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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6권 / 행장(行狀)
통훈대부 행 세자시강원 필선 증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송서 선생 강 부군의 행장〔通訓大夫行世子侍講院弼善贈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松西先生姜府君行狀〕
부군은, 휘는 운(橒), 자는 경하(擎厦), 호는 송서(松西)이며, 성은 강씨,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시조는 고구려의 원수(元帥) 휘 이식(以式)이다. 고려 말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공목공(恭穆公) 휘 시(蓍)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통계(通溪) 휘 회중(淮仲)이 공민왕과 공양왕 재위 때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한 후에는 두 분 다 지조를 지켜 끝까지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3대를 내려와 휘 연(淵)은 벼슬이 별제(別提)였고, 또 3대를 내려와 휘 위빙(渭聘)은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때 전 익위(前翊衛)로서 분사(分司)를 따라 강화도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 충헌공(忠憲公) 윤전(尹烇),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 충현공(忠顯公) 송시영(宋時榮)과 함께 순절하였으니,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강도 오충(江都五忠)이다. 대총재(大冢宰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의 시호를 받았다. 이분의 손자인 휘 천여(天與)에 이르러, 별제공의 형인 참판 휘 징(澂)의 5세손 성건재(省愆齋) 휘 찬(酇)의 둘째 아들 휘 재보(再輔)를 후사로 삼았으니, 부군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조부 휘 일신(一臣)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동생 휘 일유(一儒)의 큰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이분이 부군의 부친으로, 휘는 책(𣽤)이고 첨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숙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만전(晩全) 선생 가신후 처사(可臣后處士) 휘 빈(儐)의 따님이다.
부군은 영조 계사년(1773, 영조49) 2월 5일에 법전리(法田里)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모부인(母夫人)이, 태양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5세에 《강사(江史)》를 배우다가 여와씨(女媧氏)가 죽는 대목에 이르자 묻기를 “어째서 포희(庖犠)가 죽을 때와 다릅니까?”라고 하고서, 이내 또 스스로 풀이하기를 “필시 여주(女主)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계속하여 《통감》의 〈반씨총론(潘氏總論)〉을 읽는 것을 하나의 일과(日課)로 삼았는데, 어른이 외출하고 나면 종일 놀다가, 관솔불 아래서 한 번만 읽어 내려가도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외우면서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9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곡하고 빈소 지키기를 마치 어른처럼 하였다. 숙부 석곡(石谷) 휘 협(浹)에게 가서 배웠는데, 하루는 석옹(石翁)이 사람들과 《중용장구》 〈서문(序文)〉을 강론하면서 “‘안씨(顔氏 안자(顔子))와 증씨(曾氏 증자(曾子))가 전한 것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라고 하지만, 증씨는 도(道)를 전한 글이 있는데 안씨는 어찌하여 없는지에 대한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니, 부군이 “이것은 뜻을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공자께서 살아 계시는데 안씨가 어찌 감히 글을 썼겠습니까.”라고 하니, 좌중의 모든 사람이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일찍이 《서경》 〈요전(堯典)〉의 기삼백(朞三百)을 공부할 때 이틀의 말미를 청하여 일과를 쉬고 물러나 연구하였다. 이때는 아직 포산법(布筭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손가락을 꼽아 분(分)을 계산하여, 한 편(篇)의 주해(註解)를 만들어 올렸다.
좀 더 자라서는 발분(發憤)하여 “우리 집이 몇 대 동안 가세가 펴지지 못하여 과거 시험이 아니고는 입신양명할 방법이 없으니, 과거를 빨리 끝내고 나서야 실지(實地) 공부에 종사할 수 있겠다.”라고 하고, 바로 태백산의 아주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시(詩)》, 《서(書)》, 《역(易)》, 《예(禮)》와 정주(程朱)와 제자(諸子)의 책들을 가지고, 꼿꼿이 앉아서 읽기를 7, 8년 동안 하고 또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과 제가(諸家)의 말을 섭렵하니, 그 지은 글이 오묘하고도 청신하며, 분방하면서도 탁월하기가 동배들 중에 부군과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정사년(1797, 정조21)에 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부군을 문장에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추앙하였고, 또 의론(議論)이 명쾌하고 말에 조리가 분명하여, 성균관에서 응답하는 글을 모두 부군에게 부탁하니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때 정조(正祖)가 바야흐로 문예를 숭상하는 정치를 일으켜, 반장(泮長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날마다 시험을 보이고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마침 《대학》의 명덕(明德)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대해 묻기를 “여기에서와 《맹자》의 심(心) 자에 대한 주해에서 ‘허령불매하여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虛靈不昧 具理應事〕’라고 똑같이 말하였으니, 심(心)이 바로 명덕(明德)인가?”라고 하였다. 부군이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명덕은 마음의 표덕(表德)이니, 마치 사람에게 이름과 자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마음을 말하면 옳고 그르고 참되고 망녕된 것을 함께 말하는 것이고, 단독으로 명덕을 말하면 다만 천리의 본연을 말하는 것일 뿐이니, 이 때문에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강(講)이 끝나고 전인(前人)들의 사적(事蹟)을 논하면서 정허암(鄭虛庵)의 출처의 의리에 이르렀는데, 공의 조대(條對 조목조목 대답함)가 매우 분명하였다. 상이 사생(師生) 간의 문답을 기록하여 들이라고 명하고 특별히 부군의 이름을 어병(御屛)에 써 놓았다.
