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정원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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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순원왕후의 육순을 기념으로 건축
대조전이 불탔을때 순종이 거거했던 곳
마지막 왕실 가족들이 살았던 곳
영친왕 이방자 여사가 살던 거처.
'낙선재 남쪽문' 장락문(長樂門)은
'신선 세계' 월궁(月宮)의 출입문이다.
즉, 장락(長樂)은 전설 속에서
'서왕모가 산다.'는.,월궁의 이름.
흥선대원군의 편액 글씨인.,장락문.
누마루와 행랑 & 육모정자가 있는.,상량전(上凉殿)
누마루 밑 화방벽 - 아궁이의 불씨 날림을 막기 위한 벽.
낙선재 뒤뜰 괴석 - 소영주(小瀛州 : 신선이 사는.,봉래. 방장)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뒤편의 후원
수강재 후원의 정자., 취운정(臭雲亭)
취운정 동쪽 담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세도세자 사당' 경모궁터(서울대 병원)
서울대병원 그 뒤편으로 바라보이는.,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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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풍수지리설 상으로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타락산(駝酪山)
창경궁 통명전 옛터는
혜경궁홍씨 거처 자경전.
'취운정 서쪽 쪽문 →
석복헌 후원 한정당(閒靜堂)
→ 낙선재 후원의 상량전(上凉殿).'
상량정
상량정 서쪽편 담장의 '만월문'
그 담장에 새겨진 아름다운 꽃문양
꽃담장 만월문 안으로 들어서면.,동궁.
동쪽에 위치한.,동궐(東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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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후원의 정자(亭子) 이름이.,상량정(上凉亭).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평원루(平遠樓)라고 기록.
1820년대 동궐도에는 볼 수 없고 1908년 동궐도에 있다.
1908년 동궐도 평원루는 일제강점기.,이름.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낙선재 왕실.,감시초소.
월궁(月宮)을 상징하는.,낙선재.
월궁의 출입문을 뜻하는., 장락문
..................................낙선재 관람시간.......................................
오전 9시 15분~오후 4시 15분(3~10월 매시 15분, 45분 입장, 월요일 휴궁)
오전 9시 15분~오후 5시 15분(4~9월 매시 15분, 45분 입장, 월요일 휴궁)
오전 9시 15분~오후 3시 45분(11~ 2월 매시 15분, 45분 입장, 월요일 휴궁)
자유관람 오전 9시 15분~오후 4시 30분(4~11월 목요일, 1일 1천 명 제한)
옥류천 특별 관람 10:00, 13:00, 14:00(4~11월 월요일 휴궁, 목요일 제외)
낙선재 특별 관람 10:20, 16:00(연중 월요일 휴궁, 목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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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의 백미, 창덕궁하면 후원이 먼저 떠오른다.
조선왕조 최고의 로맨스 가이 헌종의 사랑이 깃든 낙선재.
그곳 주변 월영매와 만첩홍매와 능수벚나무는 화려한 꽃들.
마치, 로맨스 가이 헌종의 낭만인듯.
창덕궁 관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과 제한공개가 원칙이다.
목요일 자유관람 외에는 해설사와 함께 입장한다.
옥류천(玉流川)과 낙선재(樂善齊)는 특별관람이다.
일반관람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 따로 돌아보는 코스.
특히 인기높은 옥류천은 후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개울.
창덕궁의 상징이 후원이라면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의 백미.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옥류천.
그에 비해 낙선재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는 않다.
하지만, 창덕궁의 후원 비원보다 짙은 사연을 가졌다.

낙선재는 낙선재를 포함해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등을 통틀어 모두 낙선재라고 부른다.
1847년(헌종 13)에 지어진 비교적 최근의 궁궐이다.
헌종은 8살의 어린 나이에 순종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재위 3년에 효현왕후를 맞았으나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 계비의 간택이 있었다.
헌종은 관례를 깨고 간택에 참여,
하지만 자신이 마음을 둔 경빈 김 씨가 아닌
마음에 없는 효정왕후가 새 왕후로 결정되었고
효정왕후가 3년 동안 후사의 기미가 없자 헌종은
이를 핑계 삼아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 씨를 위해
헌종이 직접 지은 궁궐 속의 궁궐.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와 사랑채 역할
석복헌은 경빈 김 씨의 처소로 쓰였다.
수강재에는 헌종의 할머니이자
선대왕 순조비 순원왕후가 기거.
또한 그 사이에는 6각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상량정),
숙종 때 지은 취운정(翠雲亭) 등 전각 주변에 후원 조성.
계단식 정원인 화계도 꾸몄고
그 공간마다 헌종과 경빈김씨의
애틋한 사랑이 피어났던 곳이다.
두 사람은 헌종 13년에서 15년까지
2년 정도 같이 지내면서 애틋하게 사랑.
헌종은 예술을 사랑한 낭만적인 왕이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대리청정 4년 만에 세상을 떠난
익종의 비 신정왕후는 그런 아들을
‘낮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옛 분들의 서첩을 사랑했다’ 기억.
헌종은 경빈김씨 곁에서
서화와 유필을 벗 삼았으니
삶이 쓸쓸하지는 않았으리라.
구구절절한 왕의 로맨스.
헌종은 선진문물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삶은 검소한 왕이었다.
낙선재는 이를 반영하듯 단청이 없다.
소박한 멋스러움이 은은하게 풍겨나온다.
다만 창살의 무늬가 많고 만월문과 꽃담 등이
단청을 대신해 낙선재 공간을 아름답게 꾸민다.
낙선재는 순원왕후와 경빈 김 씨에 대한 헌종의 애정.
그 애틋한 사랑이 지난 후에는 쓸쓸한 역사의 흔적들.
수강재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가
1989년까지 28년간 기거하다가 운명한 곳.
그녀가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38년 만에 귀국하기까지 삶을 어찌 말로 다할까.
죽음 같은 마음 속에게 수강재 삶인들 평탄했으랴.
석복헌에서는 조선의 27대 왕인 순종의 비이자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살았으며,
낙선재는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기거.
이곳에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역사가 잠이 들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59호)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고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운명.
순정효황후
순정효황후 (1894년(고종 31)∼1966년)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 장례식
1963년에 귀국한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황태자 이구 순정효황후 이방자 여사 줄리아 여사.
덕혜옹주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가
1962년 낙선재로 들어와 1989년 사망.
