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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너는 나의 황금나비
2024년 6월 23일 제 944회.
사드배치 결사반대 김천시민 촛불집회
이봉란님께서 찬조해주신 자두.. 대령이오~ ^^
여름철 보양식.. 걸쭉~한 생강대추차..ㅎㅎㅎ
김정수님이 주신 참외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挻埴以爲器 當基無 有器之用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촛불의 열정으로 채워질 빈 자리..
주경야독이라는 말처럼.. 낮에는 농삿일로 바쁘고, 뒤돌아 쉴 틈없이 집회를 준비하는
운영팀의 수고와 정성이 이 자리를 채워간다.
집회를 이끄는 김종희 팀장.
"지난 번 집회를 마치고, 밥묵차 유희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쾌유를 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병석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기적처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유희선생님의 해탈, 천도를 바라면서 사드배치 결사반대 김천시민 촛불집회 944차를 시작하겠습니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과
민중애국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 여는 발언. 막내(?) 박석민 위원당님.
" 지난 주말에 서울에 강의가 있어 올라갔다가 오늘 집회 발언을 해야한다고 연락 받아서 오늘 내려오는 기차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는데, 두가지 주제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지난 6월 19일, 북러 정상회담 결과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하고, 미국은 6월20일 하원에서 이에 맞대응으로 러시아 전역에 공격 가능한 무기를 우크라에 지원하는 것을 결정했다고 하고, 한국도 러시아 대사 초치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대사가 반발했다고 합니다.
꼴뚜기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고 한국도 덩달아 우크라 무기 지원 세부 검토 끝낸 상황이라고 하고요. 이에 푸틴은 그럴 경우 회복이 어려운 보복 각오하라고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나아가 다음주에는 프리덤 에지라는 처음 실시하는 한미일 다영역 연합훈련으로 맞대응하겠다고 하고, 한편 다음달말 예정된 미일 2+2 외교 국방 회담에 한국 참여도 검토중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이 서로 전단을 날리고 남이 확성기 재개로 대응하겠다고 하는 등 남북간 대치가 심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러간 협정 체결이후 한반도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된 상황이라 이에 대한 얘기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지요? 한국전쟁과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한국전쟁 때 있었던 일로 이승만의 민낯,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이상한 사건 얘기도 함께 해보려고 합니다.
그전에 웃픈 얘기 하나 하면, 얼마전 초등학교 고학년, 5 6학년이겠지요. 장래희망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는데, 장래희망 3위가 뭔지 아셔요? 연예인이랍니다. 2위는 박병주 선생님은 아시네... 갓물주, 즉 건물주랍니다... 참... 1위는 갓물주 연예인라니 지금 세태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한편 씁쓸합니다. 하나 더 하면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 나이가 언제인지 아세요? 바로 대학생때랍니다. 교수가 "금일까지 리포트를 내라고 했는데, 다들 “금욜”로 알아먹고 아무도 숙제를 내지 않았다는....
북러 정상회담 얘기전에 오늘 있었던 역사 얘기를 잠깐 하면,
1951년 오늘 한국전쟁 중 말리크 소련 유엔대사 휴전회담 제의했고, 회담은 2년을 끌게 됩니다. 그러던중 1952년 6월23일, 회담에 북을 압박하기 위해 한국-중국 국경에 걸쳐 있는 수풍발전소가 이틀, 그리고 뒤이어 폭격을 당해 당시로는 후버댐 등 세계 3위 크기의 수풍댐과 발전소가 폭격으로 발전이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고 해요.
남쪽에는 소양강 댐이 가장 크지만 한반도 전체에서는 수풍댐이 폭이 900m로 가장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1973년 6월 23일 남과 북은 한반도 문제에서 중요한 발표를 같은 날 하게 됩니다.