을축년(1805, 순조5)에 동당시(東堂試 문과(文科))에 뽑혔으나 곧 당색(黨色) 때문에 실패를 당하였다. 정묘년(1807) 9월 정시(庭試)에 뽑혀서 10월에 급제하였다. 기사년(1809)에는 종사랑(從仕郞)에서 승사랑(承仕郞)으로 품계가 올랐다.
신미년(1811)에 호곡(壺谷) 유공 범휴(柳公範休)가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여니, 부군이 가서 강의를 들었다. 강회에서 돌아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였고 명리(名理)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회에서 이제가 병운(李際可秉運), 이신가 병원(李愼可秉遠) 형제와 유공회 휘문(柳公晦徽文), 유성백 치명(柳誠伯致明), 유회칙 정문(柳晦則鼎文)과 이충립 병하(李忠立秉夏) 등이 번갈아 서로 묻고 논란하니, 내가 처음에는 몹시 아득하였습니다. 여러 날을 들으니 깨닫는 곳이 있었고, 속학(俗學) 밖에 절로 진정한 문로(門路)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 뒤로 위의 여러 사람들과 글을 서로 주고받아 학문에 많은 도움이 있었다.
계유년(1813, 순조13)에 충렬공(忠烈公)의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을 받고, 또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에 추향(追享)되자, 공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한공 치응(韓公致應)과 더불어 절차를 자문하고 확정하여 향사(享祀)를 행하였다. 갑술년(1814)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서 정자로 승진하였다.
을해년(1815)에는 저작 박사(著作博士)로 직이 바뀌었고,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또 주부의 직으로 돌아왔다. 병자년(1816)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817)에 선부군(先府君)의 상을 당하였고, 기묘년(1819)에 상기(喪期)가 끝나고 나서 세자 가례(世子嘉禮)의 하반(賀班)에 나아갔다. 12월에 또 지평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820)에 남쪽 지방에 갔을 때, 성현(省峴)의 우관(郵館)으로 하계(霞溪) 이공 가순(李公家淳)을 찾아가서 열흘 동안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 중에 소문을 듣고 와서 문안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신사년(1821)에 상이 건릉(健陵)을 축조하여 숨겨지고 잘못된 일을 모두 바로잡았는데, 이때 광뢰(廣瀨) 이공 야순(李公野淳)이 임자년(1792, 정조16)의 청원(請願)을 거듭하고자 하여 편지로 부군의 의견을 물으니, 부군이 시의(時議)를 들어 답하였다.
계미년(1823, 순조23)에 청량산(淸凉山)에서 하옹(霞翁 이가순(李家淳))을 만나 그길로 각화사(覺華寺)로 들어갔고, 장소를 옮겨 도연서원(道淵書院)에서 모임을 열게 되었다. 이때 갈천(葛川) 김희주(金煕周),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양졸(養拙) 이용정(李用正)이 약속대로 도착하여 여러 날 동안 즐겁게 지냈다. 이윽고 또 도연서원과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가서 차례로 《심경》과 《근사록》을 강론하여 오묘한 뜻을 일러 주니, 새로 배우는 후진(後進)들이 보고 감동한 바가 많았다.
갑신년(1824)에 유교(由橋)로 집을 옮겨 초가집 몇 칸을 지었는데, 비바람을 가리기도 힘들 정도였으나 부군은 천성처럼 편안하게 여겼다. 겨울에 봉산서원(鳳山書院)에서 열린 강회(講會)에 가서 여러 사람들이 논변하는 점을 가지고 조목조목 뇌옹(瀨翁 이야순(李野淳))에게 질정하니, 뇌옹이 부군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였다.