낙선재 꽃담
낙선재는 창경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었으나
근래 창덕궁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헌종 12년(1846)에 건립한 것으로
본 건물에 접속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등 3개의 건물을 총칭하여 낙선재(樂善齋)라 부르고 있다.
정문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낙선재 남행각(南行閣) 12칸.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뒤로 낙선재가 있다.
정면 6칸 중 우측 한 칸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누마루
장대석 기단 위에 방형(方形) 초석과 기둥을 한 주택 풍.
수령 750년 고목.,향나무.
조선왕조 519년 역사
그전 베일에 가려진 역사를
품고 있는 수령 약 750년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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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원전(璿源殿 : 보물 제817)
종로구 와룡동.,창덕궁 선원전.
조선시대 어진을 모셨던.,궁전.
태조와 '현 왕(現 王) 4대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셔놓고 왕이 직접 수시로 가거나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祠堂).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궁궐에서는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정.
왕이 선원전으로 갈때
머무는 양지당이 있었다.
양지당 남쪽에는
약방으로 불리는 내의원과
옥당으로 불리는 홍문관이 있었다.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고
홍문관은 궁궐에서 보관하는 서적을 관리하고
학문과 글짓기를 연마하는.,왕의 자문 담당 관서(官署).
창덕궁 궐내각사
조선시대 궁궐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를 다 통털어.,궐내각사.
일제강점기 궐내각사는 모두 사라졌다.
창덕궁 후원.
궐내각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빈자리에 남게된 창덕궁 후원.
오늘날, 창덕궁의 경내는
조선시대 옛모습이 아니다.
창덕궁에서 바라본.,낙선재.
창경궁과 종묘는 80년간 견우와 직녀 사이처럼
율곡로 차도 위로 육교를 통해 이어진 상태였고
이 육교에서는 낙선재 일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육교 건너 바로 보였던.,낙선재.
낙선재 오른쪽 담 넘어에 창경궁.
낙선재 왼쪽 담 넘어 창덕궁이었다.
낙선재 담 뒤로.,비원(秘苑) 가는 길.
조선시대 낙선재는 구중궁궐 중심부.
1931년부터 85년간 차도, 육교 변에 위치.
낙선재는 창경원 관람객들 소음에 시달리고
구름다리 육교에서 관람객 시야에 드러났던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자 여사.
줄리아 여사.
덕혜옹주.
세 분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살던 곳.
조선왕조 519년
'비운의 역사'가
마감된.,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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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인 ‘창덕궁, 창경궁’은
1931년까지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하나로 연결.
그러던 공간이 일제때 중간에 차로가 놓이고
이동수단으로 구름다리 육교 하나가 통로였다.
'돈화문 삼거리~ 원남 사거리' 260 m 율곡로 구간.
2011년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 기공식.
2014.4.8. '창경궁, 창덕궁~종묘' 율곡로., 지하터널 공사
2013.11.14 종묘 담장길.,공사현장.
2014.02.08 지하차도 300m '지하차도'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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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번지.
창덕궁(사적 제122호) 낙선재.
'조선 24대왕' 헌종(1834~1849) 때 지은.,낙선재.
헌종은 효명세자 아들로 세손이 순조 왕위를 계승.
헌종은 '할아버지' 순조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았다.
순조는 정조가 뒤늦게 얻은 늦동이 아들이며
순조가 정조 뒤를 이었을때 나이는 불과 11세.
그리하여, 영조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그로 인해 정조때 강화된 왕권은 물거품이 되었다.
훗날, 순조도 아버지처럼 왕권을 세우려했지만 실패.
'순조 아들' 효명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서거.
그리하여, 순조의 손자인 헌종은 8살에 즉위하여
'할머니의 긴 수렴청정' 세도정치의 방자함을 체험.
헌종은 친정에 나서면서부터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듯.
정조의 개혁정치를 이어받고자.,낙선재 건립.
'헌종'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가 세운 규장각 소주합루 옆에.,낙선재 건립.
규장각을 중심으로 정사를 폈던
정조를 본받아 낙선재에 기거하며
서책을 가까이 했던 점 등이 그 근거.
낙선재 바로 옆에 석복헌(錫福軒)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해 후궁 출신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를 가까이 머물게 한 것도 그 근거.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헌종의 포석.
세자를 보기 위하여 후궁을 들인 헌종으로서는
후궁인 어미가 원자의 권위에 흠이 되지 않게 배려.
그러나, 헌종의 그러한 꿈도
그후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고 조선은 결국 망했다.
낙선재 권역은 왕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머물다가 스러진, 망각의 공간으로 전락.
문화재청이 낙선재 내 서복헌과 수강재를 개조해
‘궁(宮) 스테이(stay)’ 시설로 개방하는 안을 추진 중.
이방자 여사 & 덕혜옹주
좌측.,옛 보모상궁 그리고 덕혜옹주.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1901∼1989)가
1989년까지 살았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일대.
고종.
덕혜옹주
최근 복원된 경복궁 내 외소주방(外燒廚房)을
본래, 기능을 살려 조리시설로 개조할 것을 검토.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2017년 시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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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지은 창덕궁 내 건축물.
원래 인조 때에는 동궁 터였고 창경궁에 속한 낙선당.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1847년(헌종 13) 중건된 궁궐 내 사대부 주택형식 건축물.
원래, 처음에는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지었으나
이듬해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했다.
즉, 헌종이 사랑하는 경빈김씨와의 후사를 얻기 위해 지은.,낙선재.
빈이 왕세자를 낳아 조선왕조를 이어 가길 바랐던.,헌종.
그러나, 애석하게도 헌종은 후사를 얻지 못하고 1849년 운명.
당시 궁궐 내 사대부 민간주택 형식 건물로는 낙선재 뿐이었다.
그후, 고종 때 비원에 연경당을 지어 궁궐 내 민간 주택은 2곳이다.
낙선재는 별궁 집무실 겸 거소로.,연경당은 별궁의 연회장으로 사용.
오늘날, 창덕궁 비원의 별궁으로서 관람할 수 있는.,낙선재와 연경당.
고종 황제는 하야 후 낙선재에서 지낸 바 있고,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는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에 이곳 낙선재(樂善齋)에 잠시 머물렀다.
이곳은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 남쪽 경계.,동궁(東宮) 터.
인조 때는 저승전(儲承殿)·경극당(敬極堂)·낙선당(樂善堂)·
숭경당(崇敬堂)·시민당(時敏堂) 등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그뒤 이곳은 몇차례나 불이나 복원이 반복되었고.
