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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8.7
1012~2013 지역부총재를 맡고 있다.
라이온스 지역부총재의 사업중에 고구려 역사유적및 백두산 탐방이 있다.
직책을 맡았으니 의무도 수행해야겠다 싶어 인솔자로 나섰다.
사무실로 일정이 가는 바람에 스케줄 확인도 못하고 길을 떠났다.
성인 5명(김학근 전지역부총재님, 최창수 전회원님, 서정표기자님, 김재영회원님 ,그리고 나)
아이들 19명 (초등학생 3명, 중학생, 5명, 고등학생10명, 검정고시 1명)이다.
출발지 신갈초등학교엔 아이들이 부모님이나 할머니와 함께 나와 있었다.
아이들과의 세대차이를 생각하니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교사시절 이후 거의 이십팔년만의 아이들 인솔이라
긴장도 되고 책임감이 실감되었다.
노란색 티셔츠를 공동으로 입고 출발전 기념촬영을 했다.
티셔츠 두 벌과 관련책자, 손수건도 받았다.
우리 일정은 요녕성에서 흑룡강성까지 중국의 동북 3성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이래로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거친 만주에 터전을 잡고
조선족으로 뿌리 내리기까지를 체험하는 탐방 코스다.
출발일인 오늘은 인천에서 대련으로 17시간 배를 타야만 한단다.
11시에 모여 12시에 발대식을 한다는데 배시간은 오후 5시.
인천에 도착해서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은후 긴 대기시간을 대합실에서 보냈다.
배명은 대인페리로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 올림픽 중계를 했다.
중국인 한국인이 뒤섞인 탑승객. 식사때는 차례로 배식을 받았다.
우린 각자 4인용 이층침대를 배정받았고 어찌나 더운지 숙면은 불가했다.
샤워실에서 더운물도 나왔고, 화장실과 세면대가 잘 갖춰져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지저분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객실 중간에 있는 휴게실에는 더위를 못참는 승객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다.
잠은 자야 하고... 휴게실에서 몸이 식으면 다시 침대로 기어 들었다.
자다가 더우면 다시 휴게실로 나가기를 반복.
어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그러나, 우르르 갑판위로, 휴게실로, 매점으로 몰려 다니다가 금세 친해졌다.
이등실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창가에 있던데
커튼 덜렁거리고 후덥지근한 우리 팀의 침대는 너무 불쌍하다.
지금은 전쟁중이라고 마인드 콘트롤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스폰서라는 게 아이들에게 더 미안해 불만이나 투정은 꿈도 못꾸었다.
2일-8.8
아침 9시 30분에 대련에 도착하니 단체는 하선도 뒤로 밀렸다.
입국심사는 비행기나 다름없이 오래 걸렸다.
대련의 한낮 날씨는 37~38도
첫 관광지 성해공원이 아무리 멋져도 우린 지쳐서 볼 기력이 없다.
애들은 더위로 냉음료를 사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만 콜라를 6위안 (한화 1200원), 물 6위안 (한화 800원)이다.
100주년 기념이라고 공원에 멋진 발자국 조형이 설치되었는데
그저 기념사진도 찍는 둥 마는 둥
다시 차에 올라 해변도로를 드라이브하며 가려니 주변이 뿌옇다.
공해인가 했더니 바닷가도시라서 안개란다.
동북3성중 몇 안되는 해안도시라 신혼여행지나 휴양지라는데 더워서 쯧....
오랜 이동으로 꼬리뼈가 아프다.
점심때 몇 아이들은 중국음식을 거부하며 과자로 식사를 한다.
과자식사란 곧 냉음료를 동반하니 배앓이가 걱정 되는데
아직 친해지지 않아 강하게 제지 하지는 못했다.
어쨋든 빨리 친숙해지는 게 급선무다.
점심후 우린 다시 단동으로 4시간의 이동을 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해서 더 나은 일정을 위해 압록강 유람선을 다음날 아침에 타기로 했다.
식당에 가기전 금강산 공원에서 잠시 산책을 했는데
앰프를 켜고 혼자서 운동삼아 춤 추는 분이 계셔서 나도 따라 춰 보았다.
아이들은 벌써 서로 짝을 찾아 친숙해지려 노력중이다.
저녁 호텔은 시장곁에 있었고 북한식 저녁을 먹었다.
북한식당은 레퍼토리가 변한 게 없다.
뻔한 노래에 뻔한 공연, 팁 받는 방법까지 전에 방문 했을 때나 다름이 없다.