을유년(1825, 순조25)에 하옹과 집안 조카 필로(必魯)와 함께 태백산 신성(新城)으로 놀러가서 천천(穿川), 이화(梨花), 백천(柏川) 등의 명승을 돌아보고, 이듬해에는 소암(所庵) 이공 병원(李公秉遠)과 같이 전년에 갔던 곳을 다시 찾았다. 녹문 처사(鹿門處士) 이공 한중(李公漢中)은 세속 밖에 우뚝 서서 고결한 지조를 지킨 은자로, “산은 내 산이요 물은 내 물이니, 그 누가 고기 잡고 나무하기를 나와 다투리오.〔山吾山也水吾水也 誰爭我漁樵者〕”라고 하였으나, 오직 부군과는 산을 나누어 같이 은둔하자고 약속하였고, 이 때문에 이화동(梨花洞)에 오래 머물러 살았다.
무자년(1828)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향례(香禮)에 나갔고 이어 문회(文會)를 열고 〈경재잠(敬齋箴)〉, 〈숙야잠(夙夜箴)〉, 〈사물잠(四勿箴)〉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새로 내걸었다. 초암(草庵) 이공 태순(李公泰淳), 하계(霞溪), 소암(所庵), 수정(壽靜) 유정문(柳鼎文), 남애(南崖) 서간발(徐幹發)과 집안 조카 태중(泰重) 등 20여 인과 함께 소백산을 유람하였다. 때가 마침 4월이었으므로, 퇴계 선생의 지난날을 우러러 생각하여 시(詩)를 써서 읊은 것이 대부분 선생을 사모하는 내용이었다. 이듬해에는 하옹(霞翁)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유공 철조(柳公喆祚)가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있었다. 서로 악수하여 어색함을 떨어 버렸고, 유공이 시를 지어,
비 오다 바람 불다 절로 내 마음 서러운데 / 覆雨飜風我自悲
누가 백을 가리켜 모두 검다 할 수 있나 / 誰能指白黑皆爲
하니, 부군이 화답하여,
흑과 백은 원래 근본이 다르니 / 黑白從來元有定
이 마음 일찍이 웃어 본 적 없다오 / 此心曾不笑音爲
하였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사빈서원(泗濱書院)의 강회에 가서 임천서원(臨川書院)을 다시 세우자고 발의(發議)하였다. 선성(宣城 예안(禮安))으로 가는 도중에 소조(小朝)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예안현(禮安縣)으로 들어가서 곡반례(哭班禮)에 참석하였다. 7월에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는데, 한 번 사은숙배하고 곧바로 돌아왔다.
임진년(1832)에 거처의 남쪽 비탈에 따로 서실(書室)을 짓고, 동쪽 편에는 세한재(歲寒齋)라는 현판을 걸고 서쪽 편에는 역춘와(易春窩)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집 전체로는 종오헌(從吾軒)이라고 편액하였다. 집 아래에 연못을 파서 광영소(光影沼)라고 이름 지었으며, 연못가의 작은 폭포 가까이에 한 칸짜리 누대를 세워 여사루(如斯樓)라고 하고 폭포는 세심폭(洗心瀑)이라고 하였다. 창문 밖에 있는 큰 바위를 와운암(臥雲巖)이라고 하고, 그 앞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대(臺)를 쌓아 완월대(翫月臺)라고 이름을 지었다. 날마다 이곳에 거처하면서 생도들과 함께 차분히 강론하니, 이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
일찍이 구계서원(龜溪書院)의 강석(講席)에서 경전의 의심되는 뜻에 대해 수정(壽靜 유정문)과 쟁론하다가 수정이 끝에 가서 다시 완전히 부군에게 동의한 적이 있었다. 수정이 간간이 이 일을 가지고 “무서워라, 무서워. 오늘 독봉(毒鋒)이 또 나를 찌르는구나.”라고 농담하였으니, 이런 풍류 도의를 즐기는 유풍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또 일찍이 소암(所庵 이병원)과 함께 심(心)의 체(體)와 용(用)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각자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여 서로 굽히려 하지 않으니, 소암이 부군에게 우스개로 “자네는 거의 북방지강(北方之强)일세그려.”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군이 의리를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털끝만큼의 차이도 살피고,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게 되면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및 《주서차의(朱書箚疑)》 십수 권이 이때 비로소 완성되자, 처음 배우는 선비들에게 내보이면서 “이것은 나의 일생의 정력이 담긴 책이니, 제군들이 생각하고 분변하는 데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사년(1833, 순조33) 겨울에 본부(本府 안동부(安東府))의 유회(儒會)에서 돌아와 가벼운 병을 앓았다. 부군은 젊어서부터 몸이 야위고 병이 많아 양생(養生)의 방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줄곧 이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장수(長壽)와 요절(夭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히려 생도(生徒)를 가르치는 일에 스스로 힘을 기울였다.