고종 때 낙선재를 비롯한 건물들이 일곽을 이루었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비원과 종묘' 중심에 위치.
낙선재는 조선왕조 5백년동안 이곳 아래 동궁이 위치.
종묘에서 역대 선왕들의 추모 의식을 준비하는 제례 공간.
낙선재 아래 창경궁은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등이 태어난 곳.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낙선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시 받는 공간.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한 공간.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다 운명했고
1963년 귀국한 영친왕& 이방자는 1970년& 1989년 생을 마감.
덕혜옹주 역시 일본에서 어려운 삶을 보내다가
'1962년 귀국, 1989년 운명 전까지 수강재에 기거.
한 오백년 조선왕조의 무덤으로 전락된 공간이었다.
'그무렵 정치적으로
조선 왕실과 일본 사이에서
어떠한 사연들이 벌어졌던걸까?'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
그리고, '종묘와 창경궁' 경계에 위치해 있다.
즉, 창덕궁, 창경궁, 종묘, 비원을 아우르는.,중심.
1915년 일제때 도로가 열려 길가에 위치.
일제 강점기에는 비원에 속한 별궁.,낙선재.
조선왕실 해체 후, 이왕(李王)이 기거한.,별궁.
좌측 낙선재, 우측 석복헌 & 수강재가 연이어 있고
뒤편에 화초, 석물, 굴뚝. 화계, 그 위에 꽃담이 있다.
그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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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낙선재는 1847년 헌종 때 지은 낙선재를 그대로 복원.
오늘날은 1848년 준공한.,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낙선재 부속 건물들을 포함하여, 낙선재(樂善齋)라고 칭한다.
현종 때 낙선재는 왕의 거처,
그당시 석복헌은 왕비의 거처,
그리고, 수강재는 대비 거처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 1917년 화재 때에도 2년 뒤에 복구
이때는 일인들이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뜯어다 다시 짓고,
일부 건물은 형태나 규모를 개조하고 양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지 2년 뒤인 1912년에는
창경궁 내 인정전 등을 일반에게 관람하도록 하였다.
1909년부터 1983년까지는 창경원 공원이었던.,창경궁.
창경원에는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이 있었고
춘당지는 여름에 스케이트장, 겨울에는 보트장.
벛꽃이 만개할 때, 전국적인 유흥 명승지.,창경원.
행락 인파로 사계절 시끌벅적했던.,창경원.
일제 강점기 창경궁의 후원이었던.,비원(秘苑).
'비원의 별궁' 낙선재가 이왕가(李王家) 거처가 된 것.
즉, 조선왕실 해체 후, 창덕궁 낙선재로 쫓겨나게 된 것.
1904년 '비원'으로 불리우며
낙선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은
1926년 향년 53세에 낙선재에서 운명했고
'순정효황후'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종묘에서 육교 건너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길목.,낙선재.
비원과 창경궁 담 사이에 갇혀, 담 넘어 바라보이는.,낙선재.
조선왕조의 마지막 전각이자 이왕가(李王家) 최후의 역사현장.
조선시대 창경궁의 구중궁궐 후원 속 낙선재.
일제 강점기에는 길거리로 나와 앉은 격이 된 것.
'창경원 소음에 시달리고 도로 소음에 시달렸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울 좋은.,별궁.
창덕궁 낙선재.,'이왕가(李王家).,거소.'
1907년 12월 조선의 11세 황태자 영친왕은 불모로 일본 행.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화된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53세 운명.
순정효황후, 윤비는 43년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랜다.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 '순종'의 황후.
1910년 한일합방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춰 쥐고 통곡.
숙부 윤덕영에게 옥쇄를 빼앗긴 통분을 겪었던 비운의 왕비이다.
1950년 6.25 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해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
말년에 '대지월' 법명을 얻고 1966년 2월 3일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
낙선재 석복헌에서 운명 후, 순종이 안장된 유릉에 합장된.,순정효황후.
1945년 8.15 광복 후 낙선재는 시민에게 일부 개방.
1980년에는 그동안 훼손되었던 궁내 시설을 정비하고
창경궁의 관람을 제한하여 옛 궁궐의 면모를 지켜나갔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살다 1963년에 귀국한
고종의 일곱째아들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은)과
이방자 여사 부부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영친왕은 1945년 8.15 이후부터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왕조가 부활할 것을 우려해 거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당시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영친왕은 1970년 74세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고
이방자여사도 낙성재에서 1989년에 타계 하였고,
그후, 낙선재를 복원 보수공사 후, 2006년부터 공개.
낙선재 영역.,건물 평면도.(2006년 공개)
낙선재 내 수강재는 원래 상왕의 거처.
세종이 부왕 태종을 위해 마련한 수강궁.
세종 재위 4년에 수강궁 수강재에서 운명한 태종.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궁궐은 이궁(離宮) 체제로 출발.
왕은 개인 사정, 기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궁궐을 선택.
태종 이방원은 경복궁을 늘 꺼림직하게 여겼다.
왕위 쟁탈을 위해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죽인 곳이고
정적인 정도전이 주도하여 건설한 법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태종이 경복궁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1411년(태종11년) 창덕궁에 머물며 경복궁 명당수(明堂水)를
흥례문 앞 금천(禁川)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풍수지리 형국을 보완.
'서출동류(西出東流)' 명당수(明堂水)를
경복궁(景福宮) 금천(禁川)으로 유입한 것.
백두대간의 정기를 품은.,백두산 천지.
'명당수' 천지(天池)는 두만강의 발원지.
서출동류 명당수는 두만강 발원지에서 유래.
경복궁의 명당수는 백악산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 따라 흐르다 영추문 근처에서 꺾여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지나 청계천으로 유입된다.
청계천은 1406년부터 자연 하천의 바닥을 쳐내
넓히고, 그 양안에 둑을 쌓아 건설한 인공 개천(開川)
태종이 '1411년 12월~1412년 2월 15일' 토목공사로 완공.
1412년(태종12년) 경복궁에 경회루를 건축.
외국 사신들과 조정 대신들을 위한.,연회장.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 면모를 갖춘.,세종 8년(1426년)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門)과 다리 이름을 지어 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수재교(永齊橋).
1394년 경복궁 창건할때는 조선 건국 3년 후, 였지만
경복궁에 교태전이 없었고 세종 때 건축한듯 추정된다.
