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집 제29권 / 전(傳) / 명배신전3〔明陪臣傳三〕
채득기〔蔡得沂〕
자(字)는 영이(詠而)이고 조선 사람이다. 고조(高祖) 수(壽)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채득기는 학문을 좋아하고 어진 행실이 있었다. 숭정(崇禎) 연간에 상주(尙州) 무지산(無知山)에 물러나 살면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왕조에서 불러 빙고 별좌(氷庫別坐)를 제수하였으나 고사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앞서 효묘(孝廟)가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더불어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조정에서 충신(忠信)한 선비를 구하여 가서 왕자들을 호위하도록 하였는데, 득기가 백의(白衣)로 선발 중에 들었다. 그러나 인묘(仁廟)가 하교하여 간곡하게 불렀는데도 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죄에 걸려 보은현(報恩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비로소 석방되었다. 관찰사가 빨리 가기를 재촉하여도 득기는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였으나 왕이 권면하고 타이르면서 꼭 가주기를 명하자 감격하여 그날로 길에 올랐다. 심양에 도달하니 효묘가 매우 기뻐하며 날마다 서로 시를 짓고 창수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이때에 청인이 관문에 들어와 경사를 포위하니 해내(海內)가 마침내 진동하였다. 효묘가 발분하여 유주(幽州)를 깨끗이 쓸어내어 명나라 황실을 붙들어 세울 뜻을 가졌는데, 득기가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복수할 계획을 세우니 효묘가 크게 기뻐하였다.
한번은 효묘의 사냥길에 따라가 여계부(女奚部)에 이르러, 한길 남짓한 얼음을 캐고 그 물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효묘가 득기와 함께 하면서 득기를 위하여 비단 갖옷을 벗어 하사하였으니 은우(恩遇)가 매우 융성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이 옛 검객을 생각하는 시를 지었는데 득기가 화답시를 올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소강(小康)은 일려(一旅)의 병력으로도 대우(大禹)의 공적을 능히 회복시켰고 광무제(光武帝)는 한 척의 땅도 없이 고조(高祖)의 왕업(王業)을 넓힐 수 있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뜻을 세운 것이 견고해서였습니다. 진(晉)의 원제(元帝)와 송(宋)의 고종(高宗)은 천하의 많은 사람으로도 중국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뜻을 세운 것이 견고하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치밀하지 못하면 해가 생기는 법, 연(燕)나라 태자 단(丹)은 하루아침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오랑캐의 세력이 융성해지고 있으니 어찌 일개 검객이 도모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마땅히 뜻을 가다듬어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소현세자가 칭선(稱善)하였다.
왕자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 득기도 따라 돌아왔다. 효묘가 득기에게
“그대의 재주와 지혜는 장자방(張子房)이나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도 여기서 더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조정에 청하여 벼슬을 주려 하였다. 득기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이필(李泌)은 제왕의 벗이 되고도 벼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만일 버리지 않으신다면 그저 유악(帷幄)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라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우담(雩潭)이 상주(尙州) 낙동강 가 옥주봉(玉柱峰)의 아래에 있어 강과 산 암석의 경치가 절승한지라 득기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효묘는 손수 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또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그가 있는 곳의 산수를 그려 올리게 하였으며 도성으로 들어오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득기는 또 감히 공자(公子)를 사적으로 사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효묘는 이로 말미암아 그의 뜻을 알고 억지로 부르지 않았다. 2년 뒤에 득기가 세상을 뜨니 나이 43세였다. 효묘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득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위해 애도하였다.
