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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쌀
조성원
한국인에게 밥은 생명이고 사랑이다. 누구는 한(恨)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쌀밥을 배불리 먹었던 시절은 없었으며 그런 상황은 196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급증하는데 쌀 생산량은 도리어 줄었다. 이에 정부는 혼·분식을 유도하거나 강제했다. 경찰을 동원, 혼식 비율을 지키지 않는 업소들을 단속해 행정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1963년 1월부터는 각의의 의결로 쌀을 팔 때 잡곡을 2할 이상 섞어서 팔고 음식점도 2할 이상의 잡곡을 섞고 가정에서는 2일 1식은 분식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절미운동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고 공공단체, 학교, 관공서 등이 총동원되었다. 쌀 증산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정부의 혼·분식 정책은 더 강력해졌다. 1968년 1월 혼·분식이 법제화됐다.
모든 음식점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쌀이 들어간 밥을 팔지 못했다, 그 밖의 시간에도 잡곡을 25% 이상 섞어야 한다는 행정명령이 발동되었다. 가정과 학교에서도 혼·분식을 여러 방법으로 장려했다. 먹는 것까지 강제를 동원하나 싶지만 보릿고개 넘던 시절 쑥은 고급이었고 풀잎가루로 죽 끓여서 먹고 소나무 껍질을 끓여 먹기도 하였으니 정부의 비호는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일제는 쌀 수탈을 위해 증산 운동도 독려했다. 대표적인 게 바로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이었다. 벼품종 개량과 함께 천수답을 수리답으로 만드는 수리관개개선 작업이 병행돼 수로와 저수지가 건설되었으며 도로가 뚫렸다. 한국인의 증산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도 병행해 곳곳에 증산을 독려하는 깃발과 플래가드가 내걸렸으며 증산왕을 뽑아 ‘메이지 데이’에 상을 주는 당근 정책도 함께 구사했다.
이승만 정부 역시 증산 운동을 독려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미작 및 맥류 증산 3개년 계획’을 세우고 개간과 간척, 그리고 경지정리 등을 통해 농경지 확장에 나섰으며 종자개량도 병행해 쌀 증산에 나섰다. 하지만 사실상 이 계획의 목표는 쌀의 일본 수출이었기 때문에 가중되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쌀의 수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구호의 성격이 짙었다
박정희 정권은 식량 증산의 일환으로 벼 품종 개량에 적극 나섰다. 196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기적의 볍씨’로 알려진 ‘희농 1호’도 벼 품종 개량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해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이집트에서 나다(Nahada)라는 이름의 볍씨를 훔쳐왔는데, 언론에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부푼 희망을 안겨 주었다.
박정희는 이 볍씨에 자신의 ‘희(熙)’자를 따 ‘희농 1호’라는 이름을 붙였을 만큼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는 청와대 집무실 옆에 희농 볍씨를 가져다 두고는 방문객들에게 “우리도 보릿고개를 넘길 효자가 생겼다”며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위로 자라기만 했지 고개를 숙이지 않아 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된 희농 1호는 씨받이마저 어려울 정도의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70년대 들어 식량증산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증산의 견인차로 지목한 것은 1970년 등장한 통일벼였다. 통일벼는 국내 연구진과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가 5년 간의 연구 끝에 개발한, 기존의 볍씨에 비해 수확량이 30% 정도 증가한 다수확 품종이었다. 박정희는 1970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기적의 볍씨인 ‘희농 1호’의 실패를 의식한 듯,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의 볍씨’라며 통일벼를 소개했다.
통일벼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필리핀으로 보내 재배해 봄에 모심기 전 비행기로 다시 공수해 와 논에 뿌렸을 만큼 극진한 대접을 누렸다. 하지만 농민들은 통일벼 재배에 냉담했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데다 오랫동안 속아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벼가 지닌 단점도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통일벼는 면역성이 약해 병충해가 빈발했으며,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 농한기의 부수입원이라 할 가마니나 새끼를 꼴 수도 없었다. 소가 싫어해 여물로도 쓸 수 없었다. 군불 때어 재나 받든가 아니면 퇴비로 쌓아 놓고 썩히는 수 밖에 없었다. 통일벼로 증산을 해 봐야 돌아올 경제적 혜택이 크지 않아 농민들에게 통일벼는 ‘그저 그런 볍씨’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질(米質)도 문제였다. 통일벼는 일반미인 ‘아끼바리’에 비해 푸석푸석해 밥맛이 없고 찰기가 적어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는 불평이 쏟아졌는데,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돌만큼 통일벼의 미질은 크게 떨어졌다.그러나 당시엔 미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말 그대로 한이 맺힌 쌀밥을 배불리 먹지 못하던 시절이라, 가장 우선 순위는 양(量)’이었다.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힘 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박정희는 각종 홍보와 선전이 큰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농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채찍을 들었다. 작전상황실까지 마련해 놓고 실시한 이른바 ‘통일벼 행정’이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졌고 각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막하게 나붙었다. 심지어 책임생산제를 시행해 마을 회관 벽에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린 벽보가 붙여지기까지 했다. 농민의 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당근책도 제시되었다.
