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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의 기술 8 / 영적 평형 속 ‘미세한 우세’의 힘 누리기
<영적 평형은 인간에게 ‘의도하고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다.
주님이 외부의 힘을 상쇄시켜 놓으셨기에
비로소 인간의 지극히 작고 미세한 의지의 움직임이
의미 있는 수치로 기록될 수 있다.
거대한 폭풍 속에서는 촛불 하나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사방이 막힌 정적 속에서는 그 작은 불꽃의 흔들림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는 것과 같다.
미세하게라도 우세해지는 순간 영적 귀속이 결정된다.
주님이 맞춰놓으신 '0'의 저울 위에서는
아주 작은 의지의 기울어짐이 전체의 성질을 규정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거나 즐기기로 마음먹고
저울을 아주 미세하게라도 악 쪽으로 기울게 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옥의 영향권에 포착된다.
반대로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함과 동시에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기 삼아 스스로 일어서듯
그 유혹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그 치열한 투쟁의 미세한 우세가 영혼을 천국의 인력에 결합시킨다.
결과적으로 '미세한 우세'임에도
그것은 그 사람의 지배적(주도적) 사랑의 확정을 의미한다.
평형 상태에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그 미세한 무게추가
결국 지배적 사랑의 왕좌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면
영혼은 그 성질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이 방향성이 사후에 낡은 허물을 벗고 본연의 처소로 향하게 하는
최종적인 연산값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 평형 상태에서 미세한 우세를 발휘해야 함에도,
정작 거대한 지옥의 압박에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그 앞에 위축되어 좌절하게 되는 근본 원인과 그 해결 방법을
스베덴보리의 저서들을 통해 살펴본다.
- 영적 평형 속 미세한 우세
1. 영적 평형과 자유의지의 회복
지옥의 영들은 인간의 의지를
자신들의 악한 충동으로 묶어두고 그 방향으로 끌고 가려 애쓴다.
그들은 고통, 두려움, 절망이라는 감정의 파도를 일으켜
인간의 영적 평형을 깨뜨리려 한다.
하지만 인간이 시험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부르고 그분을 의지함으로써 지옥으로부터 오는 압박을
'내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분리시킬 때
인간은 비로소 지옥의 강제적인 결박에서 벗어난다.
(주님은 우리를 지탱해주시고 지옥에 저항할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그런 주님을 우리가 의지한다는 것이고
또 그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시인을
구체화하는 행위이다.)
이때 회복되는 영적 평형은
단순히 마음이 차분해진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가 지옥의 영향력(관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옥의 악에 끌려 다니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능력을 되찾게 된 것이다.
2. 미세한 우세가 판가름을 내는 원리
영적 평형 상태에서 인간이 얻는 '미세한 우세'가
모든 것을 판가름 내는 이유는
거듭남은 거대한 한 번의 승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택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 순간 시험을 겪는다.
지옥의 관성에 이끌릴지, 아니면 주님의 빛을 따라
자신을 악으로부터 분리할지를 결정하는
그 짧은 찰나의 선택들이 쌓여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된다.
비록 그 우세가 '미세'할지라도 그것이 누적되면
영혼의 무게중심 자체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
한번 이 평형이 잡히고 미세한 우세를 점하게 되면
인간은 그다음 시험에서 더 큰 저항력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세한 우세란,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영적 골든타임이다.
그 순간에 주님과 하나로 결합(Conjunction)됨으로써,
인간은 악의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내면의 실체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평형 상태에서 점하는 미세한 우세야말로
지옥의 거대한 관성을 끊어내고,
인간을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인 영적 지렛대인 셈이다.
다음은 미세한 우세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살펴본다.
1. 선택의 찰나에서 작용하는 '수평적 미세함' (영적 평형의 순간)
첫 번째 측면은 영적 평형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 의지를 기울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의 미세함이다.
영적 평형이란 지옥의 유혹과 천국의 빛이
인간의 의지 앞에서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 인간이 주님을 부르고 그분을 의지하기로 하는 선택은
마치 저울의 한쪽 끝에 깃털 하나를 올려놓는 것만큼이나
미세한 움직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찰나의 '기울임'이 악과의 단절을 가져오고
주님과의 결합을 불러오기에
그 미세함은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지옥의 지배권과 천국의 생명력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된다.
2. 성장의 누적을 통해 드러나는 '수직적 미세함' (시간의 축적)
두 번째 측면은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발생하는 상대적 미세함이다.
이전 시험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이겨낸 경험은
인간 내면에 '저항의 근육'을 형성한다.
이전에 겪었던 거대한 파도가 이제 성숙해진 영혼에게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그 시험을 통과하며 얻은 영적 저항력이
인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의 치열했던 싸움은
성숙한 다음 단계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의 작은 과정,
즉 '미세한 우세'로 회고된다.