남은 ‘평화통일에 관한 6.23선언’을 발표했는데, 6.23선언의 골자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민족의 지상과업으로 남북한의 국제기구 동시가입, 이념과 체제 달리하는 국가에게도 문호개방를 개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 발표에도 1976년 북이 유엔 산하기구에 가입하자 이에 반발해 당시 공휴일이었던 10월24일 유엔의 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찌질함도 보였는데, 21대 국회에서 다시 공휴일로 하자는 법안이 있었지만 폐기 되었습니다. 22대에 다른거 하지말고 이런거 해서 휴일이나 늘리지, 허구헌날 쌈박질만 하는... 참...
반면 북은 조국통일5대강령 발표했는데, 주요골자는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군사문제 우선해결), 다방면 합작, 대민족회의 소집, 남북연방제 실시(고려연방국), 연방제 실시후 유엔가입하자는 내용을 발표해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유엔 동시가입이 남북의 분단을 더 공고히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 이제 북러 정상회담과 이번 협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면,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관계, 수교를 맺게 되는 경우 처음 시작은 동반자 관계에서 시작, 그 다음이 포괄적 동반자 관계, 그 이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 그보다 더 높은 단계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 중국과 관계를 맺을 때 '우호협력 관계'(1992년) → '21세기를 향한 협력 동반자 관계'(1998년) →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3년) →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8년)의 단계를 밟아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높은 단계는 포괄적 전략 동맹관계라 할수 있는데, 한국과 미국은 이 경우라 할수 있지요. 미국 강한 나라 미국과 가장 강한 국가관계를 맺고 있어서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되시나요? 뭐 반응이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한국이 미국과 이렇듯 포괄적 동맹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추진한 건 노무현때입니다.
이를 정리한 국가 기록을 보면 5개의 장으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메모를 보면서 제목 정도만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1장 시대정신과 한․미 동맹의 변화.
(1. 참여정부 출범과 동맹조정의 시작. 2. 한․미 동맹의 발자취 3. 성공 속의 그늘 4. 변화하는 안보환경과 새로운 동맹의 필요성
5. 변화의 당위성, 기회와 도전)
제2장 한미간의 다양한 대화, 풍성한 합의
(1. 한․미 정상회담. 2. 한․미 연례안보협의회, 한․미 전략대화. 3.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 및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 4.한미외교라인 간의 협조)
제3장 변화하는 한․미 동맹의 새로운 모습들
(1. 군사임무의 한국군 전환 2. 용산기지 이전 및 주한미군 재배치 3. 변화하는 주한미군)
제4장 ‘포괄적․역동적․호혜적’ 동맹을 향하여
(1. 미래 동맹의 비전속에서의 한국과 미국: 확장되는 공통이익 2. 협력적 자주국방과 미래 동맹 3. 한․미 FTA: 포괄적 협력을 향한 첫 걸음)
제5장 미래지향적 한미 동맹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원의 필요성...인데, 할 말이 많지만 그건 생략 하겠습니다.
반면 러시아와 한국은 노무현 때인 2004년 9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과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관계를 ‘건설적이고 상호보완적 동반자 관계’에서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새롭게 규정한 공동선언을 채택했고, 이후 이명박 때 2008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로, 이번 북러는 협정 체결에는 '포괄적'이 붙어 북러 관계가 한러 관계보다 협력 수위가 조금 더 높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정부가 북러간 합의에 대해 러시아에 강력하게 "경고" 했다는데, 실효성이나 그럴 정도 힘이 있나도 의문이고, 북러 합의보다 더 강력한 동맹체제고 북을 힘으로 압박하는 한국정부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하는 생각마저 듭니다만, 북은 지난 시기 러시아와 소원했던 관계를 정상화 한 것으로 우크라 전쟁 등으로 고립된 러시아로서는 북한 등 지원군이 필요했을터인데, 지난 시기 북러 관계를 잠깐 돌아보면, 북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은 90년 소련이 한국 정부와의 수교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90년 한국은 적성 국가였던 소련과 수교를 맺어 80여 년만에 국가관계가 정상화했는데, 그 과정은 1990년 6월4일, 노태우, 고르바쵸프가 첫 정상회담을 했고, 석달 후 9월 2일, 가을비가 내리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소련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한 소련정부의 결정을 북한에 전달하면서 어떻게 설득할건지 골몰했다고 해요.