갑오년(1834) 봄에 집에 불이 나서 경적(經籍)과 저서(著書)가 모두 타 버리자 병이 더 심해졌다. 친구에게 거듭 편지를 보내어 구구절절이 아직 도(道)를 깨치지 못함을 한탄하는가 하면, 집안 조카 해은(海隱) 필효(必孝)가 와서 영결하면서 “선생의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부군이 “천명을 즐겼으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樂夫天命復奚疑〕”라고 말하는데, 목 안의 말이 나지막하고 가늘어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운명하니, 4월 9일이었다. 다음 날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다. 이해 9월에 춘양(春陽)의 서면(西面) 칠전동(漆田洞)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하였고, 소암(所庵) 이공(李公)이 부군의 묘지(墓誌)를 썼다. 후에 손자 한규(漢奎)가 귀하게 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부군은 풍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강렬하며, 정신은 추수(秋水)처럼 맑고 도량은 상월(霜月)처럼 고결하였다. 어린 나이에 아름다운 글을 지어 사람들에게 ‘낙양재자(洛陽才子)’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부친 첨추(僉樞) 부군과 숙부 석곡(石谷) 부군이 엄하게 가르친 것은 바로 ‘고명(高明)한 자를 도리어 강함을 가지고 다스린다.’라고 하는 방법이었으니, 이 때문에 침식을 잊고 출입을 줄여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 당신의 지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석곡옹(石谷翁)에게 와서 옹이 지은 상수(象數)에 관한 글을 보여 달라고 청하자, 옹이 곧 비밀문서 상자에서 꺼내어 그 사람에게 주었다. 부군이 “이 글을 어찌하여 저에게는 보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남에게는 주십니까?”라고 하니, 옹이 말하기를 “너는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으니 정력이 흩어져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고, 저 사람은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만두니 자연히 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부군은 집이 본래 가난하여 거친 밥도 잇지 못하였지만, 늘 격앙된 의기를 가지고 “부자께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함께 큰일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만일 중유(仲由)처럼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내고 지조를 굳게 하였다. 또 세상의 크나큰 일을 모두 내 분수 안의 일로 생각하고, 새로 벼슬에 나아갈 때 이윤(伊尹) 희문(希文)의 기원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조(正祖)가 유학을 숭상할 때 부군의 이름이 어병(御屛)에 적혔는데, 어느 날 상이 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로 하여금 어떤 유신(儒臣)이 조정에서 떠나지 않게 만류해 주기를 바라자, 사재(四齋)의 유생들이 모두 명을 받들어 정성껏 상의 뜻에 따랐으나, 부군은 임금이 열람하는 시도기(時到記)에서 혼자 당신의 이름을 삭제해 버리고 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뜻을 뺏을 수는 없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부군이 처벌받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상이 끝내 죄를 묻지 않고, 그 뒤 성균관 유생이 차례로 진강할 때 상이 부군을 지목하여 “이 사람이, 유신이 조정에서 떠나지 않게 만류해 주지 않은 강운(姜橒)인가?”라고 물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임금의 돌봄을 받고 임금을 뵙기도 하였으나, 정작 오색구름으로 이름 불린 일 - 송나라 한기(韓琦)가 급제하였을 때, 태사(太史)가 “태양 아래 오색구름이 나타났다.”라고 아뢰었다. - 은 이 임금이 승하한 뒤였으니,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는 뜻이 이미 10중 8, 9나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국정을 주무르는 자들이 부군을 대우한 것이 고작 변변찮은 자리와 할 일 없는 품계였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직책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으니,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이런 처지가 되면 당연히 미련없이 떠났을 것인데, 부군이 어찌 지조를 버리고 남의 것을 탐할 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연(离筵)에서 받드는 일은 본시 충렬공(忠烈公) 집안의 세업(世業)이었으니, 만약 부군이 살아생전에 이 직임을 맡았더라면, 산림(山林)에서 학문을 강토(講討)한 경력이 오래되고 몸에 도(道)와 덕(德)을 쌓은 것이 풍부하였으므로, 비록 노년에라도 한번 출사하여 정성을 다해 일찍 깨우쳐 드리는 일을 실천하였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결국 부고가 전해지지 못한 화문 대제(華文待制)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유독 한 집안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횡거(橫渠) 선생은 늦게 이정(二程)을 만나 강석(講席)을 걷었고, 주 부자(朱夫子)는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연평(延平)의 강론을 듣고서 비로소 학문이 평실(平實)한 데로 나아갔다. 비록 큰 현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발단과 흥기의 계기가 있고나서야 그 진정한 문로(門路)에 나아갈 수 있었으니, 부군의 자질로 잠시 동학(同學)들과 교유하는 사이에, 마침내 위를 향한 학문에 전념하게 된 것 또한 횡거가 과감히 강석을 거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군이 잠깐 한 번 생각하여 자신을 반성한 때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밝게 변별하는 부군의 기본 바탕의 경우는 “선생이 살아 계셨기 때문이다.”라는 대답과 명덕(明德)을 풀이하는 말에 이미 드러났으니, 어찌 일찍이 집안의 평소 가르침 외에 따로 사승(師承)이 있어서였겠는가. 오직 이미 익숙한 책을 읽어 아직 익숙하지 못한 책으로 나아가고, 이미 알아낸 이치를 궁구하여 궁구하지 못한 이치로 나아갔던 것이다.