경복궁에서 가장 깊숙하고 중심에 있어 중궁전(中宮殿).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산실' 교태전(交泰殿)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경복궁 집현전(수정전)에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국권피탈과 함께 조선총독부 설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까지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건물.
1945년 9월 9일 정식 항복조인식까지 존속하였던 일제 침략기관
1912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로 결정
설계 : 독일인 게오르그 라란테. 1916년~1925년 완공.
근정전을 제외한 전각 19채,대문 중문 22개, 당 45개 해체.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상에서
역대 왕들은 이궁을 옮겨다니면서
정사를 펼치고 거소를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낙선재.
조선시대 세곳의 영역은 대를 이어 보존.
낙선재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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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재위 때 세자를 위해 건축했던.,동궁 터.
'인조 생신때 세자가 비(妃)와 함께 동궁에서
직접 전복만두를 빚어서 새벽 문안을 드렸다.'
'영조때 무신' 구수훈(1685~1757)이 남긴 기록.
인조는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즉위 후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실시하는 가운데
'정묘효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왕(1623 ~49 재위).
조선 16대 인조는 '잦은 전란으로 인하여
심신이 늘 허약한 상태였기에 몸을 추스리는데
전복만두 만큼 입맛에 맞는 음식은 없었다.' 전한다.
훗날, 소현세자는 비운의 왕세자로서
부왕인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만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꿈꿨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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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재는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 후.,상왕으로서 기거한 곳.
단종이 이곳에 기거하다가 영월로 떠났고, 세조가 승하하였다.
세조는 생전에 "단종을 폐위한 업보로 문둥병을 얻었다." 늘 자책.
그후, 정조가 1785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서재로 재건축.
효명세자가 1827(순조 27)년 대리청정(代理聽政)할 그당시 별당.
동쪽 문을 중춘문(重春門), 서쪽 문을 '수강문(壽康門)'이라 하였다.
동궐도에는 두 개의 편액이 있는데
동쪽이 수강재, 서쪽이 경녕루(慶寧樓)
그 뒤편의 북쪽에는 취운정(翠雲亭)이 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후, 낙선재는 고종의 집무실.
'1926년~1989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족들이 기거했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 보물 제 1759호로 지정된.,낙선재.
'정면 6칸, 측면 2칸' 한옥.,낙선재(樂善齋).
즐거울 樂, 착할 善, 재계 할 齋.,낙선재(樂善齋).
원래, 상(喪)을 당한 왕비나 후궁이 기거하던 거소.
창덕궁 내에서 종묘(宗廟)와 가장 인접한 곳.,낙선재.
위치 상.,'창덕궁, 창경궁 & 종묘'의 구심점.
'樂善齋' 현판은 청나라 섭지선(葉志詵 :1779-1863) 글씨.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翁樹崑) 글씨로 청나라 당대 명필가.
이들은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금석학자 서예가.
추사 김정희는 흥선대원군의 스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년~1898년).
낙선재(樂善齋)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는
훗날,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의 영향력 일까?
아니면, 추사 김정희가 조선왕실에 끼친 영향력일까?
1864년(고종 1년) 준공된 운현궁의 노락당 & 노안당.
고종을 수렴청정한 조대비가 내린 국고(國庫)로 지어졌다.
조대비는 고종을 수렴청정,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10년 간 섭정.
수강재는 고종을 수렴청정한 조대비가 기거한 곳.
당시, 낙선재는 고종을 섭정한 흥선대원군의 집무실.
낙선재 영역에서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 국정을 조율.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집무실로 정하고
고종은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낙선재에서 접견하였다.
1917년 창덕궁 소실때 순종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원래 낙선재 영역은 국상을 당한 왕후, 후궁들의 거소.
상중에는 소복 차림으로 왕후, 후궁들이 낙선재에서 기거.
따라서, 왕후 및 후궁전에 속한 상궁들까지 함께 이곳에 기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체결 후, 대한제국 멸망.
순종은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강등.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낙선재에서 승하.
'1874년(고종11) ~1926' (향년 53세).,순종.
1926년 순종 사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한.,석복현.
1945년 8.15해방 후, 일본왕족으로부터 축출 당한 이방자 여사.
1963년 '의식불명' 영친왕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기거하였다.
영친왕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기거했고
이방자 여사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기거.
1962년 덕혜옹주가 수강재로 들어와 1989년 운명.
1989년 4월 덕혜옹주가 운명을 달리 한 지 한 달 후
이방자 여사도 낙선재에서 비운의 생애를 마감했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인이기 이전에 영친왕의 부인이었다.
조선 왕족의 기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
생전에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일본을 대신하여 수없이 사과.
1963년 한국인으로 국적을 취득한 후 사망할 때까지
한국을 위해, 한국 국민을 위해 많은 사회사업을 했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전부인 줄리아 여사도 잠시 기거.
이구는 독일계 미국인 딸인 줄리아 여사와 1958년에 결혼.
뉴욕의 아이엠페이(IM)의 건축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1963년 이구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
그러나 1977년 이후 별거 상태였다가 이혼
조선왕실의 친족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외국인을 왕족의 대열에 끼워둘 수 없다는 것.
일본의 한 호텔방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던., 이구.
전남편 이구의 장례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던.,줄리아 여사.
CJ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 '마지막 황세자비'주인공.
'조선왕조' 이왕가(李王家) 여인들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었던 거소.,낙선재.
상량(上凉)이란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뜻이다.
정자가 높은 곳에 시원스럽게 앉아 있음을 고려.
'동궐도형'에는 평원루'였는데 순종 때 개명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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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영역은 본래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수강재 옆에 있는 높은 담 너머가 창경궁이다.
이곳 높은 담은 '덕혜옹주가 기거하면서 세워졌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공주.,덕혜옹주.
1960년대 초 창경원에 놀러온 사람들이
수강재 근처에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자
경계를 가르기 위해 높은 담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창덕궁의 정문(正門)
돈화문을 통해야 낙선재에 갈 수 있다.
원래, 석복헌 동쪽에 있던.,수강재(壽康齋).
세자궁이었으나 낙선재를 지을 때 개조하여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순조 비)의 처소로 활용.
육각형 정자.,상량정(上凉亭)
상량전(上凉亭)은 원래, 평원루(平遠樓)였다.
낙선재(樂善齋)의 헌종이 평소 즐겨 찾던.,서재.
일제 강점기 창덕궁을 감시한 조선총독부 경찰서.
한일합방 후, 조선왕실이 해체되고 난 이후
순종은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거주.