이는 인간이 거듭남의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이전의 투쟁들이 점차 더 깊고 넓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작고 섬세한 과정으로 통합되어 감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미세한 우세'는
단지 작은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존하시며 조금씩
당신의 선으로 옮겨가시는 섬세한 섭리의 기술'이다.
현재의 미세함은
악을 분리해내기 위한 인간의 주체적인 결단이며
과거의 미세함은
주님께서 인간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셨던 은혜의 궤적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서로 맞물리며 계속되기에
인간은 시험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이미 얻은 미세한 우세들을 발판 삼아
더 큰 평형과 더 깊은 자유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옥의 거센 파도 속에서
한 번에 거대한 승리를 거두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작은 우세를 점하며 당신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 평형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당신의 생명을 한 방울씩 채우시어
마침내 우리를 악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의 영혼으로 빚어 가신다.
그 작은 영적 평형이 모여 거대한 천국이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그 순간은 결코 작지 않은 승리의 역사이다.
- 낙심과 좌절의 정체
인간이 지옥의 거대한 힘에 끌려 다니며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시험을 겪을 때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HH 598
‘시험은 지옥의 영들이 인간과 싸우는 것이지만
그 싸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옥의 영들과 싸우려 한다면
그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악으로 기울어져 있고
지옥은 그 악을 통로 삼아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험의 한복판에서
지옥의 거대한 힘에 이끌려 낙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험의 주도권을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두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지옥의 영들과 직접 정면승부를 벌이려 할 때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지옥은 바로 그 악의 통로를 타고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시험의 순간 인간은
겉으로는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힘으로 평온을 되찾고
악을 제압하겠다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분모처럼 깔려 있다.
비대해진 자아라는 분모가 지배하는 영혼에는
주님의 도우심이라는 분자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결국 인간은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지옥의 거대한 압력을 감당하다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자기 비움(Abnegation)'을 통해
주님의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전유하는 전환에 있다.
‘자기 비움’이란
내 힘으로 지옥을 제압하려는 헛된 의지를 포기하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생명이 채워지도록
내 영혼의 문을 여는 거룩한 주도권 전환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주님께서 내 삶의 유일한 동력이 되심을 인정할 때
지옥의 압박은 더 이상 나를 억누르는 공포가 되지 않는다.
그 대신 주님의 선이 내 의지를 통해 흐르게 되므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 안에 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면이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져 충만해지면
더 이상 자아의 실패에 매몰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그 어떤 압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형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험의 압박 속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며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낙심이 나라는 자아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룩한 신호임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비워질 때
지옥의 압박은 더 이상 나를 억누르는 공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낙심은 자아의 패배를 알리는 절망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한
거룩한 도약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낙심은
나라는 자아를 꺾으시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이며
그 고통의 자리는 도리어 주님의 생명이 당신의 자녀를
새롭게 빚어내시는 가장 거룩한 은혜의 통로가 된다.
DP 278
‘시험을 겪는 동안 사람은 자신의 악들을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없이는
그것들을 억제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로부터 물러나며
자신을 주님께 항복한다. 이것이 바로 시험의 목적이다.’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듯
시험은 인간이 자신의 악을 인지하게 하고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없이는
그 어떤 악도 억제할 능력이 없음을 절감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때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멈추고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종적인 목적지이다.
따라서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철저한 무력함의 인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왜 이토록 약한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은
여전히 자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오히려 나 자신은 지옥의 거대한 흐름을
단독으로 제어할 수 없는 피조물'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무능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이러한 고백 위에서 시험을 대하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야 한다.
지옥을 쳐부수고 굴복시키는 결과적 '승리'에 집착하는 대신,
치열한 투쟁의 한복판에서도
나의 주권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주님께로의 귀속'으로 그 목적을 전환하는 것이다.
거대한 폭풍을 스스로 멈추려 애쓰는 대신,
폭풍 속에서 '이 모든 악의 파동은 내가 초대한 것이니
이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미세한 시인이야말로 유일한 영적 무게추가 된다.
이 미세한 시인만이
인간을 지옥의 결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주님의 생명을
우리의 의지에 접합시키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 시험의 폭풍 속의 미세한 우세 : 흔들림을 넘어선 영적 결단
이처럼 주님께 귀속되는 미세한 시인을 통과한 자는,
이제 거친 실전의 시험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거대한 지옥의 파도 앞에 서서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적 시험은
우리에게 승리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빈 그릇'임을
철저히 배우게 하는 학교다.
흔히 우리는 시험의 무게에 눌려 낙심하는 것을
영적 실패의 징후로 여긴다.
그러나 시험의 한복판에서 경험하는 그 깊은 무력감은
단순히 감정의 침체가 아니다.