부군은 공자와 염계와 정자(程子)의 학문으로부터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학설에 이르기까지 탐색하고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고, 절충하고 이해하다가 때로 의심나는 데가 있으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터득하였으며, 때로는 붕우에게 물어 그 말에 옳은 점이 있으면 생각을 바꾸기를 마치 문을 여닫듯이 하였다. 만년에까지 흡족히 학문을 닦아 지행(知行)이 일치하였으며, 예전에는 엄정함이 모자랐으나 이때가 되어 장중하게 되었고, 예전에는 빠르게 드러내는 것이 지나쳤으나 이때가 되어 침착하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쉬고 있을 때에 보면 종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 항상 신명(神明)이 내려와 머무르는 듯하였고, 넓은 장소에 사람들이 빼곡할 때는 얼굴색은 장중하지만 사납지 않고 말은 간략하지만 함부로 하지 않아 비록 소원(疎遠)한 사람이라도 모두 공경하고 사모하였으니, 부군이 유도 군자(有道君子)였음을 알 수 있다.
천성으로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니, 임금을 모신 은혜가 위로 미치게 되어 촌초(寸草)로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였지만, 기일(忌日)이 되면 매양 살아 계실 때 극진히 모시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슬피 곡하는 소리가 가까운 동네에 진동하였다. 나라에서 선조에게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려 인(仁)을 행함을 아름답게 여겼으나 집이 가난하여 제사를 이을 수 없었으니,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것을 비통해하였다. 종사(宗嗣)로 여러 대를 내려와 가까운 친척이 극히 적었으나 늙어서까지 어버이가 살아 계셔서 항상 극진히 봉양하는 데 힘썼다. 골육의 친척 가운데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더욱 극진히 돌보아, 때맞추어 시집보내고 장가보내 할 일을 마련해 주니, 혼인으로 맺어진 벗들도 모두 부군의 실덕(實德)을 칭송하였다. 이씨 집안으로 출가한 손윗누이가 자신을 길러 준 고마움을 항상 마음에 간직한 채, 찾아뵙고 안부를 묻는 일을 늙어서까지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 자형(姊兄)을 친형처럼 부르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함께 다녔다.
풍채가 훤하고 은의(恩義)가 넉넉하였으며,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데 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고도 교화가 행하여졌다. 한번은 도둑이 칼을 휘두르며 포학한 짓을 하여, 그자를 결박하여 타이르고 경계하였는데, 그 후 신녕(新寧)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사람이 매우 공손하게 맞으면서 절을 하니, 이자가 바로 접때 칼을 휘두르던 도둑이었다. 이자가 말하기를 “못난 제가 그때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고서, 마음을 고쳐 보통 백성이 되고 장가까지 들었으니,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은덕을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무릇 다른 사람과 사귐에 있어서는, 뜻이 같고 의기가 합하는 사람 이외에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도 모두 부군을 좋아하였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농사에 대해 말하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장사에 대해 말하였으며, 음양(陰陽), 복서(卜筮), 의약(醫藥), 지리(地理)와 병가(兵家)에 대하여도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질문을 하면 곧바로 응답하였다. 배우는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정문(程文 과거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는 정문을 가르쳐 주고 내면의 공부를 물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내면의 공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것은 마치 치사재(治事齋)와 경의재(經義齋)를 따로 지었지만, 그것이 올바른 이치에 바탕을 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였던 것과 같았다.