비원에서 활을 쏘기도 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비원(秘苑)'은 그무렵 일제가 처음 사용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일제 때 명칭을 현재까지 그대로 쓰고있다.
이제는 '조선시대 금원(禁苑)'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정당.
낙선재 뒤뜰에는 상량정 곁에., 한정당(閒靜堂).
당호는 '한가롭고 조용하게 지내는 집'을 의미한다.
일제 때 세워졌으며 문은 유리로 마감되고 바닥은 타일.
<동궐도형>, <조선고적도보> 배치도 상 이곳은 빈터였다.
1917년 창경원 공사때 창경궁에서 옮겨지은 건물인듯 싶다.
한정당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원래 어디에 있던 건물일까?
'혹시, 이왕(李王)의 거소 용도가 아니었을까?'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 같다.
기단에 설치된 두 개의 계단 사이.,정료대(庭燎臺)
조선왕실을 뜻하는.,'오얏나무(李) 꽃무늬 철물' 난간.
조선왕실의 해체로 이왕(李王)으로 격하된.,순종.
순종 사후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1917년 이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한정당.
외관은 한옥이나, 유리문 타일바닥은 서양식 요소.
1912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로 결정 후
근정전을 제외한 전각 19채,대문 중문 22개, 당 45개 해체.
1916년~1925년 완공. 1917년에 창덕궁 인정전이 소실되었다.
이때, 순종이 낙선재로 잠시 거처를 옮긴 기록.
1923년에 낙선재에서 운명했던.,이왕(李王) 순종.
................................대한제국 순종............................
1907년 7월 일제 강요에 의해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
황태자로 영친왕을 책립후,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전.
순종의 재위기간 4년은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 무력강점 공작기간.
송병준(宋秉唆)·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
순종 즉위한 1907년 7월 일제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강제로 체결.
대한제국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차관정치를 시작.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 버렸던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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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운정
한정당 옆에는 취운정(翠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하지만,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관람객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곳은 원래, 취선당 터 아닐까?'
숙종이 한때 몹시 사랑했던.,장희빈.
그래서, 취선당을 지어 하사했던.,숙종.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옷이 되어주마.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옷."
"아들을 낳아라. 그리하면 어릴때,
내가 너에게 약속했던 옷을 만들어주마.
미천한 신분도 하얗게 세탁되는 옷.,백당의."
그러나,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숨진.,취선당.
그후,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그 건물 옛터.
훗날,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위한 조치였을까?
숙종 8년에 '2살 연상녀' 장희빈을 위해 지은.,취선당.
숙종 18년에 애련지 방지에 애련정 & 불로문까지 건축.
1701년(숙종 36년) 그녀가 숨진 후 사라진.,방지와 애련정.
현재, 애련지 북쪽 끝에 있는 정자 애련정.
숙종 때 연침공간으로 쓰였던 것과는 다르다.
하여, 비련(悲戀)의 맥이 끊긴.,애련정(愛蓮亭).
창덕궁 취운정(翠雲亭).
숙종 12년(1686) 건립되었고,
1820년 <동궐도>에도 발견된다.
담 아래 창경궁 한정당과 이웃 위치.
수강재 뒷편 언덕 위에 있어
창경궁 안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원래, 취운정은 왕이 행차때 묶는 숙소.
관람객에게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곳.
^창덕궁., 취운정. 창경궁.,함인정(涵仁亭) ^
특히, 영조가 성균관의 유생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던 명정전 뒤편 언덕 위에.,함인정.
함인정(涵仁亭)에서 창덕궁의 취운정이 잘 보인다.
낙선재는 '창덕궁 내 왕의 정치공간' 인정전과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희정당을 지나면 닿는다.
창덕궁에서 '낙선재의 정문' 역활을 하는., 장락문(長樂門).
장락문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넓은 마당 안에 낙선재가 자리하고,
그 위쪽으로 '단청(丹靑) 문양이 아름다운 2층 정자' 상량정(上凉亭).
단청(丹靑)은 청. 적. 황. 백. 흑 빛깔로 목조건물에 그린 무늬.
건물장식 외 비바람에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상량정
상량정은 장락문(長樂門) 안에 있지만
낙선재(樂善齋) 영역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원래 창덕궁에 속하는 별도 용도의 정자.
낙선재는 창덕궁의 다른 건물들과는 빛갈부터 구별된다.
낙선재에는 단청이 없으므로 단아하고 질박한 느낌이 든다.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드러내기 위해 단청을 배제한.,헌종.
꾸밈 없는 첫인상 때문에
'수수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낙선재는 은근하게 멋스러운 건물.
낙선재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 지붕은 홑처마인데
본 건물만 서까래 위에 서까래를 잇대어 단.,겹처마
평상시 관람객을 위해 항상 문이 열려 있어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문양이 단순하지 않다.
서양 추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입체감과 조형미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낙선재와 석복헌 사이에 담도 특이하다.
거북의 등껍데기와 닮은 귀갑문이 있다.
거북처럼 왕이 만수무강하길 기원하는 장식.
또 누마루 아래 얼음이 깨져 있는 듯한.,빙렬문(氷裂文)
안쪽에 아궁이가 있었는데, 화마를 막기 위해 고안한 장치.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고 있으며, 누마루 안에는 동그란 만월문.
낙선재 뒤뜰에는 화계(花階)가 마련되어 있다.
화계는 수목을 심은 층계 형태의 단을 의미한다.
낙선재 뒤뜰을 거닐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청나라 영향을 받은 화려한 창살 문양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내포한 괴석 탓일까?
괴석을 받친 기단에 봉황(鳳凰)이 새겨져 있다.
괴석분 글귀.
소영주 (小瀛州).
'신선이 사는 곳'뜻말.
봉래(蓬萊)는 '금강산(봉래산)' 산신.
방장(方丈)은 '지리산(방장산)' 산신.
영주(瀛洲)는 '한라산(영주산)' 산신.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삼신(三神) 중에서.,작을(小) 영주(瀛洲).
소영주는 '아기의 점지와 해산을 맡는.,삼신.
‘산신(産神)’·‘삼신할머니’ ‘삼승할망’이란.,포태신.
‘삼줄’·‘삼가르다’ 등 ‘삼’은 포태(胞胎)를 의미한다.
즉, 아이의 수명과 질병을 관장하는 가신(家神).,소영주.
