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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와 납합출(納哈出) [20만이 금산(金山)에 웅거(雄據)] [제3편]
2024년 08월 11일
○ 이성계(李成桂)…납합출(納哈出)과의 관계(關係)에 대해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중심(中心)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진실(眞實)로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인 함경도(咸鏡道) 땅에 “달단동(韃靼洞)”이 있고, 이곳에서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선조(先祖)들이 그곳 땅의 군벌(軍閥), 토호세력(土豪勢力)으로 4대(代)를 이어왔을까?
• 군벌(軍閥) : 두산백과 / 군벌[military clique, 軍閥] :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특권을 장악한 군인집단. 군대의 상층부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특권을 장악한 경우와, 출신지 ·지위 ·정책 등에 의해 조직된 군대 내의 그룹이 정치적 행동을 일으키는 경우 및 지방에 할거(割據)한 군사 집단이 독립적인 군사 세력으로 된 경우 등의 집단과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 토호(土豪) 또는 호족(豪族) : 〈지방(地方)에서 경제력(經濟力)과 세력(勢力) 등을 가진 지배(支配) 세력(勢力) 또는 가문(家門)〉을 일컫는 말이다.
「4대(代)」라면 일세기(一世紀), 일백년(一百年)을 말하는 것인데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일백(一百) 년(年) 세월(歲月) 동안 몽고(蒙古)의 총독(總督)【달로화적(達魯花赤) : 다루가치】으로 군벌(軍閥)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疑問)은, ➨ 「“달단(韃靼)”인들의 터전이나 본거지(本據地) 또는 고향(故鄕)과 같은 “달단동(韃靼洞)”이란 마을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어야 했을까?」하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가 색목인(色目人) 인종(人種)의 본거지(本據地)였다는 말일까?
여러 종류(種類)의 다양(多樣)한 색목인(色目人)들의 본거지(本據地), 원조(元祖)는 구라파(歐羅巴)요, 그중에서도 원조(元祖)는 흑해(黑海)와 카스피해[Caspian Sea] 사이의 코카서스[Caucasus] 땅이라고 과학자(科學者)들은 진작부터 주장(主張)하고 있는 엄연(儼然)한 현실(現實)이다.
한반도(韓半島)와 “흉노(匈奴) 달단족(韃靼族)”과는 “십원 한 장”관련(關聯)이 없다, 그런데 왜 이곳에 “달단동(韃靼洞)”이라는 지명(地名)이 어처구니없게 만들어진 것일까?
하나하나 그 연유(緣由)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사(朝鮮史)는, 한글 해설서(解說書)는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이야기책을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胎生的) 한계(限界)를 가지고 있다. ‘즉(卽) 벗어날 수 없다’라는 뜻이다.
5.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 ? : 1,388年], 그는 누굴까?
(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49, 咸鏡道, 洪原縣)】•고려사(高麗史)•각종(各種) 문집(文集) 등에서 말하기를 :
〈원(元) 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이 조소생(趙小生)의 꾀임을 듣고 삼살【三撒 : 북청】홀면(忽面) 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는데, 도지휘사(都 指揮使) 정휘(鄭暉)가 그들과 누차 싸워 패전(敗戰)하니,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를 말한다.】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해 보냈다. (중략(中略). 납합출(納哈出)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궤멸(潰滅)되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2) 국조보감(國朝寶鑑) 82권 / 文祖代理 2 / 순종(純宗) 29년(기축, 1829) :
〈竪洪原韃靼洞永興宮闥里紀蹟碑。韃靼洞。太祖禦元丞相納哈出大破之地也。宮闥里。太祖從母崔氏舊基。太祖。幼鞠養於崔氏也。因洪原永興儒士等上言。道臣。奉審基址回達也。: 홍원(洪原)의 달단동(韃靼洞)과 영흥(永興)의 궁달리(宮闥里)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달단동은 태조가 원(元)의 승상 나하추[納哈出]를 막아서 크게 파한 곳이며, 궁달리는 태조의 종모(從母) 최씨(崔氏)가 살았던 곳인데, 태조는 어릴 때 최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는 홍원ㆍ영흥 유사(儒士)들이 상언하여 도신이 그 옛터를 봉심하고 회달한 데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분명(分明)하게도 “달단동(韃靼洞)”이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高麗) 말(末)부터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이르는 동안, 대부분(大部分)의 서책(書冊)마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해 놓았는데, 다소(多少)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우리가 추구(推究)하고 있는 것은 : 「그곳이 한반도(韓半島) 땅이냐? 본시(本是)의 달단(韃靼) 땅이냐?」 하는 것이다.
납합출[ ? : 1,388年, 納哈出 : 나하추], 그는 누굴까?
(3)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납합출(納哈出) :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 : ? ∼1,388]【出處 : 두산백과】: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요동(遼東)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의 국세가 떨어진 말기에는 선양[瀋陽:奉天]을 근거지로 해서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원나라의 멸망 5년을 앞둔 1362년(공민왕11) 2월 고려의 반역자 조소생(趙小生)의 유인을 받은 그는 동북면(東北面) 쌍성(雙城: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삼철(三撤:北靑) ·홀면(忽面:洪原)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북원(北元)이 세워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는데, 특히 전술에 뛰어났던 이성계를 깊이 존경하였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관위(官位)인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필자(筆者) 주(注) : 1,387年】,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져 윈난[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필자(筆者) 주(注) : 1,388年】하였다〉라고 하였다.