만수대의사당에서 소련 외무장관이 전하는 쪽지를 받아든 김영남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외교부장은 지금 누구처럼 격노했는데, 이는 소련이 한국과 수교한다는 결정에 대해 북한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 9월 19일치 [조선의 통일에 방해가 되는 일] 이라는 제목으로 김영남이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에게 전달한 6개항의 비망록으로 구체화 했습니다.
그중 5번째 내용은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를 맺으면 조소동맹조약을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때까지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반도에서 군비경쟁을 격화시키고 조선반도 정세를 극도로 첨예화시키게 된다.”고 한소 수교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당시 소련 외무장관과 김영남의 회담장에 동석했던 한 소련대표는 김영남이 “핵무기”를 거론하며 위협했다고 전하는데 그 내용은 돈 오버도퍼가 쓴 ‘두개의 한국’ 332쪽에 기술되어 있기도 합니다.
김영남의 발언 내용중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은 곧 핵무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2023년 지금도 한반도 숨통을 죄는 북핵문제의 판도라의 상자가 한소수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물론 북이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나선 건 미국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미국의 적대정책에 맞서 생존을 위한 것이 보다 중요한 계기입니다.
당시 김영남으로부터 “조선이 창건됐을 때 조선민족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로 인정했던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제도를 뒤집어엎으려는 미국과 남조선의 공동음모에 가담해 3각 결탁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소련의 한국과의 수교는 곧 미제의 앞잡이 인 것이라는 비난을 듣던 소련 세나르드바제 외무장관은 김일성 주석과는 만나지도 못하고 미제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평양을 떠났고, 원래 1991년 1월 1일로 예정되었던 소련과 한국 수교는 훨씬 앞당겨져 그해 9월30일 체결되면서 북은 고립무원 상태가 됩니다.
이어 1992년 한중수교로 그동안 소련 중국 등과 구상무역을 통해 경제 등 국가를 유지했던 북은 1994년 큰 홍수까지 겹치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 북은 30만명이 웃도는 북녘 인민들이 굶주림에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지는 고난의 행군을 거치는 와중에서도 핵개발로 나아갔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만이 한반도 핵 문제와 평화체제가 가능한 과제가 현재화 되었습니다.
한편 90년 한소수교 이후 전개된 한반도 정세는 불과 1년 후 9월부터 12월까지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븍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 새로운 한반도의 큰 변화 정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번 북러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은 싫든 좋든 앞에서 얘기한대로 한반도 정세 영향을 줄수 밖에 없는데요. 관련 문제를 살펴보면,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은 시대착오적인 군사적 동맹관계가 복원된 것으로 한반도와 동북아가 한층 더 핵대결과 핵전쟁 위기를 가져오게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한미동맹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동맹은 곧 전쟁공동체로 동맹이 강화되면 될수록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도 북도 동맹을 해체해야만 평화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한미동맹 해체가 과제인 것처럼 북도 북러 동맹, 지금은 무력화된 중소동맹 해체 등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데 해결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북과 러시아는 조약 4조에서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 시 양국 간 군사적 원조 제공의 법적 의무와 권리를 규정함으로써 1996년 북·러 ‘우호, 협조 및 호상 원조 조약’ 폐기 후 근 30년 만에 다시 군사적 동맹관계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다수 언론이 이른바 군사력 ‘자동개입’을 명문화하고 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참 우리 언론은 문제가 아닐수 없는데요.
1949년 나토(북대서양조약)도 한미간 한미상호방위조약(1954), 미일안보조약(1960) 등 미국이 맺고 있는 모든 방위(군사동맹)조약은 동맹국이 무력침공을 받았을 때 미국이 자국의 헌법적 규정과 절차에 따라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도록 명문화함으로써 자동개입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번 북러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도 ‘지체없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러시아의 “법에 준하여”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도록 명문화하고 있어 자동개입은 아님에도 한국 언론은 이를 과대 포장하고 있어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한편 푸틴은 이번 협정으로 통해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시진핑과 푸틴은 2024년 5월 16일 북경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폐쇄적인 군사·정치 동맹이 설 자리가 없는, 신뢰할 수 있고 적절한 아·태 지역의 안보 구조를 창설해야 한다.”며 “동맹 구축은 매우 해롭고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했음에도 이번 북·러 동맹 복원으로 불과 한 달 전의 자신의 주장을 뒤집었습니다.
