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김임이 데레사(1811〜1846)
o 동정 순교자. 김대건 신부 댁 복사
◦ 1811년 서울 관우물골 출생
o 1846년 우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김임이(金任伊) 테레사는 1811년 서울의 관우물골(현 종로구 명륜동 혹은 중구 서소문동)에 있는 교우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모친을 일찍 여인 탓에 계모 밑에서 자라야만 했는데 , 계 모에 대한 순종과 효심이 지극하였고, 이복동생도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고 한다.
데레사는 나이가 들면서 교리서를 읽거나 묵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성인, 성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행적을 본받으려는 노력도 계속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애주애인(愛主愛人)의 마음이 지극하여 이웃으 로부터 사랑도 받았다. 그녀는 교우 초상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직 접 그곳으로 가서 연도(즉 위령 기도)를 바쳤고,처녀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손으로 직접 염습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6세가 되었을 무렵부터 테레사는 동정을 지킬 생각이 마음에 간절하 여 오로지 주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19세 때에 이르러 부친마저 사망하자 오빠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옷과 친척들은 여전히 혼인하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여겼고,그녀는 어떻게든 이러한 이목에서 벗어나야만 하였다.
결국 테레사는 하나의 꾀를 내게 되었다. 궁중 나인으로 들어감으로써 이웃과 친척들의 이목과 질타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침모(針母) 신분으로 나인이 되어 3년 동안 궁에서 생활했는데,
그때에도 교우의 신분을 조금도 잊지 않고 생활했다고 한다.121》
궁에서 나온 테레사는 이후 친척집으로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리고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는 이문우(요한)의 부탁으로 그의 양어 머니인 오 바르바라와 함께 화개동(현 종로구 화동)에 집을 마련하여 서 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122》그러던 중 1844년 겨울(음력) 김대건(안드 레아) 부제가 일시 귀국하여 돌우물골(현 중구 소공동의 석정동)에 거처 를 정하자, 테레사는 그 집으로 들어가 정철염(가타리나) 등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 신부가 체포되기 전까지 봉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녀는 이미 순교 원의를 마음속에 다지고 있었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뒤, 현석문(가롤로) 회장은 돌우물골 집을 지키고 있던 테레사와 가타리나를 새로 매입한 사포서동(현 종로구 수송동)의 김조이 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종적을 캐던 포교 들이 장동(현 종로구 청운동의 창의동)에 있던 우술임(수산나)을 먼저 체포한 뒤, 사포서동으로 몰려와 테레사와 가타리나, 가롤로 회장, 김조 이를 비롯하여 그곳에 와 있던 이간난(아가타)까지 모두 체포하고 말았 으니, 그날이 7월 15일(윤5월 22일)이었다.123》
테레사와 동료 5명은 모두 우포도청124>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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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순교자 약전』, 23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 김 가타리나의 증언.김 가타리나는 테레사의 이복동생이었다. 앞의 기록에서는 테레사가 ‘8개 월 동안’ 궁중 나인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122)오 바르바라는 테레사와 함께 생활하다가 1846년의 병오박해 때 체포되 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1, 김 프란치스 코의 증언).
123)『일성록』헌종 12년(1846) 5월 22 • 23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프 란치스코의 증언 : 회차 59, 한 바울라의 증언). 테레사와 동료들이 체포 된 날짜를 음력 윤5월 16일(양력 7월 9일)로 증언한 기록도 있다(『기 해 • 병오 재판록』회차 12, 이 이사벨라의 증언).
124)『일성록』헌종 12년 8월 1일 •,『기해 . 병오 재판록』,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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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게 되었다. 이때 테레사는 갖은 혹형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신앙을 굳건하게 지켰으며, 옥에 갇혀서는 애덕과 겸손으로 동료들을 끊임없이 권면하거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포도청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그때가 1846년 9 월 20일(음력 8월 1일)로,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순교 후 포도청에서는 테레사와 동료들의 시신을 시구문 즉 광희문 밖 에 버렸는데, 소식을 들은 가족과 교우들이 그곳으로 가서 테레사의 시 신을 찾아 인근에 안장했다고 한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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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김 가타리나는 수산나와 동료들이 좌포도청에 갇혔다고 증언하였 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 김 가타리나의 증언).
125)『순교자 약전』, 23〜24쪽 ;『일성록』헌종 12년 7월 29일, 8월 1일 :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가타리나의 증언 및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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