인솔자인 어른들은 마음을 비워 적응이 되었으나
아이들은 낯선 음식, 낯선 장소에 힘들어 보인다.
우린 더 씩씩한 척, 잘 먹는 척 애들을 부추기기 위해 애들을 썼다.
그나마 북한 음식에는 조금씩 젓가락을 댄다.
여자가 혼자라서 마음은 엄마 같은데 애들에게는 할머니로 보일 게 분명하다.
3일- 8.9
은지가 아침부터 배가 아프다 한다.
어제 미뤄둔 일정으로 오늘은 아침부터 빠듯한데...
바로 압록강으로 이동해서 유람선을 탔다.
강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 관리하나
강 가운데의 섬은 중국의 양보로 북한소유라 한다.
오늘 오전 유람선은 섬과 섬 사이를 운행하니 우린 북한땅을 지나가는 것이다.
안내원 김흠씨는 주의점을 길게 공지했다.
'사진을 북한군을 향해 찍으면 안된다. 손가락질 하지 마라.' 등등
무기공장이라는 곳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막사엔 여군 훈련장이 보이고 군인들의 눈길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라고 하는데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아야 하다니... 비극이다.
내 자식을 남의 품에서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겠지.
점심 후 아이들은 오후 두시에 졸본성을 올랐다.
중국은 졸본성이라는 말을 아예 없앴다.
붉은 글씨로 오녀산성. 오녀산성 박물관 이라 썼다.
1930년대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던 5명의 여자들을 기리는 곳이란다.
그럼 그 전에는 없던 땅이란 말인가!
유적은 고구려적인데 이름은 1930년대라고?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한국역사 지우기일 것이다.
안내원은 CC TV를 가리키며 아예 한국역사 이야기는 못한다고 한다.
얼마전 북경에선 징역 5년에 천만 위안의 벌금을 물었다며
당국이 하지 말라는 일은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999 개의 경사진 돌계단을 오르니 졸본성 유적지가 나타났다.
여기저기 막사들과 병사들이 살던 흔적이 보였다.
고구려의 성은 ㄷ자 형태를 갖춘 천혜의 요새로 적이 접근하는 걸 차단했다 한다.
전체적으로 오녀산성은 뾰족한 산정상을 칼로 납작하게 잘라낸 형상이었다.
군이 거주하고 생활하기엔 안성맞춤이어서 어떤 당나라 군사도 쳐들어 오지 못했다 한다.
우린 다시 집안으로 이동하여 밤 10시에 호텔에 도착했다.
집안지역엔 복조리 수술 모양의 멋진 가로등을 세웠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중국 갔을 때와는 판이하게 잘 정돈되고 정비 되었다.
어디를 가나 가로의 꽃과 나무가 잘 가꾸어졌다.
아이들은 지쳐 잠들어 있다가 부스스 눈을 뜬다.
샤워실도 부실하고... 3성급 호텔이 다 그렇지, 싶어 적응을 하기로 했다.
나야 어차피 고생하러 따라 온 것이니 불편을 감수한다지만 아이들이 걱정이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 친해져서 짝꿍들도 생기고
우리를 보고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계속된 현지식에 아이들이 가끔 배앓이를 호소한다.
걱정이 되어 자주 병원에 연락해서 남편에게 자문을 듣기도 하고
서둘러 약을 준비한 김재영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투약해 주었다.
김선생님의 열정은 존경스럽다.
4일- 8.10
오늘이 고구려 역사탐방의 정점이다.
아파트를 짓느라 석재로 써 버렸다는 나즈막한 국내성터의 나즈막한 성곽 앞에 서니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이 30년 동안이나 아파트 석재로 묻혀 있게 만들었나 싶어 숙연함이 든다.
우연한 꿈으로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고
다시 전쟁 중에 환도했다는 환도산성을 둘러 보러 갔다.
18000여개의 고분들이 모여있는 산성하고분군을 가는 길엔 맑은 냇가가 있었는데
그곳이 집안시의 상수도물이란다.
우린 그 작은 지류에서 물장난을 치고 더위를 식혔다.
아이들과 친해진 어른들이 서로를 향해 물을 뿌리기도 했고
급기야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우리 조상들의 땅. 이젠 남의 나라 땅.
비감하다.
산을 올라 환도 산성의 성채에 오르는 길에 쪼그려 앉아 과일을 파는 아낙들이 있었다.
부총재님과 최창수회원님이 호주머니를 털어 아이들에게 과일을 실컷 먹였다.
마침 그늘이라 갈증이 난 아이들은 오이와 토마토, 자두를 먹고 여유를 즐겼다.