손윗누이의 손자 이만억(李晩億)과 참판 이돈우(李敦禹)와 진사 김매수(金邁銖)가 부군의 문하에서 배우고 돌아가서 감탄하기를 “우리가 문하에서 3개월을 지냈는데, 문자만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내실(內室)과는 겨우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부인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부엌일하는 여종이나 나무하는 하인들까지도 크게 떠드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이 역시 가르침을 행하는 방법이었다. 원래 군자의 도는 부부가 집안에서 거처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일상의 모든 행동이 군자의 의칙(儀則)에 모두 부합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꽃을 찾는 즐거움과 시를 읊는 흥취에 있어서는 귀결되는 곳이 모두 천진(天津)과 형악(衡嶽)이었고, 강록(講錄)과 가시(歌詩)도 전하여져 유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였다. 부군은 일찍이 부암(傅巖), 반계(磻溪), 동강(東岡), 융중(隆中), 율리(栗里), 화산(華山), 백원산(百原山), 조래산(徂徠山)의 그림을 그려 협대(夾袋)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만년에 시골에서 학문에 전념하려는 뜻을 이룬 뒤에야 아들과 손자들에게 보여 주었으니, 대개 속세를 멀리 떠나 살려는 뜻이 원래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위로 벗 삼고자 했던 옛사람이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따금 좋은 벗들이 함께 와서 경전(經典) 강설이 막 끝나고 밝은 달이 떠오르면, 마음껏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천고 흥망의 자취와 충사(忠邪)의 분변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였는데, 훈훈하기가 춘풍과 같고 싸늘하기가 추상과 같았으며, 말이 긴 강물처럼 계속 이어져 그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긴급한 시국(時局)의 일에 이르러서는,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에 폐단이 생긴 까닭과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잘못된 연유에 대해 핵심을 꿰뚫고 밝게 분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국의 일에서 바꾸고 변통하는 방도가 마음에 준비되어 있었으니, 만일 부군을 등용하여 이 방도를 썼다면 주관(周官 《주례(周禮)》를 뜻함)의 다스림이 지금 세상에 거의 다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허락하지 않아 뜻을 지니고서도 이루지 못하여 자장(子張)이 정전(井田)의 제도를 시행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같이 되었으니, 이 어찌 유독 한 시대만의 불행이겠는가. 역시 천고의 뜻있는 선비가 유감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낙수(洛水) 북쪽에서 지난 백 년간,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한 선비가 모두 부군이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청빈하게 살면서도 남들이 열중하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일맥(一脈)의 양기(陽氣)를 붙들어 지켰으니, 여기에 인심(人心)을 맑게 하고 사풍(士風)을 바르게 한 부군의 공로가 참으로 원대하지 아니한가.
부군의 배(配)는 숙부인 진성 이씨(眞城李氏)로, 송재(松齋) 선생 휘 우(堣)의 후손인 처사 휘 중룡(重龍)의 따님이다. 영조 계사년(1773, 영조49)에 태어나 병술년(1826, 순조26) 6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은 아들 필응(必應)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하나인 딸은 대사성 이휘준(李彙濬)에게 출가하였으니, 이분은 바로 나의 선군(先君)이다.
이조 참판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규(漢奎)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음보되었고, 차남 하규(夏奎)는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참의를 지냈으며, 삼남 진규(晉奎)는 양자로 나갔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 참판을 지냈다. 장녀는 유치후(柳致厚)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명직(李明稷)에게 출가하였다. 나의 선군의 계실(繼室)이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만교(李晩嶠)는 통덕랑이고 차남 이만도(李晩燾)는 문과에 급제하고 현재 승지로 있으며, 삼남 이만규(李晩煃)는 문과에 급제하고 현재 교리로 있다. 딸은 진사 이일진(李一鎭)에게 출가하였다.
동지돈녕부사는 두 아들 위(鍏)와 진사 심(鐔)을 두었고, 이조 참의는 세 아들 수(鏽), 육(錥), 용(鎔)을 두었으며, 예조 참판은 두 아들 유(鍮)와 횡(鐄)을 두었다. 위(鍏)는 뒤를 잇는 아들 채(𣶶)를 두었다. 나머지는 다 적지 않는다.
오호라, 부군이 세상을 떠나고 9년 뒤에 불초한 내가 났으니,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인품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난번 동지돈녕부사 형의 상(喪)에 달려가 엎드려 곡하고, 조카 심과 함께 형이 지은 유사(遺事) 열 조목을 찾아냈으나 대개가 완성되지 않은 글이었다. 이에 부군에게 직접 가르침을 입은 사람으로는 오직 권공 연하(權公璉夏)가 계실 뿐이라 생각하여 여러 번 뵙고 행장을 부탁드렸더니, 나이를 이유로 사양하면서 부군의 행적 열한 가지를 써 주셨다. 그것을 받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금년에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거의 없어질 뻔하였다. 이러니 짧은 글과 조각난 기록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로 파묻혀 드러나지 못할까 겁이 났다. 이에 감히 위의 두 가지 기록을 근거로 차례를 정하고, 이력과 연기(年紀)에서 소략한 부분은 나의 조부 하계공(霞溪公)과 숙조 광뢰공(廣瀨公)의 일기 내용을 참고하여 보충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덧붙여 기록된 글들을 따와서 끼우고 보충하였다. 옛날 갈암(葛庵) 선생이 당신의 외조부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의 묘지명을 쓰면서 오직 선인(先人)에게서 들은 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았는데, 지난번에 나도 선인에게서 받은 것이 없지는 않으나 일을 엮고 말을 붙이는 일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선 유사(遺事)의 예에 따라 동지돈녕부사 형의 유지(遺志)를 마무리하였으니, 글 쓰는 이들이 혹 너그러이 채택하여 줄 것인가.
