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핑계만 없으면 성령께서 오신다
영화 ‘언 브로큰’은 최연소 미국 5,000미터 올림픽 대표로 뽑혔던 루이스 잠페리니의 생존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그린 영화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잠페리니는 미 공군 폭격수로 입대합니다.
그러나 1943년,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에서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합니다.
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구명보트에서 47일간 표류하며 극한의 생존 싸움을 벌인 끝에 구조됩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조한 배는 일본군의 배였습니다. 잠페리니는 850일간 여러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며 가혹한 고문과 학대를 겪습니다.
특히 새디스트로 알려진 와타나베 무츠히로라는
일본 장교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당합니다. 와타나베는 잠페리니의 정신을 꺾으려 하지만,
잠페리니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잠페리니는 살아남아 귀국하지만, 전쟁 중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악몽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립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 와타나베를 찾아가 복수하려고 결심합니다. 1949년 그의 아내 신시가 잠페리니를 빌리 그레이엄의 복음 전도 집회에 데려갑니다.
집회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인간의 죄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며,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설교에 반감을 품었고, 집회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루이스는 전쟁 중 구명보트에서 바다에 표류하며 하느님께 한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구출된다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기도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레이엄의 설교를 들으며, 하느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께 구원을 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깊은 내적 평화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 신적 체험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하게 체험하였고, 그 순간 그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 이후, 루이스는 알코올중독을 극복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와타나베 무츠히로를 용서하려고 했으나, 와타나베는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잠페리니는 그를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자신의 내적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 잠페리니는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을 하며 못 이룬 꿈도 이룹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시며 가서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나 ‘핑계’는 성령강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 없다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성사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위한 성령강림까지 포기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능력이 없는 이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십니다.
허버트 박사는 언어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 침팬지 님 침스키를 언어학자인 스테파니와 살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침팬지가 사춘기가 되자 폭력성이 드러나 더는 스테파니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침팬지 무리로 돌아간 님 침스키는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습니다.
스테파니가 불쌍히 여겨 그에게 다가갔지만, 침팬지는 분노로 스테파니를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내팽개쳤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능력을 그것을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핑계 대지 말고 용서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고정원 씨와 다른 유영철의 피해자들과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고정원 씨는 용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용서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강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조금씩 미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유영철을 양자로 삼습니다.
용서하라고 했다면 죽기까지 용서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핑계 대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사랑으로 이끄시기에, 결국 사랑은 의지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요한 20,19-23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잔뜩 사로잡힌 나머지 문까지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동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제가 스승이었다면 가장 필요한 순간 줄행랑을 놓은 제자들을 보자마자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에,
너희들이 대체 불벼락을 내렸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그게 할짓이냐? 그러고도 어떻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조목조목 잘못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른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샬롬!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어서 아직도 굵은 못자국이 선명한 당신의 두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아직도 당신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확증시켜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숨은 우리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런 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그 숨으로 인해 살아있기는 하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제자들은 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 숨으로 인해 제자들은 존재의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도 자신의 내면 안에 영생과 구원의 씨앗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주님을 전하는 일이라면 목숨조차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극복 못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새로 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2024. 5. 19.)
(사도 2,1-11; 1코린 12,3ㄷ-7.12-13; 요한 20,19-23)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1-8)”
1)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어일까?
천주교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라틴어일까?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일까?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일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언어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공용어부터 배워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호기심과 궁금증일 뿐입니다.
실제 상황이 어떨지는 그날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각자 사용하는 말이 달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나라” 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 그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 이야기’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도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준 표징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1요한 4,16), 하느님 나라의 언어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대화가 이루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장벽이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서 없앤 일이고, 마음의 벽도 허물어서 없앤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같은 마음의 장벽.>
3) 그렇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능력이 그 자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생긴 것인지......
결과만 놓고 보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기적은
사도들보다는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하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의 수는 삼천 명보다 많았을 텐데, 똑같은 은총이 내려도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된다는 것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내렸을 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나섬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삼천 명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려고 노력했고, 알아들었고, 변화되었고,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사도 2,41).
4)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소통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일치와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남 탓’만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통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장상들만의 탓인가?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만의 탓인가?
그게 정말로 ‘남 탓’뿐인가? ‘내 탓’은 없는가?
소통과 일치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부터 노력해라.” 라고 비난하는 모습 자체가
불통의 모습입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소통과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남 탓’만 하다가
더 큰 불통과 분열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악령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입니다.
“일치는 성령의 일이고, 분열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성령의 일이고, 교만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