출발 전 회장단 회의에서 어떤 회장님은
"남의 나라에 태극기 꽂고 내땅이라고 말하는 그런 역사탐방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개탄하셨다.
그러나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우리 조상의 패기를 잊고
당장 지금에 만족한다면 우린 반도의 반쪽에 만족하는 안일함으로
통일 이후의 문제에 눈을 감는 것이다.
눈 부릅뜨고 역사의식을 갖는 청소년들로 키울 책임은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다시 우린 오호분 오호묘로 가서 장수왕릉을 돌아 보았다.
2톤이 넘는 큰돌을 쌓은 적석묘 형태의 장수왕릉 주변도 한국역사를 말살하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온통 카메라로 감시 중이었다.
아예 겁먹은 가이드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김선생님은
"아니 이러면 오는 의미가 뭐가 있어?"
하고 한탄을 했는데 나는 이럴수록 우리 역사를 스스로 지켜야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광개토대왕비마저 호태왕비라 불렀고
심지어 가까이에서 사진촬영조차 불허되었다.
얼마후면 중국에서 한국역사는 중국의 새로운 역사로 덮힐 게 뻔하다.
어렸을 때 고구려 고분 벽화로 본 오호분오호묘의 벽화를 직접 눈으로 보니 신기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그림에
해신과 달신아래 태어나는 아이가 일상을 살다가 죽어서
사슴을 타고 하늘로 부부로 올라가기까지 인간의 삶에 대한 그림도 있었다.
전쟁은 영토와, 재물, 여자를 얻기 위해 일어난다는데
짐승들의 눈에 박힌 보석중 단 두 개가 남아 지금도 반짝이고 있었다.
무덤은 습기가 차고 서늘해서 더위에 지친 우리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를 돌로 만들어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했는데
한국에 대해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중국에 이용만 당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아예 기념품조차 사지 않았다.
우린 오늘밤 통하에서 이도백하에 가는 기차 안에서 1박을 할 예정이다.
이국의 기차를 타 보는 건 오랜만에 하는 새로운 경험이라서 마음이 설레었다.
아이들은 긴장되어 자주 화장실을 찾았다.
몇번 중국을 다녀 온 경험이 있는 나는 미리 식당에서 씻으라고 예고해 두었다.
세월이 지나 경제적 삶은 풍요로워졌으나 습관은 끈적이며 남아
어디나 불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삼 년 전보다 많이 깨끗해진 것은 인정한다.
그 와중에 설사와 복통을 앓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내심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디나 화장지가 없는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내 가방을 부산스럽게 했다.
아이들은 수시로
"선생님 화장지 있어요?"
했기에 호텔에서 늘 화장지를 접어 넉넉히 담아야 했다.
기차는 무사히 올랐는데 이번엔 삼층 침대 열차다.
오랜 이동으로 허리가 아픈 나는 일층에 자리잡았는데
이층에 오른 초등학생인 건우가
"이거 떨어지면 어쩌지?"
하고 긴장을 해서 참 미안했다.
키 큰 상연이가 삼층으로 올라갈 때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좀 더 넉넉한 스폰으로 더 좋은 조건을 아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5일- 8.11
이도백하에 가는 기차 안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본다.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을 마음에 품고 .
삼층칸의 아이들이 깰까봐 가만가만 아침 세수를 하러 나섰다.
기차안의 세숫간에는 위에서 흐른 물이 발로 튀어 올랐다.
기차칸에 들어서니 건우가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백두산에 간다.
기차역에서 시간에 맞춰 나타난 수많은 인파에 질린 김학근 전지역부총재님은
"대단한 나라여!"
를 연발하셨는데 백두산에서의 여정이 난 더 걱정이었다.
백두산에 오르는 오늘은 잔뜩 흐리다.
맑아도 불안한데 반바지 차림인 애들도 있다.
춥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질 않는다.
얼마전에 경험 했지만 이제 천지 올라가는 길은 기다림으로 진절머리가 난다.
게다가 잠시도 가까이서 들꽃을 바라볼 틈도 주지 않는다.
쉬지 않고 오르는 작은 11인승 승합차를 타는 것도
가슴이 닿을 듯 꼬불한 줄을 서기를 한 시간씩 해야 탈 수가 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우리가 만난 최고 크고 근사한 화장실조차 인파를 수용하지 못했다.
차가 세 대씩 동시에 서고 출발 하는데도 줄은 줄어 들지 않는다.
그 와중에 예민해진 사람들 중엔 싸움도 일어나니 애들도 예민했다.
