] 흐르는 꾀꼬리 : 꾀꼬리가 버들가지 사이를 들쑥날쑥 날아다니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주-D003] 정과정곡(鄭瓜亭曲) :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가 지은 노래이다. 정서가 동래로 유배 간 뒤 의종이 자신을 불러 주지 않자 임금을 그리워하며 부른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윤승준 (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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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靖
禮儀摠郞
검간집(黔澗集)->검간집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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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간집(黔澗集)
조정 (趙靖)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참봉, 봉상시정 등을 역임한 문신.
자 안중(安中)
호 검간(黔澗)
1555년(명종 10)~1636년(인조 14)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참봉|봉상시정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다.
조정(趙靖) 1555(명종10)~1636(인조14).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1596년 왜와 강화하는 것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603년(선조36)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술로 《검간집 (黔澗集)》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다.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 되었다.
*고려사 > 권105 > 열전 권제18 > 제신(諸臣) > 조인규 > 조덕유
조덕유
〈조덕유(趙德裕)는〉 아버지의 관작을 계승하여 왕부 단사관(王府 斷事官)이 되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무용(武勇)이 뛰어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화와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비록 친척이나 오랜 친구라도 나랏일이라면 절대 서로 오가지 않았다. 관직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을 때 죽었다. 아들은 조후(趙煦)·조린(趙璘)·조정(趙靖)·조순(趙恂)·조준(趙浚)·조견(趙狷)이다. 조준은 따로 전기(傳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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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영해(寧海)
변중량(卞仲良)
2월 강성에 비도 채 안 갰는데 / 二月江城霽景遲
강가에 산책하니 봄 생각이 동하누나 / 芳洲散策動春思
젊어선 돌아다니다며 호기에 상했지 / 少年流落傷豪氣
반나절을 흥청거리며 친구 만나 즐기네 / 半日娛歡遇舊知
매화ㆍ버들 철에 술 들기도 어렵것다 / 梅柳開時難把酒
누대 많은 곳에 시 어이 아니 쓰리 / 樓臺多處謾題詩
북쪽 서울 바라보니 길이 몇 천 리인고 / 京華北望幾千里
정과정 읊을 때마다 혼자 서러하노라 / 每賦苽亭獨自悲
[주-D001] 정과정(鄭瓜亭) :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 호 과정)가 죄없이 참소로 동래(東萊)에 귀양가서 임금을 그리워하여 거문고를 타고 슬피 노래한 곡조. 《高麗史 樂志》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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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유고(慵齋遺稿) 이종준(李宗準)생년미상몰년1499년(연산군 5)자중균(仲勻)호용재(慵齋), 용헌(慵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륙거사(藏六居士)본관경주(慶州)특기사항김종직(金宗直)의 문인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雜著 / 遺山樂府詩跋
