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인천고교야구계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 황동훈감독을 영입한 제고의 돌풍과 전통의 강호 동산을 물리치기에는 인고의 힘은 솔직히 부족하였다.
타 학교의 전력을 분석해보면,
동산고는 전준호 , 강귀태(포수, 현대), 박세훈으로 연결되는 초강력 클립업트리오와 에이스 언더핸드 김기식(청소년대표, 국가대표, 현대 지명, 현재 투병중)와 좌완 전준호(청소년 대표), 정상호(SK, 초고교급포수)등의 최상급 배터리를 지니고 있었고, (강귀태, 박세훈은 97년 졸업, 정상호 98년 입학), 99년에는 초고교급 투수 송은범( 인고79회 최계훈 처럼 황금사자기 준우승만 2번하는 비운의 에이스)등 인고, 제고가 범접할 수 없는 선수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고는 97년부터 신선한 돌풍 (괴물투수의 등장,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당시 전경기 완투를..)을 일으키더니 98년부터는 임동규, 이규민이라는 투수를 바탕으로 전국대회에 조금씩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아마 봉황대기, 화랑대기 등의 경기에서 제고가 인천팀들중 가장 큰 성과를 얻었을것이다.
당시 인고는 박진혁(1루수) 정재복(현 LG투수, 당시 유격수) 송태윤(2루수)의 클립업 트리오에 포수 이정일, 3루수 장호철(친한 친구, 인하대 야구부 주장) 등으로 구성되고, 송현우 - 김광수(2명모두 LG / 광수는 병역비리로 영어생활중) 의 원투펀치에 3학년 언더핸드 이 율(야구그만둠), 2학년 조병선과 현창근 등의 투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4대 메이져대회중 대통령기와 청룡기는 동산이 나간것으로 기억나고, 봉황대기도 변변치 않은 성적이었던것 같다.
98고교야구시즌 마지막 대회, 황금사자기...
인고는 봉황기를 제외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대회 티켓을 획득했다.
그때 3학년이던 인고 98회 선배들은 1학년때 96봉황대기 결승전 응원경험이 있었지만, 2학년이던 인고99회는 전국야구대회 응원경험이 전무했다.
(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당시 학교 방침이 8강은 1학년, 4강은 1,2학년, 결승전은 1,2,3학년 응원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97년 봉황기는 16강이고, 방학중이라 학교 단체응원은 아니었다. )
당시 인고2학년 학년부장 선생님이 인고71회 권태국선생님(수학) 이셨는데, 교장선생님께 강력건의해서 단체응원을 획득하셨다.
예선 첫 경기인 대 한서고전...
동대문 야구장 1루측 외야에 자리잡은 인천고 응원단과 3루측 외야에 자리잡은 한서고 응원단의 응원전이 시작되었다.
한서고의 짱짱한 엠프와 휘황찬란한 여자 응원부원(한서고는 남녀공학임)의 응원앞에 잠시 울찔한 인고응원단...사실 대부분 여자 응원단에 시선이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엠프소리를 멎게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짝짝이... ㅋㅋㅋ
짝짝이의 소리에 동대문운동장을 평정하고 말았다...ㅎㅎㅎ
경기로 돌아가서, 송현우를 선발로 내세운 인고야구부는 한서고를 6:4로 물리치고 16강에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이 한서고 응원은 98년 인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단체응원이었다는 점이 의의라 하겠다.
16강전에서는 경주고와 경기를 치루었고, 이정일 - 정재복- 송태윤으로 이뤄지는 인고 타선은 경주고를 상대로 10:0의 콜드승을 이뤄낸다.
이때 필자는 서제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대담무쌍하게 피하고 도망친 친구로 부터 걸려온 전화... 인고의 10:0 승리 소식에...
모두들 자율학습 하다말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 즐거워했던 순간이 눈에 선하다.
8강전은 대 대구상고전... 절대 잊을수 없는 경기다.
