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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 제1조 제사(祭祀)
혹시 고을에 음사(淫祀)하는 잘못된 관례가 전해 오는 것이 있으면 사민(士民)들을 깨우쳐 철훼(撤毁)하기를 도모할 것이다.
율곡(栗谷)은 초제(醮祭)에 쓰는 청사(靑詞)의 저술(著述)을 사절하였고, 약포(藥圃)는 무당의 기도에 쓰는 향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니, 군자의 행동이 구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분명히 음사(淫祠)에 해당되는 사묘(祠廟)라면 아무리 전해 오는 관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답습(踏襲)해서는 안 된다.
고소(顧邵)가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어 음사(淫祀)를 금하고 여러 묘(廟)를 철훼하였다. 여산묘(廬山廟)를 헐 적에는 온 군민(郡民)이 헐지 말기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헐어버렸다. 그날 밤에 어떤 사람이 고소의 앞을 지나가는데 모양이 마치 방상씨(方相氏) 같으니 이가 바로 여산군(廬山君)이었다. 고소는 그를 방으로 들어오도록 청하여 자리에 앉히고서 그와 《춘추(春秋)》를 담론하는데 등불이 다 타서 꺼져버렸다. 그런데도 담론을 중단하지 않고 《좌전(左傳)》을 계속 강론하였다. 귀신이 고소를 업신여기려 하였으나 고소의 신기(神氣)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였으므로 귀신이 도리어 공손한 태도를 지으며 사당을 다시 세워 주기를 요구하였으나 고소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강남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었을 적에 오초(吳楚) 지방에 음사가 많으므로 적인걸이 1700곳의 사당을 헐고 하우(夏禹)와 오태백(吳泰伯)과 계찰(季札)과 오원(伍員)의 사당만을 남겨 두었다.
유자후(柳子厚)의 〈훼비주상사기(毁鼻州象祠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비정(鼻亭)은 상(象)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하동(河東)ㆍ설공(薛公)이 이 고을에 부임해 와서 백성들의 풍속을 살피고 지도를 펴보다가 이 사당이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상이 아들로서는 오만하고 아우로서는 형을 해친 악덕(惡德)의 인간인데 대대로 제사를 오붓이 받아 먹게 하는 것은 우리 백성을 교화하는 뜻이 아니다.’ 하고 명을 내려 그 사당을 빨리 헐어버리고 그 신주(神主)는 강물에 던지게 하니 주민(州民)들이 기뻐 노래하기를,
누가 음혼(淫昏)을 좋아하여 / 孰羡淫昏
우리들을 눈멀게 하였는가 / 俾我斯瞽
천 년의 어두움을 / 千載之冥
공(公)이 밝혀 주셨네 / 公闢其戶
하였다.”
왕질(王質)이 채주(蔡州)를 다스렸는데 채에는 예부터 오원제(吳元濟)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왕질은,
“어찌 역적의 무리가 사당에서 제사를 받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적양공(狄梁公)ㆍ이태위(李太尉)는 은덕이 채주 사람들에게 입혀졌는데 어찌 사당을 지어 모시지 않는가.”
하고, 오원제의 사당을 헐어버리고 적양공ㆍ이태위 두 분의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정향(程珦)이 공주(龔州)를 다스릴 때 의료(宜獠) 구희범(區希範)이 이미 주살(誅殺)당한 뒤였다. 고을 사람들은,
“구희범의 신이 나타나, ‘나를 위하여 남해(南海)에 사당을 세우라.’ 하더라.”
라고 전하며, 그 귀신을 맞아 남해로 가는 길에 공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정향이 사람을 시켜 힐문(詰問)하게 하였더니, 그 귀신을 모시고 가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심(潯)을 지날 적에 심의 태수(太守)가 요괴(妖怪)라 하며 사구(祠具)를 강물에 던지니 그 사구가 떠내려 가지 않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므로 태수가 겁이 나서 다시 예를 드린 일이 있었다.”