(4) 납합출(納哈出)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納哈出(蒙古語:ᠨᠠᠭᠠᠴᠦ,鮑培轉寫:Naγaču;?—1388年8月31日),元末明初大臣,官至太尉,屬蒙古札剌亦兒氏。為成吉思汗四傑之一木華黎裔孫,乃蠻台之孫,埜仙普化之子。: 원(元) 말(末)과 명(明) 초(初)의 대신(大臣)으로, 태위(太尉)에 이르렀는데, 몽고(蒙古) 찰랄역아씨(札剌亦兒氏)에 속했다. 성길사한(成吉思汗)의 네 명의 뛰어난 장수의 하나였던 목화려(木華黎)의 후예(後裔)로, 내만태(乃蠻台)의 손자(孫子)로, 야선보화(埜仙普化)의 아들이다.
元朝滅亡後,納哈出駐兵開元金山(今遼寧省昌圖金山堡一帶),計有二十萬之眾,繼續抵抗明朝,與脫古思帖木兒呼應。有史料稱其為開元王。: 원(元)의 멸망(滅亡) 뒤에, 납합출(納哈出)은 개원(開元)하고 금산(金山)에 병사(兵士)를 주둔(駐屯)시켰는데, 합쳐 2십여(十餘)만 무리로, 끊이지 않고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하였는데,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호응하여, 사료에서 칭하기를 개원왕(開元王)이라 한다. 天元九年(1387年),明將馮勝進逼金山,納哈出無力抵抗,於是投降。降後,封海西侯。次年,隨傅友德征雲南,途中病亡。1,387년[天元 9年], 명(明) 장수 풍승(馮勝)이 진격(進擊) 금산(金山)에 닥치자, 납합출(納哈出)은 세력이 없이 저항하다가 투항(投降)하였다. 투항(投降) 뒤에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차년(次年)에 박우덕(傅友德)을 따라 운남(雲南) 정벌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病)으로 죽었다. 後人獲罪,流寓閩南泉州,一般認為泉州的出姓即源於納哈出。
早年 : 納哈出初為太平路(今安徽省當塗縣)萬戶,元至正十五年(1355年),朱元璋攻克太平時被俘,因其為名臣後人之故,好言勸降,不歸順,念其心繫元廷,遂給予銀兩放歸。元順帝封其為丞相,後又封太尉。
敗於高麗 : 至正二十二年(1362年)二月,雙城總管府趙小生聯絡納哈出,收復了被高麗奪取的三撒、忽面之地,並屢次擊敗高麗都指揮使鄭暉的軍隊。高麗以李成桂爲東北面兵馬使以抗元軍。當年七月,納哈出領兵數萬,與趙小生、卓都卿等屯於洪原之韃靼洞,派哈剌萬戶那延帖木兒,同僉伯顔甫下指揮,率1000餘兵爲先鋒。元軍在德山洞院平遭到高麗軍隊截擊被擊退,丟棄物資甚多。而高麗軍隊則撤到答相谷。納哈出率元軍移兵德山洞,卻被被李成桂乘夜襲擊。納哈出被迫返回韃靼洞,而李成桂則屯兵舍音洞。李成桂認為「兵法當先攻弱」,因此派兵越過車踰嶺打擊元軍,而親率精騎600到嶺下。李成桂率10餘騎衝擊元軍,射死元軍裨將1人,又以詐敗引誘元軍,射死元軍精銳將官1人。納哈出之妻勸納哈出逃跑,納哈出拒絕。數日後,李成桂率領高麗軍隊翻過咸關嶺,至韃靼洞。納哈出置陣相當,率10餘騎出陣前,李成桂也一樣。納哈出表示自己是來追剿紅巾軍沙劉、關先生和潘誠所部的,並非與高麗作戰,現在元軍損失10000多人,亡裨將數人,希望和高麗軍隊休戰。李成桂認為有詐,不從,並射死納哈出身旁1將,又射死納哈出的馬,納哈出改乘另一馬,又被射死。元軍和高麗軍隊展開激戰,互有勝負。納哈出不想繼續作戰,於是率軍回撤,而李成桂則率高麗軍隊追擊元軍。納哈出說:「李萬戶也,兩將何必相迫!」李成桂又射死他的馬。最後在元軍士兵的援助下,納哈出成功逃跑。日暮,高麗軍隊也開始撤軍,李成桂親自殿後,擊敗追擊宦者李波羅實的元軍。撤軍途中,高麗軍隊又成功擊敗了元軍重裝騎兵。數日後,納哈出率軍又於咸興平與李成桂所部高麗軍隊相遇,元軍又被擊敗,納哈出收散卒遁去,被繳獲銀牌銅印等物及其他物資。後納哈見無力擊敗李成桂,便派人通好, 獻馬於高麗恭愍王,並送鞞皷一、良馬一匹於李成桂,以致禮意,表示心服。納哈出的妹妹,在軍中見李成桂,說 :「斯人也, 天下無雙」後來納哈出對李子春說:「李子春嚮日言我有才子,果不誣矣。」至正二十七年(1367年)冬,高麗國王辛禑派開城尹黃淑卿往聘,納哈出對他表示:「我本非與高麗戰,伯顔帖木兒王,遣年少李將軍擊我,幾不免。李將軍無恙乎?年少而用兵如神,眞天才也。將任大事於爾國矣[1]。」
投降明朝 : 後元遼陽行省平章劉益降明,明取得了遼東大部後,明太祖朱元璋數次遣使招撫,未得答覆。宣光五年(1375年),入寇遼東,兵抵金州,明遼東都衛馬雲、葉旺等將其擊敗。其後數入犯,皆敗。天元九年(1387年),朱元璋令馮勝、傅友德、藍玉領軍二十萬進逼金山,又派故元將乃刺吾勸降。納哈出見大勢已去,遂降。降後,封海西侯,並賜以丹書鐵券。明洪武二十一年七月二十九日(1388年8月31日),傅友德征雲南,納哈出隨往,行至武昌,飲酒過度,卒於舟中,奉詔歸葬於南京南門外。[2][3]
據信泉州出姓即源於納哈出,納哈出卒後,其子察罕改襲瀋陽侯。明洪武二十六年(1393年),因藍玉案被殺。次子佛家奴懼,即刻離職,隱居泉州惠安。[4] 〉
➨ 위의 원문(原文)은, “중국어 위키백과[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그대로 “인용(引用)”한 것인데, 오늘 주제(主題)에 관한 주요(主要) 구절(句節)만 번역(飜譯),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➊ 그 어느 구절(句節)에도 “심양(瀋陽)=봉천(奉天)을 점령(占領)했다”라거나, “요동(遼東) 땅의 호족(豪族) 또는 군벌(軍閥)로 이어왔다”라는 등의 「기록(記錄)은 없다.」 다만 “원(元)”이 쇠퇴(衰退)하자, 요동(遼東) 땅에서 승상(丞相)을 자칭(自稱)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기록(記錄)이 없다.
