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엑소더스를 아시나요?
하다 하다 땡땡이치는 방법을 일러줬어요. 땡땡이도 실력이라고 봅니다. 휴가 마지막 날을 공주들을 위해 쓰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없을 터, 서둘러 인 서울을 했고 12시 20분에 큰 아이를 픽업해 작은 아이가 있는 용산 집으로 갔어요. 사대문 안에서 광화문-서울역-후암동-동대문을 아무나 30분에 뚫을 수 없다는 걸 공주들이 알까요? 곱창 3 인분에 행복해하는 공주들을 보고 있노라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주가 논문을 쓴다는 걸 보면 졸업을 서두르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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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복학했어(나)" "아니요, 계절 학기하고 있어요(예주)" "에고 내 새끼 풀타임 하랴 학점 따랴 고생이 많구나(나)" 젖살이 쏙 빠져서 핼쑥해 보일 만큼 업무량이 산더미라 말하지 못했지만 소쉬르 말만 들어도 흥미진진입니다. 예주의 소쉬르는 어떤 인물일까요? 내가 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마르크스-니체-프로이드-소쉬르-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정도입니다.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 linguistics)은 소쉬르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전반 언어학계를 지배했던 언어철학 및 언어 연구 방법론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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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문법 요소보다는 요소 간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야 한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 소리의 층위에서 'ㅂ'소리는 그것 혼자로는 어떤 가치도 없으며, 그것과 'ㅃ' 및 'ㅍ', 나아가 'ㄷ','ㄱ'과의 대립 관계에서 그 가치가 생긴다는 겁니다. 사실 성경 공부할 때 '문맥 구조'라는 걸 30년 전에 접했는데 필자가 이해한 ‘구조주의’란 '단어' 자체의 의미보다, '문맥의 연결'(관계)을 통해 의미 부여를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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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쉬르(1857~1913)와 재회를 하고 기뻤어요. 무늬가 국어 전공인데 '랑그'와 '파롤'이 뭔지는 알아야지 하고 나름 공을 들여 정리한 자료를 꺼내 요약했으니 참고하시라. 언어학의 아버지 소쉬르(1857-1913)는 스위스 출신으로 강의록조차 남기는 걸 싫어했다고 해요. 그의 명저 '언어 구조학'은 소쉬르 사후 제자들이 책을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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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했어요. 랑그는 '언어 체계'이고 파롤은 '말하는 행위'입니다. 말하는 행위인 파롤를 통해 말의 규칙인 랑그가 형성되기도 하는데 소쉬르는 그냥 하는 말 말고, 말의 체계(랑그)에 대해 연구한 학자입니다. 연구 방법에는 '통시적'연구와 '공시적' 연구가 있어요. 소쉬르는 언어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공시적 연구'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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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구성되며 기표란 '표시하는 것'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 간의 차이(어둠/밝음)로 발생하며 대상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먼저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니, 말(言)보다 말(言)의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소리가 먼저 있고 대상이 나중이라니 이거야 원 알쏭달쏭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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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공! 구조주의 소쉬르나 촘스키의 이론은 '차이'를 통한 인식을 랑그와 빠롤로 규정하는 것 같구나. 인격주의 현상학의 반발로 구조주의가 나왔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구조주의 강조는 인격적 자발성이 배제되는 폐단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는 구조주의가 대세가 아닙니까?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말이 없다면 생각할 수도 없다." "말이 풍요로우면 그만큼 세상이 풍요로워진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소쉬르)" "언어가 다양해야 경험도 다양해진다(존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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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는 랑그와 파롤, 기표와 기의, 그리고 공시 성과 통시 성과같이 쌍을 이루는 구조 요소가 인간 실존 너머에 있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기표는 각 어휘의 소리와 표현을 의미하고, 기의는 단어의 개념적 정의를 담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호 관계성을 파악하게 되면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고, 이를 총체적으로 '구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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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주체를 구조의 산물로 보는 한편, 실존 너머의 주체를 합리적으로 조망하려는 것에 있어요. 다시 말해 실존주의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만의 내용과 본질을 만들어 간다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탓에 구조주의는 모더니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을 비판하면서도 합리성은 인정하는 양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기도 해요. 타자의 강조나 진보(역사)의 의미 없음으로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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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는 세계 속에는 인간의 언어는 물론 사회구조, 정신 등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하며, 따라서 개개인의 특성은 이 구조에 의해 일정하게 맞춰져야만 비로소 존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해석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연역법적 사유방식으로 인해 귀납법적 사고론을 중시하는 경험론이나 실증주의와는 대비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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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를 교육철학에 대입한 대표적 학자인 피아제(Piaget)는 고립되어 있는 특수한 사실보다는 사실 사이의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 시스템(구조)을 파악하는 데에 훨씬 유용하다고 보았어요.