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순종하며) 혼자서 가라]
우리 나이, 어느날 갑자기...어느날 갑자기 잠못 이루며 생각나는대로 써본 글입니다. 길고 재미없는 것 이해 깊으시길 바랍니다.
잠못들어 깊어가는 밤,가수 하동진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인연이라는 것은
하늘만이 그걸 알수있는 것
지난날은 괴로워 말자
언제가 너도 괴로울 테니까~'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의미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뿔이 하나 뿐인 코뿔소처럼 우직하고 묵묵히 정진(精進)하라'는 뜻이지만, 법정스님의 뜻풀이를 보면 '필연적인 인연은 피할수 없으되, 불필요한 인연을 멀리하라'는 의미로 보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 모두가 인연이란 울타리속에 있다. 부모와의 인연 9000겁, 친구와의 인연 5000 + α겁...
어느 가을 날 오후, 노을 지는 강변 다리위엔 경찰 두명과 오십대 사내가 조바심을 하며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 아래엔 70대로 짐작되는 노인이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 대시더니 다리 부분부터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노인은 다리의 중간지점 전망대에다 깨끗하게 씻은 하얀 고무신 두짝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고? 가정불화? 지병? 그러나 사내는 그런걸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경찰에게 물었다.
"119에 구조요청을 하셨어요?"
사내의 말에 경찰들은 당신이 뭔데 나서느냐?는 눈초리였다.
"했어요. 오는 중입니다."
이후 사내는 자신의 가족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구조해 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아 다리를 건너 다닐 때마다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었다.
처음부터 경찰둘이 있었지만 상황판단을 면밀히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삶의 정의를 모르는 그 자신이 남의 삶에 끼어드는 것에 대한 어색함도 없지는 않았었다.
아무튼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다 보았던 그 시간은 진시황이 부러워할듯 인생에서 수명을 연장해 주는 길게 느껴지는 기다림이었으리라.
119가 오는중이라...할아버지가 얼마나 버틸까? 다리가 너무 높아 누가 뛰어들 수도 없고, 주변을 잘아는 사내는 다리 아래 가까운 곳에 비치된 구명로프가 생각났다. 그게 가까이 있었으면...
거기까지 다녀오기엔 너무 멀었다. 긴로프라도 있으면 타고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주도권은 경찰에 있었고, 경험많은 그들은 침착했다.
할아버지는 물살에 의해 서서히 떠내려갔다. 가벼운 체중 때문인지 그게 오랫동안 지속되는게 안타까워 차라리 얼굴을 돌리게 만들었다.
사내는 경찰들을 쳐다보고, 구급차가 올만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리엔 서너사람의 행인이 다가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온 그들도 가라앉는 할아버지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서야 멀리서 구급차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넋잃은듯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무일 없었다는 듯 가을 하늘엔 구름 점점... 그게 자신의 가족이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목숨을 걸고 뛰어내려야 하지 않았을까? 경찰들은 또 왜그렇게 무기력해 있었을까?
문득 또다른 지난일이 생각났다. 20여년전 동창들과 욕지도를 여행을 갔다가 탄배가 선창가에 다가서는데, 멀리서 달려온 아가씨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내는 서둘러 배에 긴 장대가 있는 것을 보고, 아가씨에게 들이 밀었다. 처음엔 안잡겠다고 도리질을 치던 그녀가 머리가 물에 잠길쯤에서야 장대를 잡았다.
무언가의 눈앞이 깜깜하여 부정하고 싶은 현실, 그러나 그녀는 미쳐 죽음을 구체적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10여년전, 애 엄마의 당직근무로 추석 귀향을 포기하고, 강변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마주친 할머니가 아가씨 한명이 강가로 갔다는 것이었다. 강가엔 뭣하려 갔을까? 볼거리도 없는데...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강과 둔치는 높이차이가 있어 다가가지 않으면 사람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내가 강가로 뛰어가니 웬 아가씨가 강물에 들어서 가운데로 가고 있었다. 강물은 깊었다. 가장자리도 허리까지 빠지는...
급하게 다가가 팔을 잡아 끌었다. 힘겨루기가 이어졌고, 그녀를 안아 둔치로 밀어 올렸다. 신고가 있었는지 경찰차가 왔고,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경찰은 바둥대는 아가씨를 차의 뒷좌석에 탸우고 압박을 했다. 경찰은 물에 젖은 바지에 흙모래 묻은 사내를 보고 말했다.