하였다. 정향이 사람을 시켜 다시 그 사구를 강물에 던지게 하니 그대로 떠내려갔으므로 드디어 그 요망(妖妄)의 소동이 잠잠해졌다.
진희량(陳希亮)이 우도(雩都)를 다스렸는데 무당들이 해마다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그 제사를 일러 ‘춘재(春齋)’라 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화재(火災)가 있다 하니 백성들도,
“붉은 옷을 입은 세 노인이 다니면서 불을 놓는다.”
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진희량이 이를 금하니 백성들이 감히 춘재를 지내지 않았으나, 화재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음사(淫祠) 수백 군데를 헐어버리고 무당들을 억압하여 농민이 되도록 한 것이 70여 호(戶)나 되었다.
유귀년(劉龜年)이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 초(楚)의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였다. 반선옹(潘仙翁)이란 신을 모시는 음사(淫祠)가 있었는데 명절 때면 사람들이 모여 징ㆍ장구를 울리고 창을 들고서 반선옹의 신을 맞아 제사 지냈다. 유귀년은 위(尉) 두사안(杜師顏)에게 명하여 그 음사를 헐고 신상(神像)을 깨뜨리고 그 무기를 거둬 들이고 그 음사의 일에 앞장선 자를 죄주게 하였다.
오리(吳履)가 남강(南康)의 승(丞)이 되었을 적에 고을에 음사가 하나 있었다. 제사 지낼 때이면 번번이 음사의 문에서 뱀이 나오니 백성들은 이 뱀을 신으로 여겼다. 오리가 무당을 묶어다가 꾸짖고 그 신상을 강물에 던지니, 마침내 음사가 없어졌다.
고려(高麗) 때 우탁(禹倬)이 영해부(寧海府)의 사록(司錄)이 되었을 적에 백성들이 팔령신(八鈴神)에 고혹되어 매우 자주 제사를 지냈다. 우탁이 부임하는 즉시 위판(位版)을 부수어 바닷물에 던지니 마침내 음사가 없어졌다.
고려 때 김연수(金延壽)가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되어 맑고 대범한 정사를 하였다. 과거에 군민들이 목우인(木偶人)을 신이라 하여 매년 5ㆍ6월 사이에 그 목우인을 객헌(客軒)에 모셔 놓고 온 고을 사람이 다 모여 큰 제사를 지냈는데, 그 흘러온 폐단이 매우 오래였다. 김연수가 부임한 즉시 무당과 그 일에 앞장선 자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그 목우인을 태워버리니 마침내 그 요망스러운 제사가 없어졌다.
황우(黃瑀)가 영춘 현감(永春縣監)이 되었을 적에, 승(丞)의 딸이 병으로 누웠는데 마치 무엇이 붙은 듯하였다. 무당이 말하기를,
“옛 나졸(邏卒) 아무개가 죽어서 서낭신〔城隍神〕의 부림을 받는데 이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황우는 노하여 말하기를,
“이 나졸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느냐.”
하고, 서낭신의 우상에 곤장을 쳐서 냇물에 흘려보내니 딸의 병이 바로 나았다.
홍윤성(洪允成)이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을 때, 성황사(城隍祠)의 신에 백성이 미혹되자 홍윤성이 그 성황사를 태워버렸다.
정언황(丁彥璜)이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안동에서는 고려 때부터 신라공주 오금잠신(新羅公主烏金簪神)을 받드는데 그 신이 매우 영험하고 괴이한 일이 많아 사람들이 공경하여 믿었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이 안동 부사로 있을 적에 그 사당을 태워버렸으나 그 뒤에 이민(吏民)들이 다시 사당을 세우고 매년 단오절(端午節)이 되면 무당과 광대 수십 명이 그 신을 모시고 관리가 그 뒤를 따르며 온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이것을 일러 단오사(端午使)라 하였다. 백성들은 뒤질세라 이 행렬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파산(破產)ㆍ실업(失業)을 하고서도 후회할 줄을 몰랐다.