북·러관계의 군사적 동맹관계로의 복원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의 강화 및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으로 대북 확장 억제 강화에 대한 맞불 성격으로 한반도에서 이러한 세력간 충돌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있는 문제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분쟁이 있고 난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해왔지만 유독 한반도, 동북아에서만큼은 미국이 이를 가로막아 왔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평화체제가 수립되면 미국의 패권 유지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북을 악마화해서 한반도 분단을 유지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는 지난 시기 한반도 평화, 통일로 나아갈 민중의 요구를 가로막는 세력 구도였는데, 북러간 강화된 동맹 구축은 지난 시기보다 어떤 면에서 더 강력한 대결구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한반도 정세에서 지금 우리의 사드 반대 투쟁은 그 파열구를 내고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투쟁이 분명합니다. 힘들지만 지치지 않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73년전 한반도는 한국전쟁중이었는데, 당시 있었던 일 하나를 짧게 이야기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기념관까지 만들자면서 애써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업적(?)은 6.25 전쟁을 이끌며 견결히 공산당과 투쟁하여 이 나라의 적화를 막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런데 실상은 잡권하면서 제주 민중을 학살하고, 419로 쫓겨가면서도 민중에게 총질을 해댄 이승만은 한국전쟁때도 도망질은 선수로 전쟁이 나자마자 대전으로 내빼고는 북이 못내려오게 한강다리를 폭파해놓고도 ‘서울 사수’를 부르짖은 사기극 벌인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한국이 망하지 않은게 다행 아닌가요?
한참 전쟁중인 1951년 2월, 미국 헌병대로부터 국민방위군 작전처장 이병국 중령이 전화한 통을 받아요. “지금 수만 명의 거지떼 같은 장정들이 문경새재를 넘어가고 있다.” 이에 달려간 이병국 중령은 대규모로 탈주하던 국민방위군들을 만나게 되는데, 급히 충남도청에 의뢰해 쌀을 지급하고 다시 후방 경상도로 이동 시키려는데 장정들은 주저앉아 “우리를 다시 죽이려고 데려가는 겁니까.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거부하는데, 이를 만류하려던 이병국 중령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 도중 자신도 수만명의 국민방위군들도 땅을 치면 통곡을 했다고 해요.
이는 동아일보 1974년 2월 11일 / 제 1공화국 국민방위군 제 15화에 있는 내용입니다. 명색 전쟁을 한다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 국민방위군은 국가비상시 예비 병력을 양성하고 병력동원을 신속히 하기위해 ‘17세이상, 40세이하의 남자는 제2국민병에 편입시키는 국민방위군설치법에 의거하여 조직되었지만 이렇게 동원된 약 50만명의 장정들은 당시 정규군의 두배가 넘는 숫자임에도 군복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은 채 거렁뱅이들을 만들었던 사건이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이 문제가 국회에서 불거진 것은 3월 29일입니다.
경남 거창을 지역구로 둔 신중목 의원이 당시 피난국회로 이용되던 부산극장에 뛰어들어 외친다. "비공개 회의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는 격앙된 어조로 외친다. "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백명을 학살했어요."
3월 초순 자신을 찾아온 거창 청년들에게서 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소식을 듣고 거창을 다녀온 신중목 의원은 산청 함양 등 지리산 일원의 국회의원들과도 만나 비슷한 사건이 국군에 의해 자행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우리 국군 역사에 깊고도 시커멓게 찍힌 오점인 ‘거창 양민 학살’의 참상을 폭로해 드디어 1천 양민의 생목숨을 앗아간 거창 양민 학살"의 흉측한 몰골이 어둠 속으로부터 끌려나왔고, 그와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도 불거져 같은 날 국민방위군 사건 진상조사위가 꾸려지게 됩니다.