그런데 천지는 구름을 뒤집어 쓴채 얼굴을 내밀지 않아 추위에 떨던 아이들은
라면이나 옥수수로 몸을 데웠다.
난 몇번 오른 적이 있어 아예 기대 안하고 편의점에서 계란을 사다가 먹으며 쉬며 애들을 맞았다.
이제 백두산 천지는 나무 계단으로 완전 포위 되었다.
장백폭포도 마찬가지다.
폭포에 오르는 길에 있는 온천 달걀은 이제 오를 때 사지 않으면 먹지 못한다.
내려 올 땐 우회도로가 주차장까지 이어졌다.
위로가 되는 건 우회도로 가에 취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것 정도.
두메 양귀비가 아무리 많아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쏜살같은 차량운행으로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느라 곁에 핀 꽃들을 눈여겨 볼 틈조차 없다.
다시 오고 싶어할 것 같지 않다.
저녁엔 연길에 도착해서 양고기 꼬치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모처럼 아이들이 넉넉히 잘 먹었단다.
알고 지내는 리선생님께서 저녁식사 장소로 마중 나오셨다.
백두산 송이는 워낙 귀해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게다가 잣이며 목이버섯이며 용정차에 고사리까지,,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셨다.
우린 밀린 정담을 나누느라 식당자리를 따로 잡았다.
리선생님의 바깥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꼬치구이를 열심히 구워 주셨다.
마음은 급하고 할 말은 많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안난다.
그러나 우리는 쉴새없이 반가운 얘기들을 나누었다.
6일-8.12
연길에서 2박을 하기로 했단다.
드디어 심각한 일이 생겼다.
은지가 앓아 누운 것이다.
그밖에도 두 아이가 더 병원에 갔다.
은지는 링거 투약까지 해야 했다.
세 아이를 호텔에 두고 나머지는 연길 모아산 등정을 했다.
일송정은 공사중이라 차안에서 멀리 바라보아야 했고
용정중학교에서는 시인 윤동주와 독립투사의 소개를 안내자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제 후원금을 받는 기회가 되어
윤동주가 공부하던 교실에서조차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고 찍으란다.
거부감이 들어 아예 둘러보고만 나왔다.
순진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금을 하고 방명록을 쓴다.
감자기 보경이가 열이 펄펄 나기 시작했다. 고열이다.
어린아이라서 겁이 덜컥 났다.
감기기운인 건 확실한데 우린 계속 움직여야 하지 않는가!
서둘러 해열제를 먹이고 잠을 재우니 좀 나아졌나 싶다가 금방 다시 열이 난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으로 옮겨 와서
밤새 수건으로 체온을 식히고 부채질을 해서 체온 조절을 했다.
부끄러워 옷을 안벗겠다고 하는 바람에 달래느라 고역이었다.
내가 여자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아침까지 열은 계속되고 겁이 난 나는 집에 계속 전화를 해야했다.
남편도 걱정이 되는지 내 안부보다 아이 안부를 먼저 물었다.
해열진통제와 보리차를 구해 먹이고 간호를 했다.
다행히 식사때마다 열이 내려 밥을 잘 먹으니 잘 견뎌낼 것 같았다.
큰애들의 설사 복통은 조금 안정되었다.
은지는 여전히 식사를 거부 중이다.
아이들이 중국 음식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고
찬 음료나 과자류를 먹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몸이 좋지 않아 일정을 조절해서 일찍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시켰다.
사우나 시설이 아주 잘 되어 모처럼 몸을 잘 씻었다.
7일- 8.13
어제 미뤄둔 일정인 도문에 가서 중-조 접경지역관광을 했다.
비가 내렸는데 다시 가이드의 경고와 주의사항이 길다.
다시 봉오동 전적지를 답사하고 기념촬영도 하고 발해 유적지인 동경성에 들렀다.
상경용천부 궁성터 앞은 꽃밭으로 잘 가꿔져 있는데
이제 중국에서 발해는 당나라때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배운다 한다.
흥륭사 절에도 들렀는데 도원결의를 한 유비 관우 장비도 모시고
부처도 모시고 두루두루 여러 신들을 모셨다.
홍콩에서 들은 바로는 중국인들은 종교도 대인배답게 한 신만을 섬기지 않는단다.
다른 신이 화를 내면 어쩌냐는 마음이라는데....
절 뒤의 느티나무는 천년이 넘게 자라
거기에 소원을 비는 사람이 많아 나무가 붉은 띠를 너절하게 둘렀다.
