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을 피워 본 경험도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이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출처: 경향신문(www.khan.co.kr)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입니다. 박선민 시인의 버터입니다.
버터 하면 부드러운 풍미가 생각납니다. 과연 시인은 어떤 생각으로 '버터'를 바라볼까요?
시인이 보는 버터와 제가 보는 버터가 다를 겁니다. 경험한 이력이 다르니까요. 그럼 한번 둘러볼까요?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모든 시의 시작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신춘문예라면 더할 겁니다.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신선한 시작입니다.
버터가 뭉쳐지는 성질이 있잖아요. 시선을 끄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펭귄'을 가져왔군요. 이제부터 '펭귄'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펭귄이 사는 곳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거니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펭귄이 사는 남극대륙은 북극만큼 추울 것 같습니다. 이 극지방들은 거푸집 같고 그곳에는 모든 것들이 얼음으로 뒤덮여있지요.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다'같은 표현은 오랫동안 갈고닦아야 나올 수 있는 표현 같아요. '오두막'은 아마도 이글루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지구 온난화로 얼음산과 이글루는 다 문을 닫고 있는 셈이죠.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초록색은 버터일까요?'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부분이 '마른 나무'에서부터 '비슷합니다'까지입니다. 버터가 우유에서 분리되듯 장작이 불타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되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흩어지는 것'과 '녹는점'이 같다는 의미에서 나무 장작의 속성과 버터의 속성을 비교하는군요. 그러고는 '초록색은 버터일까요?'라는 마지막 행을 끌어내는군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을 피워 본 경험도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언덕과 평지에서 소들은 풀을 뜯습니다. 풀을 뜯은 소들은 우유를 생산하고 생산된 우유는 버터로 거듭나니까 우리가 먹는 맛있는 버터는 '풀'에서 나온 거지요.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 부분의 묘사가 개인적으로 맘에 듭니다. 아마 원래는 '소들은 집요하게도 풀을 뜯어 먹습니다'였겠지요. 후자라면 전혀 시가 되지 않고 그냥 사실을 서술할 뿐이지요. 김춘수 시인의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꽃'이지요. 하지만 이름을 부르면 '꽃'이 '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냥 '먹어 치웁니다'로 끝나면 재미가 없죠. 풀을 먹는 '당나귀'를 등장시킵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물론 아니겠지요. '눈은 푹푹 내리고 당나귀는 응앙응앙 우는'에 나오는 당나귀는 아닐 겁니다.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이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이 부분이 사실은 이해가 좀 가지 않습니다. 전체 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유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서 버터가 되듯, 귤도 탱자가 변해서 귤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니까 그 부분을 이야기하지는 않을까요? 노새도 말과 당나귀의 교잡으로 나온 동물이고요. 그렇게 보면 '버터', '귤', '노새' 모두 변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뿔 달린 노새가 나타날 수도 있겠습니다. '저울'은 물론 '무게'에서 나온 말입니다. '버터'가 녹으면 무게가 없는 것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닐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이제 단단하던 버터가 녹고 있습니다. 원래 버터는 사각의 모양이기도 하고 별 모양이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삼각형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녹는다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라지면 잊히는 것이니까 '안녕'이라는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았다고 적은 것 같아요. 시인의 상상력이 최고봉에 이르는 대목이 아닐까요? 펭귄에서 오두막으로, 오두막에서 버터로, 버터에서 당나귀로, 당나귀에서 안녕으로 이어져 오는 말이 숨 가쁩니다. 북극의 높은 빙하나 설산은 녹아서 부서지고 삐뚤어집니다.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이젠 밀항선을 탔습니다. 밀항선을 탈수 있는 것은 사람이죠. 시인은 난민들을 생각하고 이 글을 적었을까요? 아니면 변신의 삶을 가져온 '버터','귤','노새'처럼 밀항선을 타고 와 변신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밀입국을 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그 사회에 녹아들죠. 다시 '창문일까요?'하고 묻습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창문은 '윈도'를 나타내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사각의 버터와 사각의 윈도우 화면을 교차하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윈도우에 갇혀 격렬한 속도로 뭉쳐지고 있으니까요.
이 시는 매우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요? 버터의 녹는점, 어는점을 이야기하는데, 펭귄이나 오두막이나 심지어 안녕이라는 단어까지 가져와 '나는 당연히 당선되어야 해!',라고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 감상을 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시를 만나는 일은 일상입니다. 이 모든 의미와 표현과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선뜻 이해하시는 심사위원들의 안목이 높기만 합니다. 주말이 다 가는군요. 새로운 한 주 좋은 시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