국민방위군은 군번도 없고, 명부도 없었습니다.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했고, 얼어죽지 않기 위해 가마니라도 구해서 몸을 덮어야 했습니다. 한겨울 얼어붙은 들판을 잔뜩 웅크린 채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남하 하다가 건물만 만나면 아무데나 들어가 쓰러져 자고 곯은 배 움켜쥐고, 어떤 이들은 결혼식 잔칫집에 뛰어들어 잔치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가 급체하여 죽어 자빠지기도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유령의 부대였는데, 그 이유는 국민방위군에게 지급될 군수물자를 사령관 김윤근 등 간부들 몇 명이 착복하여 제 배를 채웠기 때문으로 당시 기획예산처 예산이 3천만원이었는데, 국민방위군 간부 몇이 착복한 금액이 50억원에 달했다 하고 이들은 첩도 두고, 돈을 물쓰듯 쓰는 생활을 하면서도 국가가 소집하고 동원한 국민방위군을 거지떼로 만든게지요.
한쪽에서는 자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학살하고 불태워버리고, 그 군대의 간부가 적을 막으라고 끌어 모은 장정들을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이는 나라. 그 와중에서도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만행을 저지른 국군 장성들을 감싸려 들고, 진상 규명 요구를 ‘간첩’들의 행각으로 밀어붙이고, 1차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기적아닌가요?
그들이 착복한 돈이 소수 몇몇의 배만 채웠다고 보기엔 빼돌인 물자와 돈이 어마어마해 이승만 정권이나 권력층에게 흘러들어간 심증도 있었지만 윗선은 못 밝힌채 결국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 지휘부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은 서둘러 마무리하고, 그해 4월 30일, 국민방위군 법령 폐지를 결정해 5월 12일 폐지하게 됩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불거지자 당시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국민병 문제 역시 불시적인 사태였음에도 희생자가 ‘아주 적게 난’ 것은 국민에게 아주 행복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5열 (즉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책동에 동요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회의원들이 난리가 나고 대통령에게까지 얘기가 들어가서 헌병대의 조사가 시작되는 상황에서도 신성모는 헌병대 조사관을 불러 이렇게 얘기하고 했다고 합니다. “조사는 철저히 하되 김윤근 사령관은 구속시키지 마시오.”
뭔가 떠오르는게 없나요? 네... 지금 채상병 건과 데쟈뷰.
"이 따위 일로 처벌 받으면 앞으로 누가 사령관 하겠냐"며 격노하셔서 채상병 사건은 지금 진실 규명보다 해병대 사령관 김계환, 사단장 임성근 따위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 더 중심이 된 상황입니다 그려..
채상병 사건을 보면서 73년전 국민방위군 사건이 떠오는건.. 참... 한숨이 절로 나오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지만... 그래도 힘내서 버티면서 이놈의 사드는 반드시 뽑아버립시다. 사드뽑고 평화심자! "
** 소성리 평화가수 정진석님의 으리으리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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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작곡.. 우리가 주인
2). 밥묵차 유희선생님 추모곡
서로에게 배고프고 목마른 우리의 밥상
" 유희 선생님의 추모곡을 만들어 봤습니다. 다들, 그분의 밥상을 먹어본 기억이 있으시죠? 저도 너댓번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은 항상 페이스북에 소성리 이야기를 올려주셨고, 제이름도 여러번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름 하나하나와 그 지역의 특별한 소식, 사건, 투쟁.. 이런 걸 기억하면서 그 사람들의 승리나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보내시면서 제목을 수십개를 올려주셨습니다. 정말.. 세상 모든 이야기를 읽고 자기 안에 담아두고 지탱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갖춘 분이라고 모든 분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느끼면서 그분 영전에 바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 마무리 발언.
"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유희 선생님을 생각하는 하루였습니다. 이상으로 사드뽑고 평화심는 김천평화촛불집회 944차를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우셨지요? 네. 다음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