조선시대 '제주도의 별칭'.,영주(瀛洲)
괴석에 새긴 글귀..,雲飛玉立(운비옥립)
' 구름이 흐르고 옥돌이 서있는.,신선세계'
괴석 옆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 글자가
음각된 정사각형의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금사연지(琴史硯池)'에 담긴 뜻말은 무엇일까?'
'거문고를 연주하고 역사책을 읽는 벼루 같은 연못.'
원래, 연지(硯池)는 벼루 앞쪽에 패인 곳을 뜻하는데,
금사연지 뜻말은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담아두는 연못.'
뒤뜰의 굴뚝은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굴뚝을 받치고 있는 구조물에는 장수 '壽' 자가 있다.
낙선재에 딸린 석복헌과 수강재는 왕실의 여성이 거주.
규모는 낙선재와 비슷하지만,
앞마당이 좁아서인지 조촐하다.
낙선재와 뒤뜰을 공유하는 석복헌은
'ㅁ'자 형태로 행각이 에워싸고 있다.
석복헌 마루 난간에 있는 호리병 장식.
헌종이 경빈김씨의 다산을 염원하는 장식.
석복현에는 부엌이 없기에 음식을 데우고
상을 물리는 퇴선간(退膳間)이 설치되었다.
석복현 곁에 있는 수강재는 역사가 긴 건물이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 머물기 위해 지었고,
폐위된 단종이 상왕으로서 잠시 생활하기도 했다.
헌종은 할머니를 위해 수강재를 중수.
순원왕후는 아들과 손자를 일찍 잃었고,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했던 대왕대비였다.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이 왕좌에 올랐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조의 비' 순원왕후였다.
안동김씨 순원왕후는 손자 헌종과 철종을 수렴청정.
그 막후에서 막강한 세도정치를 편.,안동김씨.
조선의 운명을 좌우한 국모의 거소로는 간소하다.
아쉽게도 수강재 후원은 미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철종 8년에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자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가 대왕대비.
흥선군은 '풍양 조씨' 신정왕후에게 접근.
후사가 없는 철종이 붕어하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지명해 달라고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철종과 항렬이 같은 자신보다는
나이가 어린 둘째 아들인 명복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1863년 12월 철종이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이하응의 차남' 명복이 고종으로 즉위.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정치일선에 나서게 된 것.
명복이 고종으로 즉위하자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고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이 되었다.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었던 흥선군의 사택
고종의 잠저인 운현궁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중심으로 부상.
흥선군의 사택을
잠저 운현궁으로서
거듭나게 한.,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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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위치.
맨 좌측에 낙선재, 그 우측에 석복헌과 수강재가 있다.
그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화계.
'4단 화계, 꽃담, 굴뚝 4개' 후원은., 왕비(王妃)의 영역.
그러므로, 낙선재는 조선 역대 왕들이 즐겨찾던 왕(王)의 영역.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 중건된 궁궐 내 사대부 주택형식 건축물.
'헌종은 왜 이곳에 낙선재를 중건한 것일까?'
그위 꽃담 너머로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 있었던 건물이었지만
현재, 창덕궁에서 관리하며 그 이웃에 중희당과 수강재.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있던 건물.,중희당(重熙堂)
중희당은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전각으로
월대를 끼고 있던 동궁의 중심 건물로 규모가 컸다.
'헌종은 경빈김씨가 세자를 잉태하길 바란걸까?'
낙선재가 들어서기 전, 이곳 영역은 세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1756년(영조 32) 불탄 기록으로 보아 영조 때 존재했던 건축물.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 거처였던 '취선당 터가 아닐까 추정된다.
즉, 취선당은 낙선재 구역인 저승전(儲承殿) 서쪽에 있었다.
취선당은 숙종의 후궁(後宮) 희빈 장씨(禧嬪 張氏) 거처(居處).
희빈 장씨의 아들이 조선 20대 경종이 되어 꽃담장에 화계를 조성.
'한때, 왕비였던 어머니를 위해 화계를 쌓은걸까?'
경종은 후사가 없어 숙빈 최씨 아들이 '영조'로 즉위.
화계는 왕비의 침전 위에 화려하게 조성하는 4단 후원.
창경궁에는 역대 후궁이 출산한 왕들이 남긴 흔적이 많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의 궁녀였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모함에 걸려 폐비가 되었을 때도
계속 울먹이면서 잘 먹지 않으면서 상전을 수족처럼 모셨다.
인현황후의 생일 전야, 교교한 달밤에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궁궐 뒤뜰을 산책하던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고 '숙빈'에까지 오른다.
무수리 "동이~"였던 숙빈 최씨는 영조의 어머니.
조선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효심이 깊은 왕.,영조.
숙빈최씨 생모를 위한 사당 칠궁(七宮)을 건축한.,왕.
그 영조가 궁녀였던 영빈이씨 처소에서 잉태한 사도세자.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난 영춘헌 곁.,집복헌.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처소였던 곳.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 등 후궁들이 머물던 처소.
1790년 순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왕의 집무실' 인정전과 가까운 곳에 위치.
왕에게 사랑 받던 후궁 처소.,집복헌(集福軒).
'인정전 정문' 인정문(仁政門).
인정문 곁 뒤주 속에 8일 동안
갇혔다가 숨을 거둔.,사도세자.
원래, 인정문은 왕이 즉위하는.,문(門).
그곳이 사도세자에게는., '죽음의 문(門)'
'생각할 思, 설워할 悼'.,사도세자의 문(門)
정조의 집무실로 쓰였던 장소이자 승하한 곳 또한 영춘헌.
정조가 어린 세자 시절에 글을 읽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영춘헌과 붙어 있는 집복헌은 사도세자가 태어난 후궁의 처소.
후궁에는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등
정1품에서 종4품까지였다. 상궁은 정5품 사무관 궁녀
상궁이 되면 '각심'이란 비녀와 침모가 한 명씩 딸린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궁으로는 성옥염 상궁.
김명길, 박창복 상궁과 함께 순종 왕후 윤비를
끝까지 모신., 성 상궁은 윤비의 3년상을 마치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나와 쓸쓸히 살다가 운명했다.
남긴 재산이라고는 "몸뻬" 허드렛 바지 2벌 뿐이다.
내의 몇벌과 2만 3천원이 든., 낡아빠진 지갑이 전부.
"저 세상에서도 윤비를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 - 유언.
고인의 위패는
윤비의 위패가 모셔진
강릉 백운사에 함께 있다.
순정효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모시던 상궁들은 모두 낙선재를 나왔다.
