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소담과 광화문 글방
정동식
오늘 아침 현관문에 입춘방을 붙이려다가 자칫 웃음을 살 뻔했다.
붓글씨에 자신이 없어, 컴퓨터에서 출력하기로 마음먹고 한자로 변환하면서 입춘의 입을 들 入자로 선택하고,
인쇄를 눌렀다가 깜짝 놀라 취소를 했다. 入春大吉, 인쇄 직전에 잘못을 발견한 것이다. 늘 써왔던 글인데도
이런 일이 생긴다. 문득 평소에 건성으로 알고 있던 24 절기를 똑바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방금 실수로 이어졌던 입춘의 입자였다. 입춘에 왜 들 入자를 쓰지 않고, 설 立 자를 쓸까? 연례행사로 해 오던 일인데 왜 이런 착각을 할까? 작은 단어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고 생명력이 있을진대 알량한 지식으로 생각 없이, 큰 고민 없이 사용해서인가?
그러고 보니 계절이 바뀌는 시점의 24 절기에는 모두 입자가 들어간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놀랍게도 여기에는 들 入이 아니라 설 立자가 쓰인다. 入春은 얼핏 생각하면 맞는 것 같은데 명백히 잘못 쓴 글이다. 入이 아니라 立을 쓰는 이유는 직전의 계절 기운이 워낙 강하니,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내밀 듯, 새로운 계절의 기운이 일어선다는 뜻임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올해 입춘의 절입일시는 11시 43분이라고 한다, 절입일시란 절기가 들어오는 시간을 말하는데, 이 시점부터 진정한 계묘년의 한 해가 시작된다. 입춘은 한해의 첫날이면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2월 4일 오전 11시 42분에 태어났다면 임인년 생이 되고 11시 43분에 태어나면 계묘년 생이다.
60갑자로 조합되는 띠와 한해의 간지干支는 입춘 절입일시를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입춘첩을 절입일시에 맞추어 붙이면 좋다고 하여, 나는 둘째 아들과 함께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고 쓴 문구를 현관에 붙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환기도 시킬 겸, 길운이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현관문과 창문을 15분 정도 열어 놓았다.
이런 의식은 마음이 꺼림칙하면 하는 게 낫고, 내키지 않으면 꼭 할 필요는 없다. 절기가 바뀌는 시기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특히 올해 정월 대보름은 입춘 바로 뒤에 붙어오는 사실도 이채로운 현상.
작년의 입춘은 2월 4일인데, 대보름은 2월 15일, 그리고 내년인 24년의 입춘은 2월 4일, 대보름은 2월 24일인 걸 보면, 올해의 입춘처럼 대보름과 순차적으로 오는 일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아마 부모와 자식 간은 아닐지라도 가까운 벗의 관계는 되어 보인다. 그동안 기록을 찾아보니 2004년 이후 근 19년 만이다.
그리고 입춘은 대개 2월 4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3일과, 5일에 오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
만세력을 분석해 보니 1886년 이후 2021년까지, 2월 3일이 입춘이었던 해는 1889년, 1893년, 1897년, 2021년, 불과 네 번밖에 없었다.
2025 년부터 향후 2050 년까지는 4 년마다 2월 3일에 입춘이 올 예정이다.
반면에 2월 5일이 입춘이었던 해는 1960년부터 1984년까지 4년 주기로 총 7차례였다. 이러한 통계는 ‘컴퓨터
만세력(갑을당)’에서 발췌한 통계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이 만세력은 1965년부터 2050년까지 165년간의 24절기와 절입일시, 대세(그해의 간지),
월건(달의 간지), 음력과 양력 등을 표기해 놓았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한국천문연구원 자료를 인용했지만, 미래의 절입일과 절입일시의 내용에 미세한 변동사항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24절기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한 해를 24등분으로 나눈 황도좌표와 관련이 있다.
춘분점이 기준(황경 0도, 360도)이 된다. 천구속에서 황도와 적도는 두 번 만나는데 남쪽에서 만나면 춘분점,
북쪽에서 만나면 추분점이다. 입춘은 춘분점에서 서쪽으로 3번째(경칩, 우수, 입춘)에 있으니 황경 315도가 된다. 절기와 다음 절기와의 황경은 15도 차이가 있다. 같은 원리로 하지는 황경 90도, 추분점은 황경 180도, 동지는
황경 270도이다.
24절기를 음력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최근에서야 관심을 가졌으니 충분히 그럴만하고도
남는다. 특히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음력으로 알고 있다. 큰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음력이지 않을까요?” 했다.
큰아들은 정답을 못 맞힌 대신 내가 몰랐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중화문화권에서는 음력을 한자로 농력農歷이라고 표기한단다. 대만여행 당시에 농력과 24 절기를 같이 알려주는 전자시계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농사와 연관이 깊으니 단어도 실생활과 닮아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오늘 우리가 대문에 붙였던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은 우리의 발원문이나 마찬가지다. 봄이 왔으니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고개를 들면 크게 길할 것이요, 따뜻한 기운을 일으켜 세우면 경사스러운 일이 많아질 것이니, 그렇게 되도록 천지신명께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절입일시에 맞추어 붙여야 효험이 좋다고 하여 이왕 붙일 바에는 시간에 맞추어 붙이는 사람이 많았다.
예전에 왕궁의 문관들이 정월 초하루를 축하하기 위해 임금님께 지어 올린 글 중에서, 우수작을 선정하여 대궐에 붙이던 일이 민간의 풍습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23년 2월 현재,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은 ‘어울린다.’ 라느 시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게재 중이다. 이 시구는 작년 11월 28일부터 올해 4월까지 광화문 교보생명빌딩과 강남 교보타워 등에 걸릴 것이라고 한다.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진은영/어울리다 >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와락 안긴다. 어려운 시기에 손을 내미는 작은 행동에 우리는 위로받고, 우리에게 비빌 언덕을 내주어 든든함을 느낀다.
광화문 글판은 몇 개월을 게재하였다가 봄이 오면 다른 글로 교체할 계획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입춘방은 절입일시에 붙이면 좋다고 하면서, 떼는 시기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여운이 있다.
입춘첩은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과 결은 다르지만, 몇 자 안 되는 글귀로 사람에게 감동과 위안과 사랑을 준다.
둘 다 엄마의 품에 안긴 듯 따뜻하다.
첫댓글 입춘이 봄이 오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글쓰기도 더욱 박차를 가해서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