➋ 이성계(李成桂)와의 전투(戰鬪) 장면(場面)은 ”한글 해설서(解說書)와 똑같다. 누가 누구의 것을 복사(複寫)했는지조차 모를 정도(程度)로 똑같다.
➌ 이곳에서 「금산(金山)」을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창도(昌圖)의 금산보(金山堡) 일대(一帶」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이는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조작(造作)이다. 이곳에 금산(金山)이라는 산(山)의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20세기(世紀) 초(初) 이후(以後)의 일이기 때문이다.
➨ 역사서(歷史書)에 등장(登場)하는 “금산(金山)”은, 아무 곳에 나 널려 있는 평범(平凡)한 야산(野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산(金山)」은, 말 그대로 몽고어(蒙古語)로 “금산(金山)”이다. 「알타이(Altai) 산(山)=아이태산(阿爾泰山)【別盧哈山 : 4,506m • 友誼峰 4,374m • 奎屯峰 4,082m = 蒙古語 : 金山】=벨루하산[Belukha Mt]」을 칭(稱)하는 것이다.
➨「납합출(納哈出)의 선대(先代) 목화려(木華黎)」는 :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휘하(麾下) 대장(大將)으로, 몽고(蒙古)의 세 번째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곧 목화려(木華黎)는 납합출(納哈出)의 증조(曾祖)다. “증조(曾祖), 조부(祖父), 부(父)” 편을 살펴보기로 하자.
(5)-1) 「목화려(木華黎)」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木華黎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又作木合里、摩和賚等,蒙古札剌亦兒部人,元太祖成吉思汗麾下大將,蒙古第3位開國功臣(千戶)。同博爾朮、博爾忽、赤老溫並稱為成吉思汗的四傑。: 木華黎長大成人後,身長七尺,黑面,虎首虯鬚,沉毅多智,勇猛善射。: 목화려(木華黎)가 다 크고 난 뒤에, 신장(身長)이 7척(尺)이요, 얼굴은 검은색이었고, 호랑이 머리와 양쪽에 뿔이 나 있는 규룡(虯龍)수염이며, 강인하며 지혜가 많고, 날래고 사납고 활을 아주 잘 쐈다.〉라고 하였으며,
〈신원사(新元史)에서는 : 生時有白氣出帳中,神巫異之曰:「此非常兒也。」及長,身七尺,虯鬚黑麪,沈顏多智略,猿臂善射。: 태어날 때에 백기(白氣)가 장막(帳幕)에 어른거리니, 무당(巫堂)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 「이 아이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兒)다」라고 말하였다. 성장(成長)하니 신장(身長)이 7척(尺)이요, 규수(虯鬚)에 검은 얼굴을 가졌으며, 심안(沈顔)에 지략(智略)이 많고, 팔이 길고 힘이 있어 활을 아주 잘 쐈다〉라고 하였다.
인종(人種)으로 보면 : 말 그대로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으로 흑인종(黑人種)과도 같은 흑면(黑麪)【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當時)에 납합출(納哈出)의 선대(先大)들은 색목인(色目人)이었는데, 특이(特異)하게도 목화려(木華黎)는 ‘검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 그리고 그 뒤의 설명(說明)에는 : 역사통설(歷史通說)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만주(滿洲) 땅과 달단동(韃靼洞) 주변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대패(大敗)했다」라는 설명(說明)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에게 궤멸(潰滅)된 자(者)가 무슨 재주로 “1 만리(萬里) 서(西)쪽의 금산(金山)까지 도주(逃走)하여 2십여(十餘)만 병사(兵士)들을 모아 주둔(駐屯)시키고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했을까? 또 힘이 없어 명(明)에 투항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납합출(納哈出)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활동(活動)했다」라는 말은, 『전형적(典型的)인 역사왜곡(歷史歪曲)이요,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아래의 납합출(納哈出)과 그의 조부(祖父)와 부(父)의 생애(生涯)를 살펴보자.