이 가운데 박상궁과 김상궁은 친척집으로 갔지만,
막내 성옥염 상궁은 동대문 밖 보문사 시자원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순정효황후의 위패가 안치된 백운사로 가려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구니절인 보문사로 들어간 것이었다.
살아 생전 성상궁과 박상궁은
매년 백운사에 제사 비용을 보내어
순정효황후의 기신재를 치러주길 부탁했다.
.........................순정효황후..............................
1894년 음력 8월 20일/양력 9월 19일 (水) 한성부 출생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
1907년 부군 순종이 황제로 즉위
그녀는 황후가 되어.,순정효황후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듣다가
친일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던 일화의 주인공.
1950년 6.25 당시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킨 순정효황후.
인민군이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자 호통을 쳐 내보냈던 일화.
56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몰랐던 여걸.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
1953년 휴전 협정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이 두려워
환궁을 막았기에 정릉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겼다.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
그의 노력으로 순정효황후는 낙선재에 환궁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순정효황후.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실력은 타임지를 읽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
...................................................................
1966년 순정효황후 장례식
낙선재 동쪽에 걸린 현판 寶蘇堂(보소당)은 헌종의 친필.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아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는 '조선 23대 왕' 순조의 아들.
보소당(寶蘇堂)은 낙선재를 건립한 헌종의 당호(堂號)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란 뜻.,보소당.
1847년(헌종 13)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축물.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반 후 헌종은 운명.
현종은 재위15년 동안에 두 외척 간 세도정치 속에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 간의 협력과 경쟁이 반복.
헌종은 왕권강화를 이루고 못하고 8세 즉위 후, 23세 요절.
현종의 재위기간 15년 내내 계속된.,두 외척의 세도정치.
1839년(헌종 5) P. 모방 등 프랑스 신부 및 천주교도를 처형.
말년에 영국·미국·프랑스 군함들이 통상, 천주교탄압중지 요구.
내영(內營)·총위영(摠衛營)의 설치로 군사력을 양성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왕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재위년간 전국에 전염병, 홍수, 재해 삼정문란으로 민란 빈번.
헌종은 23세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운명.
그러나, 고종 때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 용도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 정문' 장락문(長樂門) 편액은 흥선대원군 글씨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낙선재 후원에는 장대석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 지붕을 얹은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 상량정(上凉亭)과 서고, 서쪽에는 소주합루.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
일제강점기에는 '상량정'으로 바뀌었다.
상량정 뒤에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
상량정 정면은 나무판을 세로로 세워 만든 판벽이고
좌우 벽은 궁장을 쌓는 것처럼 돌과 벽돌로 장식했다.
상량정에는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만월문(滿月門 )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들어가는.,만월문
소주합루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
조선 후기 궁궐에 등장하는 청나라풍 요소의 대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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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24대 현종은 왕비와 사별 후 계비를 맞이하면서
역대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지막 3간택까지 참여하여
3명의 간택 후보자 중에서 한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간택 결정권자인 대왕대비가 명현왕후 홍씨를 간택하여
계비로 맞이한지 3년이 지났어도 왕자가 생산되지 않았기에
3년전부터 현종이 마음에 두었던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였다.
헌종은 낙선재와 석복현을 지어
낙선재는 자신의 서재겸 사랑채로 쓰고,
석복현은 '경빈 김씨'의 처소로 사용하였다.
...............................경빈 김씨....................................
1832년(순조 32년)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悠然堂)에서 탄생
1847년(헌종 13년) 순원왕후가 헌종이 나이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 간택한 후궁으로 이해 음력 10월 20일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다.
.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순원왕후, 신정왕후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에게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6월 1일 향년 76세로 별세
고종은 깊이 애도하고 조문을 직접 지어 내렸다.
7월 5일 양주 휘경원에 예장(현재, 서삼릉 귀인묘역)
......................................................................
왕이 후궁을 위해 궐에 건물을 짓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1년반 후, 현종이 승하하여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헌종의 지극한 사랑은 불과 1년 반 만에 끝났지만 낙선재는 남았다.
계비 왕후홍씨 간택할 당시
최종단계에서 탈락한 궁인김씨
그후, 왕이 직접 선택한 경빈김씨.
현종이 17 때 맞이한 왕비가 승하한 후 계비 간택 때
현종이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던 처자.
하지만, 대왕대비와 왕대비 층층시하에서
계비를 간택할 결정권이 없었던.,젊은 현종.
새 왕비이자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왕자를 갖지 못하자
대비는 그때서야 헌종이 마음에 둔 처자를 후궁으로 간택.
창덕궁 낙선재는 바로 그 해에 지어져 헌종이 거처하였다.
다음해인 1848년 바로 옆에 지은 석복헌은 경빈김씨 처소.
낙선재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단아한 상량정이 나온다.
이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낙선재와 석복헌은 참 아름답다.
헌종과 경빈 김씨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봄꽃처럼 피는듯.
창덕궁 낙선재는 현종이 경빈김씨를 위해 지었다.
의복, 장신구에 대한 저서도 지을 만큼., 박학한 후궁
헌종 운명 후 궁을 나왔으나 궁궐행사에 항상 초청받았다.
왕자(王子)를 생산하지 못한 후궁은
궁궐에서 살 수 없는 조선왕실의 법도.
하여, 경빈김씨는 낙선재를 나와야 했다.
그러나, 궁궐 밖에 나왔어도
생전에는 물론이고 운명한 후에도
후궁(後宮)은 '조선왕조의 왕실' 종친.
'궁중복식 책'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에 실린 경빈 김씨.
의상 감각이 뛰어난 경빈김씨는 현종과 잘 어울리는.,한 쌍.
"외모가 훤칠했다."지만, 짧은 생을 살다간.,헌종(1827-1849).
안타깝고 애석하게도 1년 반 만에 끝난 애틋한 사랑.
왕자를 낳지 못했던 경빈 김씨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현종이 첫눈에 반했던 경빈김씨
그후, 3년을 잊지 못하고 기다렸던 사랑.
그후, 1년 반만에 삶과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그후 '궁궐행사에 초청을 받을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는.,경빈김씨.
1832년 ~ 1907년 6월 1일 향년 76세로 별세.
1846년(헌종 12)에 창건되었으며,
1926년 순종이 죽은뒤 순정효황후가
이곳에 은거하여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순정효황후(윤비) & 순조.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다가
친일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다.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그후부터 '상중(喪中)에 있는 후궁들의 거처'.,낙선재.
