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에 대해 말해도 될까
최민자
숙녀들의 점심식사, 접시와 수다가 바닥을 보일 무렵, 한 친구가 가만히 손가방을 열었어. 물자와 정보의 빈번한 출입으로 칠이 벗겨진 나들목에 도색작업을 하려는 거야. 여자들이 모이면 제일 바쁜 것도, 행복한 것도 입이잖아. 매끈한 금속 케이스를 돌려 와인 빛깔의 립스틱을 밀어올린 친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초승달처럼 입 꼬리를 올려붙였지. 화장도 하품처럼 전염성이 있는지 다른 친구들도 주섬주섬 파우치를 열고 제각기 거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 차 가져왔어? 아니, 전철 탈거야. 몇 호선이야? 뭐 그런 하나마나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내일이면 잊으리. 또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고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는 전철조차 탈 수 없는 여자들. 여자들은 왜 그리 립스틱에 집착할까. 선정적인 색조, 불온한 모양새로 손가락만한 캡슐 안을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탄환 같은 그것에 말이야.
코코샤넬이 그런 말은 했지. 여자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립스틱이라고. 맨얼굴로도 자신이 있을 만치 출중한 미모이거나 외모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기로 작정한 투사가 아니라면 무기 없이 전투에 임하긴 어렵지. 그 무기라는 게 창인지 방패인지, 산 채로 적을 나포하기 위해 잠깐 동안 눈을 멀게 하는 레이저 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야.
세상의 딸들은 화장하는 엄마 모습을 곁눈질하며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것 같아. 로션을 바르고 분첩을 두드리면 돋을볕처럼 환해지는 얼굴, 그 밝음의 정점에 립스틱이 있어. 정성스레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려도 입술을 칠하지 않으면 안색이 화사해 보이지 않지만 꺼진 램프처럼 어두워 보이는 민낯도 립스틱만 발라주면 생기가 확, 살아 보이거든. 치마가 계집아이의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패션이라면 립스틱은 성인여자의 인증샷같다 할까.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소도구, 일생 소녀에서 새댁, 엄마, 아줌마, 할머니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살아내지만 립스틱을 바르는 나이 동안에만 명실 공히 여자로 사는 지도 몰라. 그런데 잠깐, 궁금한 게 있어. 조물주는 왜 인간의 입 언저리에 선명한 붉은 테를 둘러두신 것일까, 그것도 왜 하필 불과 피의 빛깔, 벽사의 주칠로 테두리를 쳐 놓으셨냐 이거야.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별 생각을 다한다고, 할 일도 퍽 없는 모양이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네. 맞아. 할 일이 썩 없진 않지만 그다지 쓸모 있는 생각은 아닌 거. 하지만 이렇게 생게망게한 어리보기도 있어야 꽉 막힌 세상에도 숨구멍이 트이지 않겠어? 너무 똑똑해서 쓸 데 있는 생각만 하고들 사니 각박해서 살맛이 나느냐 말이야.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살맛이라는 건 먹고사는 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쓸 데 없는 생각 근처에서 발생한다는 걸.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도 봐. 다 숫자나 효율에 매욱한 사람들이 세상의 도린곁에서 깜냥대로 주물러 내놓는, 쓸모와는 거리가 먼 수제품들 아니야? 그래도 그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의 유용이 우리를 위로하고 쉬게 해 주잖아. 하긴 그것도 운 좋은 소수의 이야기일 뿐, 대부분은 그저 무용의 무용, 쓸모없음의 쓸모없음에 쓸쓸해하며 스러져버리고 말지만 말이야.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비꼈네. 이치와 당위를 따지려 들고 구구절절 변명이 늘어지는 거, 변명할 수 없는 노화현상이지. 아무려나, 신이 인간의 입술을 항구적 원천적으로 화장시켜 두신 데는 그럴만한 곡절이 있을 것 같아. '여기는 그대가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걸신께서 은거하는 동굴 입구니라. 삼시 세 때 받들어 모시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말지어다.' 하는, 준엄한 신탁의 표지였을까. '오로지 입을 지켜라, 입에서 나온 말이 몸을 태우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찌르는 칼이니라' 하는, 눈 코 입 문드러진 이무기 한 마리가 하반신이 묶인 채 들앉아있는 위험천만한 늪이라는 적색 경고일까.
