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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으며, 미국도서관을 소개하는 책을 보며 부러움을 넘어선 시기심이 일었던 기억은 책읽기를 좋아하고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도서관 활동을 하면서 항상 미국처럼 또는 유럽처럼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교육 환경도 문화적 배경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시아 도서관으로 눈을 돌렸다. 내가 본 대만, 싱가포르, 일본 공공도서관 모습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글쓴이)
싱가포르 탐방기1)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다양하게, 그리고 독특하게”라고 정했다. 사실 다양하다와 독특하다는 같은 맥락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이 독특하며 전체적으로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에, 비슷한 프로그램, 비슷한 장서를 갖추고자 하는 우리나라 도서관이 생각해 볼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 무엇이 다양하고, 무엇이 독특할까?
우선 언어가 다양하다.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하철역 이름에서부터 공공 안내판은 모두 4개 언어로 공평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도서관 자료에 굳이 다문화서비스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언어만 다양한 건 아니다.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진행되는 주제전시도 다양하고, 특정 주제만을 다루는 주제전문 도서관이 있으니 독특한 전시와 도서관이 모여 다양함을 만든다.
이런 다양함과 독특함을 지닌 싱가포르 도서관으로 함께 떠나 보자.
픽토그램과 그림라벨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큰 도시국가이며, 인구는 556만 명 남짓하다. 그 중 중국계(약75%)가 가장 많고, 말레이계와 인도계 주민이 다음으로 많다. 공용어로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그리고 타밀어2)를 사용하고 있다. 버스 유리창에 ‘위급할 때 아래의 망치로 유리창을 깨시오.’라는 문구가 4개 언어로 쓰여 있는 것이다.
도서관도 다르지 않다. 언어 자료가 대부분인 도서관에서 4개 언어 자료를 모두 제공하는 것도 당연하다. 도서관의 위치가 상업지역인지 주거지역인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네 가지 언어 자료를 모두 제공하며, 도서관 자가대출반납기와 같은 전자기기부터 각종 안내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4개 언어가 나란히 있다.
도서관 자료 배가는 성인, 청소년, 어린이 등 연령대를 먼저 나누고, 그 안에서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로 언어를 나눈 뒤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어린이 코너에 가면 언어별로 구역이 나뉘고, 한 언어 안에서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뉘고, 픽션에서는 그림책과 옛이야기, 동화로 나뉜다. 그리고 그림책은 책등에 알파벳 ‘P’가 쓰인 라벨이 붙어 있는데 그 색깔이 네 가지다. 언어별로 색깔이 달라 안내문이 없어도 책등 라벨 색을 보고 어느 언어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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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을 안내하는 픽토그램과 장르별 라벨
이런 라벨은 그림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싱가포르 지역 관련 도서는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멀라이언’(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자 머리에 몸은 물고기인 모습) 그림라벨이 붙어 있고, 4개 공용언어 이외의 언어 자료는 각 나라마다 색을 부여해서 구분하고 있다.(한국은 빨강, 미국은 주홍, 대만은 주황 등.) 소설 서가에서는 장르를 표시하는 그림라벨을 볼 수 있다. 로맨스 소설은 하트, 추리 소설은 홈즈, 범죄 소설은 총, 옛이야기는 알라딘 램프, SF 소설은 우주선, 호러 소설은 마녀, 그리고 판타지 소설은 성(城)을 그림으로 나타낸 라벨이 붙어 있다. 이렇게 색과 그림을 활용한 라벨을 붙여 책의 언어와 장르를 쉽게 알려 줌으로써 이용자가 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4개 언어를 모두 써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다양한 픽토그램이나 기호를 쓰고 있다. 우리나라 도서관에서 주로 ‘음식물반입금지’, ‘휴대폰사용금지’, ‘실내정숙’ 등과 같이 짧게 금지행동을 알리려고 하다 보니 한자말을 많이 쓰게 되는데, 싱가포르에서는 간단한 그림으로 알리는 것이다.
국가도서관의 S.U.R.E.
싱가포르 공공도서관은 국가도서관 건물에 이공찬 참고정보관과 중앙공공도서관이 있으며, 동쪽, 서쪽, 북쪽으로 지역을 나누어 각 지역마다 거점도서관이 있다. 이들을 포함해 총 22개 공공도서관이 있고, 그 중 3개 관은 주제전문 도서관이다. 이 모든 도서관은 국가도서관의 정책과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중에서 국가도서관이 시민들의 정보활용능력을 위해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S.U.R.E.’(Source, Understand, Research, Evaluate)이다.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정보원을 찾아 이해하고 평가함으로써 이용자가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보활용능력 향상 프로그램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떠도는 ‘베이컨이 수명을 늘린다.’, ‘생선의 오메가3는 머리를 좋게 한다.’와 같이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시민들이 스스로 정보원을 찾아 조사하고 이해함으로써 정보원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공유되어 전파되는 인터넷 기사들의 신뢰성을 시민들이 스스로 검증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은 연령대별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특히 교육기관에 소속되지 않는 성인을 위한 정보활용교육은 국가도서관이 직접 진행한다. 이전에도 ‘이러너즈’(eLearners) 프로그램을 통해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실제로 수집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교육해 왔다.
난양공대 교수님의 소개로 잠시나마 참관할 수 있었던 대학 도서관 강좌실에서는 예술 관련 학과 학생들을 위한 정보활용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사서가 학술정보 평가를 실습해 봄으로써 어떤 정보원이 더 신뢰성이 있는지 교육하고 있었다.
정보가 넘치는 현대사회에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을 찾고 평가하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대체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나 지인을 통해 정보를 접하는 성인들을 위해 제대로 된 정보활용교육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본받을 만한 프로그램이다.