"혼자 수고 하셨네요. 명절때면 고향도 못가고 저런 아가씨들이 가끔 있어요. 우리가 알아할게요."
고향 못가서...경찰의 그말이 겨울 찬바람에 맞은듯 한동안 머리에 남았었다.
다리에서 뛰어내린 할아버지, 추석날 차가운 강물에 뛰어든 아가씨, 나의 생각엔 모두가 그 가난이란게 범인일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뒷처리도 참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인계된 아가씨의 얼굴에서 최근에 사망한 영화 암흑가의 두사람에서의 단두대에 목을 내민 알랑드롱의 그 원망과 공포에 찬 눈빛처럼, 아가씨도 '내환경 책임 못질거면서 당신이 왜 나를 살려놨어요?'하고 원망하는듯 싶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고, 두 아가씨가 그러한 마음을 가졌던때가 가족들이 모이는 추석 무렵이었으니...
배부른 누군가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이 좋은 세상에 정부에 애기하면 뭐라도 도움을 줄텐데 어리섞게...
그러나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은 지금까지 유효한 만고의 진리이다. 버리는 그들에게도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그들인들 왜 한평생을 위해 태어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버리려 하겠는가?
조물주로부터 부여 받았든, 전생의 인연으로 윤회에 의한 것이든, 소중하게 키워낸 부모가 있다. 그러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들이 예전엔 '동방에의지국' 포장지에 쌓여있던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단연 ORCD 으뜸이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28명, 2위인 일본이19.7명이다.
더욱 최근의 자료에선 1위인 우리나라가 25.8명, 2위가 라트비아, 3위가 슬로베니아, 4위가 일본이란다. 20명이 넘는 나라는 단연 우리나라뿐이다.
이런걸 외면하고 세계경제 10위권이고 뭐고하면 죽는 사람만 바보를 만드는 것이 된다. 돈도 싫다는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는데야...
스위스는 자살이 허용된 국가이다. 그곳에는 버튼 하나로 고통없이 죽음에 이르는 안락사 캡슐이 있다. 캡슐내의 산소를 질소로 바꾸어 저산소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죽고싶다고 아무에게나 허용하지는 않는다. 이용을 원하는 이들은 '정신 능력을 포함한 의학적·법적 요건에 따른 평가'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후 사르코에 들어가 뚜껑을 닫으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등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버턴을 눌러야 한다. 이기계를 사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우리돈 3만원 정도이다.
조력 자살'이란 스스로 극단을 택하고 싶은 사람을 누군가 돕는 일로 스위스에서는 합법이다.
2020년에는 약 1,300명 정도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일명 '의사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었고, 국민 70% 이상이 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료계는 이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조력존엄사'가 아니라 의사의 조력 하에 이뤄지는 '자살'이며 한국 의료는 그런 죽음을 다룰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지적이란다.
누군가는 죽음의 마지막 단계를 수용이라고 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이라는 피를 토하고 싶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용하며 막연히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어느 개그프로의 연기처럼 죽음이란 내가 싫다며 손사라쳐도 자꾸만 내게 달겨드는 것을 어찌하랴? 어쩌면 그 기다림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숙명적이란 생각이 든다.
'지켜봐 주시지 말고, 지켜주세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다. 막연히 지켜보기만 하는건 관망이고, 순전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지켜주는건 실행이고, 타인을 위한 선의적 행동이다.
기독교의 아멘(Amen)을 대체(?)하는 영문을 'So be it'라고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부정의 의미이지만 결국 위대하신 신앞에의 순종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인간인 나로서는 능력이 모자라니,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옵소서?"라고나 할까?
남은 여생 살아온 것 뒤돌아보며, 세상일에 순종하며 살아야겠다.
추석이 가까워온다. 그러나 이나라엔 갈수록 수많은 고민꺼리가 늘어난다. 이제 개인의 삶은 '각자도생'이란 신조어 아닌 신조어로 세상 관심사에서 밀려난 것 같다.
지구온난화로 커지는 남극의 크레바스처럼 양극화는 더욱 깊어만 간다. 이럴때일수록 소중한 생명들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튼 추석연휴 아파서 병원 찾는 일없고, 무더위에 불청객 태풍 없기를 기원해본다. 소중한 가족들 모여 행복한 추석 보내시길 마음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