[주-D001] 강사(江史) : 송(宋)나라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요약하여 저술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주-D002] 공자께서 …… 썼겠습니까 : 안자가 공자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도를 전하는 글을 쓸 수 없었다는 의미이며, 《논어》 〈선진(先進)〉 제11장에 있는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子在 回何敢死〕”라는 말을 흉내 낸 것이다.[주-D003] 정허암(鄭虛庵) : 정희량(鄭希良, 1469~1502)으로,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2년(성종23)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였으나 왕에게 올린 상소 때문에 해주에 유배되었다. 1497년(연산군3)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왕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였다. 무오사화 때는 사초(史草) 문제로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하였다.[주-D004] 유공 범휴(柳公範休) : 유범휴(柳範休, 1744~1823)로, 자는 천서(天瑞), 호는 호곡(壺谷)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배운 학자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고성 군수(高城郡守)와 안변 부사(安邊府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반촌문답(泮村問答)》, 《사문간독(師門簡牘)》, 《호곡집》이 있다.[주-D005] 이공 가순(李公家淳) : 이가순(李家淳, 1768~1844)으로,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霞溪)이며,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1813년(순조13)의 증광시에 급제하였고, 1820년 당시에는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으로 있었다.[주-D006] 건릉(健陵)을 …… 바로잡았는데 : 건릉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의 능으로, 능호(陵號)는 1821년(순조21)에 정하였다. 원래 정조의 생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원소(園所)인 현륭원(顯隆園)의 동강(東岡)에 있던 것을 1821년 현재의 현륭원 서강(西岡)으로 이장하여 효의왕후를 부장(祔葬)하였다.[주-D007] 이공 야순(李公野淳) : 이야순(李野淳, 1755~1831)으로, 자는 건지(健之), 호는 광뢰(廣瀨),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이상정(李象靖)과 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전습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저서로는 《예설유편(禮說類編)》과 《광뢰선생문집》이 있다.[주-D008] 임자년의 청원(請願) : 임자년(1792, 정조16)에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연명으로 사도세자의 신원(伸冤)을 위하여 올린 상소를 말한다. 만인소(萬人疏)라고도 불린다.[주-D009] 퇴계 선생의 …… 생각하여 :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있던 1549년(명종4) 4월에 소백산을 유람한 일을 떠올린 것이다. 《退溪集 卷41 遊小白山錄》[주-D010] 소조(小朝) : 섭정하고 있는 왕세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순조의 아들로서 당시에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세자(孝明世子)를 말한다.[주-D011] 북방지강(北方之强)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袵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章句 第10章》[주-D012] 해은(海隱) 필효(必孝) : 강필효(姜必孝, 1764~1848)로,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이다.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쓴 학자로, 1803년(순조3)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저서로는 《해은유고(海隱遺稿)》가 있다.[주-D013] 손자 한규(漢奎) : 강한규(姜漢奎, 1810~1892)로, 자는 한오(漢伍), 호는 현파(玄坡)이다. 1864년(고종1)에 학행으로 덕망이 있는 선비를 찾아 기용할 때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고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주-D014] 고명(高明)한 …… 다스린다 : 《서경》 〈홍범(洪範)〉에 “침잠한 자는 강함을 가지고 다스리며, 고명한 자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다스린다.〔沈潛剛克 高明柔克〕”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방법을 바꿔서 적용한 것을 말한다.[주-D015] 이윤(伊尹) 희문(希文)의 기원 : 이윤이 탕왕(湯王)의 초빙을 세 번 받고 출사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포부를 펴겠다고 맹세한 말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주-D016] 시도기(時到記) : 도기(到記)는 성균관 유생들이 출석하여 끼니 때 식당에 들어온 횟수를 적는 장부이며, 시도기는 그날 현재의 도기를 말한다.