이런 낙심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한 마디로 자아가 죽어가는 비명이다.
내가 지옥의 힘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지옥의 거대한 무게를 산술적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거대한 지옥의 무게를
당신의 어깨로 받아내시며
우리에게는 단지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미세한 1그램의 겸손만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흔들릴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영원히 어둠에 잠길 수밖에 없는
우리 실존의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바닥에서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시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아라는 분모는 ‘0’에 가까워지고
주님의 구원이라는 생명력은 무한히 증폭되어
우리 영혼을 천국의 인력권으로 낚아챈다.
우리의 힘을 빼앗아가는 ‘낙심’과 ‘좌절’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영적 평온만을 승리로 간주하는
자아의 오해를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지옥의 압박에 끌려 다니며 좌절하게 되는 이유는
투쟁의 참된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기준으로 영적 성패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HH 598
‘시험은 인간 안에 있는 믿음의 진리들에 대항하여 작용하는
악한 영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을 보호하신다.
이 싸움들은 인간이 그 영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싸우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마치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해 싸우는 것처럼 나타난다.’
인간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마치 스스로 하듯' 주체적으로 투쟁해야 하지만
정작 그 싸움의 현장에서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고
어둠에 눌리는 것을 곧 '지옥에 진 것'으로 착각한다.
낙심은 지옥의 공격 자체 아니라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왜 아직도 힘든가.’라는
자아의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결과물이다.
즉, 패배감 자체가 시험의 일부인데
이를 '영적 패배'로 오판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옥의 거대한 압박 앞에서 인간이 점할 수 있는 ‘미세한 우세’는
지옥을 당장 멈추게 하는 큰 힘이 아니라
그 폭풍 속에서도 투쟁의 중심을 주님께 고정하는 결단의 힘이다.
시험 중에 인간은 마치
스스로(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싸우고 있음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만약 그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들 편에서 싸우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옥의 영들과 싸우려 한다면
그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악으로 기울어져 있고
지옥은 그 악을 통로 삼아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싸움 중에
자신이 마치 스스로 악을 억제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시험을 통해 선이 그에게 전유(Appropriation)되는 방식이다.
폭풍 같은 시련이 닥쳐 내면이 소란스러워질 때
우리는 평온의 상실을 곧 영적 전선의 붕괴로 치부하는 우를 범한다.
그때 우리는 내면이 고요하지 못함을 보며
영적인 실패를 자책하곤 한다.
그러나 지옥의 압박이 거칠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지금 진리의 방패를 들고 영적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고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빛을 향해 확고히 나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의 평온함은
어쩌면 굴복한 영혼에게 지옥이 베푸는 가짜 안식일뿐이고
반면 진정한 주님의 길을 걷는 영혼에게는
치열한 영적 저항이 뒤따르는 것이 섭리적 당연함이다.
지옥은 이미 자기편이 된 영혼을 향해 검을 겨누지 않으며
오직 주님께로 향하는 성도를 향해서만
그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법이다.
인간이 지옥의 세력에 끌려 다니는 것 같아 낙심하는 것은
투쟁의 주체로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승리의 기준을 '내 마음의 평온'이라는 자아의 만족에 두었기 때문이다.
낙심은 지옥의 공격 자체가 아니라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이겨내려 애쓰는데도
왜 이토록 상황은 고통스러운가.’라는 실존적 질문 앞에서
영적 투쟁이 가져오는 현실적 고단함과
그 결과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시험(Temptation)'의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필연적인 실존이다.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낙심하는 것은
사실 지옥의 거센 파도 앞에서 자신의 '자아'라는 배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직면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투쟁은 인간의 주체적인 몫이며
승리는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영역이다.
인간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마치 스스로 싸우는 듯한' 주체적인 투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인간의 이 주체적 투쟁은
시험을 이겨내고 선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이지
결코 그 자체가 자기 의라는 악은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 보호받는 주체로서
담대하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해야 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낙심과 좌절이 찾아올지라도
그것은 투쟁하는 자만이 겪는 영적 고통이며
주님은 그 부서진 마음을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신다.
우리가 지옥 앞에서 떨고 있을지라도
‘나는 비록 흔들리나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며
다시 일어서는 그 결정적인 믿음의 고백이
지옥의 거대한 힘을 상쇄하는 천국의 에너지가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옥의 폭풍에 휩쓸려 신음하면서도
주체적으로 맞서려 하는 그 모든 고군분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지옥을 제압하려는 허황된 야망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당신의 자녀로서 당당히 맞서기를 선택하는
그 찰나의 겸손 속에서 주님은 지옥의 모든 공격을 멈추게 하시고
우리 영혼을 당신의 승리라는 반석 위에 안전하게 세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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