「중국(中國) 위키백과[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및 「열전(列傳)」 등에서 : 납합출(納哈出)의 조부(祖父 : 할아버지), 부(父 : 아버지)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5)-2) 乃蠻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납합출(納哈出)의 조부(祖父)
〈乃蠻台(13世紀∼1348年),又譯乃馬台,蒙古帝國札剌亦兒氏。木華黎的五世孫,國王忽速忽爾之子。元成宗大德五年(1301年),受命征討海都、篤哇,以功被任命為宣徽院使。元仁宗延祐七年(1320年),擔任嶺北行省右丞。至治二年(1322年),轉任甘肅行省平章政事。元文宗天曆二年(1329年),調任陝西行省平章政事。任內,賑濟災民。繼任陝西行台御史大夫。至順元年(1330年),擔任上都留守、虎賁衛親軍都指揮使,改任知嶺北行樞密院使、封宣寧郡王,鎮
守北邊。元順帝至元三年(1337年),取代朵兒只襲為國王。至元六年(1340年),擔任遼陽行省左丞相,歷官皆有政績,年邁辭歸大都,卒後追封魯王。其子埜仙普化,埜仙普化子納哈出.〉라고 하였으니,
➨ 「조부(祖父) 내만태(乃蠻台)」는 :
〈령북행성우승(嶺北行省右丞), 감숙행성평장정사(甘肅行省平章政事), 陝西行省平章政事(섬서행성평장정사), 섬서행태어사대부(陝西行台御史大夫), 上都留守(상도유수), 호분위친군도자휘사(虎賁衛親軍都指揮使), 영북행추밀원사(嶺北行樞密院使), 선녕군왕(宣寧郡王), 북변(北邊) 진수(鎭守)【鎮守北邊】, 요양행성좌승상(遼陽行省左丞相), 나이가 많다, 또는 노쇠했다는 이유로 대도(大都)로 돌아왔다【年邁辭歸大都】〉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납합출(納哈出)의 할아버지(祖父)인 내만태(乃蠻台)’는, 영북(嶺北)과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지(等地)의 요직(要職)을 거쳤고, 요양(遼陽)에서는 요양행성좌승상(遼陽行省左丞相)으로 있다가 대도(大都)도 귀환(歸還)했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이나 심양(瀋陽) 등에 군벌(軍閥), 호족(豪族)이니 하는 말은 웃기는 말일 뿐이다. 전혀 관계(關係)없는 인물(人物)이다.
(5)-3) 埜仙普化(?—?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납합출(納哈出)의 아버지(父).
〈埜仙普化(?—?) : 譯名又作也先不花、野仙溥化,蒙古札剌兒氏,埜仙普化是木華黎六世孫、孛魯的玄孫、阿里乞失的曾孫,忽速忽爾的孫子,乃蠻台的兒子。元朝末年大臣,元順帝時中書平章政事。其子納哈出。埜仙普化早年入宿衛,掌管速古兒赤(怯薛官名,掌內府尚供衣服),歷任朝列大夫、給事中,拜為監察御史。後來擔任河西廉訪副使。至正十三年(1353年)擔任淮西添設宣慰副使,率軍鎮壓泰州農民起義。入為中書參知政事,轉任御史中丞。至正十七年(1357年),拜為中書右丞,奉旨宣撫彰德路、大名路、廣平路、東平路。至正十九年(1359年),統帥探馬赤軍去遼陽行省鎮壓紅巾軍。至正二十年(1360年),為中書省參知政事,前去調解孛羅帖木兒和察罕帖木兒的矛盾。至正二十一年(1361年),為中書左丞,加太尉銜,任遼陽行省左丞相。至正二十二年(1362年),升為中書右丞,次年罷。至正二十八年(1368年),明朝大軍北伐,他奉命防守入海口,護衛畿輔.〉
➨ 납합출(納哈出)의 아버지(父) 야선보화(埜仙普化)는 :
〈급사중(給事中), 감찰어사(監察御史), 하서렴방부사(河西廉訪副使), 회서첨설선위부사(淮西添設宣慰副使),중서참지정사(中書參知政事),어사중승(御史中丞), 중서우승(中書右丞),요양행성(遼陽行省)의 홍건적을 진압(統帥探馬赤軍去遼陽行省鎮壓紅巾軍), 중서성참지정사(中書省參知政事),중서좌승(中書左丞),태위함(太尉銜),요양행성좌승상(遼陽行省左丞相), 중서우승(中書右丞),명(明)이 대군으로 북벌(北伐)하자, 해구(海口)를 방수하는 봉명(奉命)을 받고, 기보(畿輔)를 호위(護衛)하였다(明朝大軍北伐,他奉命防守入海口,護衛畿輔)〉라고 하였으니,
아버지(父) 야선보화(埜仙普化) 역시(亦是) 요양행성좌승상(遼陽行省左丞相)을 ‘1년’ 여(餘) 역임(歷任)하였을 뿐이다.
즉(卽) 기록(記錄)으로 보면 「“납합출(納哈出)의 조상(祖上) 가운데 ”요동(遼東)“땅과 특별(特別)한 인연(因緣)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설명(說明)으로 보면 :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은 서로 다른 땅이다.」 심양(瀋陽)은 요수(遼水) 동안(東岸)에 있는 지명(地名)이고, 요양(遼陽)은 심양(瀋陽)의 남(南)쪽에 있는 지명(地名)이다.
• 심양(瀋陽) 땅에서 대대(代代)로 살면서 흥성(興盛)한 토호(土豪)도 아니요,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린 군벌(軍閥)도 아니다. 군주(君主)로부터 어명(御命)을 받고 지방(地方) 관직(官職)을 1년여씩 역임(歷任)했다고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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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백과…위키백과 등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의 가계(家系)는 : 대대(代代)로 요동지방(遼東地方)의 군사적(軍事的) 책임(責任)을 맡았고, 심양[瀋陽 : 奉天]을 근거지(根據地)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稱)하며 만주지방(滿洲地方)에 세력(勢力)을 뻗쳤다〉라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그러나,
➡➡ 위의 “조부(祖父)와 그의 부(父 : 아버지)”의 관직명(官職名)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요양행성(遼陽行省)의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는데, 이는 이들이 역임(歷任)한 많은 관직(官職) 중에서 하나의 관직(官職)이었을 뿐으로, 이곳의 요양(遼陽) 또는 만주(滿洲) 땅을 중심(中心)으로 대대(代代)로 군벌(軍閥)이나 근거지(根據地)로 활동(活動)했다는 이야기는 단 한 글자도 없다.」 이게 뭔 일인가?