樂府。詩家之大香奩也。遺山所著。淸新婉麗。其自視似羞比秦晁,賀晏諸人。而直欲追配於東坡,稼軒之作。豈是以東坡爲第一。而作者之難得也耶。然后山以爲子瞻以詩爲詞。如敎坊雷大使之舞。雖天下之工。要非本色。李易安亦云。子瞻歌詞。皆句讀不葺之詩耳。往往不協音律。王半山,曾南豐。文章似西漢。若作小歌詞則人必絶倒不可讀也。乃知別是一家。知之者小。彼三先生之集大成。猶不免人之譏議。況其下者乎。夫詩文分平側。而歌詞分五音五聲。又分六律。淸濁輕重。無不克諧。然後可以入腔矣。蓋東坡自言平生三不如人。歌舞一也。故所作歌詞間有不入腔處耳。然半山,南豐。皆學際天人。其於作小歌詞。直如酌蠡水于大海。豈可謗傷耶。吾東方。旣與中國語音殊異。於其所謂樂府者。不知引聲唱曲。只分字之平側。句之長短。而協之以韻。皆所謂以詩爲詞者。捧心而顰其里。祗見其醜陋耳。是以。文章巨公。皆不敢強作。非才之不逮也。亦如使中國人若作鄭瓜亭小唐鷄之解。則必且使人撫掌絶纓矣。唯益齋入侍忠宣王。與閻,趙諸學士游。備知詩餘衆體者。吾東方一人而已。然使后山易安可作。未知弊衣緩步。爲眞孫叔敖也耶。以此知人不可造次爲之。雖未知樂府。亦非我國文章之累也。愚之誦此言久矣。今以告監司廣原李相國。相國曰。子之言是矣。然學者如欲依樣畫胡蘆。不可不廣布是集也。於是就舊本考校殘文誤字。謄寫淨本。遂屬晉州慶牧使絍繡梓。時弘治紀元之五年壬子重陽後一日。都事月城李宗準仲匀。識。先生表德。從金而避諱書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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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집(西厓集) 유성룡(柳成龍)생년1542년(중종 37)몰년1607년(선조 40)자이견(而見)호서애(西厓), 운암(雲巖)본관풍산(豐山)봉호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황(李滉)의 문인
西厓先生文集卷之十五 / 雜著 / 離騷
朱晦菴晩年。註楚辭。其意深矣。盖自度道終不行。而世道人心。日趨於汙下。吾之忠君憂國惓惓不忘之誠。無可告語。而平日之稍以名節自礪者。莫不變遷而從俗。於是。有感於屈子之詞。而隔千載爲知己友。發揮於離騷。所謂可與識者道。難與俗人言者。眞不誣矣。新羅時有鄭敍。謫居東萊。戀君作歌詞。
號鄭瓜亭曲。麗末柳思菴淑。臨命作詩曰。
他鄕作客頭渾白。到處逢人眼不靑。淸夜沈沈滿窓月。琵琶一曲鄭瓜亭。
其詞悽怨。李陶隱崇仁詩云。
琵琶一曲鄭瓜亭。遺響悽然不忍聽。俯仰古今多少恨。滿簾疎雨讀騷經。
서애선생문집 제15권 / 잡저(雜著) / 이소(離騷)
회암(晦菴) 주희(朱熹)는 만년에 《초사(楚辭)》를 주석하였으니, 그 뜻이 깊었다. 주자는 스스로 생각해 보니, 도(道)는 끝내 행해지지 않고 세도(世道)와 인심은 날로 더러운 데로 달음박질하니, 간절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여 잊지 못하는 자기의 성심을 하소연할 데가 없고, 또 평소에 제법 명분과 절도로 자신을 연마하던 사람도 변천하여 세속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굴원(屈原)의 문사(文詞)에 느끼는 바 있어, 천년의 간격에도 지기(知己)의 벗이 되어 《이소경(離騷經)》에서 자기의 뜻을 발휘하였느니, 이른바 “식자와는 말할 수 있으나 속인과는 말하기 어렵다.”는 말이 참으로 옳다.
신라(新羅) 때 정서(鄭敍)라는 사람이 동래에 귀양 가서 살면서 임금을 사모하여 가사를 지었는데,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하였다. 고려 말에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운명할 때 시를 지어,
타향에 객이 되어 머리가 다 희었는데 / 他鄕作客頭渾白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도 반기는 사람 없네 / 到處逢人眼不靑
고요히 맑은 밤 달빛은 창에 가득한데 / 淸夜沉沉滿窓月
한 곡조 비파 소리는 정과정곡이네 / 琵琶一曲鄭瓜亭
하였으니, 그 시의 내용은 비통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시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과정의 비파 한 곡이 / 琵琶一曲鄭瓜亭
그 메아리 슬퍼 차마 들을 수 없네 / 遺響悽然不忍聽
예와 이제 생각하니 얼마나 한스러운가 / 俯仰古今多少恨
성긴 비는 주렴에 가득한데 이소경을 읽노라 / 滿簾疎雨讀騷經
[주-D001] 신라(新羅) : 고려(高麗)의 잘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권호기 박희창 은정희 조복연 최순희 (공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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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집(石門集) 정영방(鄭榮邦)생년1577년(선조 10)몰년1650년(효종 1)자경보(慶輔)호석문(石門)본관동래(東萊)특기사항정경세(鄭經世)의 문인. 유진(柳袗), 김근(金近), 이시명(李時明) 등과 교유
石門先生文集卷之一 / 賦 / 鄭瓜亭賦 竝序
鄭叙蓬原人。仕高麗睿宗朝。位知臺事。以直見廢。謫居蓬原亭于浦溆之上。而治圃其前。手種瓜爲事。旣取以自號。又作歌詞。以寓戀君憂國之忠。其詞悽惋。殆不免過哀而傷。後人謂之鄭瓜亭曲。嘗見麗史樂府中有鄭瓜亭曲。而其詞無傳。惟柳思菴
詩佗鄕作客頭渾白。到處逢人眼不靑。淸夜沉沉滿窓月。琵琶一曲鄭瓜亭。李陶隱詩琵琶一曲鄭瓜亭。遺響悽然不忍聽。俯仰古今多少恨。滿簾踈雨讀騷經。雖不見其詞。而其詞哀㤪。見二詩可想矣。余寓居臨川。見士子輩命題鄭瓜亭爲賦。得見之。爲之感歎。葢瓜亭卽侍中沆之子。而侍中乃吾先祖僕射試事中公弟也。非若佗人之汎然於其遭遇者。遂援筆賦此。
朝發軔於臨川。夕弭節乎蓬原。江波咽而有聲。煙樹暝而無痕。夫何樂浪之一隅。絶有似乎湘沅。豈三閭之遺騷。何壹鬱而煩寃。念夫子之洵美。紛懷瑾與握蘭。蘊馨德而不出。來束帛之戔戔。際風雲之嘉會。同魚水之交歡。庶獲展其抱負。位又躋於臺端。上無重華之好察。下有逆耳之忠言。鳳孤飛而無所集。鸒萬族之啾喧。恩未終於玉汝。迹已遠於金鑾。將澤物之素願。學種瓜於靑門。蒔及時而繁衍。子離離兮滿園。手摘摘兮不盈筐。君不御兮誰忍餐。誠徒切於獻芹。日未照於覆盆。傷流波之不復。感頹陽之再暾。芰余衣兮荷余裳。悵思君兮不敢諼。托胡琴而訴懷。輸滿腔之忱丹。悲羲馭之駸駸。㤪長夜之漫漫。葉辭條而色死。鴈出塞而聲酸。放妾聞而噓噫。纍臣爲之汍瀾。自古忠直者難容。君胡爲乎不自寬。賈賦鵩於長沙。屈懷沙於湘源。皆滄浪之自取。雖欲追而葢難。彼務光與巢許。在邃古而不論。吳市有南昌之尉。東門掛逢萌之冠。斯乃全身而遠害𥚁。何由而相干。自子逝今五百餘年。世愈變而難存。義見制於蹈海。勇無賴於拔山。矧鬼魅之與處。求晷刻之苟安。草可衣兮木可食。孰長往而不還。無今昔之可別。又何爲乎永歎。歌白雲而歸來。山靑靑兮水潺湲。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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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棲先生文集卷之四 / 詩 / 仁興酬諸友