안동을 거쳐간 많은 부사(府使)들이 능히 금하지 못했던 것을 정언황이 유림(儒林)들을 모아 놓고 그 괴상한 복장을 태워버리니 그 요사한 짓거리가 마침내 없어졌다.
이형상(李衡祥)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는데, 제주에는 광양당(廣壤堂)이란 것이 있어 이 고장 백성들이 여기에 기도하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이형상이 그 사당을 태워버리라 명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기며,
“옛날에 김치(金緻)가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가 되었을 때 태백산 신사(太白山神祠)를 헐어버린 일에 견줄 만하다.”
라고 하였다.
이정악(李挺岳)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연안에는 본래부터 묵은 폐단이 많았다. 이정악이 부임하는 즉시 모두를 혁거(革去)하니 며칠이 안 되어 폐단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곳에는 예부터 기도하는 백성들이 모여 날마다 재물을 허비하는 음사(淫祠)가 있었는데 이정악은 즉시 이 음사를 헐어버리게 하고,
“저 음사의 신이 빌미가 될 수 있다면 으레 내 몸에 가해질 것이다.”
하니, 백성들이 크게 깨닫고 서로 이르기를,
“전에는 우리가 미혹하여 알지 못했었다.”
하였다.
《상산록(象山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가경(嘉慶) 기미년(己未年) 봄에 칙서(勅書)를 맞는 일로 내가 평산부(平山府)에 있을 적에 한가한 날에 풍천수(豐川守) 이민수(李民秀)ㆍ장연수(長淵守) 구강(具絳) 등과 함께 태백산성(太白山城)을 유람하였는데, 성 안에는 삼태사(三太師)의 사당이 있으므로 함께 배알(拜謁)하기로 언약하였다. 삼태사란 태사(太師) 신숭겸(申崇謙)ㆍ태사(太師) 복지겸(卜智謙)ㆍ태사 유검필(庾黔弼)이다. 사당 문을 열고 보니 철상(鐵像)이 세 구(軀) 있는데 모두 천박하여 참모습이 아니었고 또 그 사이에 여자의 소상(塑像) 두 구가 있는데 노란 저고리 붉은 치마에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입술은 붉은 칠을 한 것이 요괴(妖怪)스럽고 바르지 못하였다. 이민수가 말하기를, ‘이런 곳에 어떻게 절을 할 수 있느냐.’ 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나왔다.”
[주-D001] 음사(淫祀) : 부정(不正)한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주-D002] 초제(醮祭) : 삼청성신(三淸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로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과 재동제군(梓童諸君)ㆍ칠성제숙(七星諸宿)ㆍ사해용왕(四海龍王)ㆍ명부시왕(冥府十王)ㆍ수부제신(水府諸神) 등 도교(道敎)의 모든 신을 구상화(具象化)하여 삼청전(三淸殿)과 태일전(太一殿)에 모시고 소격서(昭格署)에서 그 제사를 주관하였다.[주-D003] 청사(靑詞) : 도교(道敎)에서 기도할 때 쓰는 축문(祝文)을 말한다. 푸른 종이에 붉은 글씨로 썼기 때문에 청사라 한다.[주-D004] 약포(藥圃) : 선조(宣祖) 때 상신(相臣) 정탁(鄭琢)의 호이다.[주-D005] 고소(顧邵) : 삼국(三國) 때 오(吳)나라 사람이다. 번역 대본에는 소(劭)로 되어 있으나 《삼국지(三國志)》에 의거하여 소(邵)로 고쳤다.[주-D006] 방상씨(方相氏) : 역귀(疫鬼)를 쫓는 행사 때 구역신(驅疫神)으로 분장한 사람인데, 곰의 가죽을 들씌운 큰 탈에 붉은 저고리ㆍ검은 치마를 입고, 금빛의 눈이 2~4개이고 창과 방패를 들었다. 