주제전문 도서관 ‘라이브러리@’
싱가포르 쇼핑의 중심이라는 오차드 거리 가운데 니안 시티(Ngee Ann City) 쇼핑센터 3층과 4층에는 오차드도서관이 있다. 가장 번화한 거리 쇼핑몰에 공공도서관이라니.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이 도서관은 디자인, 생활, 그리고 예술자료를 담당하는 도서관이다. 이 주제로 10만 권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권당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디자인 및 예술 관련 도서와 영상자료를 가지고 있어 젊은 층의 이용률을 높이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오차드도서관은 디자인 생활예술 전문 도서관답게 도서관 서가와 실내장식 역시 아름답다. 북쪽으로 난 통창 아래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책을 보았다. 곡선으로 흐르는 서가와 반듯한 의자들이 조화를 이룬다.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이렇게 특정한 주제 분야의 자료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을 주제전문 도서관이라고 한다. 오차드도서관의 영문명은 ‘library@orchard’인데, 이렇게 ‘라이브러리@’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서관은 주제전문 도서관을 가리킨다. 싱가포르에 이런 도서관은 3곳이 있는데 오차드도서관 이외에 에스플러네이드도서관(library@esplanade)과 차이나타운도서관(library@chinatow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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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드도서관의 아름다운 서가 공연예술 전문 도서관인 에스플러네이드도서관
에스플러네이드도서관은 멀라이언 파크로 유명한 마리나 베이 앞 두리안 모양을 닮은 공연장 안에 있는 공연예술 전문 도서관이다. 음악과 무용, 연극과 영화 이렇게 네 분야의 도서, 잡지, 대본, 시나리오, 악보 등 인쇄자료뿐만 아니라 영상자료 5만 종을 2,300제곱미터에 담고 서비스하고 있다.
미술 분야 자료를 담고 있는 오차드도서관과 음악영상 자료를 담고 있는 에스플러네이드도서관은 젊은이들이 예술을 통한 ‘21세기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는 싱가포르 국가도서관 정책의 일부이다. 예체능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꿈을 이루고자 하는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이런 공공도서관 모습은 부럽기 한이 없다.
공공도서관은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보존함으로써 축적하고 이를 시민에게 공적으로 서비스함으로써 지적 평등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기관이다. 특별하고, 구입이 어렵고, 아주 비싼 자료를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구해서 자신의 관심과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지적 서비스 역시 공공도서관이 하는 역할임을 이곳 주제전문 도서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어린이·청소년 서비스
싱가포르 서부지역 거점도서관인 주롱지역도서관 4층은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다. ‘버징-올-틴스’(Verging-All-Teens)라는 이 공간은 온전히 십대만을 위한 도서, 오디오, DVD 자료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청소년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안한 의자와 책상을 갖추고, 바닥에서도 책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중국인 주거 밀집 지역인 비산공공도서관에도 이런 십대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다.
십대를 위한 공간에는 다양한 장르의 만화와 그래픽 노블 등도 함께 갖추고 있다. 이 분야 도서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에서는 수집 배제 자료이지만, 외국도서관에서는 청소년을 도서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만에서도, 홍콩에서도 고민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만화 서가를 따로 배치하고 있었다.
비산공공도서관에서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싱가포르 학생 몇 명이 외국 각지에서 온 청소년들에게 자기 지역 도서관을 소개하며 이용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한 여학생에게 물어보니 학교에서 하는 외부활동 중 하나인데 외국 청소년과의 교류 활동이라고 한다. 주변에 인솔하는 교사가 없이 학생들끼리 설명하고 들으며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학생 자율활동이라는 이름에 ‘자율’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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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공공도서관의 다양한 주제전시
청소년 서비스는 우리나라와 다소 다른 점이 있지만, 어린이 서비스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른 점을 느낄 수 없었다. 책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른과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행사를 하는데 공간이 폐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자료실별로 모두 폐쇄적이고 문화강좌실이나 시청각실 같은 공간이 대부분 폐쇄적이지만, 싱가포르 공공도서관은 넓은 공간을 코너별로 구분만 할 뿐 칸막이로 공간을 가두지는 않는다. 공간도 개방적이고 행사도 개방적이라 누구나 참여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다르게 느껴진다.
다양한 주제로 소장도서를 전시하는 것은 어느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다. 첫 방문지였던 퀸즈타운도서관 청소년 코너에서는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전시하고 있었으며, 세계 여행, 50세 이상의 어른을 위한 책, 유아 그림책, 씨앗을 주제로 한 책, 중국작가 작품, 요리책 등 갖가지 주제로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다. 국가도서관 지하에 있는 중앙공공도서관에서도 캐나다 도서 전시와 우정, 환경 등을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주제 전시는 작가, 장르, 목적, 연령, 형태 등 다양한 기준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주제전시뿐만 아니라 신착도서, 방금 반납된 도서 등도 따로 공간이 있어 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 공공도서관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도서관이 발달한 우리나라나 대만과는 달리 유럽도서관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공공도서관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Quiet Reading Room’을 제공하고, 청소년들이 3D 프린팅에 관한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직접 3D 프린터(심지어 한국산이었다!)를 사용해 볼 수 있으며, 책 읽는 이용자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허브정원을 가꾸는 노력은 본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1) 싱가포르 도서관은 2016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탐방하였다. 국가도서관과 중앙공공도서관, 주롱지역도서관, 퀸스타운공공도서관, 비산공공도서관, 그리고 난양공대도서관을 방문했다.
2) 인도 남동부 지역의 타밀족이 사용하는 드라비다 어족의 대표 언어.
*2016년 6월호 <동화읽는어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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