[주-D017] 오색구름으로 …… 일 : 과거에 급제한 일을 말한다.[주-D018] 이연(离筵)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서연(書筵)을 가리킨다.[주-D019] 부고가 …… 화문 대제(華文待制) : 화문 대제는 남송의 주희(朱熹)를 지칭한 말인 듯하다. 주희는 65세 때인 영종(寧宗) 즉위년(1194)에 환장각대제 겸 시강(煥章閣待制兼侍講)에 임명되었으나, 입조(入朝)한 지 겨우 46일 만에 물러나 시강(侍講)의 직책을 실제로 수행해 보지 못하였다. 환장각은 남송에서 한때 화문각(華文閣)으로 불렸으므로 화문 대제라고 한 것 같다. 강운(姜橒)이 1834년(순조34) 4월 9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조정에서 공의 부고를 듣지 못하여, 죽은 다음 날에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한 일을 말한 것이다.[주-D020] 횡거(橫渠) …… 걷었고 : 송(宋)나라의 유학자 장재(張載)가 《주역》을 강(講)할 때 호피(虎皮)를 깔고 앉아 강했는데, 정자(程子) 형제가 찾아와 함께 《주역》을 논한 후 다음 날로 호피를 걷어치우고 제자들에게 “이정(二程)이 《주역》에 워낙 밝아서 내가 따를 수 없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 고사를 말한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6의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에 “과감히 강석을 거두고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렀다.〔勇撤皐比 一變至道〕”라는 구절이 있다. 횡거는 장재의 호이다.[주-D021] 주 부자(朱夫子)는 …… 나아갔다 : 주희(朱熹)는 젊어서 동안현(同安縣)의 주부로 있었는데, “그때 밤중에 산사의 종소리를 듣고,……전심치지(專心致志)로 학문을 해야 함을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104 自論爲學工夫》 또 연평(延平) 선생 이동(李侗)에게 나아가 수학하고서, 뒤에 스스로 “이 선생을 뵌 뒤로부터 평실(平實)한 학문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12 朱熹》[주-D022] 한 번 …… 때 : 신미년(1811, 순조11) 고산서원(高山書院)의 강회에 참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던 때를 말한다.[주-D023] 임금을 …… 되어 : 강운(姜橒)의 손자 강한규(姜漢奎)가 높은 벼슬에 오름으로써 강운의 부모가 첨지중추부사와 숙부인에 추증된 일을 가리킨다.[주-D024] 촌초(寸草)로서 …… 보답하였지만 :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가 지은 〈유자음(游子吟)〉의 “한 치의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을 가지고서, 봄날의 햇볕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주-D025] 치사재(治事齋)와 …… 것 : 송나라의 학자 호원(胡瑗)이 호주(湖州)에서 교수로 있을 때, 치사재와 경의재(經義齋)를 따로 설치하고 과목을 구분하여 각자의 재주와 능력에 맞게 교육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宋史 卷432 儒林列傳 胡瑗》[주-D026] 천진(天津)과 형악(衡嶽) : 소옹(邵雍)과 주희(朱熹)의 기상과 충절을 말하는 듯하다. 천진은 중국 낙양(洛陽)에 있는 천진교(天津橋)를 말한다. 소옹이 이 근처에서 살았으며, 천진교 위에서 두견의 소리를 듣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邵氏聞見前錄 卷19》 형악은 중국의 남악(南嶽)인 형산(衡山)으로, 주희가 벗인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함께 형산을 유람하면서 여러 수의 시를 지었다. 《晦庵集 卷5》[주-D027] 부암(傅巖) …… 조래산(徂徠山) : 모두 중국의 위인들이 은거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장소들이다. 부암은 부열(傅說), 반계는 강태공, 동강은 주섭(周燮), 융중은 제갈량, 율리는 도잠, 백원산은 소옹(邵雍), 화산은 진박(陳搏), 조래산은 이백(李白)이 은거한 곳이다.[주-D028] 정전(井田)의 제도 : 주(周)나라 때 시행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토지 제도이다. 사방 900묘(畝)를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가운데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삼고 그 나머지 800묘는 여덟 가구가 나누어 경작하되 공전은 공동으로 관리하여 거기서 나오는 것을 나라에 바치는 제도인데, 그 모양이 정(井) 자와 같기 때문에 정전이라고 한 것이다. 《周禮 冬官考工記 匠人》[주-D029] 낙수(洛水) 북쪽 : 낙동강이 동서로 흐르는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그 북쪽의 봉화, 영주, 문경 등의 지역을 가리킨다.[주-D030] 나의 선군의 계실(繼室) : 이만도의 부친 이휘준의 후취(後娶) 야성 송씨(冶城宋氏)는 통정대부 송재헌(宋在憲)의 딸이며 이만도의 생모이다. 이휘준의 초취(初娶) 진주 강씨는 강운(姜橒)의 딸이며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주-D031]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 : 김해(金垓, 1555~1593)로, 자는 달원(達遠),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남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다.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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