요일은 지금엔 잘 기억나지 않지만(아마 토요일이었던것으로 기억난다), 단체응원은 가지 않았고, 선생님들과 희망학생들만 단체로 응원을 갔던 기억이 난다.
인천고 선발 송현우, 대구상고 선발 장준관.
결과부터 말한다면...
대구상고 6 4 3 0 2 ---- 15
인 천 고 0 0 0 0 0 ---- 0 (5회콜드)
경기는 출발부터가 불안했다. 송현우의 부진도 있지만, 고교야구는 수비에서 결정되듯이 1회에 3루수 호철의 실수부터, 유격수의 악송구, 1루수의 험블등... 갖가지 에러를 선보이며(?) 일치감치 자멸을 하였다.
당시 유격수 정재복선배 (지금은 투수지만)는 상당히 큰 체격으로 유격수를 보았는데, 순간순간 잘 하는 듯 하더니, 결국 대형 알까기를 선보이면서 팀을 어렵게 만들었고, 3루수 호철이도 결정적인 순간에 공을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1루 외야에 단체응원오셨던 선생님들은 망연자실하셨고, 황금주말을 야구보러 동대문까지 왔던 우리 인고재학생들도 너무 허탈했다.
우리 인고마운드를 초토화시킨 대구상고는 그해 98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에이스 장준관(현 LG)이 상을 탄것으로 기억난다.
장준관과 이정호...
이 두명이 우리 인고를 무참히 짓밟는데 기여를 했는데... 프로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참..재미있다..
인천행 전철속에서 친구들과 나는 망연자실한체 내려왔다.
이것으로 인고의 98 시즌은 황금사자기 8강 진출로 막을 내렸다.
100주년 기념관에 있는 인고 연혁관...
나는 고1때 역사탐구부를 들었는데, 지도선생님이신 김성태 선생님 (인고 81회)을 모시고, 연혁관 개관에 매진하게 된다.
1997년 연혁관 개관후에도 김성태 선생님을 모시고, 고2때까지 계속 연혁관 관리 및 동문회 일을 돕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때 동문회보 및 학교신문 제작을 추진하였었다.
김성태 선생님께서 문예도서부 윤영성선생님을 찾아가 보라고 하시어, 찾아간것이 지금 주작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윤영성 선생님과는 97년 고1때 한국원자력발전소 주최 글짓기 대회때 참여했던 인연이 있었고 (이것으로 교내 최우수상 수상), 이글이 교지 미추홀'재창간호'에 실려있다.
윤선생님께서는 교지를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며, 참여하겠냐고 물으셨고 나는 선뜻 선생님말씀에 응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네가 추천한 학생과 글짓기를 통해 선발할 친구들로 인원을 구성하겠다고 하셨다.
결국 내가 역사탐구부에서 데려온 이치원, 이근수, 이길택 이상 4명에 윤선생님이 글짓기를 통해 뽑은 학생들 (원치현, 김구호, 서현석, 황택근)과 함께 당시 인덕관 2층 교사회의실 (지금은 식당이지만)에서 발족한것이 인고 교지편집부 '주작'의 시초이다.
고2 겨울쯤에 치현이와 함께 인고야구부를 방문하여 당시 인고감독인 오공탁감독(인고71회)과 이덕상 코치(인고89회)와 인터뷰하고 사진촬영도 하며 내가 작성한 기사가 '미추홀의 영광이여 다시한번'이란 제목으로 인고 교지 재창간호에 실려있기도 하다.
고3때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고3이었던 환경과 인고 야구부의 침체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2000년 2월 나는 인고 99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인고 연혁관 개관 및 교지발간의 공으로 졸업식때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첫댓글 레간자 ㅠ_ㅜ 윤석아 점심 맛있게 먹어 난 중도로 간다 ㅎㅎㅎ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인고야구는 작년 (2004년)대통령배에서도 우승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아~~ 그것을 잊고 있었네여...ㅎㅎㅎ 교생떈 대통령배 4강까지 올라갔었는데..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