사람의 얼굴에는 터진 구멍이 여럿 있지만 다른 것들이 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점잖고 수동적인 처소인데 반해 입은 적극적 능동적인 편이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외에 표정과 목소리로 희로애락을 드러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내기도 하니까. 사랑이 눈에서 시작된다하지만 사랑도 실은 입술에서 시작돼. 마주쳐 스파크가 일어난다 해도 눈과 눈은 물리적으로 포개지지도, 화학적으로 스며들지도 못하잖아. 도발적인 평화와 평화로운 도발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인간의 입술, 그 입술이 눈이 점찍은 대상을 향해 부드럽게 이완되어 귓바퀴를 향해 들려올라가고, 그렇게 자주 마주서면서 물길 불길을 이어붙이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서사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가 없어.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포옹해도 심장끼리는 절대로 포개지지 않는 법이어서 그렇게 서로 입술과 입술을 견주어 상대를 면밀히 재단해보려는 것 같아. 그 방법 밖에는 제 안에 유숙하는 영혼의 몸피를 가늠해 볼 방책이 없을 테니까.
육신보다 정신의 우위를 믿고 싶어 했던 젊은 날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닿고 싶은 걸 거라고 불가해한 욕망을 합리화하기도 했었지. 요즘은 아니야. 사랑이라는 감정은 육신의 해부학적 구조와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후천적으로 진화된 특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기 시작했거든. 종족보존을 지상목표로 하는 생명체는 건강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냄새와 느낌으로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하려 했을 테고, 그 방편으로 포옹이나 키스 같은 신체적 접촉이 생겨났을 거야. 총이 있으면 쏘고 싶고 주머니가 있으면 채우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아니겠어? 그리저리하여 찰나적 충동적으로 맞추어진 사개를 돈독하고 끈끈하게 이어 붙여놓아야 종족 양육에 안정적일 터여서 심리적 접합기제가 불가피해진 거지. 어쨌건 그렇게 양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절차 없는 문물교역이 이루어지고 역사적 현실적 책임이 따르는 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중차대한 전략적 관문에 빨간 똥그라미 두 개쯤 겹으로 둘러쳐둘 필요가 있었을 거란 얘기야.
쓸 데도 없고 골치만 아픈 생각을 왜 하고 사냐고? 나도 몰라. 에테르처럼 날아오르는 상상력이나 말랑말랑한 감상이 애초 내 것은 아니었어도 어쩐지 자꾸 삭막해지는 느낌이야. 무미한 사변과 경직된 관념만 모래알처럼 서걱대고 있으니…… 누군가가 그랬어. 관능의 부재라고. 관능…… 좋은 얘기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전철 앞자리 풋풋한 아가씨의 귓불 아래 선명하게 찍혔던 인주 자국이. 시치미를 떼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당사자는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뭉개진 꽃잎 같은 쾌락의 환부에 내가 외려 당황했었지. 대체 어떤, 열에 달뜬 부룩송아지 녀석이 전인미답의 처녀지를 저리 함부로 도발했을까…… . 그러다 문득 무릎을 쳤어.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은 정말 사려 깊으시네요, 내심 경탄을 하면서 말이야. 남녀 사이, 성마른 욕정의 흔적을 표 안 나게 감추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신께서 요소요소마다 붉은 물감을 칠해 두셨을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퍼뜩 떠오른 거야. 호오, 기막히지 않아? 요소요소마다, 그 섬세한 배려심이라니.