➡➡➡ 반대(反對)로, 『납합출(納哈出)은 금산(金山)【알타이산(Altai, 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山)】을 근거지(根據地)로 수십만(數十萬) 무리를 모아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했다』라고 하였다.
「“금산(金山)”은, ‘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 山)=벨루하산(Belukha, 山)’」을 말하는 것이다.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다.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 山)=벨루하산(Belukha, 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4,506m, 4,440m인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따로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 「만주(滿洲)와 달단동(韃靼洞)」은, 바로 금산(金山)【알타이산(Altai, 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山)】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다는 것이고, 「이곳 주변일대(周邊一帶)가 이성계(李成桂)와 그 가문(家門)이 4대(代)에 걸쳐 몽고(蒙古) 몽고 조정(蒙古 朝廷)으로부터 총독(總督)에 임명(任命)되어 ‘지방(地方) 토호군벌(土豪軍閥)’로 세력(勢力)을 키웠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는 : 당시(當時)에 이러한 각축장(角逐場)이 될 만한 조건(條件)을 갖춘 땅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라는 것인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日帝)가 첩자(諜者)들을 보내어 철저(徹底)하게 조사(調査)한 보고서(報告書)가 이를 증거(證據)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곧 「일제(日帝)가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은밀(隱密)하게 첩자(諜者)들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바에 따르면 : 19∼20세기(世紀) 초(初)에 이르기까지에도, 이곳은 무인지경(無人之境)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8) 「달단족(韃靼族)」에 대한 최근(最近)[중국어 위키백과] 설명(說明)을 보자.
• 韃靼人[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韃靼人,中國及歐洲古代對歐亞草原游牧民族的統稱,源於蒙古語族群塔塔爾部的族稱,現專指俄羅斯境內一突厥語族群. : 달단인(韃靼人)은, 중국(中國)과 구주(歐洲)【구라파(歐羅巴) : 유럽】의 고대 초원(草原) 유목민족(遊牧民族)을 총칭(總稱)한다. 몽고어족(蒙古語族) 무리로 탑탑이부(塔塔爾部) 족(族)을 말하는데, 현(現) 아라사(俄羅斯)【Russia : 러시아】 경내(境內)의 돌궐어족(突厥語族) 무리다〉라고 하였다. 즉(卽)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십원 한 장도 관계(關係)가 없다”」라는 뜻이다.
• 〈塔塔爾族,當代中國的少數民族之一,東歐韃靼人後裔 : 탑탑이족(塔塔爾族)은, 그 시대에 중국(中國) 소수민족(少數民族)의 하나로, 동구(東歐)【동구라파(東歐羅巴) : 동유럽(Eastern Europe)】달단인(韃靼人)의 후손(後孫 : 後裔)들이다.〉
• 〈韃靼利亞(Tartary),中世紀到20世紀歐洲部分地區的稱呼,大約位於裏海北部和中部到烏拉爾山脈 : 달단리아【韃靼利亞 : Tartary】는, 중세기(中世紀)에서 20세기(世紀)에 걸쳐 구주(歐洲)【구라파(歐羅巴) : 유럽】의 땅에 나눠 있는 지구(地區)의 칭호(稱號)로, 대략적(大略的)으로 “리해(裏海)【카스피해】북부(北部)와 중부(中部)의 오랍이산맥(烏拉爾山脈)【우랄(Ural)산맥(山脈)】에 자리해 있다”〉라고 하였다.
➡ 오늘날의 대륙(大陸) 측(側)에서도 : 「달단족(韃靼族)에 대해 위와 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십원 한 장”도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 땅【구라파(歐羅巴)+동구라파(東歐羅巴)】북방지대(北方地帶)를 한때나마 누비고 다녔던 옛 유목종족(遊牧種族)」을 말하고 있다.
◈ 이들 달단족(韃靼族)들의 일부(一部)가 조선(朝鮮)【총칭(總稱)】에 투항(投降), 의탁(依託)하여 무리를 이뤄 살게 되면서부터 이들이 고려(高麗) 때의 “유랑집단(流浪集團)”으로, 「양수척(揚水尺). 화척(禾尺). 재인(才人). 백정(白丁)」등이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居處)도 없이, 가축(家畜)을 기르며, 이들 가축(家畜)이 먹이로 하는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사는 무리(衆)를 칭(稱)하는 것이다.
이들은 : 「신라(新羅) 말기(末期) 및 고려(高麗) 초(初)에 유입(流入)된 북방종족(北方種族)이었던 “글란(契丹 : 거란)과 여진(女眞 : 말갈(靺鞨), 또한 달단(韃靼 : Tatar) 족(族)”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방종족(北方種族)’이란 말은,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신라(新羅), 고려(高麗)가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을 때 가능(可能)한 설명(說明)이다.】
특히 여기서 “백정(白丁)”은, ‘색목인(色目人) 장정(壯)’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유목민(遊牧民)으로 가축(家畜)을 도살(屠殺)하는 것에는 전문가(專門家)다〉
◈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고증(考證)해 보면 :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를 석권(席捲=席卷)하고 있었던 천자국(天子國)이었음으로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證明)해 주고 있다」
즉(卽), 「카스피해[裏海 : Caspian Sea]의 북부(北部)와 동부(東部)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달단(韃靼)이 있었다. 그 남(南)쪽은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해주고 있는 이야기다.
◈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의 우랄산맥【Ural Mt’ : 오랍산맥(烏拉山脈) : 오랍이산맥(烏拉爾山脈)】을 중심(中心)으로 동(東)쪽과 서(西)쪽에서 살던 유목종족(遊牧種族)」으로, 「이들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출몰(出沒)했다든지 침략(侵略)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제정신이 아닌 자(者)들이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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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납합출(納哈出)이 이성계(李成桂)에게 궤멸(潰滅)당한 그 뒤의 기록(記錄)은?
