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제는 백조의 영원한 야생성의 터전
변수남
우습제.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시 웃을 만하다는 ‘우습다’에 사실 확인의 의미를 지니는 어미 ‘지’를 전라도식 표현 ‘제’로 바꾸어 ‘우습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문장도 아니고 그것도 하나의 단어로만 제시한 우습제는 단지 저수지 이름일 뿐이다. 우습제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김제의 벽골제나 제천의 의림지보다는 훨씬 후에 축조되긴 했으나 그래도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있는 저수지 중 하나이다.
우습제는 약 43만㎡의 크기의 저수지로 7~8월이면 홍련이 장관을 이룬다. 호숫가로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홍련 향기를 맡으며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1611년에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습제를 우십교지(牛十橋池)로 1899년에 간행된 ≪나주군읍지≫에는 우십교제(牛十橋堤)로 나와 있다. 우습제의 우리말 뜻은 소 소리 방죽이다. 소 소리 방죽이든 우습제이든 또는 우십교지나 우십교제이든 저수지가 소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정확히 든다.
귓가를 스쳐지나는 겨울 바람이 제법 거칠 긴 하지만 우습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니 소리에 비하면 오히려 실바람 축에도 못 낀다. 지나가는 차들의 클랙슨 소리마저 수천 마리 고니의 꽈꽈꽈 하는 소리에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만다. 지금은 방죽에다 메어놓았다던 소도 없으니 소 우는 소리도 만무하다. 여기저기에 고니 소리만 가득하여 마치 나이야가라의 폭포수 소리처럼 내 귀에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흡사 수천 마리의 소들이 일제히 우는 듯도 하다.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고니는 큰고니, 고니, 혹고니가 있다. 이중 부리의 노란색 부분이 넓은 것으로 보아 내가 본 것은 큰고니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고니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내몽고 또는 아무르강 근처에서 날아왔을까? 아무르강이 있는 러시아 힝간스키에는 두루미 산란처가 있다고 알고 있다. 이 두루미가 한국의 철원 지방으로 와서 구애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예술이었다. 혹시 이 고니도 두루미의 멋진 춤사위를 훔쳐보면서 아무르강에서 살지는 않았을까?
어떤 고니는 머리를 물 속에 처박고는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검은 발 물갈퀴를 나에게 펼쳐 보여준다. 어떤 고니는 물 위를 지방 많은 풍성한 배로 유유히 미끄러지며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있다. 또 어떤 고니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개를 멋지게 펼친 다음 상대에게 구애 작전을 벌인다. 또 몇 마리 고니들은 초월한 도인처럼 희고 고귀한 몸을 하늘로 곧게 뻗어 날아오르기도 한다.
고니 하니 악비 장군이 떠오른다. 악비는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정강촌(程崗村)의 가난한 농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악비가 태어나던 날 고니가 그의 집 지붕 용마루 위에서 울다가 날아갔다고 한다.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던 때에 악비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했던 신하였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세워지는데 이 때에도 그는 오직 조국을 위한 진충보국의 하얀 마음 하나를 조국에 바쳤다. 그랬던 악비가 진회란 간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악비의 죽음 원인은 백조와 같은 하얀 마음인 충성심 하나로 금나라와 끝까지 싸우려는 변함없는 굳은 절개 때문이었다. 진회는 악비의 하얀 마음을 싫어했으며 시기했으며 미워했으며 여기에 더하여 대단한 악감정까지 품어왔다.
고니의 색은 하얗다. 그냥 하얀 것만이 아니다. 고니의 하얀 깃은 그런 깃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시기심를 살 만큼 희다. 그래서 고니를 백조라고도 한다. 파란 호수 속에 떠 있는 하얀 백조, 생각만 해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다. 우습제에서 먹이도 찾고 헤엄도 치며 구애도 하며 멋있게 날갯짓도 하고 있는 저 백조들이 갑자기 악마인 로트바르트 저주를 풀기 위해 여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얀 것은, 까만 것들이 싫어한다. 그래서 자기 색으로 물들이지 않고는 견디질 못한다. 악비의 곧은 절개는 백조의 하얀색으로 송나라를 위한 굳은 충성심의 상징이었다. 이 충성심은 하나밖에 없는 악비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진회는 그것이 못마땅했기에 마치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로트바르트처럼 변함없는 그의 충성심을 더럽히고자 했다. 오데트 공주 또한 로트바르트 저주의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순수하고 고귀한 하얀 사랑만이 필요했다. 오데트에게 필요한 사랑은 악비가 품고 있는 고니 정신과 일맥했다. 하지만 로트바르트는 자신의 딸 오딜을 사주해서 오데트를 향한 왕자의 순수한 사랑을 훼손시키고 만다.
홋가이도 쿠시로에는 원래 철새였던 두루미가 텃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두루미에게 먹이를 충분히 주기 때문이다. 철새가 머나먼 길을 떠나는 이유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인데 인간이 그 일을 대신 해주니 두루미는 더 이상 야생성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자연의 섭리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자연의 섭리는 가식이 없는 순수한 것으로 로트바르트가 오데트 공주에게 걸어놓은 마법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안 본 것보다는 낫겠지만, 야생성을 포기하고 인간에게 기생하여 먹이를 구하고 있는 단정학의 춤사위가 가식으로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나 인공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는 고니 또한 그렇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인간에게 아양만 부리고 하늘이 부여한 야생성을 버린다면 그는 더이상 내가 생각하는 고니일 수는 없다. 그런 고니라면 악비와 같은 충성스러운 인물의 꿈에 더 이상 등장하면 안 된다.
우습제를 둘러싸고 있는 공중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천의 이름 모를 철새들이 상공에서 떼를 지어 이리저리 그물을 펼친 듯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다. 그러더니 누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제히 우습제에 빠져들어 백조들과 섞여든다. 수천의 백조들이 피워낸 우습제의 백련 축제가 더욱 글로벌화 된 느낌이다. 십만 평이나 된다는 우습지 않은 우습제가 백조들의 노래로 교향악단이 되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내년에도 우습제가 수천의 철새들을 끌어안고 이렇게 멋진 잔치를 벌였으면 한다. 이 우습제에서 백조의 야생성을 끊임없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그들의 새끼들도 자연의 법칙을 여기에서 철저히 배워가기를 희망한다. 또한 이 호수에서 로트바르트가 걸어놓은 지저분한 주문을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의 백조들이 다음 기착지를 향해 힘차게 비상해 나가길 기원한다.
첫댓글 '우습제'는 그야말로 '백조의 호수'로 변하는 계절이군요.
우습제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3년 12월 31일 백조들이 우습제를 찾았어요^^
지금도 열심히 우습제에서 놀고 있더라고요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10만 평이나 된다니 대단한 호수군요.
개동 선생님 말씀처럼 대단한 호수라는 것을 저 또한 느꼈습니다
이 장면을 보셨다면 개동 선생님은 멋진 소설 한 편을 쓰셨을 것 같은데.....
현실은 늘 녹록한 것은 아니지만 늘 건필하시고 특히 마음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개동 선생님^^
우습제가 나주의 명물이군요.
우습제에서 생성된 백조의 순수가 이 시대 로트바르트 마법을 씻어내면 좋겠습니다.
벅찬 마음과 잔잔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명작입니다.
현광 회장님^^
다녀가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필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