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구조의 기본 개념들은 총체성, 자율적 규제, 그리고 변형이라는 어휘로 정리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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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호 관계를 중시하는 구조주의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조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개별성, 혹은 특수성을 부인하고 총체성을 중시하는 이 구조주의 개념이 사회주의자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어요. 사회주의가 본질상 생산 양식이나 사회구성체에 대한 구조 분석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는 그들 특유의 '심층구조 분석 방법론'과 구조주의의 그것은 상당 부분 겹치는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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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레비스트로스나 고들리에 같은 학자들은 "구조는 직접 볼 수 있거나 관찰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그리고 그 기능은 사회체계의 더욱 심화된 논리를 구성하는 수준의 실체"라고 말한 바 있어요. 이는 곧 구조주의가 기능주의나 경험주의와 병립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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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가 모든 시대, 모든 상황, 즉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이에 대한 반동으로 구조주의를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돼요. 이들이 바로 후기 구조 의자들인데, 구조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변형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 차별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려면 먼저 구조주의를 공부해야 합니다. '계승'과 '차별"을 따로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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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자들은 서구 역사를 지배해 온 '보편적 이성'을 토대로 한 '절대적 진리'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들은 구조주의가 물러난 자리에 개별성, 우연, 해체, 그리고 차이라는 개념들로 채워 넣고 있어요. 이런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후기구조주의자들 상당수가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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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Michel Foucault)의 탈 중심화 개념,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를 중시하는 철학 등이 이 범주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될성싶어요. 요즘은 위에 적시한 후기구조주의 개념에다 언어 지시성에 대한 불신, 역사주의 비판, 그리고 주체성 비판을 추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구조주의자에서 후기구조주의자로 전향한 푸코의 경우, 지식은 타자를 지배하는 힘인 동시에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시, 통제, 혹은 구속의 양식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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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데리다는 역사에는 그 어떤 종착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설파한 바 있는데 이는 곧 역사의 진보를 부정하는 것과 진배없어요.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줄곧 서구 문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던 플라톤 이래의 존재, 실체, 형식, 합목적성, 그리고 신의 존재 개념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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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앎은 아는 것이 아니다"
분령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딱 떨어지지 않아 속상합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시대의 대안인데 이미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가 '힘의 의지'-'유물론'-'무의식'을 통해 예견된 사조라는 겁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이후 인간,지구,신 중심의 중세 신학이 무너지면서 데카르트-뉴턴-칸트의 이성주의 시대를 엽니다. 지나놓고 보니 합리성, 과학,경험을 거쳐오면서 '미시세계'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었고 '불확정성'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양자역학'을 현실화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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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체)에서 보는 것(관찰자)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는 어디로 튈지 모른답니다. 인간의 욕망, 감정이 부지불식간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양자 물리학의 중요한 키워드가 '보는 자 관점' 이 되었고 양자역학은 뉴턴을 넘어 아인슈타인에 이르게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사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는 움직인다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이제부터 보는 건 해석이며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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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이 시점(보는 것)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체를 인식하려는 목표에 더 멀어졌다는 뜻 같구나.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언어만큼만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보는 것의 목표가 바른'인식'을 위함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를 위해 구조주의 소쉬르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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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자(관찰자)가 중요해지면서 움직이는 관찰자와 정지된 관찰자까지 나아간 것 같아요. 그래서 '존재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19세기 철학 사유의 핵심은 이원론-실체론-중심주의였는데 이것을 일원론-환상-모든 것은 관계다가 되었어요. 천재 니체는 이미 150년 전에 ‘상승을 추구하는 힘의 의지’를 설파했고 그의 새끼 데리다는 '생성'으로 해석합니다. 더 이상 神 중심이 아닌 것도 좋고 '힘의 의지'가 작동하는 우주도 멋지고, 씨줄과 낱줄로 연결된 '관계 세계'에서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발상도 놀랍습니다. '변화'와 ‘일원론'은 죽은 플라톤이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닙니까?
2024.7.10.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