明史列傳 / 韃靼 : 〈二十年, 夏,師逾金山,臨江侯陳鏞失道,陷敵死. 乃剌吾歸,備以朝廷撫恤恩語其眾,於是全國公觀童來降。納哈出因聞乃剌吾之言已心悸,復為大軍所迫,乃陽使人至大將軍營納款,以覘兵勢. 勝遣玉往受降. 使者見勝軍還報,納哈出仰天歎曰:天弗使吾有此眾矣. 遂率數百騎詣玉納降. 已,將脫去,為鄭國公常茂所傷不得去。都督耿忠遂以眾擁之見勝,勝重禮之,使忠與同寢食。先後降其部曲二十余萬人,及聞納哈出傷,由是驚潰者四萬人,獲輜重畜馬亙百余裡。勝班師,都督濮英以三千騎殿,為潰卒所邀襲,死之秋,勝等表上納哈出所部官屬二百余人,將校三千三百余人,金銀銅印一百顆,虎符牌面百二十五事,馬二百九十余匹,稱賀. 太祖封納哈出為海西侯,先後賜予甚厚,並授乃剌吾千戶。納哈出既降,帝以故元遺寇終為邊患,乃即軍中拜藍玉為大將軍,唐勝、郭英副之,耿忠, 孫恪為左, 右參將,率師十五萬往征之.〉
➡ 홍무(洪武) 20년(年) : [丁卯 辛禑 十三年【AD 1,387年】大明 洪武 二十年] : 《太 祖 封 納 哈 出 為 海 西 侯 : 명(明) 태조(太祖)가 항복(降伏)한 ➨ 납합출(納哈出)에게 “해서후(海西侯)”에 봉(封)했다.》라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말하기를 「‘납합출(納哈出)’과 그의 선조(先祖)들이 요동(遼東) 땅에서 대대(代代)로 군사적(軍事的) 관직(官職)을 이어받아 요동(遼東) 본거지(本據地)처럼 해설(解說)하고 있지만 : 납합출(納哈出)은, 금산(金山)에서 웅거(雄據)했고 수십만(數十萬) 무리와 함께 명(明)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자(者)다.」
요동(遼東) 땅과 금산(金山)【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 山)=벨루하산(Belukha, 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사이는, 4,000㎞ 이상(以上) 떨어져 있어, ➊ 요동(遼東) 땅의 토호(土豪)이자 군벌(軍閥)이 ➋ 수년(數年) 사이에 생소(生疏)한 “일만(一萬) 리(里)” 머나먼 서(西)쪽 땅 금산(金山) 주변(周邊)의 토호(土豪)이자 군벌(軍閥)로 성장(成長)할 수 있는 확률(確率)은 제로【0%】다. ➌ 더더구나 생소(生疏)한 곳에서 20여만(餘萬) 무리를 모아 명(明)에 대항(對抗)했다는 말은, 그곳이 납합출(納哈出)의 본래(本來) 본거지(本據地)였다는 뜻과 같다.
「또 그가 명(明)나라에 투항(投降)하니 명태조(明太祖)는 그에게 ‘해서후(海西候)’에 봉(封)했다」라고 하였는데, 해서(海西)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해서(海西)』란 말 그대로 『해(海)의 서(西)쪽 또는 서(西)쪽 해(海)』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서방(西方) 땅을 말하는 것이다
(10)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반복(反復)되는 말이지만, 이 부분(部分)에서의 기록(記錄)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지리지(地理志), 동사강목(東史綱目), 문집(文集) 등의 것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되어 있어 의아함을 감출 수 없다. 너무도 똑같게 기록(記錄)되어 있기 때문이다.
(10)-1 고려사(高麗史) 世家 卷 第 四十 恭愍王 11年 [1,362年]
1362년 2월 3일(음) 기묘(己卯) : 〈二月 己卯 趙小生誘引納哈出, 入寇三撒·忽面之地. 元季兵燹, 胡虜納哈出, 據有瀋陽之地, 稱行省丞相. : 2월 기유 조소생(趙小生)이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을 유혹해 끌어들여서 삼살(三撒)·홀면(忽面)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元) 말엽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할 때, 오랑캐[胡虜]인 납합출이 심양(瀋陽) 땅을 차지해 거점으로 삼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납합출(納哈出)은 “호로(胡虜)”라고 하였으니, 「胡虜在漢語中,為漢人對北方遊牧民族的貶稱 : 호로(胡虜)는 한어(漢語)에 : 한인(漢人)들이 북방(北方) 유목민족(遊牧民族)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곧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이야기다.
