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서태후
1. 속국인 조선의 지원을 명분으로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랴오둥 반도를 보호하기 위해
임진왜란에 20만 병력을 지원한 명나라는
그 여파로 17세기초부터 재정이 기울기 시작했고
설상가상 여진족의 성장으로 점차 위축되다
농민 이자성의 난으로
3백년이 안돼 역사를 마무리 짓습니다.
2.. 그렇게 등장한 여진족 후금은
후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강건성세를 걸치며 명나라의 2배 영토를 뛰어넘는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 등
그 대단한 위상을 동아시아에 다시 한 번 각인시켰습니다.
* 강건성세 :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황제 건륭제까지의 통치 시기이며
청나라의 최대 전성기라 불리는 시대
3. 결국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대제국의 영광도 잠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과 쇠퇴를 반복한다는 순환론의 논리
청나라 또한 역대 만국 불변의 법칙인 망조의 길을 걷게 됩니다.
4.. 오늘은 그 망조의 순간인
동아시아 분위기가 가장 살벌했고 긴장감이 돌았던 19세기
청나라의 최고 권력자 서태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태후는 유복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지만
부친의 몰락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궂은 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서태후는 궁녀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출중한 외모덕에 황제의 궁녀로 들어가는데에 성공합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황제를 반하게 하였고
황제 ( 함풍제 ) 의 첫 아들까지 얻어 황제의 큰 인심을 사 '의귀비' 라는 자리까지 임명받습니다.
몰락한 관리의 딸에서 황제의 아들까지 낳은 궁녀 시절의 서태후
그 순조로운 출세의 이면에는
유복한 시절에 쌓아왔던 능숙한 처세술 덕이 있었습니다.
1860년 함풍제(제 9대 황제)의 타계로
서태후와 함풍제 사이의 아들이 황제에 즉위합니다. ( 제 10대 황제 동치제 )
아직 정치면에서 낯선 동치제를 대신해 서태후가 ' 수렴청정 '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그녀가 ' 서태후 ' 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서쪽 별궁에 거처했던 태후였기 때문이다.)
* 수렴청정 : 대리정치
동치제 시절 서태후는
인재 등용 등 부국강병에 힘 썼으며
난징까지 점령한 최대규모의 민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아편전쟁의 패배로 쇠약해진 나라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회복시키는 성과를 보입니다.
이 시기는 동치중흥이라 불릴 정도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야욕에 불탔던 서태후는
나라를 위한 대국적인 판단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대해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들 동치제가 황제의 역할을 고수하게 될까 봐 두려워
아들을 ' 정치의 라이벌 ' 로 분류해
그를 향락의 길로 타락시켰고
동치제의 아내 또한 심한 언행으로 구박하여 자살까지 몰고갑니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유흥에 빠져 병에 걸려 죽고 말자
남편 형제의 손자인 어린 조카를 황제에 세우고 ( 제 11대 황제 광서제 )
또 그 권한을 대행합니다.
막부 폐쇄와 메이지유신등의 근대화로
비약적인 성장을 진행중인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을 두고 마찰을 빚습니다.
결국 1895년에 청일 전쟁이 발발합니다.
중국 대륙에서 언제나 " 세계 중심의 질서 " 의 정통심을 자부하던
청나라에게 이 전쟁은 그 존망을 결정짓는 전쟁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청일 전쟁의 와중에 서태후는 ...
북양 함대를 지원할 청국의 군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거처인 이화원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행합니다.
랴오둥 반도의 뤼순 함락
압록강 해전 패배
북양해군의 전멸과 제독의 자살
산둥반도 함락
청나라는 일본에 완패하게 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타이완과 랴오둥반도등을 할양하고
2억냥의 거금을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하였습니다.
일본은 이 2억냥이라는 거금의 대부분을 군비확장으로 사용하여
제국주의 입지를 더욱 확대해갔습니다.
청일 전쟁의 결과
보편적이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중화사상에 자부심을 가지던 청나라는
일본과 열강의 '밥' 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 우리가 너무 약했다. "
" 청나라는 변해야 한다. "
영국과의 아편전쟁 패배로 신식무기 도입에 대한 관심은 양무운동으로 발전했지만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실패한 양무운동의 반성으로
신식무기뿐만 아니라 법적, 제도적 개혁으로
변법자강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보수파인 서태후는 자신의 위치를 잃을 것이라 생각하여
변법자강운동의 주도인물들 대부분을 처형하고
눈엣가시였던 광서제를 유폐시킵니다.
1901년 의화단 운동이 진압되고 신축조약이 체결된 후
서태후는 나랏일을 모두 손을 떼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습니다.
서태후는 항상 옷을 보석으로 치장했으며
수많은 미남자를 이화원으로 유혹하여
향락을 즐긴 후 살해했고
1끼식사에는 128개의 반찬이 올랐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조카 굉서제(제 11대 황제)를 독살시키고
부의(제 12대 마지막 황제)를 새 황제로 세웁니다.
황제 3명(동치제. 광서제, 부의)을 자기 손으로 세우고 폐위시킨
중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절대권력을
누렸습니다.
벌을 받은 것인지
사람으로서의 명이 다한 것인지는 모르나
서태후는 태평한 생활 도중 ' 이질 '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서태후가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집권기간은 26세에서 73세까지 무려 48년 간이었다.
서태후가 죽고 불과 4년이 지나서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1912년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서태후가 세운 부의 황제도 쫓겨납니다.
서태후의 수렴청정 초기 '동지중흥'의 성과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서태후는 전횡을 일삼아 청나라를 기울게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청나라의 멸망은 서태후가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면을 배제했을 때에도
서태후는 함풍제 타계 후 과부가 된 상황에서
옛 애인과 밤을 보내고 수 많은 남자들과 놀아나는 등
당시 유교 질서 중심인 중국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담함을 넘어 황당한 모습까지 보입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순간
후세에 알려져 치를 떨게할 정도의 사치를 일삼았다는 것만 봐도
서태후는 객관적으로 인간 됨됨이가 매우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태후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 다시는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