琵琶一曲鄭過庭。萬事眞堪醉不醒。長夜悠悠幾時曙。寒風瑟瑟自生聽。
我曹放眼乾坤窄。行路關心雨雪零。爲愛深房煖如許。從君欲借一樵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5
인흥에서 여러 벗들과 수창하다〔仁興酬諸友〕
비파 한 곡조로 정과정을 연주하니 / 琵琶一曲鄭過庭
세상만사 참으로 취해서 깨지 않을 만하네 / 萬事眞堪醉不醒
기나긴 밤 유유하니 언제 날이 밝으려나 / 長夜悠悠幾時曙
우수수 찬바람 소리 제냥으로 들려오네 / 寒風瑟瑟自生聽
우리가 눈 휘둘러보니 천지가 비좁고 / 我曹放眼乾坤窄
행로에 마음 쓰이는 건 눈비 내릴까 해설세 / 行路關心雨雪零
깊숙한 방 이렇게 따스하니 너무 좋아 / 爲愛深房煖如許
그대에게 여종 하나 빌리고 싶구나 / 從君欲借一樵靑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김홍영 정석태 김보경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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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기(柳沂)의 …… 조아 세자를 끼고 권력을 쥐려 했다는 죄로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이무(李茂)가 처형될 때 유기와 조희민(趙希閔)도 그 당여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어 유기의 아버지 유후와 조희민의 아버지 조호도 연좌되어 각기 순흥(順興)과 평주(平州)에 유배되었고, 조호의 아들 조아와 조수는 모두 형조도관(刑曹都官)의 종이 되었다. 《太宗實錄 9年 10月 2日, 10年 1月 30日ㆍ2月 7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
2 유혜강이 …… 말 묘음은 유숙(柳淑)의 첩이고, 유혜강은 유숙의 손자이다. 조호가 했다는 말은 묘음이 조호의 집에 갔을 때 들었다는 말로서, 조호가 자기 아내에게 “정승 이무는 풍채가 매우 좋으니, 왕이 될 만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太宗實錄 10年 3月 14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
3 조호(趙瑚)가 지은 죄 조호는 태종 9년(1409) 6월에 여승(女僧) 묘음(妙音)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처에게 이무(李茂)의 풍채가 훌륭하여 왕이 될 만하다고 말하였는데, 이 일이 묘음의 고발로 알려지면서 국문을 받은 뒤 옥사(獄死)하였다. 태종은 조호를 형률대로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처자식을 관노로 삼았다가, 태종 11년(1411)에 조호의 처를 용서하였고 태종 15년(1415) 7월에 아들인 조수와 조아에게 가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다. 《太宗實錄 10年 3月 14日ㆍ30日, 4月 4日, 11年 10月 23日, 15年 7月 5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
4 조호(趙瑚)가 한 말 태종 9년(1409) 6월에 있었다는 일로, 조호가 “정승 이무는 풍채가 매우 좋으니, 왕이 될 만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太宗實錄 10年 3月 14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
5 조호(趙瑚)의 …… 돌려주었다 조호가 명나라와 무역할 때 남의 소를 빌려다 무역하고는 소의 주인에게 그 값을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상태에서 녹을 받아 갔기 때문에 이해 1월에 그 녹을 징수하고 평주(平州)에 정배하였다. 《太宗實錄 5年 1月 15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
6 조호(趙瑚)의 …… 주셨는데 조호는 태종 9년(1409) 6월에 여승(女僧) 묘음(妙音)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처에게 이무의 풍채가 훌륭하여 왕이 될 만하다고 말하였는데, 이 일이 묘음의 고발로 알려지면서 국문을 받은 뒤 옥사(獄死)하였다. 태종은 조호를 형률대로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처자식을 관노로 삼았다가 재위 11년(1411)에 조호의 처를 용서하였고 이해 7월에 아들인 조수와 조아에게 가재와 노비를 돌려주었다. 《太宗實錄 10年 3月 14日ㆍ30日ㆍ4月 4日, 11年 10月 23日, 15年 7月 5日》 신역 태종실록(新譯 太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