(10)-2)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8권 / 恭愍王三 정미 16년(1367), 원 지정 27년 : 〈冬 10월, 納哈出,遣使來獻馬。: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와서 말을 바쳤다.〉
(10)-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8권 / 공민왕 3(恭愍王三) 기유 18년(1369), 대명 홍무 2년 : 〈春正月,遼陽省納哈出,及洪寶寶,遣使來聘。: 봄 정월에 요양성(遼陽省)의 나하추[納哈出]와 홍보보(洪寶寶)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10)-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9권 / 공민왕 4(恭愍王四) 경술 19년(1370), 대명 홍무 3년 : 〈二月, 納哈出,遣使來,獻土物,仍求官,且以黃金八兩,求婦人腰帶,授納哈出三重大匡,司徒,賜細布二匹,婦人金帶一腰,還其金。: 2월에,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는 관직을 요구하였으며, 또 황금 8냥으로써 부인의 허리띠를 구하였다. 나하추에게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司徒)의 관직을 주고 올이 가는 베 2필과 부인의 금띠 하나를 하사하고, 황금은 돌려보내었다. 三月,達靼王哈剌八禿,及也先不花,遣使來聘。: 3월에 달단왕(韃靼王) 합라팔독(哈刺八禿)과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吳王,淮王,遣使來,獻土物。: 오왕(吳王)과 회왕(淮王)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10)-5)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9권 / 공민왕 4(恭愍王四) 갑인 23년(1374), 대명 홍무 7년 : 〈十一月, 納哈出,遣使,來獻駱駞二頭馬四匹。: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와서 낙타 2마리와 말 4필을 바쳤다.〉
(10)-6)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30권 / 신우 1(辛禑一) 을묘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 〈春正月, 納哈出,遣使,來問禑嗣位,時,北元,以玄陵無嗣,乃封瀋王暠孫脫脫不花爲王,故有是問。: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어 우(禑)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물었다. 이때에 북원에서, 현릉(玄陵)이 아들이 없다하여 심왕(瀋王) 호(暠)의 손자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물음이 있었다.〉
(10)-7)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4하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 二月。趙小生引納哈出。冦東北面。2월 조소생이 납합출(納哈出)을 이끌고 와서 동북면에 침구하였다. 時。元朝政亂。胡虜納哈出。據有瀋陽等地。稱行省丞相。: 이때에 원의 조정은 정치가 어지러웠다. 이에 오랑캐 납합출이 심양 등지를 차지하고서 행성 승상(行省丞相)이라고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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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달단동(韃靼洞)
달단(韃靼) [지명대사전(地名大辭典)] : 〈韃靼 : 因中古時韃靼族侵入中亞細亞. 故名. 近世學者分爲支那韃靼. 卽 東土耳其斯坦. 獨立韃靼. 卽土耳其斯坦. 二部. (中略) : 달단(韃靼)이란 중고(中古) 시대(時代)에 달단족(韃靼族)이 중아세아(中亞細亞)에 침입(侵入)하였다. 오래된 이름이다. 근세(近世) 학자(學者)들은 지나달단(支那韃靼)은 곧(卽) 동토이기사탄(東土耳其斯坦)이요, 독립(獨立)한 달단(韃靼)은, 곧(卽) 토이기사탄(土耳其斯坦)으로, 2부(部)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달단족(韃靼族)은, 어디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침입(侵入)했느냐? 하는 것인데, 핵심(核心)은 이들 “달단족(韃靼族)”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이라는 점이다.
「색목인(色目人) 종족(種族)이 중원대륙(中原大陸) 또는 한반도(韓半島) 토착민(土着民)들인가? 이건 정신(精神) 나간 자들의 헛소리다.」 “색목인(色目人)”들은 말 그대로 서방세계(西方世界)에서 살던 이민족(異民族)들이다. 이들이 몽고족(蒙古族)의 일파(一派)로 「‘철목진(鐵木眞)=성길사한(成吉思汗)’의 선대(先代)들이 카스피해[Caspian, 海]를 건너 중아(中亞)【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왔다」라고 하였다.
➨➨➨ 〈색목인(色目人)들은 최소한(最小限) 흑해(黑海)와 카스피해【리해(裏海)】사이의 코카서스인종, 곧 코카소이드(Caucasian race, Caucasoids) 또는 백인종(白人種)들이 원류(源流)다〉 이걸 동아세아(東亞世亞)로 옮겨 놓으면 그동안의 인류사(人類史) 및 그 기원사(起源史)는 모조리 폐기(廢棄하고 새로운 학설(學說)과 그 고증(考證), 증거(證據)로 대체(代替) 새롭게 세워야 할 정도(程度)로 중차대(重且大)한 사건(事件)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 그 어떤 정황(情況) 또는 징후(徵候)는 전혀 없으며, ‘십원 한 장’도 포착(捕捉)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없다는 얘기다.
➨ 우리는 우리들의 조상(祖上)들이 땀 흘려 기록(記錄)해 놓은 많은 서책(書冊)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당시(當時)의 생생(生生)한 현지(現地) 상황(狀況)을 그대로 전(傳)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연행록(燕行錄) 계산기정(薊山紀程) 산천(山川) 조(條) : 醫巫閭山。堯封十二山之一也。自我國長白山分脉而走。橫遮大漠。西北行七八百里。散漫扶輿。不見窮際。山外則古凶奴地。明稱韃靼。今稱蒙古。此天所以限夷夏也.〉
「醫巫閭山. 堯封十二山之一也. 自我國長白山分脉而走. 橫遮大漠. 西北行七八百里. 散漫扶輿. 不見窮際.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산(山) 중의 그 하나이다. 아국(我國)【조선(朝鮮)】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大漠)을 가로질러【동서(東西) : 횡(橫)】막았다. 서북(西北)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散漫)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山外則古凶(匈)奴地. 明稱韃靼. 今稱蒙古. 此天所以限夷夏也. : 의무려산(醫巫閭山) 밖(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明) 때는 달단【韃靼 : 타타르 : Tatar】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 지어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잠깐… …
•「深河。在山海關一里。卽遼東伯金應河大鏖之地。湯河堰,石子河,羊河,飮馬河,白沙河,靑龍河。皆關內地也。載路程排站記。: 심하(深河)는 산해관 1리에 있으니, 즉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가 크게 무찌른 곳이다. 탕하언(湯河堰)ㆍ석자하(石子河)ㆍ양하(羊河)ㆍ음마하(飮馬河)ㆍ백사하(白沙河)ㆍ청룡하(靑龍河)는 모두 산해관 지역이다. 노정 배참기(路程排站記)에 실려 있다.」라고 하였으니,
「산해관(山海關)이니 심하(深河)니 하는 곳은 모두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다」라는 정도(程度)는 알아야 한다. 이곳은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이나 중원(中原) 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서북(西北) 1 만리(萬里) 먼 곳에 있었던 지명(地名)”이다.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어찌 동(東)쪽 모퉁이 땅에 존재(存在)할 수 있겠는가? 천하(天下) 가운데의 땅에 당당(堂堂)하게 서 있는 것이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아니겠는가! 뭘 좀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 한국인(韓國人)들이 얼마나 역사인식(歷史認識)이 없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딱한 이야기가 참 많다. 오죽하면 한국인(韓國人)들이 오늘날의 만주(滿洲)【심양(瀋陽) 주변(周邊)】땅을 찾아 그곳이 김응하(金應河) 및 당시(當時)의 많은 조선(朝鮮) 병사(兵士)들이 전사(戰死)했다고 하면서… …막걸리를 따라 놓고… …아마도 지하(地下)에서 영면(永眠)하고 있는 많은 병사(兵士)들의 혼(魂)이 놀라 까무러치지 않을까? 염려(念慮)될 정도(程度)다.