73년부터는 다수확농가에 대한 시상이 실시되어. 쌀의 계약증산제도를 시행해 목표를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원부터 1백만원까지 시상금을 주는 등 푸짐한 상금을 걸고 군과 면에서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한마디로 피나는 식량증산 운동이었다. ‘통일벼 행정’도 강화돼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이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허줄하던 그 시절, 고봉으로 담으라는 말이나 곱빼기란 말은 실로 행복한 낱말이었다. 산소만큼 불룩 올려서 담으라 하고 양은 두배인데 가격은 두 배가 아니니 즐겁지 않을 수없었다. 담아 주는 온정이 그저 고마웠던 가난했던 그 시절. 밥풀을 흘리면 혼이 났다. 밥그릇에 밥알이 남겨져 있어도 큰일 날 일이었다. 사과는 껍질을 얇게 깎았다. 어찌 받아든 수박은 붉은 티가 사라질 때까지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은 그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걸려든 생선은 밥알보다 작은 살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닭고기는 뼈마디까지 오작오작 씹어 뼈 속 피 한 점도 빠짐없이 해치웠다.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많이 맞기도 하였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덕에 삶은 악착스럽게 사는 것이란 것을 배웠다. 경거망동한 사치풍조는 당연 지탄의 대상이었고 뉴스 감이었다. 그 시절 사치는 분명 죄였다. 감히 누가 찬밥 더운밥을 가리고 닭다리 한 조각을 그냥 내버릴까. 그 때처럼 밍크코트가 제 진가를 발휘하던 때가 있을까 싶다. 흔하지 않던 시절 값진 것은 그야말로 절실함이고 부러움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쌀 자급에 성공했다. 수확량은 3621만석이었다.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박정희는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키워드와 다름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쌀 생산량이 4천만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쌀 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박정희는 이 해 12월 4천만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으며, 농업 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쌀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쌀이 남아돌자 박정희는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나 ‘혼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고이 보관해 놓고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 고봉으로 퍼 담던 밥이 차츰 줄어들 때도 바로 그무렵이다. 1980년대로 오면 쌀은 더이상 뉴스꺼리가 되지 못한다. 소비생활이 많이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컵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식품들이 늘어났었고. 간편하게 먹는 닭튀김, 햄버거 그리고 피자 등등 미국식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시장에 등장을 한다. 오히려 그쯤부터서 우리네 밥상을 지켜오던 쌀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 변화 속에 예전 동네마다 쌀집, 싸전 혹은 쌀가게집 하면 누구든 기억을 하는데 요즘은 일부 재래시장에 있는 노점을 제외하면 찾아보기도 어려워졌고 됫박으로 쌀을 파는 곳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설날에는 쌀로 만든 가래떡을 썰어서 만든 떡국을 먹고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함께 나물을 먹고 8월 한가위에는 추수한 햅쌀로 밥을 지어서 제사상에 올리고. 쌀을 빻은 가루로 송편을 빚는 전통 풍속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런 명절의 풍경들도 앞으로 세월이 몇 십 년이 지나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모른다.
제사상에 피자를 올린다든지 홍동백서나 어동육서 등과 같은 기존 제사상 차림에 파인애풀이나 바나나 같은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90년대에는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화를 외쳤는데 1994년 체결된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우리나라도 쌀시장 개방은 당연지사로 변하고 말았다.
