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벽란도라는 거대한 국제무역도시가 있어 상업이 융성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절약과 검소를 중요시하는 유학이 조선의 국교가 되면서 상업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비단, 무명, 어물, 모시, 명주, 종이 등 조정에서 중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관영기업체 성격의 육의전이 국가로부터 독점권을 인정받고 조선시대 상업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토지는 황폐화되고, 잇단 병란과 조정의 혼란으로 백성들이 더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되자, 한양으로 옮기게 되고,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에 난전을 설치하였는데, 이 난전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성행하게 되어 독점을 누리던 육의전(市廛)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시전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난전을 단속하여 몰수하는 금난전권을 행세할 수 있었는데, 그 행위가 지나쳐 난전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고, 조정에게도 난전은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농업을 우선시하는 조선시대로써는 난전의 인정은 곧 농민의 토지 이반화를 양산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국가의 세금이 줄어 국가 재정에도 위협받기 때문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1791년 정조는 일부 품목을 제외한 육의전의 난전금지권을 폐지했다. 결국 난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상업이 영국의 산업혁명처럼 혁명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제한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국제무역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물론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 상인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는 가능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조선의 인삼이었다. 삼을 건조시켜 수분을 제거한 것이 백삼이었는데, 처음에는 청나라의 무역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으나, 백삼이 독소가 있어 배의 위를 헐게 만든다고 해서, 청나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송상에서 홍삼을 개발하게 된 것이었다. 홍삼은 6년된 인삼을 증기로 쪄서 담황갈색이나 담적갈색의 빛을 띠게 되어 홍삼이라고 불렀는데, 이 홍삼은 백삼의 단점인 독소가 제거되어 백삼때보다 더 인기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조선 최고의 거상 임상옥은 바로 이런 홍삼의 등장과 함께 탄생했다. 임상옥은 홍경래의 난이 평안도에서 일어났을 때 정부에 협조해 난을 진압하는 데 일조했고, 당시 세도가인 박종경의 권세에 힘입어 조선의 인삼을 독점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상권은 서울상인인 경상, 개성상인인 송상, 의주상인인 만상 등이 있었는데, 송상이 전국적인 체인망인 송방을 개설해 그 위세를 떨쳤으나, 홍경래의 난 때 송방의 일부 상인이 난에 협조하여 그 위세가 꺾이게 되자, 후발주자였던 만상이 그 자리를 꿰차고 조선 인삼의 대부분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의 상술 역시 뛰어났다. 청나라 상인이 임상옥이 가져온 인삼 가격을 내리기 위해 불매운동을 했다가, 임상옥이 자기 인삼을 불태우자, 이에 놀란 청나라 상인들은 달려와 막으며, 임상옥이 종전의 가격에 몇배를 부르는데도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는 사람 보는 눈도 타고났다. 홍경래가 임상옥을 찾아가 서기로 있게 해달라고 하자 당신은 상가가 아닌 조정에 있을 사람이라며 거절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임상옥은 인삼교역으로 약 1백만냥을 벌었다. 왕실비축금고가 42만냥에 불과한 점을 본다면 임상옥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 수 있다.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약이다. 정조 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무역권을 독점하였고,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는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기민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었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임상옥은 작은 집을 짓고, 그 앞에다가 채마밭을 길러 호를 가포라고 하고 시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가포집〉,〈적중일기(寂中日記)〉등이 있으며 "장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버는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