그런 친절을 무시하고 아무데나 화인(火印)을 남발하는 센스 없는 남자들도 문제지만 여자들에게도 문제는 있어. 왜 굳이 붉은 테 위에 붉은 칠을 더하여 무구한 남정네를 유인하느냐 이거야. 유인이란 말, 좀 그렇긴 하네. 여자들이 입술을 바르고 화장을 하는 것이 대남(對男)공작용은 아니니까 말이야. 화장은 남 보라고, 아니 남자 보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화장은 일단 나 보려고 하지. 꽃을 찾아오는 게 꽃이 아니라 나비라 해도 꽃이 나비를 위해 피는 건 아니니까. 꽃은 스스로를, 꽃을 위해 필뿐이야. 제 멋에 피고 제 멋에 진다고. 다만 나비를…… 이용할 뿐이지. 물고 물리고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사, 삶이란 결국 두 타자 사이의 틈새, 그 '사이'의 일 아닐까.
터질듯 팽팽하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여배우가 꽃잎 같은 입술을 반쯤 열고 광고판 안에서 헤프게 웃고 있어. 반투명의 탱탱한 과피 안쪽에 얼비쳐 보이는 흥건한 과즙, 톡, 터뜨려 빨아먹으면 입 안 가득 단물이 괴어 문문히 녹아내릴 것 같은 고혹적인 입술 뒤에는 상업주의와 결탁한 말초적 관능,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유혹이 은밀하게 구조화되어 있지. 아름다운 것에는 독이 있는 법, 명심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원죄가 사악한 뱀의 흉계라 하듯이 이 또한 배후가 있을지도 몰라. 신과 맞장을 뜨고 싶을 때 악마는 여자를 이용하잖아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라는 간지러운 카피 때문이 아니라 화사한 빛깔들의 향연에 매혹되어 나도 가끔 화장품 매대 앞에 서지. 날렵하게 줄 맞추어 서있는 꽃각시들을 보면 핫 핑크나 피치오렌지 같은,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색깔에조차 유혹을 느끼곤 해. 어느 신묘한 마법사가 잠든 여자들의 꿈속으로 잠입해 들어가 순정한 설렘과 아슴아슴한 기억, 때 묻지 않은 상상들만 훔쳐갖고 와 비밀스러운 공정으로 추출한 안료 같거든. 여자들에게 화장은 물질화된 몽환 같은 거야. 소멸해버린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돋보기를 끼지 않고는 메뉴판도 못 읽고 금세 들은 이야기도 삼분 안에 까먹어 버리는, 겉만 멀쩡한 여자들이 전철 의자에서 흔들리고 있어. 아니, 아니지. 오랜만에 만나도 하나도 안 변했다고, 어쩌면 옛날 그대로냐고 살갑게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속도 따뜻한 친구들이야. 아무도 후하게 봐 주지 않고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는, 삶의 변곡점을 넘겨버린 여자들은 그렇게 서로 괜찮다 괜찮다 아직은 그래도 봐 줄만하다…… 곰비임비 최면을 걸어가면서 애써 용기를 돋우지 않으면 우울증에 빠져버리기 쉽거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따위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여자들의 입술, 그 입술 위에 노을빛으로 덧입혀진 질료는 순하게 스며들지 못하고 번들거리며 슬프게 빛나지. 대상과 조응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오브제일수록 물성 자체의 빛깔과 광택으로 스스로의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이어서 붉은 잎새들이 발산하는 현란한 침묵이 전철 안에 낯설게 흥성거리고 있어. '이 여자들 괜찮아. 아직 멋지다고. 서리 맞은 가을 잎이 이월 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는 말 몰라?'
건너편 친구가 다음 역에서 내리려는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네. 여자가 웃을 때 세상은 평화로운 천국이 되지만 양 입술을 앙다물고 봉인하거나 폭포수처럼 독설을 쏟아낼 때, 사랑도 평화도 물 건너가고 말지. 셈 밝은 남자들은 알고 있을 거야.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걸.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토마토나 탱글탱글한 앵두가 아니어도 여자의 입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소낙비와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리고 떫은맛을 무르익은 단맛으로 숙성시켜온 늦가을 홍시 같은 여자들의 입술이 무얼 말하는지, 언제 어디서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