좀 느긋한 여행이 되게 되었다.
우린 목단강으로 이동했다.
우린 한중우의공원에 들렀다.
독립군 총 사령관이었던 김좌진 장군과 여러 독립투사들의 기록이 보전된 한중우의공원에 들러
아이들은 그분의 행적과 그 후손의 필름을 보고는 절로 애국자가 되어 박수를 친다.
모처럼 아이들이 대견하다.
형편없는 중국 시설을 경험하느라 불평 불만인 아이들이
들을 것, 마음에 새길 것은 다 챙겨 담고 있는 것이다.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우리가 헛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을 믿어 주고 더 많은 어른들이 후원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일찌감치 호텔에 들렀는데 거긴 북한사람들이 운영하는 것 같았다.
무리해서인가 급격하게 몸이 나빠져 나조차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래.... 짐이 되는 게 싫어서...^^
보경이란 설화가 소망대로 오늘밤 룸메이트가 되었다.
내내 함께 잠들고 싶어했는데 초등학생들이라 노파심에 미뤘었다.
그러나 여행 내내 너무나 모범적이라 둘이 재워도 되겠다 싶었다.
보경이가 열이 나면 즉시 알리라는 다짐을 받고...
설화는 잘 웃고 인사성 바른데 게다가 제 앞가림을 아주 잘했으니 신뢰감이 생겼다.
건우를 포함해 초등학생 삼인방은 요번 여행의 귀염둥이들이다.
8일-8.14
드디어 귀국하는 날.
보경이가 드디어 열이 내렸다. 안도~
팔녀투강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공원에서
우린 비행기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팔녀투강이란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궁지에 몰려
다른 부대원을 구하기 위해 일본군을 유인한 후
강에 뛰어든 조선여인 두명과 중국여인 여섯명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냉음료를 마시며 집에 돌아간다는 홀가분함에 놀이를 즐겼다.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 오르고 자전거를 타고 돌며 전기 장난감 자동차를 몰고
공원을 누볐다.
어른들은 그 모습에 귀여움을 감추지 못하시고 덩달아 신났다.
목단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리자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와! 한글이다.
우리 나라가 진짜 짱이다!"
한국에 오는 게 그리 좋다니...
아마도 집은 얼마나 더 좋을까?
더 나은 조건으로 다음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애국자가 되었다.
힘없는 나라는 국토를 빼앗기고
내가 속한 곳이 자랑스러운 한국이라는 걸 체감했으니까.
이 일을 실천하는데는 김재영 회원의 헌신이 한몫을 한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보람있는 봉사란 없다.
어차피 봉사는 희생을 전제 하니까.
그분도 요번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음엔 못할 것 같아요. "
하고 고백을 하셨다.
우리는 머잖아 그 청소년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그 희생으로 살아갈 세대다.
난 그분께 감사의 말씀과 위로와 격려를 했다.
그런분이 바다가 썩지 않게 하는 소금같은 분들이니까.
우리 사회에도 무심코 제 일만 하는 물같은 분들이 계시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나말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소금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김재영 회원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다만 땅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성서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소금의 역할로 태어났는지 물로 살아 갈 것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린 라이온이므로 사실은 모두가 사회의 소금이어야 하지만
바빠서, 힘들어서 모두가 소금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금이 소금역할을 하도록 도와 드릴 의무는 있으니까
힘껏 돕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더 많은 청소년들이 아이들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들이 사는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언제나 봉사는 희생을 전제하므로 힘들고 하고 싶지 않죠.
그러나 그럴 때 힘을 내셔야 더 짭짤한 소금이 되는 겁니다. 화이팅!"
"애들아! 건강하게 돌아와서 너무 고맙고
쉰 다섯 이 나이에 씩씩한 너희들과 함께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어서 기뻤다.
항상 당당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길 기도하며 이글을 너희에게 바친다.
너희들 얘기를 더 많이 쓰고 싶었는데 사생활 보호차원에서 최소한만 썼어.
센스있는스타일리스트 혜원이, 살 좀 쪘으면 싶던 상연이,성균이
진학을 고민할 수빈이,한나, 다희. 귀염둥이 건우, 설화, 보경이,
짝지들인 주은이 진영이, 수경이, 유리,재은이, 멋진 다연이, 씩씩한 정환이,
성격좋은 은지, 연예인 포스 주승이, 예의 바른 말투를 쓰던 태종이.
모두모두 애 썼다.
어른으로서 너희들 자랑스럽다는 말 전하고 싶구나.
사랑한다. 늘 건강하고 참하게 자라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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