득기는 박학하여 천문(天文)부터 복서(卜筮)와 병법서에 이르기까지 탁월하게 이해하지 못함이 없었다. 영아아대(英俄兒代)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을 때도 득기는 밤 하늘에 나타난 현상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주상께서 필시 성을 내려오실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주-D082] 채득기(蔡得沂) : 1605~1646.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ㆍ학정(鶴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역학ㆍ천문ㆍ지리ㆍ의학ㆍ복서ㆍ음률ㆍ병진 등 백가에 밝았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상주 자천대에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ㆍ봉림대군이이 청의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을 때 심양으로 불려가 왕자들을 모셨고, 봉림대군과 함께 귀국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낙동강 유역 옥주봉 아래에 은거하며 지냈다. 저서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ㆍ《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이 있다.[주-D083] 고조(高祖) 수(壽) : 채수(蔡壽,1449~1515)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부수찬(副修撰)으로 《세조실록》ㆍ《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475년(성종6)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하였다.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고,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가 1485년(성종16) 서용되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ㆍ호조 참판을 지냈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 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함창(咸昌)에 은거하여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 《난재집(懶齋集)》이 있다.[주-D084] 소현세자가 …… 지었는데 : 성해응(成海應)은 검객시를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 심양에 있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어 고증이 필요하다. 《硏經齋全集 卷33 風泉錄三 題遼陽射獵記後》[주-D085] 소강(小康)은 …… 회복시켰고 : 소강은 하우(夏禹)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이다. 요(澆)가 제상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우의 왕통이 끊어진 지 40년이 되었을 적에, 소강이 사방 십 리 되는 땅[一成]과 5백 명[一旅]의 병력으로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한 뒤에 하나라 역대 왕을 종묘에서 제사 지내며 천명으로 왕이 되었음을 밝혔다.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史記 卷31 吳太伯世家》[주-D086] 광무제(光武帝)는 …… 있었으니 : 광무제는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로,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고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꽃을 피운 임금이다. “백수(白水)에서 위무를 떨치고 일어나 해내에 한 치의 땅에 의지함도 없이 천명을 받은[白水奮威武海內, 無尺土所因, 一位所乘, 直奉天命]” 임금으로 일컬어진다. 《論衡 卷19》[주-D087] 진(晉)의 …… 고종(高宗) : 난리를 피해 남도(南渡) 혹은 남천(南遷)한 임금이다. 서진(西晉) 말년에 진 원제(晉元帝)가 장강(長江)을 건너 건업(建業) 즉 남경(南京)에 도읍을 옮겼고, 북송(北宋) 말년에 송 고종(宋高宗)이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임안(臨安) 즉 항주(杭州)에 도읍을 옮겼다.[주-D088] 하루아침의 분함 : 《논어》 〈안연(顔淵)〉에 “하루아침의 분함 때문에 자신의 몸을 잊어버린 나머지 그 화가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한다면,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89] 연(燕)나라 …… 하였습니다 : 연나라의 태자인 단은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고초를 겪다가 간신히 연나라로 돌아온 뒤에 형가(荊軻)를 보내서 진 시황(秦始皇)을 척살(刺殺)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진 시황이 노(怒)하여 연나라를 멸망시켰고, 단은 태자하(太子河)로 도망쳤다가 죽었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주-D090] 장자방(張子房)이나 제갈공명(諸葛孔明) : 장자방(張子房)은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책사(策士)이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책사이다.[주-D091] 이필(李泌)은 …… 않았습니다 : 이필(李泌)은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덕종(德宗) 때의 신하로 자는 장원(長源), 시호는 현화(玄和), 봉호는 업후(鄴侯)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 있고 민첩하기로 이름이 나 현종이 태자 숙종에게 포의교(布衣交)를 맺고 선생이라 부르게 하였다. 즉위 후 능력 있는 인재의 보좌가 필요했던 숙종이 은거하고 있던 이필을 불렀고, 숙종의 부름에 응한 이필은 젊었을 때처럼 손을 잡고 궁을 드나들며 숙종과 이마를 맞대고 조정의 대소사를 의논하였다. 숙종은 이필을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필이 고사하여 총참모장직에 해당하는 원수부의 행군장사(行軍長史)로 임명, 안녹산의 난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에 숙종이 이필을 장안으로 불러들였으나 이필은 굳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형산(衡山)에 작은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주-D092] 우담(雩潭) : 채득기가 머물던 공간이면서 그의 호이다.[주-D093] 영아아대(英俄兒代) :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말한다. 1636년(인조14) 2월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청나라 황제의 존호를 쓰고 군사의 의(義)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도망하여 돌아갔으며, 그 해 12월에 마부대(馬富大)와 함께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