요즘은 쌀 개방에 대해 무기력해졌다. 주요 이슈가 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논 농사를 축소하는 것만 같다. 못 먹어 허리 휘청한 보릿고개가 이제는 정신적인 보릿고개로 바뀐듯도 싶다.요즘 내가 곱빼기를 안 시키듯 밥풀 좀 흘렸다고 무어라 말을 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넘치는 세상이니 풍성하다는 것이 그다지 효용가치가 없다. 양 대신 질이다. 입맛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급수로 바뀌었다. 고급이냐 최신식이냐가 중요한 세상이다. 생산 공장의 물건들이 과거 대량생산에서 소량 다품종화 되고 있다.
이는 개성이 강하여 소비자 비위맞추기가 어렵다는 까다로워진 세상을 말한다. 무엇이든 듬뿍 담아주면 그것이 바로 인정이고 장사의 밑천도 되었는데 요즘은 더 들라고 고봉으로 밥을 담아주는 것은 큰 실례다. 인정도 사나워지고 대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아 주고받는 정감이 밋밋하고 인정이 처신하기가 어렵다. 사과는 오히려 껍질을 두껍게 도려내어 농약의 잔류, 꺼림칙한 느낌을 마저 지운다. 가난이 한이 되어 한 톨의 알갱이도 귀하고 남은 것이 아깝다고 억지로라도 남은 것을 비워버리던 어른들. 이제 그들 스스로도 더 이상은 지독하지 않으며 나서지 않는다.
어른들이 해야 할 말이 자연 줄어든 시대. 배고픔을 참아내며 근근이 살아왔던 그들이 사라지면 그런 산교육은 단지 가난의 한 방편으로써 흔적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난 요즘 그런 가르침이 아쉽고 그립기만 하다. 풍족하니 아낌이 없다. 그러한 것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녕 사라진 것은 어른이 전하는 검소라는 튼실한 삶의 자세이고 가난 속에서 핀 애틋한 온정이다. 곡식 알갱이 하나에 담긴 소중함을 말하는 이가 요즘 있던가.
어느 때 작은 일에서도 흔들리는 것은 그 시절처럼 투철한 자세가 실종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지나치다 싶고 과하다 싶고 이러해도 되는가하면 그 때의 어른들을 떠올리곤 한다. 질책을 받고 싶은 심정이 자진해서 이는 것은 어른이 주었던 교훈과 느낌이 내 마음 속에 여전하기 때문이다. 심부름을 하고 일을 거들던 때 그것은 대견함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런 일도 자연 줄어들었다. 공부하기 바쁘고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관대하다.
가난의 틀에서 벗어나자 자율이 자리를 잡았으며 됨됨이 보단 목적하는 의도된 사람 만들기에 모두들 정신들이 없다. 똑똑한데 버릇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여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닐까. 가난의 탈피는 산업화이고 이는 핵가족에 의식의 개인화를 말한다. 스스로 알아서 챙기고 따지는 자율의 시대이다.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겁 없는 시대이니 실로 겁나는 시대인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변하여 남의 것에 참견하지 말 것이며 나의 것은 스스로 알아서도 지켜야 한다. 느낌은 즉흥적이며 가치관도 제각기이다. 이른바 개인이 잘 난 개성의 시대이다.
솔직히 그 시절엔 그 시절로서의 회한이 있다. 권위로서 통솔하고 수직 상하를 두어 정당한 사유 없이 많이도 맞았으며 개인은 여간해서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만한 여유와 인권신장을 얻어냈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요즘 나는 밥을 태운 며느리를 혼내는 권위의 시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아쉽고 늦게 다녀도 가르침을 줄 어른이 없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없는 살림에 고봉으로 밥을 퍼주는 따스함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 어른들의 가르침 속엔 생각하여 마음에 담아 둘 소중함이 있다.
소중함은 절실함이며 성실 속에서 얻는 참 맛이다. 어쩌지 못하는 자율이라지만 작은 낱알의 소중함으로부터 삶은 비롯된다는 것만이라도 가슴 깊이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우린 여전히 가난을 밑천으로 삶을 꾸린다. 계란 하나가 귀하였던 그 시절 외할머니는 계란찜을 아낌없이 만들어주곤 하였었다. 그런 당신은 굽은 손으로 내 흘린 밥알을 알알이 훑어서는 당신 입에 대었다. 오늘 수입쇠고기가 와르르 쏟아지는 날 주름투성이 당신의 모습이 깊게 떠오른다. 나는 후손들에게 옳은 그 무엇을 제대로 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