《주례(周禮)》에는 금빛의 사목(四目)을 방상이라 하고 이목(二目)을 기(倛)라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방상이라 하였다. 단, 품계가 높은 사람만이 사목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광중(壙中)의 악귀(惡鬼)를 쫓는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장례(葬禮) 이외에도 연말(年末) 연시(年始) 궁중 행사와 임금 행행(幸行), 또는 중국 사신을 맞을 때에 악귀를 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주-D007] 적인걸(狄仁傑) : 당(唐)나라 때 사람이며 자는 회영(懷英)이다. 하남순무(河南巡撫)와 예주 자사(豫州刺使)로 있을 때 묵은 송사를 처결하고 음사(淫祠)를 훼철하는 등 많은 치적을 세웠으며,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끊어질 뻔하였던 당의 황통(皇統)을 지속시키는 데 큰 공이 있었다. 그 뒤 당 예종(唐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追封)되었다.[주-D008] 오태백(吳泰伯) :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로서 아버지 태왕의 뜻이 막내아우 계력(季歷)에게 있음을 알고, 세자(世子)의 자리를 버리고서 둘째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 지방으로 도망갔다. 뒤에 오(吳)의 시조가 되었다.[주-D009] 계찰(季札) : 춘추(春秋)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막내아들로서 현덕(賢德)이 있어, 수몽이 왕위를 전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주-D010] 오원(伍員) : 춘추 때 초(楚)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서(子胥)이다. 그의 부형(父兄)이 초 평왕(楚平王)에게 살해되자 오(吳)로 망명하여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도와 초(楚)를 쳐서 부형의 원수를 갚았다. 뒤에 간신의 참소로 사사(賜死)되었다.[주-D011] 훼비주상사기(毀鼻州象祠記) : 《유종원집(柳宗元集)》 28권에 보이는 〈도주훼비정기(道州毁鼻亭記)〉를 말한다.[주-D012] 상(象) : 순(舜)의 이복(異腹) 동생으로 사람됨이 사나워 항상 형인 순을 죽이려고 하였다.[주-D013] 설공(薛公) : 설존의(薛存義)를 가리킨다.[주-D014] 오원제(吳元濟) : 당 헌종(唐憲宗) 때 채주(蔡州)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역신(逆臣)이다.[주-D015] 이태위(李太尉) : 오원제의 난을 평정시킨 이소(李愬)를 말한다. 태위는 그의 관직명이다.[주-D016] 의료(宜獠) : 미상이다.[주-D017] 유귀년(劉龜年) : 송(宋)나라 때 사람이며 자는 차로(且老)이다.[주-D018] 반선옹(潘仙翁) : 미상이다.[주-D019] 위(尉) : 병사(兵事)와 형옥(刑獄)을 맡은 관직으로 큰 현(縣)에 두 사람의 위가 있다.[주-D020] 오리(吳履) : 명(明)나라 때 사람이며 자는 덕기(德基)이다.[주-D021] 우탁(禹倬) : 고려(高麗) 때 학자로 자는 천장(天章), 호는 역동(易東)이다.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였고,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들어올 때 문을 닫고 연구에 몰두했다.