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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춘포 달빛소리 수목원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산도라지를 캐러 갔다가 산삼을 캤다면 뜻밖의 횡재에 기뻐하고 산도라지 캐러 오길 잘했다며 본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박장대소할 것이다. 그래서 나머지 하루 일정도 무엇이든지 잘 될 거라는 생각으로 주변에 산삼이 있나 이 산 저 산 기웃거리며 본래의 산도라지 캐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오늘은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어서 아내와 함께 교외로 나가기로 했다. 안전띠를 매면서 목적지를 물으니 뜬금없이 지난 식목일에 나무 사러 갔던 황등장 일대를 돌아오잔다. 이유를 물으니 값도 저렴하고 꽃도 예뻤던 노란 장미를 황등장에서 못 사고 와서 눈에 밟힌단다. 삼식이 주제에 아내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황등장을 중심으로 익산 외곽지역에서 안 가본 지역부터 돌아서 황등장으로 가기로 했다.
익산지역에서 들이 꽤 넓다는 춘포들녘을 남쪽에서부터 훑어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일본은 1914년에 춘포(春浦-봄 나루) 들녘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에서 배로 실어 가기 위해 개통한 우리나라 철도역사 중 가장 오래된 간이역인 춘포역(대장역:大場驛)을 둘러보고 춘포 들녘을 뽀얀 먼지를 뒤로하면서 올라가니 100여 년 전 민족의 아픔과 일본의 만행이 들녘의 허수아비가 되어 다가왔다. 한참을 더 가니 들녘인데 넓은 시골학교 운동장 크기의 주차장에 자동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 크기와 자동차의 주차대수를 보면 인근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행사와 관계된 건물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투표장도 아니다. 건물이라고 해야 주차장 입구에 아주 작은 손짜장 집이 있는데 집 규모와 주차 대수는 걸맞지 않았다. 길가에 잠시 주차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대형주차장 뒤쪽에 작은 동산이 숲으로 둘러 쌓여있고 꼭대기에는 큰 목조건물 같은 누각이 보였다. 눈을 들어 보니 이곳이 ‘춘포달빛소리수목원’이란다. 동산의 숲길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오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고 달빛소리수목원으로 올라갔다.
평소 작은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조금 올라가니 ‘황순원 소나기 나무’가 반겨주었다. 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익혔던 황순원 님의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을 두었던 터라 그중에서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의 청순하고 깨끗한 사랑을 소나기 오는 날 원두막에서 만나 풋풋한 사랑을 나눈 작품으로 지금도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작품이다. 나는 황순원 님이 이 마을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쓴 줄 알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무 안내판을 보니 이 나무는 500년이 넘는 마을 수호신 당산나무로 '첫사랑 나무'로 불렀단다. 나무는 너무 오래된 고목이어서 나무 안쪽이 작은 동굴처럼 벌어져 소나기가 오면 서너 사람 정도는 서서 피 할 수 있는 장소로 그 옛날부터 젊은이들이 특히 소나기 오는 날 사랑을 속삭였던 장소로 알려져서 그저 웃으며 사진 한 컷만 찍고 올라갔다.
익산 달빛소리수목원은 전국 각지에서 20여 년간 수집해 가꾼 개인 사유지로 개방된 지 이제 2년쯤 된 아담한 수목원이다. 백여 종의 희귀한 고목들과 어우러진 산책로와 함께 전망 좋은 '카페 달빛 소리'도 이용할 수 있었다. 위치는 익산시 부송동 2공단 근처 춘포면 삼례 가는 길목에 있다. 특히 향수의 원료가 된다는 금목서와 은목서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금목서는 누런 꽃잎에 향이 강렬하고 은목서는 향이 은은하여 세계적인 향수 샤넬 No. 5 향수의 주원료가 되는 꽃으로 유명하다기에 아내는 연신 코끝에다 대고 있었다. 작은 고개를 넘으니 ‘잊지마요 목화밭’이 있었다. 지난가을에 관광객을 위하여 일부러 수확하지 않은 하얀 목화송이가 함박눈이 와서 그대로 얼어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목화와 길쌈에 얽힌 생전의 어머니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메타세쿼이아 길, 애기동백 길, 야외 예식장 등을 한 바퀴 돌아오니 운동량도 적당하고 갈증도 느꼈다. 정상에 있는 카페 달빛소리에서 음료수 두 잔을 주문하여 사방이 확 트인 2층 달빛지평선 테라스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드넓은 춘포 들녘을 바라보니 전신의 피로와 아픔이 순간에 날아가 시쳇말로 힐링의 최적 장소였다. 나와 아내는 마치 파노라마의 상자 속에 도취한 것인 양 테라스의 장소를 옮겨가며 색다르게 펼쳐지는 풍광에 빠져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때 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시간을 보니 오후 4시에 가까웠다. 나는 아내에게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노란 장미를 사러 갈 것이냐고 물으니, 기어코 황등장은 가야 한단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시장에 도착하니 4시 30분이다. 아내는 주차하기가 무섭게 나무시장 쪽으로 달려가서 노란 장미를 찾으니 주인은 오전에 다 팔렸단다. 그러자 아내는 모든 원인이 나 때문인 것처럼 나를 바라본다. 대꾸하면 더 큰 불똥이 튈까 봐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장날에 다시 오자고 달래서 집으로 향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더니, 내가 지은 죄는 하루 세 번 꼬박꼬박 밥 얻어먹는 죄뿐이다. 오늘 춘포달빛소리수목원을 둘러본 것은 다 좋았는데, 황등장 노란 장미 때문에 내가 덤터기를 썼다. 노란 장미가 아내 몰래 다가와서 작은 가시로 내 손등을 살짝 찌르며 '당신은 무죄'라고 들려주었다.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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