세상(世上)에… …전혀 엉뚱한 곳, 그곳에는 조선군(朝鮮軍)이 출병(出兵)한 예(例)가 없는 곳이다. 웃고 있기엔 너무 비참(悲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다. 열도(列島) 학자(學者)들은 이를 보며 킥킥대며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이게 나라냐? 이게 국가(國家)냐?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이 얼마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약(約) 1억(億)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는 한민족(韓民族)을 대상(對象)으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演出)하고 있다. 이게 팩트(Fact)다.
「봉건왕조(封建王朝)」 때라면 : 「이놈들을 반드시 색출(索出)하여 무덤으로 들어간 놈은 꺼내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살아있는 놈들은 능지처참(凌遲處斬)시켜야 하며, 삼족(三族), 구족(九族)을 멸(滅), 가계(家系)를 아예 멸각(滅却)시켜, 다시는 이런 놈들이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며 시행(施行)했을 것이다.
➨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옛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면 :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과 한반도(韓半島) 땅이 중원(中原)이요, 화하(華夏)요, 중국(中國)이요, 황제(皇帝), 천자국(天子國)의 나라였다」라는 뜻과 같고, “발해(渤海)와 황해(黃海)와 동해(東海)는 육지(陸地)였다”라는 말과 같다.
위의 계산기정(薊山紀程) 산천(山川)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천산(天山)=기련산(祁連山)’이요, 천산산맥(天山山脈)이어야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수 있다.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가로(橫 : 東西 혹은 西東)질렀다”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옛 기록(記錄)으로 보면 : 『“달단(韃靼) 곧 타타르(Tatar)”의 본거지(本據地)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밖(外)의 땅이다”』 이곳이 달단(韃靼)의 고향(故鄕)이요, 본거지(本據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달단동(韃靼洞)”이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비단(緋緞)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일 것이요, 이러한 땅에서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가 몽고(蒙古)의 총독(總督)인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임명(任命)되어 수대(數代)를 이어왔다면 : 그 지방의 군벌토호세력(軍閥土豪勢力)임은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이게 나라냐?
이게 국가(國家)냐?
21세기(世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남한(南韓) 총독(總督)”이 다스리는 남한(南韓) 땅에서, 천손족(天孫族) 왜(倭)들 받들며, 이등국민(二等國民)으로 사는 5,100만 일인(一人)들이다.」라고 한다면… …어떤 비난(非難)이 쏟아질까?
비난(非難)할 자격(資格)은 있고? “윤석열” 정권하(政權下)에서, 친일사대주의자(親日事大主義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활개를 친다. 반역행위(叛逆行爲)【반역행위(叛逆行爲)란 간첩(間諜) 짓이나 총칼을 거꾸로 드는 것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나라와 겨레를 배반(背反ㆍ背叛)하는 행위(行爲)를 말하는 것이다. 】를 서슴없이 벌이고 있다.
◈ 〈주권(主權)을 가진 국민(國民)들 스스로 이제는 가부(可否)를 판단(判斷)할 때다. : 더 이상(以上) 두고 보다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망가지는 것은 차치물론(且置勿論)이요, 영토(領土)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절박감(切迫感)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것이다.
더 이상(以上)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주었으니 되돌려 받을 때다” [제4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2024년 08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뉴라이트"라는 웃기는 아이들이 말하는 내용으로 이를 연결시키면 :
1. 1945년의 광복(光復)은 없다.
2. 약 2년으로 추산되는 미군정은, 미군(美軍)이 일제(日帝)를 대신(代身)한 것이 되며,
3. 1948년 탄생된 정부수립은 : '일제의 남한 총독부'가 새롭게 수립된 것이다.
4. 2024년 오늘까지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일제(日帝)의 식민지 굴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 일본의 남한총독부는 용산에 있다.
6. 윤석열은 본토부터 임명받고 부임한 '총독'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 光復(광복)이 없었다는 말은, '일제(日帝) 식민(植民) 통치(統治)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은 헛소리일 뿐이요, '대일본제국인'이어야 맞는 말이다.
* ["뉴라이트"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일제(日帝)에 의해 세뇌(洗腦)되어 반복적으로 훈련받은 그 뇌 세포들이 고형화되어 사고(思考)를 정지시켰다. 그 탓에 머릿속에는 1900년대 일제(日帝) 강점기 시대만이 기억세포에 남아있다는 것일까?]
7.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체는 뭐냐?
나라냐?
국가(國家)냐?
일본의 식민지냐?
* 대한민국은,
'보수(保守) 우파(右派)'가 사라져야 '대한민국(大韓民國)과 한민족(韓民族)'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이 직접 피부(皮膚)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