[주-D022] 사록(司錄) : 고려 시대 지방 관아에 있던 관직이다. 고려 때에는 관인(官人)들에게 지방 행정의 수련을 쌓도록 하기 위하여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사록에 차임(差任)하였다.[주-D023] 팔령신(八鈴神) : 여말(麗末)에 영해(寧海)와 영양(英陽) 경계에 위치한 울령(蔚嶺)에 있었다는 신(神)을 말한다. 영해에 부임(赴任)하는 신관(新官)이 이 고개를 지날 때 방울소리를 들으면 부임하는 날 밤에 즉사한다고 한다. 우탁이 이 고을에 부임할 적에 방울 소리가 들리므로 그 유래를 묻고서 팔신(八神)을 불러 꾸짖고 그중 오신(五神)은 쫓아버렸다 한다. 나머지 삼신(三神)은 영덕(盈德) 병곡면(柄谷面) 유금(有金)과 영해면 읍내(邑內)와 영해면 괴시(槐市)의 성황(城隍)이 되었다 한다. 《東海岸地區 學術調査報告書, 成均館大學校》[주-D024] 김연수(金延壽)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장군으로 수차에 걸쳐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주-D025] 홍윤성(洪允成) :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하고 세조(世祖)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하였으므로 뒤에 세조조(世祖朝)의 공신이 되었다.[주-D026] 신라공주 오금잠신(新羅公主烏金簪神) : 여기에는 안동(安東)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문헌을 상고하건대 삼척(三陟)에 있었던 토속신앙인 오금잠제(烏金簪祭)인 듯하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 사람들이 비녀〔簪〕를 작은 상자에 담아 읍 동쪽에 있는 나무 밑에 간직하였다가 단오(端午)날이 되면 그 비녀를 내어 놓고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드린다. 제사가 끝난 다음 날 이 비녀를 다시 상자에 담아 도로 옛 장소에 간직한다. 전하는 말에는 고려 태조 때 물건이라 하나, 그 제사 지내는 이유는 알 수 없다 한다. 예부터 전해 오는 일이라서 관에서도 금하지 않는다 한다.[주-D027] 김효원(金孝元) :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이다. 벼슬은 부사(府使)이며,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동인(東人)의 거두(巨頭)이다.[주-D028] 이형상(李衡祥) : 조선 중기 때 학자이다.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瓶窩)이다.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주-D029] 광양당(廣壤堂) : 제주 남쪽에 있는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이다.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神)이 되었는데, 고려 때 송(宋)나라 호종조(胡宗朝)가 와서 이곳 제주를 치고 돌아갈 때 신이 매로 변하여 호종조의 배 돛대 위에 앉자,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조의 배가 파선(破船)되어 서쪽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 침몰하였다 한다. 조정에서는 그 영이(靈異)함을 포상(褒賞)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에 봉했다 한다. 《東國輿地勝覽 濟州牧 祠廟》[주-D030] 김치(金緻) : 조선 중기 때 사람이다. 