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범 李春範(1888 ~ 미상)】 "최진동, 홍범도(洪範圖)봉오동전투를 수행할 때 제3대대장",
함경북도 온성(穩城)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8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이춘범(李春凡)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만주로 이주한 이후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부터 만주지역의 독립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동생인 이춘보(李春甫)와 함께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춘보와 함께 함경도 출신의 김규면(金圭冕)을 수장으로 하는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에 가담하여 왕칭현 나자구 방면에서 5연발 장총과 탄약 등의 무기를 구매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1920년에는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독군부(軍務都督府)로 소속을 옳겨, 왕칭현 봉의동(鳳儀洞)에서 같은 해 5월 2일에 개최된 재북간도기관협의회(在北間島機關協議會)에서 이범윤(李範允)을 필두로 하여 군무독군부 뿐만 아니라 신민단, 국민회(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북간도지역 6개 독립단체의 18개조 협의사항에 최진동과 군무독군부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0년 3월 15일에는 독군부 단원 14명을 인솔하여 온성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6월에는 최진동과 홍범도(洪範圖)가 봉오동전투를 수행할 때, 제3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해 10월경 청산리전투가 벌어질 무렵에는 최정국(崔正國)과 함께 나자구 지역에서 대의전의사회(大義甸議事會)의 170여 명을 통솔하였으며, 신민부·도독부·의군단(義軍團) 등과 함께 사령관에 문창범(文昌範) 등을 추대하여 사천구(四川溝)를 중심으로 대한총군부(總軍部)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11월경에는 200여 명의 포수대(砲手隊)를 이끌고 광모저구(光母猪溝)에 주둔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말에는 북로군정서(北路司令部)의 김좌진(金佐鎭) 예하 제2 연대 제3대대장을 역임하였다.
1921년 1월경에는 대한총군부를 이끌고 나자구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나자구 북방에서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최명현(崔明鉉)이 이끄는 70명의 병사와 합류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2월경에는 동녕현(東寧縣) 삼차구(三岔口), 소유분(小綏芬) 지방의 각 단체에 연락을 취하면서 이들을 모아 혼춘현(琿春縣)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같은 해 3월경에는 나자구에서 3·1운동 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로 북로군정서 계열의 독립군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1922년 1~2월경에는 춘경사(春耕社), 나자구에서 지방자위대(地方自衛隊)를 조직하여 단원 100여 명을 조직하여 최정국을 단장으로 하여 간도뿐만 아니라 함북 종성군(鍾城郡)·온성군 등에서 군자금과 지원 모집에 경주하였다. 이때 자신은 총무(總務)로 재임하였다.
1923년 6월경에는 의군단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러시아령의 좌익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연계 관계를 모색하였다. 한편 1923년 김규식(金圭植)과 고평(高平) 등이 자유시참변 후 옌지현(延吉縣)으로 독립군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귀환하였으나 물자 부족으로 고초를 겪자 임시정부는 노병회(勞兵會) 등과 함께 이들을 지원하였고 이범석(李範奭)이 합류하여 1923년 5월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였다. 이때 1923년 7월경 고려혁명군후원회장(高麗革命軍後援會長)으로서 김종봉(金種鳳) 등과 함께 초기 단계인 고려혁명군을 물심양면으로 돕기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1923년 10월 23일에 고안현(高安縣)에서 최진동을 포함한 16명과 논의 중에 중국 관헌에게 검거되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1924년 1월 최진동이 다시 총군부(總軍府)를 설립하여 중대규모의 독립군을 재편하자, 이때 감사장(監事長)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경 과거 독군부원이었던 김호석(金浩錫) 외 7인이 대한혁명위원회(大韓革命委員會)의 조직을 진행하자 최진동과 함께 합류하여 그해 10월에 간부진을 선출할 때 산업부장(産業部長)을 역임하였다. 이 와중에도 좌파계열과의 연대를 모색하여 1924년 7월경 모스크바에서 박제호(朴濟浩)가 나자구로 귀환하여 공산당후원회(共産黨後援會)를 조직하자 외교모연부장(外交募捐部長)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북간도의 주요 독립단체였던 대한국민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던 구춘선(具春先)은 약화된 조직을 대신하면서 사관학교 등의 설립을 목적으로 최정국 등의 독군부 세력, 조상갑(趙尙甲) 등의 의군단 세력과 손잡고 50여 명의 무장인원을 갖추고 나자구를 근거로 한 대한독립군자위단(大韓獨立軍自衛團)을 결성하였는데, 1924년 11월경에 해당 단체에서 경리부장(經理部長)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12월경에는 최진동의 부하로서 나자구를 중심으로 신우일(申雨一) 등과 함께 위장 및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1925년 2월경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의 나자구 지역의 지부활동에서 3인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3~6월경에는 나자구의 공산당후원회가 발전한 적기단(赤旗團)의 외교부장(外交部長)을 역임하였다. 4월경에는 최정국과 함께 한민회(韓民會)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역시 극동청년공산당(極東靑年共産黨)과 연락하는 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러던 중 최진동이 1926년 9월 9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같은 해 12월경에 은밀히 일제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최진동을 중심으로 한 독군부 계열 독립운동은 구심점을 상실하였고 이후의 행적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