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열세 명이 12박 13일간 몽골에 간다.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를 읽으며 자란 우리는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를 되씹으며 아라비아보다 가까이 있는 고비 사막으로 간다. 항공권과 숙소는 여행사를 이용하고 몽골에서의 일정은 준모드 고등학교에 파견 근무 경험이 있는 친구가 현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잡았다.
한여름의 울란바토르는 대구 날씨와 비슷하게 더웠다. 먼저 고비 사막을 체험하고 준모드에서 나담 축제 관람, 엔케 목장 방문, 태을지 국립공원 등 울란바토르 주변을 여행하기로 했다.
고비 사막은 몽골어로 ‘황무지’란 뜻으로 몽골과 중국국경 사이에 있는 암석 사막이 대부분이고 홍고린 엘스 등과 같은 모래사막도 일부 있다. 내가 생각한 사막은 모래사막인데 내 상식을 뛰어넘었다. 역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작은 바위가 많은 산으로 둘러싸인 바가가즐링 촐로에서의 생애 첫 게르 체험, 엉덩이에 상처가 나도록 말을 탄 얼음이 있는 계곡 욜링암, 홍그린 엘스의 모래 언덕과 모래바람 그리고 낙타 체험, 바얀작의 공룡알과 불타는 절벽에서 바라본 석양,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협곡인 차강 소브라가 등 고비 사막은 경이롭고 신기했다.
고비 사막에서는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야 하고 다니던 길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가야 한다. GPS나 구글 지도가 무용지물이 될 경우가 있어 혼자서는 갈 수 없다. 함께 가야 한다.
고비 사막 여행을 마치고 준모드에서 나달 축제를 관람했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의 몽골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이렇게 다양한 복장의 몽골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씨름, 말타기, 활쏘기 시합보다 사람 구경이 우선이다. 아마도 고비 사막을 헤매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엔케 목장을 방문하는 날이다. 초원에서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기회여서 기대감이 더하다. 호텔을 출발해 준모드를 거쳐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엔케 언니 가족과 친척들이 우리를 반겼다. 넓디넓은 초원에 게르 두 채가 있는 목장이다. 양과 염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말과 젖소도 많다. 텐트와 천막을 치고 양고기를 안주로 해서 마유주를 마시며 환영 자리를 가졌다. 첫 잔은 남김없이 마셔야 예의라는 말에 한숨에 잔을 털었다. 시큼하면서 비릿한 젖내가 섞인 막걸리 맛과 비슷하다. 말이 무슨 풀을 먹었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한다.
마유주를 마시며 감사의 선물을 전했다. 환영 자리에서 엄마 젖을 먹던 엔케 조카가 말을 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젖먹이가 말을 타다니.
엔케와 아이들도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린다. 뒷모습이 싱그럽다.
엔케 남편은 몽골 전통음식 버덕을 준비하고 있다. 텅 빈 우리 한쪽에 묶여 있던 하얀 양 한 마리가 자꾸 눈에 밟힌다.
몽골 전통음식인 버덕은 타르박이라는 대형 설치류를 요리한 것으로 칭기즈 칸의 보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흑사병 문제로 주몽골 한국대사관에서 취식 금지를 권고하고 있어 우리에겐 양으로 요리해 준다고 한다.
양을 잡아 목부분의 가죽을 자르고 내장과 뼈를 발라내는 과정이 보기 어색해 사진만 찍고 천막에 가서 쉬었다. 그래도 눈길은 계속 그곳으로 간다. 가죽을 손상 없이 원형을 유지하며 내장과 뼈를 발라내는 데는 많은 시간과 기술이 필요하다.
“혹시 마유주나 물을 담기 위한 가죽 부대를 만들기 위해 가죽을 벗기다 생각한 요리법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죽의 구멍을 철사로 묶은 다음 달군 돌과 고기, 내장, 감자 등을 넣고 목부분을 묶는다.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익을 때까지 토치로 열을 가한 후 충분히 익었다고 판단되면 알루미늄 포일로 감싸 뜸을 들인다. 양을 잡아 재료를 준비하고 돌을 달궈 요리하는 시간은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초원을 바라보다 싫증이 나면 말을 타기도 하고 그늘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주변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다. 게르에서 보면 가까운데 막상 가보니 멀고 힘이 들었다. 고비 사막을 겪어본 터라 쉽게 이해가 된다. 언덕에 올라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했다. 360도 회전하며 멀리 보이는 게르와 말과 소, 양 떼를 담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후 8시가 다가오자 젖을 짜기 위해 젖소 떼를 몰아왔다. 젖소를 묶어 놓고 우리에 있는 송아지를 한 마리씩 내보내면 어미소를 찾아 젖을 빤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젖을 먹으면 어미소에서 떼어 내고 젖을 짠다.
소를 몰아오는 사람, 송아지를 우리에 가두고 내보내는 사람, 젖을 짜는 사람 등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엔케 젖먹이 조카는 송아지 우리에서 송아지를 내보는 역할을 한다.
젖을 짜는 여인의 손길과 눈길, 젖소의 편안한 되새김질, 그 옆에 앉아 어미를 바라보는 송아지의 눈동자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초원에 어둠이 짙어지자마자 양과 염소가 뒤섞여 구름같이 우리를 향해 몰려온다. 오토바이를 탄 어른은 뒤에서 몰고 사내아이들은 옆에서 몰아간다. 양과 염소와 송아지는 우리에서 자고 젖소와 말은 초원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나 보다.
열사흘 달이 휘영청 떠오르고 양 떼가 우리로 들어간 후에 버덕 상차림이 시작되었다. 고기와 감자 등을 꺼내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껍질도 먹기 좋게 잘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놓는다. 누구 먼저랄 것 없이 손이 움직인다. 일곱 시간을 기다려 맛보는 음식이다. 부드럽고 연하며 고소한 맛이 난다. 둥글게 둘러앉아 먹는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다. 시금털털한 마유주의 안주로도 최고다.
버덕은 기다림의 음식인가 보다. 음식을 기다리며 목장을 둘러보고 엔케 가족과 어울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밤 11시에 목장을 출발했다. 엔케 부부는 별과 달만 보이는 한밤의 초원길이 걱정되었는지 도시의 불빛이 보이는 지점까지 길라잡이를 하고 돌아갔다.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도 버덕인지 허르헉인지 자세히 몰랐고 막걸리처럼 먹은 마유주가 ‘호후르에 담아 아이락을 만드는 몽골의 전통과 기술 관련 풍습’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줄도 몰랐다. 아이락은 가축의 젖으로 만든 몽골의 전통주로 ‘발효주’란 뜻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마유주라 불린다. 알코올 도수는 1도 정도로 몽골의 게르나 가정을 방문하면 환영의 뜻으로 많이 권한다. 몽골에서 가장 좋은 아이락은 말젖으로 만든 것을 최고로 친다.
나담 축제의 활쏘기를 구경하다 운 좋게 얻어 마신 것도 아이락이다.
우리는 몽골 최고의 전통음식과 아이락을 마시며 따뜻한 사람들과 하루를 보냈다. 버덕은 기다림의 음식이다. 기다리는 동안 초원과 동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거친 고비 사막에서 환경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 초원에서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 현대의 문명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울란바토르의 사람,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024.9.22.(24)
첫댓글 몽골 여행기 자세히 잘 읽었습니다. 좋은 여행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