자는 사정(士精), 호는 심곡(深谷) 또는 남봉(南峯)이다.[주-D031] 태백산 신사(太白山神祠) : 강원도와 경상도 접경에 위치한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사(神祠)로 일명(一名) 천왕당(天王堂)이라고도 한다. 강원도와 경상도의 인근 주민들이 춘추로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 드리는 의식은 신사(神祠) 앞에 소를 매어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하산(下山)한다. 만약 뒤를 돌아보면 신이 불공(不恭)하다 하여 죄를 준다는 것이다. 3일 후에 부(府)에서 그 소를 거두어 오는데, 이 소를 퇴우(退牛)라 한다. 《東國輿地勝覽 三陟都護府 祠廟》[주-D032] 이정악(李挺岳) : 조선 현종(顯宗) 때 사람이다. 자는 수이(秀而), 호는 아은(啞隱)이다.[주-D033] 태백산성(太白山城) : 황해도 평산(平山)에 있는 산성을 말한다. 신라 경덕왕(敬德王) 21년에 쌓았는데, 뒤에 성황산성(城隍山城)이라 개칭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平山都護府 古跡》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6
其或邑有淫祀。謬例相傳者。宜曉諭士民。以圖撤毀。
栗谷辭醮靑之詞。藥圃拒巫禱之香。君子之行。不可苟也。若有祠廟。明係淫祠者。雖有舊例。不可蹈也。
顧劭爲豫章太守。禁淫祀。毀諸廟。至廬山廟。一郡悉諫不從。夜有人經前。狀若方相云。是廬山君。劭要之入座。與談春秋。燈盡燒。左傳以續之。鬼欲凌劭。劭神氣湛然。鬼反和遜。求復廟。劭笑而不答。
唐狄仁傑爲江南巡撫使。吳楚多淫祠。仁傑毀千七百房。止留夏禹吳太伯季札伍員四祠。
柳子厚毀鼻州象祠記。鼻亭祀象神。河東薛公至。考民風披地圖。得是書。駭曰。象以爲子則傲。以爲弟則賊。以惡德而專世祀。殆非化吾民之意。命亟撤之。沈其主於江。州民歌曰。孰羨淫昏。俾我斯瞽。千載之冥。公闢其戶。
王質知蔡州。蔡俗舊祠吳元濟。公曰。豈有逆醜而廟食耶。狄梁公,李太尉。德加蔡人。胡不爲祠。命撤元濟祠。建二公祠。
程珦知龔州時。宜獠區希範旣誅。鄕人忽傳其神降言。當爲我南海立祠。於是。迎其神以往。至龔。珦使詰之。曰比過潯。潯守以爲妖。投祠具江中。逆流而上。守懼乃更致禮。珦使復投之。順流去。其妄乃息。
陳希亮爲雩都守。巫覡歲斂民財祭鬼。謂之春齋。否則有火災。民訛言有裶衣三老人行火。公禁之。民不敢犯。火亦不作。毀淫祠數百區。勒巫爲農者。七十餘家。
劉龜年知武陵。楚俗右鬼。其淫祠曰潘仙翁者。歲時集會。摐金鼓。執戈矛。迎而祭之。公命尉杜師顏。撤屋毀像。收其兵刃。罪其倡之者。
吳履爲南康丞。邑有淫祠。每祀輒有蛇出。戶民指爲神。履縛巫責之。沈神像於江。淫祠遂絶。
高麗禹倬爲寧海府司錄。民惑八鈴神。奉祀甚瀆。倬至卽碎。而沈于海。淫祀遂絶。
高麗金延壽知淸風郡。政尙淸簡。初郡人得木偶人。以爲神。每歲五六
月間。奉置客軒。大張祀事。一境坌集。流弊已久。延壽赴官。卽收捕巫覡及首事者。杖之。遂火其木偶。妖祀乃絶。
黃瑀知永春。節 丞有女病。若有物憑之者。巫曰。故邏卒某也。死而役於城隍之神。實爲崇。瑀怒曰。是安敢然。杖其土偶。而投之溪流。女病卽愈。
洪允成牧羅州。城隍祠有神惑民。允成焚其祠。
丁公彦璜爲安東府使。本府自前朝有新羅公主烏金簪神。多靈怪。人敬信之。金省菴孝元爲守時。焚毀其廟。厥後吏民。更復尊崇。每年五月五日。巫覡才人。奉其神。數十爲群。官吏陪之。周行境內。謂之端午使。閭民奔走恐後。破產失業。猶不知悔。前後太守。莫能禁。公大會儒士。焚其怪服。其妖遂息。
李衡祥爲濟州牧使。州有廣壤堂。土民祈禱成風。公命焚之。聞者稱快。昔金緻觀察嶺南。毀太白山神祠。可以匹美云。
李挺岳爲延安府使。府素多宿弊。至則一革去之。不日洗焉。舊有淫祠。祈甿坌集。日事縻費。公立毀之曰。彼能爲崇。宜加我身。邑民大覺。相語曰。始迷不知也。
象山錄。嘉慶己未春。延勅在平山府。暇日與豐川守李民秀,長淵守具絳。同游太白山城。城中有三太師祠堂。約共瞻謁。三太師者。申太師崇謙。卜太師智謙。庾太師黔弼也。旣啓戶見。有鐵像三軀。皆朴而失眞。間有女塑二軀。黃襦紅裙。粉面朱脣。妖怪不典。李曰何如。不可拜也。遂闔戶而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