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임은 말해 무엇 하나?
마음이 고달프고 현실이 괴로울 때, 반추하는 추억이야 당연히 고마운 추억이 될 테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한가의 내 고향은 중흥리 제일 높은 제비골에 위치해 있어서 시장 통을 가로질러 도원리쪽으로 시선을 내리면, 저 녘 서산의 둥근 해가 낙조를 이룰 때 피어나는 초가집 굴뚝마다의 연기,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예술이었네!
민속촌에서도 지금은 찾을 수 없을걸………………….
그러나, 인생의 추억은 꼭 그런 곳에서만 다 찾을 수 없을 것 아닌가?
전기도, 전화도 없었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가?
우리 아들과 심지어는 와이프도 내가 전기도 없었고, 전화도 없었다면 이조 시대를 모르겠다며 거짓말이라니.....................................................
여기서는 전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믿지도 않으니…………………
그러나, 우리들은 알지………………………..
그 것도 새마을 운동으로 복운리에 버스도 들어가고 딸딸이 전화도 설치 되어 마을 방송으로 <아~ 거시기~ 승심이 어머님! 서울에서 전화 왔슈~> 하던, 일상이 전원일기 였던, 그 시절의 추억은 차라리 생각만 하여도 울렁거리는데……………………………………
내 기억에 그 전화가 제비골에 처음 한대 설치 되어 그 중계방송을 내가 달음박질로 알려야 되거나 편무권이네 집까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야 교환의 의무를 다 하는 거라서<무권이 엄마! 서울서 전화 왔씨유~> 무권 엄마는 고무신을 벗어 던지고 달려와서 전화를 받곤 했었다.
“그 때를 아십니까?”
대문을 마주 보던 무권네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딸만 7명에 막내로 아들이 하나라 참~ 기억이 많은 동무네다!
지금은 늦게 장가가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 아버님께서 소학교(송악초등학교12회, 할아버지는 1회, 나는 51회, 조카는 80회, 아들은 5학년, 3학년 까지) 다니실 때, 새색시로 시집 오셨다는 무권이 엄마는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늘~ <우리 딸은 잘 있는지 편지 좀 갔다 줘유~>.
온 동네 아줌마들이 밭 매다 배꼽을 잡고 웃어 제키던 그 시절…………………..
내가 무권이 어머님께 여쭈었다.
<아니 아주머니는 어째서 집배원 아저씨에게 안부를 물으시나요?>
“아~ 저 집배원이 우리 딸한티 갔다 오능거 아녀?”ㅋ.................
'모두 그 시절에 사실이다'
그래서 나중엔 무권이 엄마도 무권이 누나 가 서울에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야 여기까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른다.
“그 때를 아십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까지 자전거로 집에서 통학을해야 되는 형편이라서, 제비골에 나 하나 밖에 고등학생이 없어서(제비골엔 8가구가 살고 있었다)…………….
무권이가 도회지로 나가 돈을 벌 때 무권네의 모든 편지는 내가 읽어 드렸고,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적어 대필로 7명의 누나들에게 연애편지 아닌 연애 편지를 참 많이도 썼었다.
물론, 가끔 내가 보기 좋게 각색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을 그 동무집……………………………….
그 때를 아십니까?
초등학교 때, 학교를 일찍 다녀와서 소 풀을 뜯기는 의무(?)를 가진 나로서는 12살 된(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소를 타고 소가 알아서 가는 대로 타고 다니며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월곡리로 넘어가던, 아마도 서울 손님이지 싶은데………………………
소를 탄 나를 보며 사진을 열심히 찍은 것 같았는데, 지금 같으면 모델료라도 제대로 달라고 할걸..........
이 건 뭐?
카메라도 처음 보는 것이니……………………………………………..
그 때를 아십니까?
우리 아들은 당최 나의 이런 얘기를 전혀 믿지 않고 꾸며낸 얘기로 알고 있으며, 와이프는 애들 데리고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데 나는 미치겠다.
와이프는 대전 문화동(천근)이 태어난 곳이니 전기 없었네, 전화가 없었네, 소 풀을 뜯겼네 하면 지금도 반신반의 한다.
장인께서 당진 탑동 초등학교에 약 2~3년 선생님으로 근무하신적은 있고, 나를 만나서 결혼을 결정하고 당진을 처음 봤으니, 그 때가 1989년이다.
그나마, 중흥리에서 몇 년 살면서 재원이나 재온이, 병로, 상길이 친구들이 거들어(?) 줘서 조금 믿는 것이 이 정도니…………….
각 지역마다, 각 나라마다 문화라는 것이 그 사람의 성품을 결정하고 기질을 가늠케 하는 척도가 바로 조국이고 고향 아닌가?
어디서 태어났는가?
어디서 자랐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사람들은 만나면 궁금해 하는 이유를 이제 나이를 먹어 익어가니 알 것도 같은데…………………….
아쉽게도 인걸(친구들)은 간 곳 없고 허물어진 옛 친구들의 추억만 남았구료~
여러분!.
그 때를 아십니까?
만나서 그 때, 새로 이엉과 용고새 엮어 올린 늦가을의 산뜻한 초가집을 안주 삼아 추억 찾기 여행을 떠나봅시다!.
이천칠년시월스무하루
Sunnyoung jeon
p/s. 혹시, 무권이가 이 글을 보면 뭐라고 하기 없다. 지우라면 지울께!.
요즘, 마음이 착잡하여 요따위 글이나 쓰고 있는 중인데, 역하다면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누구던, 말씀하시면 받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추억의 소재를 찾다가 무권이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무권이가 제발 기분 좋게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디 사는지............... 그 무권이 아들 하나 보시려고 딸을 무려 일곱번이나 낳으신 어머니.............. 무권이를 우리들은 그냥 무경이라고 불렀습니다. 무경이 넷째 누나는 송악초등학교 사환으로(우리들 학교 다닐 때도) 오랬동안 근무 했습니다. 없어도 행복 했던 그 집엔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때 무경이네를 지켜보며 행복의 개념을 조금 알았습니다.
무권이가 편무경인가?? 네글읽으니 어렴풋이 그 누나도 생각이 나네.추수끝나고 짚으로 이엉(영이라했음 울동네 중말에선.. )엮어 용고새 틀어 새지붕만들고 흙으로된 마당 깨끗히 쓸어내고 닥종이로 문바르고 손잡이 가까이에 봉선화꽃잎과 잎파리 붙이면 집단장이 다 되었던때가 바로 지금 이때가 아니었나싶네. "그때" 가 그리워지게 만드네.영선이가...
기억력 좋구만. 맞어!. 편무경이야!. 나는 거칠은 기억인데, 세숙이는 곰살 맞은 기억이라서 분위기가 더 애닲으네.......................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