상중에 있는 왕비 또는 왕의 후궁들이 소박한 건물에서
근신하며 예를 갖추고 법도를 지키도록 단청하지 않았다.
'낙선재 대문 위에 걸린 현판' 長樂門.
'장락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쓴 친필이다.
낙선재와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 장락문.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민가 형식으로 건축했다.
궐 안에 민가 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 뿐.
낙선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
조선왕조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낙선재에 머물렀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비' 이방자 여사는 88세에 서거.
1847년(헌종 13)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낙선재.
그후, 순정효황후 윤씨,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후, 마지막 황태자 & 비, 마지막 공주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살다가 이곳에서 운명했다.
낙선재 옆으로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 모두 낙선재라고 부른다.
원래, 낙선재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 현주소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1847년에 지어졌고, 창덕궁 동쪽에 위치한 건물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종로구 율곡로.
율곡로 위로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육교 옆.,낙선재.
조선시대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 한가운데 위치.
오늘날,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
맨 좌측에 낙선재, 그 우측으로는 석복헌과 수강재.
이들 뒤편에는 화초·석물·굴뚝 화계와 그 위에는 꽃담.
왕이 평상시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연침(燕寢)
낙선재 꽃담 넘어로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있다.
왕명이 아니면 대신들도 출입할 수 없는 옥류천 구역.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을 통과해야 옥류천 출입이 가능.
낙선재는 원래 왕의 연침 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건축.
이듬해 '빈의 처소'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했다.
궐 내 민가 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 뿐.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 경빈김씨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했다.
석복헌(錫福軒)은 경빈김씨 거처이고, 수강재(壽康齋)는 대왕대비 거처.
헌종이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연침공간.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1970년 거주.
1966년~1989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해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편.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재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정면 6칸,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았다.
낙선재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1칸이 주형 초석 위에 놓인 누마루
누마루 뒤로는 온돌 1칸, 그 우측에 대청 2칸, 온돌 2칸, 다락 1칸.
다락 배면에 흔치 않은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2칸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고,
건물 뒤에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간 이동이 편리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높은 다양한 문양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 위계를 읽게 한다.
구조양식은 잘 다듬은 화강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물익공 겹처마 팔작지붕
물익공은 당초 문양으로 세련되게 초각하고
보머리와 보아지도 같은 수법으로 품위 있게 장식
주간은 소로로 수장하고, 누마루의 머름대 아래에는
아름답게 초각한 낙양이 장식되어 누 부분이 돋보인다.
상부가구는 몸채는 5량가, 누마루는 3량가로
가구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대량 위에 당초문양을
양각한 화려한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 건축물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 주택형식으로 건축
궁궐 침전 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들이 특히 주목된다.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기량을 엿볼 수 있고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
고종도 낙선재에서 지낸 바 있으며, 조선왕족의 마지막 거처.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도 낙선재에 머물렀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운명.
1963년 귀국한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2년 덕혜옹주도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사망했다.
17세.,순종효황후.
순정효황후 & 의친왕 비.
이방자 여사.
이방자 여사 & 영친왕.
이구 & 줄리아 여사.
덕혜옹주.
'대마도 번주가문 37대 당주' 쇼 다케유키 & 덕혜옹주.
'대마도 번주' 소 가문.,37대 당주.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고니시 유키나가
'그 사위이자 부장 소 요시토시'., 직계 후손.
'덕혜옹주 남편'.,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 일생에 가려진.,인물.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일본인.
소 다케유키 家 모두는
일본황실이 보이는 쪽에서
엎드려 절했으나 덕혜옹주 만
일본황실을 향해 절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의 공주인데.,
왜 일본의 공주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덕혜옹주 돌 사진.
1912년 5월 25일 덕수궁 갓난아기 울음소리
고종의 회갑 생일을 축하하듯 태어난.,덕혜옹주.
고종과 후궁인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옹주.
'회갑에 태어난 자녀는 어버이를 똑 같이 닮는다.'
1911년 황귀비를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고종.
그 즉시로,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를 내렸다.
다음날 고종이 직접 산실로 아기를 보러갔고
그 다음날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 문안인사
생후 일주일이 되는 날, 왕실 및 종척 알현이 있었다.
삼칠일 되던 날에 종척(왕실 & 외척) 및
책임관 이상 직급이 참석한 덕수궁 축하연
7월 12일에는 생후 2개월된 옹주를
아예, '고종의 침전' 함녕전으로 옮겼다.
그것도 유모를 딸려 함녕전에서 함께 생활.
하루는 옹주의 방에 불쑥 들어왔던.,고종.
젖을 먹이던 유모는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자,
"아이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대로 있거라."
황제 앞에서 유모가 누운채
젖을 물리게 허락했던.,고종.
'조선실록'에 의하면
왕녀가 태어나서 이처럼
환영을 받은 전례가 없었다.
귀국 후 어린 시절 유모였던 변복동 여사와 지내다가
1989년 4월 21일 78세에 낙선재에서 영면한.,덕혜옹주.
조선시대 왕실 유모였던 변복동 여사는.,봉보부인 종1품

......................
2017년 11월 26일
쥴리아 여사.,타계.
.........................
하와이 요양원서 쓸쓸히 떠난 94세
조선 마지막 세자빈.,'쥴리아 리' 여사.
조선왕가 마지막 세자빈 죽음은 처연했다.
타계 소식조차 열흘이 흐른
12월 5일에 뒤늦게 알려졌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이은.
그의 외아들인 고(故) 이구(李玖).
그 부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
2017.11. 26 미국 하와이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94세).
줄리아 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이구 선생을 처음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인
이오 밍 페이(I.M.Pei)의
설계사무소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했던 줄리아.
직장 동료 중에서
동양 청년을 발견.
MIT공대를 나온 건축가인 이구는
섬세한 성격으로 줄리아를 매료시켰고,
27세 이구와 35세 줄리아는 58년 결혼했다.
'외롭게 타국을 떠돌던 이구.
8년 연상인 줄리아가 엄마 또는
누나같이 의지가 되지 않았을까?'
1963년 시부모인 영친왕 내외의 요청으로
남편 이구(왼쪽)를 따라 한국에 온 줄리아 리.
이들은 이때부터 한때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단독] 하와이 요양원서 쓸쓸히 떠난 94세 조선 마지막 세자빈](https://t1.daumcdn.net/news/201712/06/joongang/20171206023106961gzh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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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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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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